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는 선택되었다
증 언 자 : 박영순(남)
생년월일 : 1954.(당시 나이 27세)
직 업 : 대학생(현재 보험회사 근무)
조사일시 : 1988. 7
나는 조선대 체육대를 다니다 학교를 그만두고 보건전문대를 다니던 중 군에 입대하여 1979년에 제대한 후 1980년에 학교를 복학했다. 당시의 정국은 묘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군부독재자 박정희가 죽고 세 김씨가 국민의 지지를 받고 민주화를 위해 무엇인가 해보겠다고 하는 등 사회적 분위기가 한참 들떠 있을 때 군부의 강경파가 온건파를 제압하는 12·12사태가 발생했다. 그래서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으로 되고 전두환 측근의 특전사령관, 수도경비사령관 등을 해먹고 그들이 주축이 되어 기회를 포착하고 있을 때다. 그때 국민은 세 김씨와 1980년도의 남한 상황에 대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5월 17일 자정을 기해 계엄령이 확대되고 실질적으로 군부가 전면에 부상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전국적으로 시위가 사그라지거나 평화적 시위를 하고 있을 때,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전남대 점거를 시점으로 다시 격렬하게 시위가 발생했다. 그건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가 동학농민전쟁, 광주학생운동, 3·1운동의 정신을 정통적으로 계승하고 있는 의로운 지역이었으며 호남 출신인 김대중 씨의 체포소식과 더불어 상승효과를 가져온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쩌면 이러한 점을 고려해 군부가 광주를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16일 횃불시위만 하더라도 매우 평화적이었고 시민들도 전에 없던 광경을 대하면서 '이렇게 민주화가 되는가보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17일 저녁에 공수부대가 배치되자 18일 아침 구호 중에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도 있었다. 그건 일부 정치군인들이 광주를 그들 정권탈취의 제1차 명분으로 삼았다는 이야기고, 광주시민 또한 김대중 씨가 잡혀간 사실 등을 들어 직감적으로 느꼈던 것이다.
5월 18일 이전에 학생들이 주로 외친 구호는 '비상계엄 해제하라. 언론자유 보장하라. 노동 3권 보장하라. 학생 자율활동 보장하라' 등이었고 5월 18일이 넘어서는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은 물러가라. 김일성은 오판 말라. 계엄군을 몰아내자. 전두환 찢어 죽이자. 내 자식 살려내라' 등의 직접적이고 감정적인 구호들이 많았다. 노래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훌라송', '아침이슬', '투사의 노래' 등이었고 무엇보다 애국가를 많이 불렀다.
아무튼 광주를 택했던 것은 기정사실화되었고 광주시민들은 공수부대에 의해 처참하게 유린되었다.
그리고 그때 분명히 전투경찰이 시위를 진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수부대로 대체되었던 것도 의혹의 하나였다. 16일까지만 해도 시위가 평화적으로 진행되었는데 왜 공수부대를 투입했겠는가!
18일 나는 시위대를 따라다니며 동조했다. 보따리에 나물 같은 것을 싸가지고 다녔는데 학생같지 않고 시골에서 막 상경한 농사꾼이나 장사치 등 어른으로 보이게끔 하려고 그랬다. 내가 눈으로 직접 본 것은 18일 오후에 노동청 근처에서 공수부대가 버스나 택시를 세우고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끌어내리고 어른들은 옆에서 말리는 광경이었다. 공수부대는 큰 몽둥이로 다짜고짜 젊은 사람들을 팼는데 그 몽둥이는 박달나무로 만든 몽둥이였다. 그 몽둥이는 보통 몽둥이보다 훨씬 크고 한번 맞았다 하면 퍽퍽 쓰러졌다. 나는 그걸 보고 피가 솟구쳤다. 19일까지 수 없이 피해 있어야 했다.
21일이 되어서야 트럭을 탔다. 군용트럭이었다. 그때 상황은 시위 때의 차량이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무기의 필요성을 느껴 각군으로 시위대가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21일에 공설운동장에서 전남방직-한일은행 길을 따라 트럭을 타고 수건을 매고 동료 20-30명과 함께 시내로 갔다. 그때 트럭이 10여대 정도였는데 맨 앞에는 장갑차였다. 나는 공수부대가 사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트럭을 앞으로 몰라고 했다. 군대 경험에서 생각해 볼 때 쏘지 않을 것이고 쏘더라도 위협사격이거나 공포탄 정도일 거라고 생각했다. 금남로 2가 관광호텔 앞까지 가니 공수부대가 엎으려 쏴 자세로, 쪼그려 쏴 자세로 있었다. 그전까지만 해도 차량이 시위를 하면 근처까지 갔다가 돌아왔기 때문에 사격을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위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 '김대중 씨 석방하라. 전두환 물러가라' 등의 노래와 구호를 외치던 중이었다. 나는 5번째 차량이었는데 그때까지 없던 밀어붙이기 식으로 나가자고 제의하고 운전사에게 말하려는 순간 공수의 사격이 시작되었다.
나는 황급히 엎드렸지만 총알이 발목을 관통했다. 대퇴부에도 파편이 박혔다. 운전수가 총에 맞지 않았는지 차를 뒤로 돌렸다. 그때가 1시쯤 되었을 것이다. 나중에 말을 들어보니까 장갑차에 탔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머리에 총을 맞고 죽었다고 했다. 나는 무신론자였지만 총을 맞으니까 절로 "하느님 살려주세요. 살려주시고 더 큰 일을 하게 해주세요"라고 빌었다.
나는 피를 너무 많이 흘리고 상처 부위가 너무 아파 정신을 잃었다. 깨어보니 기독병원이었다. 그날은 24일이었다. 처음에는 개인병원으로 갔다는데 치료시설이 부족하여 응급처치만 하고 그곳으로 옮겼다고 했다.
나는 응급실이나 입원실, 중환자실이 꽉차 복도에서 치료를 받았는데 나뿐만 아니라 환자가 너무 많아서 복도에서 대부분 대기하다가 치료받곤 했다. 내가 병원으로 가기 전부터 부상자들이 꽉차 있었던 것이다. 병원 의료진이 총상에 대한 치료 경험이 없어서 중환자들 위주로 수술하고 그래도 위급하면 막바로 시체실로 보냈다. 나머지 환자들은 지혈, 수혈 위주의 치료를 했다. 병원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헌혈하러 온 사람, 부상자 가족들이 아들 살리라고 지르는 고함소리, 부 상자들로 인해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다.
의사들은 정성껏 치료한다고 했다지만 경험 부족으로 인한 치료 과정들이 소홀했었고 실제적으로 박힌 총탄이 납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섭다고만 인식했지 부분적인 제거밖에 못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총상자가 아직도 납탄을 몸에 지닌 채 고통받고 있다. 나의 경우 절단했어야 할 경우였는데 당시 남영균 교수의 부인인 김형자 씨가 만류하여 절단은 면했다. 하지만 총상의 경우 신경이 타버린 까닭에 더욱 고통이 심했는데 당시 기독교병원에서 치료받은 총상자들은 그 병원 에 신경외과가 없어서 거의 혜택을 보지 못했다. 나는 5개월 치료를 끝으로 물리치료를 받던중 더 이상 무료로 치료해 줄 수 없다며 일반치료로 바꾸라고 연락이 왔다. 애초에 처음 진단했던 치료기관과 치료방식이 끝나면(예컨데 물리치료 5개월 등) 정부의 보조가 끊긴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기독병원뿐만 아니라 어느 병원이나 마찬가지였다. 서무과에 가서 항의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물론 1급 의료보험카드가 있긴 하지만 특수치료나 특수의약품 지급시에는 해당이 되지 않으니 필요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경황이 없어서 밖의 소식을 들을 수는 없었는데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27일 새벽에 계엄군이 다시 도청을 공격하면서 쏘아대는 요란한 총소리였다. 우리는 처음에 시민군과 계엄군간에 단순한 접전인 줄 알았는데 헬리콥터 소리와, M16의 자동연발 총소리로 인하여 계엄군의 총공격으로 도청을 진압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그때 기독병원은 전부 소등했었다. 환자를 전부 죽인다는 소문도 나돌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그 당시 헬리콥터와 트럭으로 시체를 옮기는 작업을 제일 먼저 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생계비에 대한 압박 때문에 충분한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좋다는 한약재는 비싸서 먹지 못하고 개고기가 좋다고 해서 개고기는 조금 먹었다. 대신 어머님이 산에서 약뿌리를 캐다가 달여주시는 것으로 약을 대신했다.
1982년 6월부터 6, 7명의 부상자들이 모여 부상자회 창립을 준비했다. 강신석 목사의 도움으로 무진교회에서 모임을 가졌다. 나도 부상자회 창립 준비과정부터 함께 활동했고 현재는 총무를 맡고 있다.
퇴원 후 현대자동차를 판매하는 일을 하다 개방대에 편입했다. 낮에 학교를 다녀야 하기 때문에 직장을 다닐 수 없게 되었다. 개방대 졸업 후에는 동양화재보험회사 대리점을 차려 지금까지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리고 학교공부를 덜 끝마친 관계로 학교를 다녀야 했는데 생활이 넉넉지 못한데 학비를 타기가 미안해 아르바이트나 포장마차를 해서 납부금을 해결했다.
지금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때 광주시민들이 미국에 대한 인식이 뚜렷하지 못해 미국 타도에 대한 이슈가 나오지 못했던 것이 가장 안타깝다. 사실 그 당시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란 노래가 참 많이 불렸는데 미국이야말로 우리의 군사작전권을 틀어쥔 민족의 적 아닌가! 북한과 남한이 한 동포인데 그 38선이 턱 가로막아 있지 않는가! 미국이야말로 그 38선을 만든 원흉인데 왜 그런 인식이 없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미국에 대한 인식이 많이 심화되었지만 그때 미국을 상대로 싸움을 했더라면 상황은 우리 쪽에 조금이라도 더 유리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들어 안타깝기만 하다. 그 많았던 외신기자들에게 참 많은 선전이 되고도 남았을 텐데……. 전두환만을 생각했고, 또한 그리고 우리는 5·18 이후 또 미국이 힘쓰면 정치일 정이 정상화되고 원만한 수습이 될 줄 알았으니까 미국 조종인 줄 새까맣게 몰랐던 게 큰 착오였다.(조사.정리 정명자)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