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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누가복음 16장 1-13절
빛의 아들들의 지혜로움은 어디 있는가
오늘 본문은 많은 부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일단 어떤 부자의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소리가 주인에게 들렸을 때 청지기직을 빼앗은 일에 대해서는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들은 일반 사회 속에서도 납득하기가 어렵습니다. 직분을 잃은 청지기는 자기 살 길을 찾기 위해 주인의 소유를 빌린 사람들에게 주인 허락 없이 그 빌린 소유를 탕감해 주는 행동을 하는데, 소위 상식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신이 잘못해서 쫓겨났는데 반성하기보다는 더욱 더 불의한 행동을 하는 것 자체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일이 내 주위에서 일어난다면 대부분은 고소를 하게 되고, 처벌할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인의 말을 보면 이와는 정반대로 칭찬을 하고 있다는 데 어려움이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물론 이 문제를 풀어가겠지만 얼핏 읽으면 불의한 행동을 칭찬한 것은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오해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도 깊이 생각해야 될 내용입니다. 9절을 보시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불의의 재물은 무엇이고,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라는 건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이 영주할 처소로 영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러나 반드시 기억해야 될 것은 본문이 불의해도 좋다는 그런 내용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란 사실입니다. 그리고 불의한 것 자체를 칭찬하는 것도 아니란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분의 속성상 옳지 못한 행동을 옳다고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하니까 어떤 방법을 동원하든지 많은 친구를 사귀고, 또 그것이 영주할 처소, 즉 천국을 보장한다고 하니까 전도 많이 한 사람이 천국을 보장받는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친구를 사귀는 것도 주의해야 할 것을 말씀하시며, 전도가 천국 보장이라는 그런 말씀은 하신 적도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따라서 본문을 주의하여 읽지 않으면 오해를 많이 살 수 있는 그런 본문이기에 여러분도 조금 더 집중하셔서 함께 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6장 말씀의 맥락을 좀 살펴보면, 좁게는 누가복음 14장에서부터 연결된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 중 한 지도자의 집에 들어가셔서 식사를 하실 때 이런 질문을 던지십니다. 누가복음 14장 3절에 보시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 아마도 저들 편에서 먼저 질문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대답 대신에 질문으로서 그들의 물음에 응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후 말씀을 보면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당시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의 잘못을 드러내시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지난주 마태복음에서 살핀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마22:1-14 참조). 물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전후 맥락이나 배경은 차이가 있지만 동일한 말씀을 여기서도 가르치고, 저기서도 가르칠 수 있기 때문에 전후 맥락의 차이, 배경의 차이는 사실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런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들 자신을 향하여 비판하시는 것으로 알았을 때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만 누가복음 본문을 통해서는 그 부분까지는 설명하고 있지 않고 있고, 도리어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기 위해서 나아온 자들이 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15장 1절이 그 부분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못마땅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2절에 보시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못마땅할 뿐 아니라,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것에 대해서도 못마땅해 하고 있는 것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나오는 비유가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세 가지 비유입니다.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잃어버린 아들에 대한 비유입니다. 특히 이 비유를 누구에게 하시느냐 하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 것에 대하여 못마땅해 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눅15:3). 그리고 세 비유의 핵심은 잃어버렸던 것을 찾았을 때, 혹은 잃어버린 아들이 돌아왔을 때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들 입장에서는 죄인을 영접하고 가까이 하시는 것에 대하여 비판의 내용이 되고 있지만, 정작 예수님 편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요, 뜻이라는 것을 알리고자 하신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저들이 못마땅해 하면서 비판하고 있는 내용은 실상 종교지도자라 하는 저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는지를 여실히 드러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 중 세 번째 내용은 단지 잃은 아들이 돌아오는 것만을 말씀하시지 않고, 또 다른 아들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 집에 머물고 있는 큰 아들에 대한 내용입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와 같이 살면서도 아버지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자입니다. 작은 아들이 돌아왔을 때 반가워하지도 않으며, 반가워하는 아버지의 마음도 전혀 헤아려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지금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서 못마땅해 하고 있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최근 살펴본 말씀으로 하자면 아버지가 명하셨을 때 순종하겠다고 해 놓고 순종하지 않은 아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니다.
그러면서 누가복음 16장으로 넘어오게 되는데, 누가복음 15장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 비유라면 이제 그 대상을 옮겨오게 됩니다. 오늘 본문 1절을 보시면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니까 누가복음 15장의 경우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하신 말씀이라면, 누가복음 16장은 그들이 아니라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내용으로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집을 나간 아들과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 사이에는 어떤 면에서는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의 경우 아버지로부터 받은 모든 재산을 다 낭비한 자였고, 16장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는 주인의 뜻과 상관없이 제멋대로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고 탕감해 준 자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결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의 경우 아버지께 돌아왔더니 반겨줍니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과분하게 반겨줍니다. 반면 불의한 청지기의 경우 그가 한 일에 대하여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리고는 그 직분을 빼앗는, 어떤 면에서는 징계까지 행하고 계십니다.
결국 15장에 나오는 둘째 아들도 불의하고 16장에 나오는 청지기도 불의하지만, 한쪽은 그 대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가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다른 한쪽은 그 대상이 제자들이기에 책임과 징계가 강조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의 경우 죄인을 용서하시고 영접하사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을 일깨우시기 위한 것이라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한 마디로 책임 있는 삶을 말씀하시기 위해 비유로 등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맥락을 염두 해 두시고 오늘 본문을 보시면 먼저 1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한마디로 불의한 청지기입니다. 그래서 주인은 그의 청지기 직분을 빼앗습니다. 2절을 보시면 “주인이 그를 불러 이르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찌 됨이냐 네가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직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문제는 이후 청지기의 행동입니다. 청지기는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다고 판단합니다. 3절을 보시면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까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그러면서 하는 행동이 우리가 본받을만한 행동이 아니라 전혀 반대의 행동입니다. 4절 이하 7절을 보시면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사람들이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일일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빚졌느냐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빚졌느냐 이르되 밀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조금 전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불의한 청지기의 이런 행동은 참으로 이해하기가 힘든 모습입니다. 자기 재산이 아닌 것을 맡았으면 그 재산에 대해 충실해야 합니다. 그래야 주인으로부터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실하기는커녕 그 재산을 낭비했습니다. 그래서 쫓겨나게 되었는데, 이제는 주인의 재산을 자기 사후대책을 위해 제멋대로 탕감해 주는 행동을 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는 행동입니까!
그런데 이 비유가 어렵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런 일반적인 반응이 아니라 뜻밖에 주인이 이런 말을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8절을 보시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일단 지금 주인이 청지기를 칭찬한 것은 그의 행동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염두 해 두셔야 합니다. 비유에 나오는 주인이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할 때 하나님은 속성상 옳지 못한 행동, 즉 불의한 일, 죄악 된 일을 칭찬하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인의 재산을 낭비하거나, 또 주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는 이런 이중적인 행동은 여기 8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옳지 않은’ 일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주인의 표현도 ‘이 옳지 않은 청지기’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 주인이 칭찬한 것은 무엇인가? 8절 후반부를 다시 보시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 옳지 않는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보다는 지혜롭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있습니다. 즉 행동에 대해 칭찬하고 있는 게 아니라 행동이 아닌 다른 것을 지혜롭다고 하시는 겁니다. 물론 전제는 따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시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만큼은 이 옳지 않는 청지기가 빛의 아들들보다는 더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행동이 아니라 다른 것에 대해서 지혜롭다고 할 때 그것은 무엇인가? 그의 행동보다는 그의 자세를 칭찬한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옳지 않은 자로서 옳지 못한 행동을 하고 있지만, 적어도 자신이 자기 앞길을 예비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시는 것은 어떤 행동이 아니라 불의한 청지기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즉 이 땅에서 자신이 살아가기 위해 미리미리 준비하고 예비하는 그 자세를 칭찬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불의한 방법이긴 하지만 그 자세만큼은 칭찬할 만하다고 말씀하시는 게 이 비유의 핵심인 것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세상 사람들도 자기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준비하고 예비하는 모습이 있는데, 너희는 무엇을 준비하고 예비하고 있느냐?” 이런 반문을 이 비유를 통해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어쩌면 여러분들도 여러분의 앞길을 위해 많은 부분 예비하고 준비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혹시 큰 병이 생기면 큰돈이 드니까 보험을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자녀들 대학 가면 학비다, 생활비다 하여 미리 미리 저축을 해 놓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참으로 잘 하는 일입니다. 세상적인 부분에 있어 어떤 준비한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 예비한다고 해서 믿음이 약하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비유가 단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이 땅의 삶을 위해서 준비하라는 쪽의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 보면 이 세대의 아들들과 대조되는 부류가 빛의 아들들입니다. 성도요, 교회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지혜롭다고 할 때 그것은 한낱 이 세상에 제한된 의미에서만입니다. 다시 말해 그것이 영원을 준비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나 빛의 아들들은 어떻습니까? 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영주할 처소, 즉 천국으로 영접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세대의 아들들은 이 세상만을 위해 준비하는 반면, 빛이 아들들은 ‘영주할 처소’를 준비하는 자로서 대조를 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자로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비록 불의한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 땅에서 자기 미래의 살 길을 찾고 있는데, 빛의 아들들, 즉 영원히 거할 하나님 나라가 보장된 너희는 과연 무엇을 얼마나 준비하며 살아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 땅에서 좀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준비하고 예비하는 일을 동일하게 하겠지만, 성도이기에 영원을 준비하며 사는 삶은 얼마나 되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칼빈은 오늘 본문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욕심 많은 세속의 사람들이 원시안적이고 기민하게 자신들의 이득에 몰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의 성령과 말씀으로 그 위에서 비추고 계시는 빛의 자녀들이 잠을 자면서 자기들에게 주신 영원한 축복의 소망을 등한히 하는 것은 얼마나 악한 일이겠는가! 그러므로... 신자들은 미래의 생명에 대하여 더욱 조심스럽고 숙고하고 복음의 빛에 눈을 감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여러분, 이 세상이 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잠시잠간입니다. 시편의 기록을 보면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90:10)라고 말하는데, 이와 같습니다. 아마도 들어보셨을 텐데, 이런 말도 있지 않습니까? 10대 때는 시속 10킬로로 가고, 20대는 20킬로로 가고, 30대는 30킬로로 간다. 즉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간의 빠름이란 더욱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의 경우 칠십, 팔십이라는 나이가 되어 지나왔던 시간을 생각해 볼 때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었다는 겁니다. 특히 인간의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죽음 이후는 시간이라는 것 자체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됩니다. 영원이라는 것입니다. 영원에 비해 이 땅에서의 삶이란 그만큼 짧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도로 부름을 받은 자들은 영원을 위해 무엇을 준비하며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와서, 오늘 본문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9절 말씀 때문이기도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지금 주님은 불의한 청지기가 미래를 준비하듯 빛의 아들들 역시 영원을 준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그런 영원을 준비하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했을 때 주시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언뜻 보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친구를 사귀라는 그런 뜻으로 보입니다만 그런 뜻은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왜냐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은 마치 불의한 청지기의 방법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 비유는 불의한 청지기의 방법을 긍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의 예비하는 자세만을 교훈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따라서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친구를 사귀라는 그런 의미는 결코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이 말씀은 무슨 뜻인가? 일단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본문의 비유에서 밝히고 있듯이 예비하는 성격의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방법으로 자기 편을 삼아 예비하고 있듯이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예비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불의한 재물’은 무엇인가? 그 힌트를 이후 말씀에서 보여줍니다. 10절에서 12절을 보시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너희가 만일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과 큰 것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한 재물과 참된 것이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의 것과 너희의 것이 대조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10절에서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것은 곧 남의 것에 충성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으로 너희의 것은 무엇인가 할 때 그것은 불의한 재물이 아니라 참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작은 것이 아니라 큰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좀 더 직접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 그 다음 절인데, 13절을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지금 전체적인 대조는 무엇이냐 하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이 땅에 있는 재물인 겁니다. 즉 10절 이하의 말씀은 대조를 이루는 말씀으로서 큰 틀로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대조시키고 있다는 겁니다. 남의 것은 재물로 대표되는 것이고, 너희의 것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의하여 보시면 둘 다 충성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지극히 작은 것, 즉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면 큰 것에도 충성하고, 지극히 작은 것, 다시 말해 불의한 재물에 대해 불의하면 큰 것에도 불의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11절에서는 직접적으로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희에게 맡기겠느냐”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기만 하면 참된 것으로 우리에게 맡기시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불의의 재물이란 단순히 우리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의롭지 못한 방법으로 벌게 되는 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이 말은 불의한 재물을 작은 것, 참된 것을 큰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지금 전체적인 내용이 이 세대의 아들들과 빛의 아들들, 그리고 이 세상과 영원한 처소를 대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불의한 재물은 불법적인 방식으로 취한 물질이라는 개념보다는 이 세상에서 소유하고 있는 것들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즉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잠시 잠깐, 일시적으로 소유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것입니다. 13절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처럼 재물로 대표되는 성격인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내 것이 될 수 없다는 차원에서 ‘남의 것’으로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왜 하필 이 땅의 것을 불의의 재물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의 본성의 부패함과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본래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을 때는 선하게 지었지만 아담의 죄로 인하여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것들을 가지고도 선하게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는데, 그런 의미에서 불의의 재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은 이 땅을 살아가면서, 그리고 이 땅의 것으로 하나님 나라를 예비하며 살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것,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일시적이요, 사라질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 의미에서는 우리의 소유가 아닌, 잠시 잠간 맡긴 것입니다. 그것으로 장차 올 ‘영주할 처소’를 예비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잠시 맡기신 것으로 얼마만큼 영원을 예비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내가 한 달 수입 가운데 종교적인 일을 위하여 얼마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것을 얼마나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했는데, 그런 가장 기본적인 먹는 문제, 마시는 문제까지 생각해 볼 때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 그분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느냐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확인하게 위해 오늘 본문 13절과 동일한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마태복음 6장으로 가시면 좀 더 분명합니다. 13절의 내용이 마태복음 6장에서는 24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물론 이 말씀은 그 앞에 있는 19절부터 연결되어서 나오는 말씀인데,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어디에 쌓아둘 것인가에 대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보물을 땅에 쌓아두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아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땅에 쌓아두면 결국에는 사라지지만, 하늘에 쌓아두면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1절에 보면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너희의 마음은 어디를 향해 있는가? 그러면서 나오는 것이 24절입니다.
그리고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시는 것이 25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겠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25-30) 분명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로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할 때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삶에서 우리가 반드시 해결해야 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25절을 통해 교훈해 주고 계신 것처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에 대한 염려는 내려놓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섬기고 있는 하늘 아버지는 모든 만물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교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공중의 새를 보라는 것입니다.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그것들의 주인이시고, 주인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친히 그것들을 보살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인 정도가 아니라 우리를 자녀로 삼아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것보다 귀한 너희를 보살펴주지 않겠느냐는 겁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고 할 때 우리는 뭔가 대단한 것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 보호하신다는 믿음, 그가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신다는 믿음을 가지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영광에 부합하는 것으로써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계속해서 31절 이하도 보시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마6:25-34) 오늘 본문에서 두 부류를 대조시키고 있는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너희는 누구냐? 이방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천국을 보장 받은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방인, 즉 이 땅에 속한 자처럼 살아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는 하나님이 없는 이방인들이나 구하는 것이란 겁니다. 반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구하라고 하는가?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입니다. 그것을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과 비교해 보시면 마태복음은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되어 있습니다. 반면 오늘 본문은 마치 반대로 말씀하시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즉 너희에게 더해진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으로 너희는 무엇을 예비해야 하는가? 하나님 나라라는 겁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살기 때문에 이 땅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는 다 뭐냐? 결국 하나님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을 의지하며 사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자들은 그런 염려를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된 관심은 결코 이 땅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이 땅의 것, 결코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을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잠시 맡기신 것이기에 그것을 선용함으로 장차 올 나라를 준비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충성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입니다. 간단한 예를 들자면 가사 일, 해도 해도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티도 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 그 일이 맡겨졌다면 주께서 맡기셨다는 것 때문에 우리는 충성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먹고 마시는데 있어 뭐가 하나님께 영광이 되겠습니까? 먹는 것 그냥 먹으면 되고, 마시는 것 그냥 마시면 됩니다. 거기에 어떻게 하나님의 영광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된다고 말씀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습니까? 디모데전서 4장 4절과 5절로 말씀드리면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즉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모든 것에 대하여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는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입는 모든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상생활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그러나 구별됨이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받고, 또한 말씀과 기도로서 구별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로 거룩해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단지 가사 일 뿐이겠습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정당한 직업이 있다면 거기서 충성하셔야 합니다. 학생이면 학생의 본분으로서 충성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회사의 직원으로 있다면 직원으로서 충성하셔야 합니다. 사장님 눈치 보고 꾀를 부리는 것이 아니라, 보든 보지 않든 하나님 앞에서 충성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부지런 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정직하셔야 합니다. 성실하셔야 합니다.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께 영광이 되고,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고 말씀하신 내용입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13절을 다시 보시면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충성하되 그렇게 충성하는 것이 단지 이 땅에서 누릴 것에만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불의의 재물에 충성한다고 하면서 단지 그 목적이 이 땅에 머무는 것이라면 그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의 충성은 언제는 영원한 처소를 목적으로 삼아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충성을 담보로 해서 이 땅에서 그 대가를 바라는 것은 결코 성도로서 옳은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충성했지만 충성한 만큼 결과 되지 않더라도 이 땅의 소유는 잠시 잠간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영원한 처소에 우리 마음을 두고 살아가는 삶이 바로 성도로서의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9절에서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면 그것이 없어질 때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한다고 하니까 마치 우리가 이렇게 살면 영생을 보장받는 듯 한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영생이 우리들의 공로에 대한 보상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는 듯 보이지만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그만큼 불의의 재물, 즉 사라질 것, 우리의 것이 아닌 남의 것, 그런 의미에서 맡기신 것으로 더욱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만 충성하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영생을 보장받았지만 더욱 열심을 내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 12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 그러니까 이 땅에서 충성하지 못하면 이미 너희의 것으로 예비하신 하늘에 있는 것을 줄 수 없다는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주지 않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너희의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너희의 것이 이미 하늘에 예비 되어 있기 때문에 마땅히 이 땅에서의 삶을 충성스럽게 살라는 것을 역으로 알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충성하셔야 합니다. 이미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 있습니다. 이 땅에서 무엇을 해서 얻는 방식이 아닙니다. 이미 얻은 것이 있고, 이미 약속으로 받은 것이 있습니다. 아니 지금 우리는 다 받은 자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얻기 위해 충성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받았기에 감사함으로 충성할 수밖에 없고, 이미 충분하기에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더욱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늘의 것을 받았는데 무엇이 부족하겠습니까? 바로 그런 이유에서 바울의 고백까지도 가능한 것이 이 땅에서의 성도의 삶인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7-8) 내게 유익한 것이지만 그리스도 때문에 해로 여겨서 배설물로 여길 수 있는 자세가 성도의 자세인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은 빛의 아들들인 너희는 이 세대의 아들들보다 지혜롭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대의 아들들은 다 자기 살 길을 위해 예비하는데, 너희는 영원한 것을 보장 받은 자들로서 전혀 준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여전히 이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며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한다는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의 지혜로움은 이 세상의 것으로 염려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염려함으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있다면 염려해도 되지만, 사실 염려한다고 해서 우리가 바꿀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물론 우리도 이 땅에서의 삶에 대해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로서 이 땅에서의 삶이 우리의 모든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잠시잠깐 스쳐지나가는 나그네요, 외국인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우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채우고 계십니다. 광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아무런 노력 없이 얻게 하신 방식이라면, 가나안에 정착하고 난 뒤에는 노력하여 얻게 하시는 방식으로 채우셨는데 오늘날 우리에게는 주로 후자의 방식으로 얻게 하십니다. 물론 전자의 방식은 전혀 없느냐? 성경 기록 당시처럼 기적의 방식은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도 보면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같다고 말할 수 있는 일들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자의 방식이라고 해서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라고 말할 수 없는가?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 방식일지라도 우리가 한 일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즉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을 채움 받고 있는 자로 있을 뿐입니다. 때문에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 영원을 준비하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분명 하나님의 은혜 안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잃어버린 양이요, 잃어버린 드라크마지만 주인이 먼저 찾아오셔서 우리를 찾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품으로 돌이킬 때 마치 탕자를 받아주신 것처럼 은혜와 사랑으로 거저 받아주셨습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인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에 마음대로 살 수 없고, 은혜와 사랑을 받았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을 주님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땅에서부터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위에 살면서 이 땅의 것만 복으로 여기며 사는 삶이 아니라, 주신 것에 자족하며 항상 우리의 눈이 하나님을 향하여 있는 것.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반드시 영원한 처소에서만 누릴 그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아니 이미 여러분은 그런 복을 누리도록 되어 있는 사람이기에 마땅히 작은 것에 충성해야만 하는 그런 자들임을 반드시 명심하셔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것을 주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