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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외척으로 정권을 독점한 인물
한국 역사상 왕의 외척으로 정권을 독점한 인물은 수없이 많다.한일'합방' 당시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던 윤덕영도 그 중 한 사람이다. 그는 외척이라는 신분을 최대한 활용하여 일본의 침략정책에 일조하였다.
윤덕영은 순종의 비(妃)인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의 삼촌이며 해풍부원군 윤택영(尹澤榮)의 형이다. 윤덕영이 관직에 오르는 데는 그의 조부 윤용선의 영향력이 컸다. 윤용선은 오랫동안 의정대신을 역임한 조정내의 원로 중의 원로였다. 1894년 윤덕영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것이나,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된 것 등은 모두 윤용선의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기반 위에 윤덕영의 권세를 확고하게 해준 것은 윤택영의 딸, 즉 조카가 황후에 책봉된 일이다. 윤덕영의 조카가 황후에 책봉된 것은 윤택영이 조부 윤용선을 통하여 경운궁(엄비)에 통로를 열고 엄비의 승비(陞妃)운동에 종사한 데서 기인한다. 윤택영은 이 일에 종사하면서 많은 계책을 세워 신임을 두텁게 하고 자신의 딸이 황후에 책봉되도록 하였던 것이다. 윤덕영은 조카가 황후가 된 다음해인 1908년, 시종원경이 되었고 황후의 태부도 겸하였다. 이로 인해 궁중은 그의 손아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물론 왕비의 아버지인 윤택영이 있었지만, 실제로 황후를 등에 업고 외척세도를 부리며 정치에 깊숙히 관여한 것은 윤덕영이었다.
당시 일본은 송병준*, 이용구*, 이완용*을 내세워 일진회를 조직하는 등 '합방'의 불가피성을 부르짖으며 한일'합방' 조약 체결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일본은 대신들을 매수하거나 회유·협박하여 일본의 정책에 협조하도록 하여 한일'합방' 계획을 어느 정도 진전시켜 나갔다. 이제 남은 것은 고종을 포섭하여 허락을 받는 일이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 이어 제3대 통감이 된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는 여론의 귀추를 살피면서 '합방'을 마지막까지 순조롭게 진행시키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황실을 설득해야만 하였다. 데라우치는 황실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는 윤덕영을 그 적격자로 삼았다. 그리하여 윤덕영을 비밀리에 관저로 초대하여, '합방'의 불가피성을 주지시킨 다음 적극적인 협력을 구하였다. 즉, 데라우치는 윤덕영에게 각의를 거쳐 조약을 체결할 시기가 되었으며, 각 방면 대표자의 합의가 이미 있었다고 말하고, 조선의 이해(利害)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였다. 그러면서 고종 및 순종의 양해를 얻는 데 진력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왕실의 장래를 도모한다는 미명하에 '합방' 설득
윤덕영은 이미 이완용으로부터 이러한 취지를 들은 데다가, 대세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을 보고서 감히 거절하지 못하고 미력하나마 진력할 것을 맹세하고 물러났다. 내외 형세로는 어찌할 수 없음을 파악하고 일대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물론 윤덕영의 고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의 사직에 대한 생각과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고종에게 어떻게 말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래서 윤덕영과 궁내부대신 민병석*은 이 같은 큰 일에서 벗어나는 길은 죽음 뿐이라며, 죽음으로써 위기를 모면하고자 하는 생각도 하였다.
그러나 내외의 중임을 맡고 있는 자신들이 죽는다면, 고종의 좌우를 보좌할 이가 없다는 논리를 들어 자기 합리화를 하고 일본에 적극 협력하기로 하였다. 이는 곧 황실의 장래와 안정을 도모하고 수호한다는 미명하에 자신들의 친일행위를 정당화시키는 것이었다.
윤덕영은 윤택영, 민병석과 함께 고종에게 7일간 조석으로 문안인사를 드리면서 결단을 촉구하였다. 이들은 왕가와 종친의 신분을 보장하고, 사직과 백성의 안녕을 유지하는 길은 협약을 원만히 성립시키는 것 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는 것을 고종에게 설명하였다. 이에 고종은 이미 대세가 기울어진 것으로 판단하고 어쩔 수 없이 한일'합방' 조인에 대해 수락했다.
그리하여 1910년 8월 22일 한국의 장래를 결정하게 된 마지막 어전회의에 시종원경 윤덕영과 궁내부대신 민병석은 고종을 모시고 참석하였다. 어전회의는 극비에 붙여진 채 진행되었다. 여기서 총리대신 이완용을 조약체결 전권위원으로 임명하고 옥새를 찍은 전권위임장을 이완용에게 주었다.
조약에 대한 국왕의 재가는 조인된 후에 받는 것이 의례였지만, 1910년의 합병조약은 조인 이전에 이미 고종의 재가를 얻은 것이다. 보통의 경우라면 먼저 전권위원이 조약을 심의한 뒤 조인을 마치고 형식적인 비준을 얻는 것이 순서였다. 그러나 '합방' 조약은 사안이 그만큼 중요했기 때문에 내정된 조약안을 내각의 대신들 이외에도 원로왕족에게까지 자문한 것이었다. 이 조약은 국왕 자신의 통치권 양여에 관한 조항을 포함하는 것이었기에 특이한 절차를 취하였던 것이다. 1910년 8월 22일에 조인된 조약은 7일 동안 비밀에 부쳐진 채 29일에 공포되었다. 이로써 조선은 공식적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고종과 순종을 협박, 왕실을 움직여 조선의 식민지화에 일조한 윤덕영은 그 대가로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군신간의 예의나 종친간의 의리를 도외시한 채, 고종의 결의를 촉구하고 어전회의를 형식적으로 개최하는 등 한일'합방' 막후에서 활약한 윤덕영의 공로는 매우 컸다. 윤덕영 또한 한일'합방' 과정에서 자신이 막후의 제1인자였다는 긍지를 갖고 있었다. 그럼에도 '합방' 이후 논공 과정에서 이완용에게는 작위와 훈장이 거의 최고 수준으로 주어진 것에 비한다면, 윤덕영에게 주어진 작위는 보잘것 없었다. 이는 병합과정이 표면상 이완용에 의해서 진행된 것으로 나타났고, 윤덕영의 공로는 이완용의 그늘에 가려졌기 때문이다.
한일'합방' 이후 내선일체론을 내세운 일본 정부로서는 해결해야 될 또 하나의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조선의 국왕인 순종으로 하여금 일본에 가서 일본 왕실종묘에 참배하게 하는 것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왕실간에 우의를 맺는 것은 한일'합방'에 수반되어 행해져야 할 중요한 절차였던 것이다. 그러나 '합방' 이후 한국인의 배일감정은 더욱 악화되어 갔고, 조선황실 주변의 사정도 여의치 않은 상태이기에 조심스럽게 추진되어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1대 총독인 데라우치는 1910년 한일'합방' 후 6년 동안 무단통치를 행하였지만 순종의 일본행은 실현시키지 못하였다. 때문에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후임자인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총독에게 취임 후 해결해야 할 가장 중대한 과제로 인식시킬 정도였고, 구니와케(國分衆太郞) 차관에게 그 계획을 은밀하게 추진하도록 지시하였다.
먼저 순종의 일본행을 실행시키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함경도 함흥의 태묘(大廟)에 참배하는 의식을 행하게 하였다. 고종은 순종의 건강 문제를 들어 반대하였지만, 결국 이 참배 의식은 1917년 5월 10일에 거행되었고 순종은 무사히 함흥을 다녀왔다. 이로써 순종의 건강 문제는 이상이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이제 일본은 고종에게서 순종의 일본행에 대한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그리하여 우선 고종의 마음을 돌려 놓는 일에 착수하였다.
이는 사안이 중대한 만큼 하세가와 자신이 직접 지휘하였다. 우선 이완용에게 고종을 설득하도록 하였지만, 오히려 고종의 노여움만 돋구웠다. 따라서 '합방' 이후 궁중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윤덕영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 하세가와는 윤덕영을 불러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윤덕영은 일이 중대한 만큼 쉽게 응할 수 없어 어느 정도 주저하기는 했지만 하세가와의 부탁을 들어 주기로 하였다.
순종의 일본행 성사시킨 '공로자'
윤덕영은 고종에게 하세가와 총독의 의중을 헤아리기가 매우 어렵다고 피력하면서, '노령에 번거러움을 알지만 황실백년의 안녕을 위해 친히 일본에 가서 일본 왕실의 종묘에 참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역설하였다. 또 '만약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왕가에 어떤 일이 미칠 지 헤아리기 어렵다'는 등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였다. 이는 순종의 일본행에 대한 허락을 구하기 위한 우회전술이었다.
고종이 일언지하에 거절하였지만 윤덕영은 재삼 강요하면서 완강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다시 되풀이하여 밤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그러기를 7일, 그는 집요하고 대담했으며, 분별력과 옛 신하로서의 예의도 정도 없었다. 고종이 60여 세로 40여 년 동안 조선에서 군림해 왔는데, 친히 일본 왕실의 종묘에 참배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요하여도 허락을 받아내기는 당연히 불가능했다.
그래서 윤덕영은 비열하기 짝이 없는 계략을 진행시켰다. 윤덕영은 구니와케 차관과의 계획하에, 궁내의 크고 작은 여러 창고에서 고종 신변의 문고서함(文庫書函) 따위까지 엄밀히 검사하였다. 그리고 나서 일일이 봉인한 뒤 이들 물건을 보관해 온 모(某) 상궁을 관리 소홀을 이유로 파면시켜 궁 밖으로 좇아 버렸다. 그 목적은 고종의 총애를 받고 있던 궁녀를 쫓아냄으로써 고종을 괴롭히려는 것이었다.
윤덕영은 한걸음 더 나아가 고종에게 매우 곤혹스런 사건을 들추어 내었다. 즉, 30년 전에 민비가 참변을 당한 후, 다시 비를 간택하라는 내의(內議)가 있었는데, 그 중 김씨라는 규수가 제1후보가 되어, 고종과 혼약까지 성립되었다. 그러나 왕비 간택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지 않던 고종의 고사로 일단락지어졌다. 그런데 윤덕영이 지금 새삼스럽게 그 일을 끄집어 내어 고종을 곤혹스럽게 만들었다.
윤덕영은 고종에게 혼약까지 성립된 규수를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해 두는 것은 일국의 왕으로서 인륜지대사에 위반하는 행위이며, 지금이라도 그 규수를 덕수궁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윤덕영은 그 즉시 김씨라는 규수를 찾아내 단장시켜 덕수궁으로 데리고 왔다. 고종으로서는 그 규수와 결혼할 입장이 전혀 아니었기 때문에 감당하기가 매우 어려운 문제였다.
이처럼 윤덕영은 이처럼 기괴한 문제까지 빌미로 삼아 고종의 내락을 얻으려 하였다. 그는 총독의 위세를 빙자하여 더욱더 가혹하게 압박을 가하였다. 고종도 꽤나 궁지에 몰리게 되었던지 마침내 고종 자신은 연로하고 이미 순종에게 황제 자리를 물려주었기 때문에 황제가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자신의 일본행을 거절하고 대신 순종의 일본 왕실 방문을 허락하게 되었다.
윤덕영은 즉시 순종에게 고종의 의향을 알렸고, 순종이 고종의 뜻을 받들어 친히 일본에 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순종의 일본 왕실 방문은, 치욕적인 사건으로 조선 황실이 일본 왕실에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것은 황실뿐만 아니라 일본 민족에 대한 조선 민족의 종속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는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식민지화된 상태에서 황실의 존엄성마저도 일본에 의하여 여지없이 짓밟힌 것을 의미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윤덕영의 반민족적, 반국가적인 행각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한일'합방'과 그 이후 중대 안건들의 배후에서 친일행각을 하였던 윤덕영의 행위는 모든 조선인의 증오의 대상이 된 것은 당연하다 아니할 수 없다. 그럼에도 윤덕영은 자신의 친일행위에 대해 "옛 신하로서 견디기 어려운 일을 해냈고, 그런 일을 행하였기에 생각해 보면 죄는 죽어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단지 하세가와가 시키는 대로 하였을 뿐인데 나보고만 악인이라고 한다"(權藤四郞介, {이왕궁비사}(李王宮秘史))라고 변명하였다.
왕실을 중심으로 한 그의 눈부신 활동에 대해 {공로자 명감}(1935)에서도 "1910년 시종원경으로 있을 당시, 병합을 맞아 상하의 안태(安泰)를 위해 평온원만한 해결을 하려고 노력한 한 사람으로, 그 정성, 그 상식은 당시 가장 걸출한 인물로서 빛나고 있었다"(47면)라고 극찬할 정도였다.
'병합'의 공로로 일제로부터 자작과 매국공채 5만 원을 받은 그는 이왕직 장시사장(掌侍司長), 황해도 관찰사, 철도원 부총재 등을 거쳐 1925년에 중추원 고문이 되었다. 이후 만 15년이나 중임한 끝에 1940년 8월에는 중추원 부의장에 오른다.
그는 특이한 두상을 가져 '대갈대감'이란 호칭을 들으면서 친일파 탐학으로 큰 악명을 떨쳤다. 동생 윤택영이 빚에 쫓겨 북경으로 달아날 무렵에는 옥인동에 특급 호화주택 송석원을 지어 세인들로부터 빈축을 샀다. 그리고 이 집의 안방마님으로 이길선(李吉善)의 딸을 앉힌 후 그 입막음으로 5만 원(현시가 5억원)을 준 유명한 일화가 있다. 또한 참봉 첩지를 대량으로 위조해 팔아먹는 사기극을 벌이기도 하였다.
일제가 중국을 침략한 후에는 조선총독부 시국대책조사위원을 지냈으며, 아내 김복원(金福 실사변+爰)은 일제의 전쟁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친일여성단체인 애국금차회 회장을 맡아 금비녀 헌납운동에 앞장을 섰다. 남편의 반민족행각에 걸맞는 내조를 한 셈이다.
이처럼 몰락해 가는 조선왕조의 친족으로서 일신의 영달과 부귀를 위해 왕실과 나라를 팔아먹은 그는 1940년 10월 18일에 사망함으로써 그 화려한 친일의 막도 내리게 된다.
■ 오연숙(인천교대 )
참고문헌
大村友之丞 編, {朝鮮貴族列傳}, 대촌우지승, 1910.
觀藤四郞介, {李王宮秘史}.
釋尾東邦, {朝鮮倂合史}.
山邊健太郞, {日韓倂合小史}, 태평출판사, 1966.
小松錄, {朝鮮倂合之裏面}, 중외신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