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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독립
마 24;32-33.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성전에서 나오셨습니다.
성전이 바라 보이는 감람산 위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 항상 영적 진리를 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조용히 예수에게 물었습니다.
“예수님의 임하심과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그 때 예수님이 세상 끝에 있을 징조를 상세하게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그 중에 중요한 징조가 이스라엘의 독립입니다.
독립하였다는 말은 나라를 빼앗겼었다는 말입니다.
70년 7월 9일 로마 장군 타이터스(Titus)가
4개 군단 8만명 군대를 이끌고 예루살렘을 침범하였습니다.
로마 통치를 반대하는 유대인 110만명을 불과 칼로 살육하였습니다.
그리고 97,000명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은 로마 속국으로 지배를 받았습니다.
70년에서 395년까지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였습니다.
395년부터 638년까지는 동 로마 제국이
638년부터 1072년까지는 아랍이
1072년서 1099년까지는 터키가
1099년에서 1291년까지는 십자군이
1291년에서 1517년까지는 이집트가
1517년에서 1917년까지는 터키가
1917년에서 해방 전 1947년까지는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 당시는 로마가 온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도 로마가 지배하고 있었을 때에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온 줄 알라”(마 24;32-33)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가 연하여지고 가지를 내는 것은 이스라엘의 독립을 의미합니다.
1900년 동안 흩어졌던 이스라엘이 1948년 5월 14일 독립을 선언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열면 닫을 자가 없고 하나님이 닫으시면 열 자가 없습니다.
이스라엘 회복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는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하여 주셨습니다.
1870년대 영국이 전성기였을 때입니다.
영국 땅에는 해가지지 않는다는 말이 나왔을 때입니다.
영국 수상 벤자민 디스라엘은 유대인이었습니다. 그는 거듭난 유대인이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언젠가 이스라엘은 반드시 회복된다. 그리고 전 세계에 영적 중심지가 된다.”
1800년 대 중반부터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이 활발하게 움트고 있었습니다.
당시 문학, 기도문의 핵심은 시온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타이터스 장군은 예루살렘 성을 둘러 싸고 물러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있었습니다.
장기전으로 기다리면 굶주림에 두 손들고 성문을 열고 나올거라 생각하였습니다.
그 때 있었던 사건 하나를 소개하면 그 날의 참상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 그 후대에 알려진 놀라운 사건이 있다. 자기 아들을 구워먹는 마리아 사건이 일어났다.
마리아는 요단강 건너편 지역 베데스다 마을의 명문인 엘르아살의 딸이었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도망쳐 왔다가 로마군에 포위되어 갇히게 되었다.
그 녀가 페라이아(Peraea)에서 꾸려 가지고 온
모든 재산과 식량은 강도로 돌변한 성안의 폭군들에게 모두 강탈당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찾아드는 기근으로 그녀의 창자와 뼛속까지 고통이 스며들었다.
동족들이 재산과 식량을 약탈하는 강도로 돌변하는 현실에 분개하면서
윤리, 도덕에 벗어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게 되었다.
이에 그의 품안에 있는 아들을 붙잡고 이렇게 말했다.
“오 불쌍한 아가야! 전쟁과 기근과 내란 속에서 내가 무엇을 위해 너를 보호해야겠니?
로마군이 성 안으로 들어올 때 우리가 살아 있다 해도 노예가 된다.
아마 노예가 되기 전에 기근으로 죽게 될 것 같단다.
그러나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배고파 죽는 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강도들이란다.
자! 아가야! 이리 와서 내 음식이 되어다오. 그래서 강도들에게는
복수의 분노를 보여주고 세상 사람들에게는 유대인들의 재난이 얼마나
극심했는가를 보여주는 이야깃거리가 되어다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6권3장 4항)
그 여인은 사랑하는 아이에게 이 말을 한 후
아들을 죽여서 몸을 구운 후에 반은 먹고 반은 싸서 감추어 놓았다.
이 때 고기 냄새를 맡은 강도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음식을 내어놓지 않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하였다.
그녀는 강도들을 위해 충분한 양을 남겨 놓았다며 뜯어 먹다 남은 아들의 시체를 펴 놓았다.
강도들은 이 광경을 보고 끔찍스러워 어안이 벙벙한 채 움직이지를 못하고 서 있었다.
이에 마리아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이 바로 내 아들이오. 내가 손수 만든 요리란 말이오.
내가 금방 이 요리를 먹었으니 당신들도 먹어 보시오.
여자보다 더 나약하거나 어머니 보다 더 측은히 여기는 모습을 보이진 마시오.
만약 당신들이 내가 아들을 죽인 것을 불쌍히 생각하고 양심의 가책이 된다면,
당신들의 몫을 내가 먹었다고 생각하고
남은 것은 그대로 손대지 말고 가시오.”(요세푸스, 유대전쟁사 6권 3장4항)
마리아는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스라엘 멸방 때에 일어난 사건중에 하나입니다.
배가 고파서 성문을 열고 두 손 들고 나오는 이들은 금은 패물을 먹고 나왔습니다.
이를 안 로마인들은 성안에서 나오는 유대인들을 잡아 배를 갈랐습니다.
어떤 날 밤에는 하루 밤에 2,000명 배를 가르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소문을 들은 타이터스 장군은 엄명을 내렸습니다.
“유대인들의 배를 가르는 이들은 사형에 처한다.”
그러나 이미 재물에 눈이 어두워진 병사들은 몰래 유대인들 배를 갈랐습니다.
주후 70년 7월 9일 완전히 예루살렘을 점령하였습니다.
요세프스 기록을 보면 그 후 이런 박해가 있었습니다.
젊은이들은 이집트 광산으로 끌고 갔습니다.
건강한 남녀들은 로마 투기장으로 보내어 짐승과 싸우게 하여 맹수 먹이로 주었습니다.
17세 이하 남녀는 종으로 팔았습니다. 포로로 97,000명을 로마로 끌고 갔습니다.
110만명을 즉석에서 죽였습니다. 하루에 십자가에서 500명씩 죽였습니다.
성전 꼭대기로 끌고 가서 떨어뜨려 두개골을 박살내어 죽이기도 하였습니다.
마사다 항쟁
마침내 로마가 이스라엘 전역을 점령하였습니다.
최후까지 항거하는 이들이 마사다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로마에 대항하였습니다.
로마는 자존심이 상하였습니다. 로마 군대는 토성을 쌓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디어 내일이면 토성을 다 쌓아서 로마 군인들이 마사다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마사다 군대의 지도자 엘르아살이 외쳤습니다.
“용감한 나의 동료들이여! 우리는 오래 전부터 로마를 섬기지 않았으며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다른 어떤 신도 결코 섬기지 않기로 결심했었소.
왜냐하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참되시며 의로우신 만인의 주가 되시기 때문이오.
이제 우리의 결심을 행동으로 증명해야 할 때가 되었소.
지금 바로 이와 같은 절박한 위기의 순간에
우리의 결심을 깨뜨리는 부끄러운 짓은 하지 말아야 할 것이오.
우리는 과거에 목숨을 구하려고 노예가 되는 짓은 거부했던 자들이었소.
만약 우리가 로마군의 손에 생포된다면, 노예가 되는 것은 물론
돌이킬 수 없는 처벌을 받게 되는 것이니만큼 그러지 않도록 신중히 처신하도록 해야 하오.
왜냐하면 우리는 제일 처음으로 로마에 반역을 일으킨 자들로
결국 제일 나중까지 로마군과 싸우게 된 자들이오. 또한 나는 우리가 스스로 자유롭고
고귀하게 죽을 수 있는 권한을 우리에게 보장해 준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라 생각하오.
이것은 예상치 못한 불시의 공격을 당한자들에게는 부여받지 못한 특권이오.
이제 우리는 새벽이 되면 분명 체포될 운명에 놓여 있소.
하지만 아직도 우리에게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영광스러운 죽음을 선택할 시간이 있소.
적군이 아무리 우리를 생포하려 해도 우리가 그들을 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있는 것은
어쩔 수 없으며, 더욱이 영광스럽게 죽겠다는 우리의 의지를 막지는 못할 것이오.
하나님께 한번 은총을 받은 우리 유대민족은 망할 운명에 처해졌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아야 했었단 말이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있거나 혹은 단지 가볍게 분노하셨다면,
결코 하나님께서 이러한 유대의 완전한 파멸을 그냥 보고만 계시지는 않았을 것이며,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이 적군에 의해 불에 타 완전히 파멸되도록 내버려두시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오.
사실 우리는 모든 유대인들 가운데 우리만이 살아남아서
마치 우리가 하나님께 죄가 없는 사람들이나 되는 것처럼,
아니면 백성들의 지도자나 되는 것처럼 자유를 수호하기를 바라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지금까지 지도자적 입장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범죄치 않은 자들로써 깨끗하다고 자부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이와 같은 우리의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하나님께서 잘 보여 주셨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이 같은 처참한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 우리를 몰아 넣으셨소.
마사다 요새와 같은 난공불락 요새조차 우리를 구원해 줄 수 없으며,
식량이 충분히 비축되어 있고 무기들과 그 밖에 다른 각종 필수품들이 넘치도록
많이 쌓여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우리의 모든 구원의 희망을 앗아가 버리셨소.
우리의 부녀자들이 더렵혀지지 않고 우리의 자녀들이 노예가 되지 않게 합시다.
부녀자들과 자식들을 죽인 후에,
우리도 서로 영광스럽게 죽도록 하여 우리의 자유를 고귀한 수의(壽衣)로써 간직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의 소지품들과 요새를 불 질러 파괴하도록 합시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로마군들은 우리의 몸과 재산을 한꺼번에 잃게되어 슬픔에 잠길 것이요.
그러나 우리의 식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우리의 시종일관한 결심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오.”
(요세푸스 유대전쟁사 7권8장6항)
이런 엘르아살의 연설을 들은 사람들 중에는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엘르아살은 두 번째 호소를 하였습니다.
“참으로 내가 잘못 했소...세상에서 자유를 추구하면서
영원한 자유를 꺼리는 것은 분명히 어리석은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소?”
이 말에 감동을 받고 모두 자살을 결심하였습니다.
먼저 재산을 모두 불질렀습니다. 남자들은 아내를 품에 안고 죽였습니다.
자녀들도 죽였습니다. 남자들만 남았습니다. 제비로 10명을 뽑았습니다.
10명 앞으로 모든 남자들이 차례로 나와서 목을 댔습니다. 차례로 목을 잘라 죽였습니다.
10명이 제비를 뽑아 한 명을 선택하였습니다. 그가 9명을 죽였습니니다. 자신도 자살하였습니다.
이 때 엘르아살 친척 여인 하나가 5명 아이들을 데리고 동굴로 도망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 여인 때문에 모든 과정이 다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960명이 죽었습니다. 73년 5월 2일이었습니다.
나라없는 설음
로마가 이스라엘 전역을 점령한 후 처참한 폭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 아우슈비츠 학살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홀로코스트였습니다.
그 상황을 역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부녀자들은 독일 군병들에게 끌려가서 추행당하고 처참한 도륙을 당하는 사태가 계속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끌려가지 않으려고 지식들에게 독약을 먹이고
발버둥치는 자녀들의 숨통을 막아 살해한 다음 자신들도 죽어갔다.
성장한 어린 처녀는 창밖으로 뛰어내려서
그 시체가 피투성이가 되었고 길거리에 그대로 버려진 채로 썩어져 갔다.
살아남으려고 몸부림쳤던 이스라엘의 소녀, 소
녀들은 독일 나치스 군대에게 붙들렸고 그들은 모두 옷이 벗겨졌다.
한 번에 더 많은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 옷이 벗겨진 자녀들이 여러 명 겹쳐져서 총상을 당했다.
그 다음에는 구덩이에 시체를 쌓아 놓고 흙으로 덮은 후
그 위에 또 소년. 소녀들의 발가벗은 시체들을 쌓고 또 그 위에 흙을 덮은 후 다시 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은 사람들의 꿈틀거림이 있었으나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두들겨 맞고 구덩이 속으로 굴러 떨어졌다.”(아우슈비츠 대학살 중에서)
세계에서 가장 고통을 당한 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유대인은 두려운 존재로 이 땅에서 없애야 한다고 할 때
마크 트웨인은 소문에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매를 걷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직접 유대인의 정체를 밝혀 보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쓴 책이 바로 “유대인에 관하여”라는 저서입니다.
펜실베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러닝 출판사에서 발간되었습니다.
트웨인은 이 책에서 유대인을 직접 접하고 연구한 결과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통계가 맞는다면 유대인은 전 세계 인구의 겨우 1%입니다.
그것은 밀키 웨이의 불길 속에서 사라져 버릴 수 있는 적은 수를 의미합니다.
유대인은 철저하게 올바른 평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을 바로 보고 바로 평가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유대인은 지구 위에 사는 모든 사람들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상업적인 중요성은 대단합니다. 소수가 엄청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문학, 과학, 미술, 음악, 물질, 의학, 그리고 심오한 연구 등 세계적으로
그 이름을 떨친 위대한 공헌은 숫자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유대인은 전 세계적으로 모든 세대에 걸쳐 놀라운 일을 해왔습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상황을 이기고 그런 일을 해내고 말았습니다.
유대인은 자만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이집트인, 바빌로니아인, 그리고 페르시아인은
지구상에 화려하게 그리고 요란하게 나타났다가 꿈을 접고 사라져야 했습니다.
그리스인, 로마인도 큰 소리를 내며 등장하였다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다른 민족은 한동안 횃불을 높이 들었다가 다 태워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희미해졌거나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습니다.
유대인은 이 모든 것을 보고 지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모두에게 이겼습니다.
그리고 유대인은 타락하거나 쇠약해지거나 나약해지지 않았습니다.
힘이 없어지거나 둔해지거나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모든 민족은 사라지거나 나약하여졌습니다. 그러나 유대인은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은 불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불멸의 비밀은 무엇일 까요?“
이것은 마크 트웨인의 말입니다. 트웨인의 책은 1800년 대 말에 쓰여졌습니다.
트웨인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바벨론과 이집트, 페르샤, 그리스,
로마인의 공격에서 어떻게 싱싱하게 살아 남을 수 있었는 지 궁금하였습니다.
물론 마크 트웨인이 <유대인에 관하여>란 책을 쓴 이후에도 유대인들은 수많은 고통을 겪어야 했습니다.
독일 나찌 하에서 무사히 벗어났습니다. 대학살에서도 살아남아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국경을 확고하게 만들었습니다.
과거 나치에 공격을 이긴 유대인은 지금은 아랍 광신자들에게서 견디고 있습니다.
우리 유대인은 앞으로도 계속 투쟁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런 투쟁은 끝이 없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불멸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마크 트웨인이 가진 의문이었습니다.
어떻게 유대인은 그런 고난속에서 살아날 수 있었을까요? 그 대답이 여기 있습니다.
질문으로 대답하고 싶습니다.
“무엇이 마크 트웨인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하였을 가요?
무엇이 유대인의 세계에 궁금증을 갖도록 그를 자극했을 가요?
무엇이 트웨인에게 그 책을 쓰도록 동기를 부여하였을 가요?”
트웨인이 본 유대인을 정리하겠습니다.
첫째로 트웨인은 유대인이 대체로 평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둘째로 유대인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민족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중
범죄든 경범죄든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하는 민족입니다.
셋째로 유대인은 대단한 가족 지향적 민족입니다.
넷째로 유대인은 인정이 많습니다.
다섯째로 유대인은 근면합니다.
트웨인은 유대인이 대체로 그들이 속한 공동체에 공헌을 하지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고 끝말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트웨인의 결론입니다.
유대인은 세계 곳곳에 디아스포라로 흩어져 살면서 전통을 지켜 왔습니다.
홀로코스트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수많은 유대인이 학살되었습니다.
독일에서 학살당한 유대인들외에 각 곳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이 죽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보가 아닙니다. 자기 발로 와서 죽을 사람들이 아닙니다.
도망다녀야 했습니다. 그러면 모두 끌어다가 죽인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벽에 그려놓거나 써놓은 낙서가 이런 사실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 저기 유대인들을 끌어다가 죽였습니다. 유
대인들을 할 수 없이 멀리 멀리 도망하여야 했습니다. 그러나 따라 가서 죽였습니다.
그러니까 학살 반경이 넓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학살장소가 더 많아 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5년 사이에 독일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은 255,000명이었습니다.
그 중에 180,000명이 학살 당하였습니다.
덴마크의 6,000명 가운데 100명이 학살 되었습니다.
이렇게 조금 학살당하였다는 것은 정말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화가 있습니다.
나는 다음에 있을 강의 중에 한가지를 꼭 언급하려 합니다.
바로 덴마크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을 도와 그 6,000명의 생명을 구했는지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네델란드에서는 140,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104,000명이 학살 되었습니다.
벨기에에서는 85,000명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28,000명이 살해 되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300,000명의 유대인 유대인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65,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120,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9,000명이 추방되고 살해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70,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58,000명이 학살 당했습니다.
루마니아에서는 1,000,000명의 유대인 중에 755,000명이 죽임 당했습니다.
헝가리에서는 710,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20,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는 70,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60,000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는 81,000명의 유대인이 있었는데, 60,000명이 희생되었습니다.
폴란드에서는 3,000,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2,600,000명이 학살 되었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140,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104,000명이 학살되었습니다.
라트비아에서는 100,000명 가운데 70,000명이 살해되었습니다.
1941년에서 1944년 사이에 독일에 점령된 러시아에서는 2,500,000명 가량의 유대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750,000명이 학살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1939년에서 1945년 까지 독일은 6백만이 넘는 비유대 민간인들까지도 죽였다는 사실입니다.
이들 역시 강제 수용소 같은 곳에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유대인 학살을 반대한 양심적인 사람들 이었습니다.
그런 중에 이스라엘로 도망친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에는 67,000명의 유대인이 살았습니다. 그 중에 60,000명이 학살되었습니다.
1933년에서 1934년 사이에 각 나라들로부터 이스라엘로 망명온 유대인의 수를 살펴보겠습니다.
극소수에 불과하였습니다.
폴란드에서 12,000명.
루마니아에서 8,000명.
독일에서 8,000명.
체코슬로바키아에서 6,000명.
헝가리에서 3,000명.
불가리아에서 3,000명.
그리스에서 1,000명.
유고슬라비아에서는 800명이 도망오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리투아니아에서는 600명이 이스라엘로 돌아 왔습니다.
구 소련에서는 오직 600명만이 이스라엘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500명이 왔습니다.
프랑스에서 300명.
네델란드에서 200명.
그리고 라트비아에서는 오직 100명이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 왔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1900년 동안 나라를 잃고 세계에서 가장 박해를 많이 당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엘리에젤 벤 예후다
알리아는 1881년에 움트기 시작하였습니다.
알리아는 흩어져 살던 유대인이 고향 땅 가나안으로 돌아 온다는 의미입니다.
알리아의 첫 인파속에 엘리에젤 벤 예후다가 끼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히브리어를 다시 부활케 하기 위한 사명을 받고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음성을 생생하게 들었습니다.
“선지자의 땅에 예언의 언어를 회복하라.”
그래서 히브리어 복원에 평생을 바친 사람입니다.
히브리어 복원이 이스라엘 복원이라고 믿었던 것같습니다.
그는 이렇게 역설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우리 자녀들이
히브리인으로 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히브리어로 훈련시켜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타락한 외국어를 잊도록 하여야 한다.
외국어를 쓰는 것은 우리를 조각조각 내고
우리가 한 민족으로 뭉치는 것을 방해할 것이며 결국은 만국중에 조롱거리가 되게 할 것이다.“
세계 각국에 흩어져 1900년 동안 살다보니 히브리어를 잊었습니다.
각국 나라 말을 제 각각 하고 있었습니다. 언어의 통일을 알리아를 통하여 제일 먼저 느꼈습니다.
리투니아계, 세파르드계, 예멘계, 폴란드계, 독일계, 페르시아계, 우크라이나계등 다양하였습니다.
따라서 언어도 다양하였습니다. 이를 통일시킨 이가 벤 예후다입니다.
그의 아들 벤 지온(Ben Zion)은 히브리어를 모국어로 말한 최초의 유대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정통유대인들은 엘리에젤 벤 예후다를 맹비난하였습니다.
“엘리에젤 벤 예후다는 히브리어를 현대어로 변질시키고 있다.
이는 거룩한 언어에 대한 신성 모독이다.”
엘리에젤 벤 예후다는 라투아니아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에 정통 유대 교육을 받았습니다.
성장하면서 서구의 세속적 교육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로 돌아가자는 분위기가 온 땅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 영향으로 이스라엘 회복운동을 언어로 시작하였습니다.
데오도르 헤르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땅에서 영원토록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70년 로마가 쳐들어 와서 그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때부터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살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땅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제일 적게 남아 있을 때는 25,000명 남아 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유랑생활을 계속 하여야 했습니다.
나라없는 설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곳에서 정착하고 살만하면 내쫓겼습니다.
게토라는 이스라엘 백성들 마을을 만들어 놓고 그 곳을 벗어나지 못 하게 하였습니다.
수없이 많은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고 살해 당하였습니다.
어느 곳에서는 유대인을 놓고 총 성능 실험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절정이 바로 히틀러가 600만명을 학살하는 홀로코스트 사건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땅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절실히 깨닫기 시작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드레푸스 사건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를 찾아야 한다는 의식에 불을 지른 사건이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드레푸스 사건이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 1894년부터 1906년까지 매우 강한 반 셈족적인 감정들이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드레퓨스라는 프랑스 유대인 군대 장교가 비밀을 누설하고 있다는 죄로 고소되었습니다.
군대 비밀을 독일 정부에 보냈다는 것입니다.
드레푸스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그는 비밀들을 적군에게 누설한다는 죄목으로 고소되었고 반역자가 되었습니다.
비밀을 누설한 댓가로 많은 돈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농담에 가까웠습니다.
그러나 프랑스 법원은 그에게 증거를 찾았다고 발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를 악마의 섬으로 보내라고 판결을 내렸습니다.
후에 그는 무죄임이 입증이 되었습니다. 풀려 나게 되었습니다.
이 재판의 기자가 있었습니다. 테오도르 헬첼이라는 기자입니다.
테오도르 헬첼은 재판에 관계된 기자였습니다. 1894년 그는 이 일을 보고 말했습니다.
“누명이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다. 정말로 터무니 없는 일이다. 보라. 이제 이 정도로 충분하다.”
그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의 신문 기자였습니다.
그는 아마도 그 때까지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나라라고 알려진 프랑스에서 행해진 이 재판을 보았습니다.
프랑스는 문화와 문명으로 인하여 주목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프랑스는 얼굴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프랑스인들은 유대인들을 거칠게 대하였습니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프랑스에서는 희망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헤첼은 이 이야기를 간직하고 프랑스를 떠나 비엔나로 돌아 갔습니다.
그는 뜨거운 시온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유대인은 이스라엘로 돌아 갈 수 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는 돌아 와서 유대인들에게 말했습니다.
“들어 보십시요. 우리 유대인들에게는 어디에 가도 희망이 없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도 해고를 당합니다. 여러분은 아름다운 군인 드레푸스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누명을 쓰고 투옥되었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프랑스 남자였습니다.
후에 그는 무죄로 인정되어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군대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그는 충성스러운 프랑스 남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1894년에 그는 마침내 시온니즘의 대변인이 되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고향 땅을 필요로 합니다.”
그는 드레푸스 재판 이후에 유대 사람들에게 고향 땅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통감하게 됩니다.
1896년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헬첼은 책을 출판하였습니다.
유대인과 유대 국가에 대한 책입니다.
그 책에서 그는 유대인들은 팔레스틴에서 고향 땅을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이 나라 저 나라에 살고 있는 영향력있는 유대인들이 이에 뜻을 같이 하기로 하고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랍비의 아들이었던 데오도르 헤르첼은
1884년 <데어 쥬덴스타트>라는 50 페이지 정도의 시오니즘 책을 발간하였습니다.
땅을 찾고 나라를 세우자는 외침이었습니다.
독일어로 출판하였는 데 이 작은 책이 유대인의 역사를 바꾸었습니다.
놀라운 반응이 일어났습니다. 쥬덴스타트란 유대인 국가라는 말입니다.
유대인은 가나안 땅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당시로서는 도저히 상상도 못 할 이야기였습니다.
데오도르 헤르첼은 각 나라 별로 유대인을 조직하였습니다.
온 나라 유대인들이 시온주의라는 깃발아래 모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영국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이런 것을 알고 제안하였습니다.
“아프리카 우간다 땅을 줄 터이니 그 곳에 유대인들이 모여 나라를 세우라.”
이 말을 듣고 헤르첼은 나라 세운다는 것만 좋아서 찬성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정통주의 유대인들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이 창조하셨다.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이 땅의 주인 하나님께서 가나안을 우리에게 주셨는 데 누가 무어라겠느냐?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땅을 찾아야 한다. 우간다는 안 된다.”
그리고 헤르첼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첫번 시오니즘 회의가 스위스 바젤에서 열렸습니다.
그 후 계속 시온주의 회의가 열렸습니다.
헤르첼은 제4차 시온주의 총회 연설을 하고 그 다음 해에 41세에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1904년이었습니다. 그는 외쳤습니다.
“우리가 꾸는 꿈은 5년 내지 50년이면 이루어집니다.”
그가 죽은 지 50년이 채 안되어 1948년 5월 14일 그 땅을 찾았습니다.
이스라엘 회복은 인간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같지만 하나님의 섭리속에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독립
그러나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이스라엘은 1948년 5월 14일 독립되었습니다.
그 상황을 역사는 이렇게 전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 날 이른 아침에 대영제국의 국기인 유니온 잭이 내려지고
태양이 빛나게 내리쪼이는 가운데 새로운 수도인 텔 아비브의 로스 차일드 거리에 많은 군중들이 몰려왔다.
이 곳은 로프가 쳐 있는 지역이었다.
여기에는 세계의 여러 신문사 대표자들과 유대 랍비의 지도자가 대기하고 있었다.
오후 4시 정각, 드디어 데이비드 벤 구리온이 개회를 선언했다.
사람들은 기립해서 이스라엘 군가를 불렀다.
그 사이에 열방에서는 팔레스타니안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되고 있었다.
국악이 끝나자마자 벤 구리온이 일어나서 히브리말로 이스라엘의 독립선언을 똑똑하게 읽어 나갔다.
온 회중은 일어나서 박수갈채를 보냈으며 많은 사람들은 울고 있었다.”
(프레드릭 오웬` 에드만 출판사, 아브라함에서 중동위기까지)
벤 구리온
1917년 발포어(Balfour) 성명으로 유대인들에게 회복의 기운이 움트고 있었습니다.
영국 정부가 이스라엘을 건설하는 데 협력한다는 공식 성명입니다.
이 후 유대인들이 해외에서 대거 들어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중에 대부분은 열렬한 사회주의자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꿈을 이스라엘에 심기 시작하였습니다.
노동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드는 유토피아 이념은 키브츠를 만들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2000년까지 이스라엘을 이끌어 온 정당은 노동당이었습니다.
첨단에 선 사람이 바로 벤 구리온이었습니다.
1921년 그는 노동당 당수로 선출되었습니다. 후에 수상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제 공항 이름은 벤구리온(David Ben-Gurion)입니다.
벤구리온(David Ben-Gurion 1886~1973)은 이스라엘 초대 수상이 되었습니다.
그는 13년동안 나라를 잘 다스렸습니다. 수상직을 마치는 날 그는 기사에게 말했습니다.
“차를 네게브 사막으로 몰아라.”
벤 구리온은 네게브 지방의 키부츠 스데 보케르(Sde Boker)로 들어 갔습니다.
그리고 키브츠 가족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의 나이 77세 때였습니다.
키브츠에서 그에게 베푼 특전은 4평짜리 방 하나였습니다. 그 곳에 도착한 그는 말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앞으로의 희망은 사막 개척에 달려 있다.
나는 이 사막을 개척하여 이스라엘에 쓸모 있는 땅을 한 평이라도 늘리겠다.”
그리고 이어서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나는 이 광야에서 우리의 창조능력과 개척정신의 유무를 테스트 받을 것입니다.”
그는 87세에 숨을 거둘 때까지 사막을 농토로 개간하는 일에 헌신하였습니다.
그가 죽자 그의 재산으로 남은 것이라고는 입었던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밀밭으로 그가 개간한 사막의 토지만을 남겼습니다.
그리고 두 가지 정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남겨주었습니다.
하나는 무소유 정신이고 다른 하나는 개척정신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를 존경하여 국제 공항 이름을
벤구리온이라 부르며 영원히 영원히 그를 기념하고 있습니다.
수상까지 지낸 그가 죽기까지 4평에서 살면서
옷 한 벌과 신발 한 켤레를 남긴 것은 큰 교훈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회복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얻었습니다.
이스라엘은 회복되고 있습니다. 모두 하나님의 섭리안에 있는 드라마입니다.
드디어 이스라엘은 회복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의 시작은 이스라엘의 독립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1900년만에 나라가 독립되었습니다. 마지막 때의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이미 울렸습니다.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문 앞에 온 줄 알라”(마 24;32-33)
- 갈보리교회 강문호 목사 설교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