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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豊友會 원문보기 글쓴이: 김수종(안정면)
김수종의 영주, 봉화 여행기
금성대군의 숨결을 느끼며 단산면 고치령에 오르다.
지난 주말(22~23일) 선배 3명과 함께 경상도 영주시(http://www.yeongju.go.kr), 봉화군( http://www.bonghwa.go.kr ) 에 다녀왔다. 여름휴가의 막바지를 어떻게 보낼까 고민을 하다가 선배들을 모시고 내 고향에 다녀오는 것으로 정했다. 졸지에 관광가이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22일(토) 오전 6시 혜화동 로타리에서 만난 일행은 별다른 막힘없이 2시간 반 만에 영주의 초입인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통과하여 아침식사를 위해 3대 42년 전통의 청국장 전문점인 풍기역전의 인천식당으로 갔다.
영주사람이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인천식당은, 청국장 맛도 일품이지만 주인장의 소탈한 웃음과 인품이 더 유명한 곳이다. 식당 이름은 정감록을 보고 한반도 최고의 길지인 풍기로 이주해온 부친의 고향이 인천이라 붙여진 것이다.
인천식당의 대표 메뉴는 물론 말할 것도 없이 청국장이다. 그러나 안주인에게 청국장 못지않은 뛰어난 음식솜씨가 있으니, 바로 맛깔 난 밑반찬이다. 청국장이란 게 뚝배기 하나면 밥 한 그릇이 뚝딱인데, 무슨 반찬이 십여 가지 이상 나오는지 청국장 없이도 공기 밥이 바닥을 보였다.
아쉬운 것은, 고약한 냄새도 없이 맛나기만 한 이 청국장이, 지역에 좋은 콩이 없어 전남 고흥의 콩을 원료로 한다는 점이었다. 조만간 인근의 부석면 일대에서 좋은 콩이 나오면 그것을 쓰려고 생각 중이라고 한다.
인천식당의 맛난 청국장 요리는 허기진 아침 배만 부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따스한 친절함으로 마음까지 부르게 했다. 오랜만에 나의 방문에 놀란 주인장은 동행한 외지 손님들을 위해 직접 담근 청국장 2통을 선물로 주었다.
아침 일찍 나온 일행은 식사를 마친 다음, 식당의 좁은 화장실을 피해 풍기역 화장실로 같이 이동했다. 세수도 하고 볼일도 보고 로비에서 커피도 한잔 마시면서 잠시 담소를 나눈 다음 순흥면의 금성대군신단으로 향했다.
금성대군신단은 대군의 위리안치지 옛터이다. 위리안치는 중죄인의 거주지를 제한하기 위해 집이나 움막의 둘레에 탱자나무 울타리를 치거나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외인의 출입을 금한 형벌로 요즘으로 말하자면 가택연금이라고 할 수 있다.
금성대군 위리안치지는 바로 금성대군이 순흥면 내죽리에 안치되어 있던 장소이다. 물론 현재의 위리안치지는 최근에 고증을 통하여 원래의 자리에서 30~40미터 뒤에 복원을 한 것이다.
세종대왕의 아들이며, 수양대군의 동생인 금성대군은 사육신들의 단종복위운동에 연루되어 유배지를 떠돌다가 마침내 흥주도호부(순흥의 옛 이름)로 옮겨 오게 된다.
당시 폐위된 단종은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영월군 청령포 적소에 안치되어 있었다. 금성대군은 조카인 단종의 복위를 위해 순흥부사 이보흠 등과 고을의 군사들과 선비를 모으고, 영남의 선비들에게 격문을 돌려 단종의 복위를 꾀하게 된다.
그러나 관노의 밀고로 발각되어 죽임을 당하면서 그에게 동조하던 흥주도호부 지역의 수백 명 선비들과 가족은 물론, 흥주 30리 안에는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모두가 죽음을 당했다. 이 사건을 영주지방에서는 정축지변(丁丑之變)이라고 하여 특별히 기억하고 있다.
일행은 금성대군신단을 둘러본 다음 단종이 유배되어 있던 영월로 가는 지름길인 고치령(古峙嶺)을 도보로 올라보자는 계획으로 단산면 좌석리로 이동했다.
개인적으로 나는 금성대군신단에서 단종의 유배지였던 영월 청령포로 가는 길을 금성대군의 충절을 생각하면서 걷는 길이라는 의미에서 ‘금성대군 길’이라고 부르고 있다.
오전 10시 30분 좌석리의 고치령 민박집 앞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고치령을 오른다. 고개를 넘어 마락리까지 가지 않고 고갯마루에 있는 산신각을 둘러보고 돌아오는 시간은 대략 3시간 내외로 보면 된다.
길 전체가 아스팔트 포장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반복하는 고갯길은 일부 비포장 흙길을 제외하곤 운동 삼아 걷기에는 적당한 길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길을 따라 개울이 흐르고, 나무가 좋아 햇볕을 강하게 받지 않는 관계로 남녀노소 누구나 편하게 걸을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차량 통행도 많지 않고, 한적한 곳이라 물소리, 새소리를 들으면서 천천히 걸었다. 등산을 위해서 트럭을 얻어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산신각에 기도를 위해 방문하는 사람들의 차량이 간간히 지나다닌다.
4명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걸으니 1시간 40분 만에 산신각에 도착한다. 영주사람들은 북쪽 영월에서 죽은 단종을 ‘태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고 남쪽 순흥으로 유배되었다가 안동에서 죽은 금성대군을 ‘소백산 신령이 되었다.’라고 믿는다. 그들 조카와 삼촌 사이에는 죽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육신은 넘을 수 없었던 고개 고치령이 있다.
사람들은 소백과 태백 사이의 양백지간(兩白之間)인 고치령에 산신각을 짓고 금성대군과 단종이 영혼이 되어 만나는 자리를 마련해준 것이다. 아담한 산신각에는 태백산 신령인 단종과 소백산 신령인 금성대군을 함께 모셔져 있다.
산신각 안에는 금성대군과 단종의 위패가 모셔져 있고, 작은 인물화도 있다. 도로를 가운데 두고 좌측에는 포도대장군과 단산대장군이 소백지장 장승을 모시고 있고, 우측에는 태백천장을 가운데 두고 양백대장과 항락 장승이 둘러 서 있다.
고치령에서는 매년 정월에 단산면 기관단체협의회 주관으로 지역발전과 번영을 기원하는 ‘소 태백 양백지간 시산제’를 열리고 있다.
단종과 금성대군을 생각하면서 산신각에 절을 올리고 나서, 차와 간식을 먹으면서 잠시 쉰 다음 길을 돌아 하산한다. 내려가는 길은 아주 편하다.
한참을 내려오면서 사진도 찍고, 바람도 맞으면서 오다가 개울가에 앉기 편한 터를 발견하고는 오랜 만에 탁족(濯足)을 하기 위해 신을 벗고 물에 들어갔다. 일행 모두가 탁족을 하면서 이야기도 나누고 조선선비의 옛정취도 생각했다.
시원한 시냇물에 발을 씻으니 더워도 가시고, 무좀도 일순간에 좋아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짐을 챙기고는 좌석리에 돌아오는 시계는 오후 1시 30분을 지나고 있다.
고치령 도보 산책은 단종과 금성대군을 생각하면서 걸었던 아름다운 나들이였다.
불교와 유교 문화가 꽃피는 문화마을 순흥면
영주시 단산면 좌석리에 도착하여 차를 타고 순흥면에 위치한 선비촌(http://www.seonbichon.or.kr)으로 갔다. 선비촌은 영주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고택과 초가집을 복원한 가옥단지로 입구에 공연장과 전통 음식점, 지역 특산물 매장, 공예 체험장, 염색 체험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오후 2시부터 입구의 공연장에서 ‘순흥 초군청 마당놀이’공연이 있다고 하여 달려간 것이다. 하지만 격주로 마당놀이공연이 있고, 이번 주는 청소년들을 위한 춤 공연이 있다고 하여 늦은 점심이라도 먹기 위해 면 사무소 인근에 있는 순흥전통묵집으로 이동했다.
묵밥은 메밀묵을 무채보다는 굵은 크기로 썰어 담고, 그 위에 야채와 양념간장, 멸치육수를 부어서 내는 음식으로 기장밥을 말아 김치 등과 함께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40년 전통의 묵집에서 맛있게 식사를 한 다음, 음식점 마당에 열린 머루를 몇 알 따서 먹은 다음, 묵을 제조하는 식당 우측 묵 공장에 들어 묵을 쑤고 있는 아주머니와 잠시 대화를 나누면서 묵을 만드는 공정을 구경했다.
영주지역에서 나는 메밀을 일일이 갈아 가루를 낸 다음, 가마솥에 물과 함께 넣어 약한 불에 1시간 정도 가열한 다음, 틀에 담아 하루 정도 식히고 굳히면 묵이 완성된다고 한다.
묵을 만들면서도 멸치육수를 만드는 것에도 신경을 쓰는 아주머니의 손길이 바쁘다. 생각보다는 간단해 보였지만, 손이 많이 가고 정성도 상당해 보였다.
묵집에서 나와 바로 우측에 있는 기지떡(술떡, 기정 떡, 증편이라고도 함)과 인절미를 만드는 순흥기지떡집(http://www.xn--ok0b44l27kuuh7wr.kr)에 들어가 떡 만드는 구경을 잠시 하다가 두 종류의 떡을 1.5kg씩 샀다. 이틀을 두고 이동 간에 먹을 양식으로 쓰기 위해서다.
오랜 만에 먹는 기지떡과 인절미는 맛이 좋았다. 영주지방에서 ‘여름에 친정 가는 며느리를 위해 시어머니가 만들어주는 상하지 않는 떡’으로 인기가 높은 기지떡은 쌀에 막걸리를 넣어 발효시킨 떡으로 더위에도 쉽게 상하지 않고, 발효식품이라 소화도 잘되 결혼식, 회갑연, 돌잔치 등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다.
방금 전에 식사를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일행은 떡을 한참 집어 먹고 나서, 척화비, 연리지 소나무, 읍내리 석불입상, 봉도각 공원이 있는 순흥면 사무소로 갔다. 지금이야 면사무소가 있는 작은 농촌 마을이지만,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문화관광체육부 지정 ‘문화마을’인 순흥면은 흥주도호부가 있던 영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면사무소 뒤편에 연못에 정자가 3개나 있으며, 고목들이 둘러싸고 있는 봉도각 공원이 있고, 척화비에 연리지송, 송덕비 등이 즐비하여 옛 영화를 말해주는 듯하다. 연꽃과 정자가 예쁜 공원에서 사진도 찍고 봉도각 정자에 올라 잠시 쉬고 나서 인근의 소수서원으로 갔다.
서원 입구에는 표지판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이 수백 그루의 소나무 군락이다. 사군자의 하나인 소나무가 서원 주변을 뒤덮고 있는데, 이 적송들은 세한송(歲寒松) 또는 학자수(學者樹)라고도 불린다. 이는 겨울을 이겨내는 소나무처럼 인생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참선비가 되라고 붙여진 이름이란다.
1542(중종37)년, 풍기군수 주세붕은 우리나라 성리학의 선구자인 회헌 안향 선생을 흠모하여 그가 학문에 정진했던 ‘숙수사’란 절터에 사묘를 세우고, 이듬해 서원을 세워 흰 구름이 머무는 곳이란 뜻의 백운동(白雲洞)이란 현판을 건다.
불교의 터전 위에 유교의 서원을 세운 곳이라 자유로운 학문적 사고와 틀이 소수서원 곳곳에서 이후에 세워진 다른 서원에서 맛볼 수 없는 형식의 파괴와 건물 배치의 여유로움 등을 통하여 느낄 수 있다.
퇴계 선생이 풍기군수로 재임하면서 백운동서원에 대한 상소를 올리는데, 명종은 친히 무너져가는 교학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는 의미를 담은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어필현판을 하사한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현판과 함께 서적, 노비, 토지를 하사받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서원이 된 것이다.
입구 왼쪽의 학자수와 대비되게 우측에는 소수서원의 오랜 역사를 지키고 서 있는 한 쌍의 돌기둥이 서있다.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졌다는 숙수사는 간 곳 없고, 유일하게 이곳이 절터였음을 알리는 당간지주만이 금낭화의 연분홍 꽃송이를 바라보며 서 있다.
나는 일상적으로 드나들던 소수서원의 내부로는 들어가지 않고, 서원 우측 죽계천 옆에 있는 취한대(翠寒臺)로 갔다. 퇴계 선생이 대를 세웠으나, 오랜 세월로 인해 무너져 있던 것을 다시 터를 닦아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취한’이란 ‘푸른 연화산의 산기운과 맑은 죽계의 시원한 물빛에 취하여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에서 따온 것이란다.
여름에 이곳에 앉아 물소리를 들으며 바람을 맞으며 농주를 한잔 하면 무척 좋을 것 같다. 취한대에서 휴식을 취한 다음 소수서원은 주마간산으로 둘러보고, 소수박물관으로 갔다.
소수박물관에는 영주의 역사와 인물을 통사적으로 분석한 유적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으며, 특히 소백산 비로봉 아래 초암사에 있던 국보 78호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의 복원본이 있어 유명한 곳이다.
금동 미륵보살 반가사유상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에 만들어진 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세계적인 명품이다. 금동 반가상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으며, 앙드레 말로, 버트란트 러셀, 칼 야스퍼스 등 세계적인 석학들이 감동을 했다는 일화가 전한다.
현재 원본은 초암사에 있지 않고,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영주시와 초암사가 돌려줄 것을 몇 차례 요구하였지만, 이루어지지 않아 몇 년 전 복원본을 만들어 소수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
아울러 소수박물관에는 영주시 가흥동에 있는 ‘선사시대 암각화’와 ‘순흥읍내리 고분벽화’를 복원해 둔 유물이 있으며, 풍기에서 출토된 절의 당간지주의 맨 위에 세워서 쓰는 ‘금동용형당간두’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간두로는 매우 희귀한 유물이며, 당시의 조각사, 공예사, 건축사는 물론 도르래를 사용한 점에서 과학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유물이다. 또한 지역의 여러 종가에서 기증받은 다양한 유물도 전시되고 있다.
소수서원에서 조선선비의 숨결과 유학의 역사를 보았다면, 소수박물관에서는 영주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볼 수 있다. 선사시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는 영주의 불교, 유교 문화를 둘러보면서 고향에 대한 긍지를 느낀다.
영주시 순흥면의 선비촌에서 느끼는 조선선비의 숨결
순흥면의 소수박물관에서 나와 선비촌을 둘러본다. 영주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10여 곳의 고가와 초가를 복원한 곳으로 숙박체험을 포함하여 각종 문화행사로 늘 붐비는 곳이다.
선비촌은 네 공간으로 나누어 구성되어 있는데, 수신제가(修身齊家), 입신양명(立身揚名), 거무구안(居求無安),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 그것이다. 이는 여러 문중의 대표 건물만 한 채씩 선별하여 영주지역 선비가문의 특성을 살펴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선비촌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수신제가(修身齊家)의 공간을 만날 수 있는데, 김상진 가옥과 해우당 고택, 그리고 강학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신제가란 자신을 수양하고 집안을 올바르게 가꾼다는 뜻이다.
선비들은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 학문을 힘쓰며 일상의 생활윤리를 실천하는 일, 즉 수신을 중요시했다. 이는 유학의 실천적인 학풍에 의한 것으로, 선비들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를 공부하고 바르게 실천하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수신제가의 공간에서는 자기 수양을 위해 노력했던 선비의 모습을 살펴보고 전통적인 교육 방식도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해우당 고택은 문수면 무섬마을에 있으며, 1875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북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ㅁ자형 구조로 전면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 사랑과 아랫사랑을 두었다.
고종 때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낙풍이 지은 고택으로, 다양하고 조리 있게 활용된 수장 공간의 모습과 넓은 대청 공간이 돋보이며, 여느 가옥과 달리 안채와 사랑채가 직선형으로 배치된 점이 특이하다.
입신양명의 공간에는 두암 고택과 인동 장씨 종가가 나란히 붙어 있다. 입신양명(立身揚名)이란 사회에 진출하여 이름을 드높인다는 뜻이다.
옛 선비들에게 과거시험을 통한 관료의 길은 수신제가(修身齊家) 후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 즉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얻는 일이었다. 입신양면의 공간에서는 중앙 관직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영주 선비의 숨결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우금촌 두암 고택은 이산면 신암리에 있으며, 1590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원군수, 해미현감 등을 지낸 두암 김우익이 건립한 ㅁ자형 기와집으로, 문간채와 안채 외에 사당과 별채의 사랑채가 있다.
선비촌 내에서 인동장씨 고택과 함께 가장 규모가 크며 중심이 되는 가옥이다. 내부 치장 또한 고급스럽고 화려한 가구를 선택하여 배치하였다. 관료로서 선정을 펼치는데 최선을 다했던 선비의 모습과 자녀들을 교육하는 어머니의 모습도 연출해 놓았다.
이제 거구무안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뒤쪽으로 정사가 있고, 김문기 가옥과 만죽재로 구성되어 있다. 거무구안(居求無安)이란 사는 데 있어 편안함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선비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살아갈 길을 고민하였다. 자연과 더불어 풍류를 즐기면서도 자신의 안위를 우선시하지 않고 현실의 잘잘못을 비판한 영주 선비의 굳은 기개를 엿볼 수 있도록 하였다.
만죽재 고택은 문수면 무섬마을에 있으며, 무섬마을의 입향조인 박수가 1666년에 건립한 가옥이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가 ㅁ자형을 이루는데, 경북 북부지역의 평면구조를 잘 간직하고 있다. 중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우사가 있고, 왼쪽이 사랑채인데 앞면에 널찍한 툇마루를 둘렀다.
만죽재를 나와 초가들이 늘어선 우도불우빈의 공간으로 들어선다. 우도불우빈(憂道不憂貧)이란 가난함 속에서도 바른 삶을 중히 여긴다는 뜻이다.
비록 살림살이가 어렵더라도 잘사는 것에 욕심이 나서 선비의 도를 벗어나지 않으며, 곤궁함으로 인해 가볍게 스스로의 품격을 잃지 않는 선비의 자세다. 우도불우빈의 공간에서는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비들의 모습을 느낄 수 있도록 꾸몄다.
마치 한 집처럼 앞뒤로 나란히 서 있는 청록파 시인인 동탁 조지훈 선생의 처가인 김뢰진 가옥과 이웃한 김규진 가옥은 문수면 무섬마을에 있으며, 각각 1800년도와 1900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까치구멍집이다.
까치구멍집이란 안방, 사랑방, 부엌, 마루 등이 한 채에 딸려 있고, 앞뒤 양쪽으로 통하는 집을 말하는데, 지붕 양쪽 옆면의 작은 박공 부분에 구멍이 있어 부엌의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되어 있다. 김뢰진 가옥의 광에는 김매기, 거름주기용 농기구를, 김규진 가옥의 광에는 물대기용 농기구를 전시해 놓았다.
우리 일행은 특히 내일 갈 예정인 문수면의 무섬마을을 생각하면서 그곳에 있는 해우당, 만죽재, 김뢰진 가옥을 주목하며 보았다. 선비촌의 가옥들은 전부 열린 공간으로 전시가 되어 있어 자유롭게 관람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실상 현지의 가옥들은 비어 있거나 주인이 없어나, 있어도 닫혀있는 경우가 많아 차근차근 살펴보았다.
선비촌 구경을 마치고 나오려는데, 저녁에 문화공연이 있는지 공연자들이 분주하게 왔다갔다는 모습이 보였다. 우리들이 보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공연 같아, 인근의 배점저수지 변에 위치한 통나무주택단지인 한스빌로 갔다.
호숫가에 지어진 20여 채의 통나무주택이 이웃한 비로봉과 국망봉, 초암사, 성혈사 등과 만나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이다. 200~300평정도 되는 넓은 대지에 1~2층의 통나무집은 누가 봐도 하룻밤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깨끗했다.
현재 한스빌에는 거주하는 10여 가구와 주말에만 별장으로 사용하는 7~8가구가 있으며, 봄, 가을에는 이곳에 통나무주택단지를 건축한 대원종합건설(http://www.dwhans.co.kr)이 설립한 ‘죽계문화재단’을 중심으로 장학 사업은 물론 각종 문화행사 등이 자주 열려 지역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통나무주택을 둘러본 다음, 호숫가에 지어진 찻집 구비도라에 들러 전통차를 한잔씩 마시면서 점심에 산 떡으로 허기를 채웠다. 새참으로 떡이 최고인 줄 이번에 알게 된 것 같다. 맛있다. 차도 좋고.
차를 한잔 마신다음, 담소를 나누다 저녁식사를 위해 영주경찰서 앞에 위치한 축산식육식당으로 가서 쇠고기구이를 먹고 숙소가 있는 이산면 두월리의 괴헌고택으로 갔다.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오라는 고택 안주인의 말에 천천히 고기를 구워먹고 가느라 저녁 9시를 넘겨서 괴헌고택에 도착했다.
선비숨결을 느끼면 괴헌고택에서 하룻밤을 보내다.
영주에서 유일하게 한옥민박체험을 하고 있는 이산면 두월리의 괴헌고택은 도로변에 위치하면서도 조용한 곳으로 집보다 더 큰 잔디가 깔린 마당과 현재는 윗사랑으로 쓰이고 있는 사당과 입구 왼쪽에 마련된 초가 행랑채, 입구 우측의 현대실 화장실과 세면장 등등 민박을 하기에 충분한 아름다운 고택이다.
늦은 시간 도착한 우리들은 남자들은 사당을 개조한 윗사랑에 여자들은 4~5년 전에 지어진 초가 행랑채에서 잠을 잤다. 사실 나는 왜 사당을 개조하여 손님을 받고 있는지? 한옥민박이라고 하면서 왜 사랑채에 손님을 재우지 않고, 사당과 지은 지 얼마 되지도 않는 초가 행랑채에 손님을 재우는지 의문을 가지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을 부르는 새소리에 눈을 뜬다. 7시다. 일어난 김에 집안을 산책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집 한 채가 들어서도 될 만한 넓은 바깥마당에는 안채로 향하는 길과 사당으로 통하는 두 길이 손질 잘 된 푹신한 잔디 위에 징검다리처럼 박석(礡石)을 놓아 연결시키고 있었다.
건물은 뒤쪽이 약간 경사진 대지에 가지런히 서 있다. 1804년(순조4) 식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부정자(承政院副正字),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낸 괴헌(槐軒) 김영(金瑩)이 1779년(정조3) 부친인 덕산공(德山公) 김경집(金慶集)으로부터 물려받은 살림집이다.
중문을 들어서면 왼쪽이 마구간이다. 오른편은 화장실과 목욕탕으로 개조된 사랑채, 사랑채에서 안채로 직행하는 통로에 바깥마당처럼 징검다리 박석이 안마당을 가로질러 놓여 있다.
안방과 대청, 건넌방 배치는 대갓집 전형을 그대로 따랐고, 안방 앞마루는 툇간이 아니라 대청인데 대청의 전체 규모는 6칸이다.
이 집에는 용도에 따라 창고 방, 고방, 광 등의 수납공간이 설치되었고, 안방의 피난 다락과 사랑방 다락 뒷벽에 은신처가 마련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사랑방 뒷벽 밖에 장독대를 만든 일도 특색의 하나다.
현재 윗사랑으로 쓰이는 사당은 안채의 오른편 위쪽에 따로 일곽을 이루며 자리 잡고 있다. 돌계단은 올라가다 두 갈래로 갈리는데, 그대로 올라가면 사당으로 통하는 문이고, 옆길로 빠지면 옆의 덕산 고택과 연결되어있다.
산책을 하다가 괴헌의 아버지 집인 덕산고택으로 들어갔다. 자연스럽게 연결된 집이라 무심결에 들어간 것이다. 통정대부(通政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지낸 덕산(德山) 김경집(金慶集)이 1756년(영조32)지은 것으로, 애초의 당호는 덕산정(德山亭)이었다고 한다. .
행랑채가 나중에 세워진 것인지, 대문을 통과하기 전에 보이는 본체 건물은 사선 방향으로 놓여 있었다. 바깥마당이 괴헌 고택의 절반도 안 되었고 잔디도 깔려 있진 않았지만, 중문간채의 문도 활짝 열어놓아서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행랑채를 연결하여 정면 6칸 측면 6칸 규모인 전형적인 ㅁ자형 평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붕은 안채와 사랑채만 팔작지붕이고 나머지는 우진각 지붕이다.
덕산고택은 좌측 사랑채와 마루를 설치한 곳간에 벽장과 안채로 통하는 은밀한 통로를 두었다는 것이 특이하다. 내외간의 통행을 편리하게 한 이러한 연결 동선 등이 조선 후기 사대부가의 생활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민가건축으로서는 드물게 서당까지 잘 갖추고 있는데, 덕산은 자신의 집 왼편에 아들의 살림집을 축조하면서 뒤쪽으로는 서당을 건립하여 인근의 후학들에게 배움의 터를 제공하였다고 한다. 역시 선비의 고장다운 면모가 느껴지는 부분이다.
산책 도중 덕산고택의 주인 아주머님을 만나 차를 한잔 마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란히 마주한 덕산고택과 괴헌고택은 장자 상속의 원칙에 따라 원래는 10촌이 넘는 촌수를 가지고 있었지만, 덕산고택에 대를 이을 양자를 괴헌고택 지하에서 받아 현재는 당숙질간으로 아주 가까운 관계가 되었다고 한다.
봉화의 닭실마을에서 시집 왔다는 주인아주머니의 말씀을 들으면서 오후에 닭실마을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책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세수를 하고 아침 식사로 어제 남은 떡과 쥬스, 물, 녹차를 마셨다. 9시가 다 되어 집을 나오려고 하자, 주인부부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는 사랑채로 우리 일행을 부른다.
상호 인사를 하고 나서 차를 마시면서 잠시 대화를 나누었다. 타향에서 50년 넘게 살다가 7년 전 귀향했다는 주인부부는 점잖았다.
“사실 한옥 민박을 원하시는 분들은 주로 한옥의 사랑채에 묵길 원하고, 저녁과 아침 식사를 주인과 함께하면서 전통 음식과 술, 차를 한잔 즐기며 여유롭게 보내길 원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현실은 대부분 노인 부부가 집을 지키고 있는 수준이라 숙박 이상을 체험하는 것이 힘들다.” 라며 “조만간 영주댐이 생겨 수몰되는 10여 곳의 문화재와 고옥을 한 곳에 모아 전통마을 만들면, 그 곳에서 숙박과 공동으로 전통음식체험이 가능한 공간이 마련될 것 같다.” 며 “나중에 한번 더 기회를 만들어 달라.”고 말을 맺었다.
내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왜? 사당에 아무것도 없고, 숙박을 시키냐?”라고 물어보니 “사실 윗사랑이 사당으로 쓰인 것은 건축초기 2~3년 정도로, 위패를 자주 도둑맞아 어쩔 수 없이 본채의 사랑에 모시고 있어, 줄 곳 윗사랑으로 쓰고 있는 관계로 손님을 모신 것이고, 그 곳에 이집에서 가장 터가 좋은 곳이라 남자분들이 주무시면 최고라고 하니 걱정은 말라”라고 말했다.
“여성분들이 주무신 행랑채는 지어진지는 4~5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초가로 운치가 있고, 원래 있던 자리에 복원을 한 것이라 의미도 있어 2~3분이 오시면 선호하는 곳이다. 섭섭하면 나중에 윗사랑에 주무셔도 좋다. 하지만 여성들이 윗사랑에 주무시면 기가 세어진다고 하여 말리는 분들도 있다.”라고 말했다.
차를 한잔 마시면서 잠시 이야기를 나눈 다음, 나가려는데 주인부부가 대문까지 나와서 배웅을 한다. 손님을 위해 한복까지 차려입고, 배웅을 나오는 모습이 여느 한옥민박과도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것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정말 맛있는 된장을 만드는 된장마을 무수촌
괴헌고택에서 나온 일행은 인근 이산면 두월리에 있는 된장마을 무수촌( http://www.moosoochon.co.kr )으로 향했다. 다들 오래된 서울살이로 이제는 된장, 고추장, 간장 등을 사서 먹어야 하는 관계로 아주 맛있는 된장을 찾기 위해 된장공장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이다.
사실 된장마을 무수촌에서 나오는 된장, 간장 등은 그 동안 내가 맛본 것 가운데 가장 맛있고 깔끔한 맛을 자랑할 만한 곳이기 때문이다. 아직 건강하신 자친(慈親)께서 나중에 직접 된장이나 간장을 담글 수 없게 되면 나도 사먹을 곳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산면 지동리에 위치한 무수촌 된장마을은 옥천전씨 종가 옆에 자리를 잡고 있어, 간혹 방문하는 손님들이 종가로 착각을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무수촌에서는 100% 영주지역의 콩으로 가내 수공업적 형태로 된장을 만들고 있다. 전작으로 수확한 콩 중에서도 제일 알찬 녀석들만 골라 메주를 쑤고 있다. 순수한 국산 콩을 잘 선택한다는 것은 좋은 된장 만들기의 시작이자 끝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연간 100~130가마 정도의 콩을 옛날 가마솥에 부어 장작불로 달구고 달구어 충분히 삶는다. 콩을 삶을 때 쓰이는 물은 주민들도 함께 마시는 1급 자연수이기에 된장 맛이 한결 좋아진다. 삶은 콩은 일일이 손으로 메주를 만들어 황토방에서 2~3개월 말리고 띄워 정월에 된장을 담근다.
또한 된장을 담는 용기는 유약을 바르지 않은 천연 황토옹기를 쓰고 있으며, 메주의 좋은 성분을 그대로 유지한 상태에서 1년 이상 자연 숙성시킨다. 아울러 각종 화학용품은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
제품은 ‘무수촌(無愁村)’이라는 이름으로 된장, 간장, 고추장, 식초 등을 생산하여 주로 백화점에 납품하고 있다. 방송과 신문 등에 자주 등장한 관계로 아주 유명한 집이다.
충청도에서 시집온 주인 박인숙씨는 오랫동안 가구판매업을 하다가 시댁이 있는 지동리로 귀향하여 지역 할머니들의 도움으로 된장공장을 이끌고 있다.
속리산 법주사 주지 스님의 권유로 된장 만드는 일을 시작했다는 박인숙씨는 가구판매업을 하면서도 콩을 너무 좋아해 언젠가 기회가 되면 콩과 관련된 사업을 하고 싶었다고 한다.
법주사와 무수촌 인근의 흑석사 스님들의 도움을 받아 만든 된장이 승승장구하며 팔려나가 스스로 끼가 있음을 깨닫고 본격적인 사업으로 전환하여 10년이 다 되어 간다고 한다.
같이 간 일행들은 전부 된장에 청국장, 간장을 사들고 나왔다. 넓은 대지에 한옥을 적절하게 이용한 공장의 전경과 수백 개에 이르는 된장독, 연못, 장승, 석물 등이 사진을 찍기에 너무 좋은 그림이 나오는 곳이다. 그래서 TV출연이 잦은가 보다.
된장을 사서 나오는데, 박인숙 촌장은 “요즘 큰 걱정이 하나 있다. 인근에 영주댐이 생기면 기후 변화가 분명한데, 일조량과 강우량 등이 바뀌어 좋은 콩을 구하는 일과 된장의 발효 등에 문제가 생겨 터를 옮기거나 인위적으로 된장을 발효 건조시키는 기계를 들여야 될지도 몰라 잠이 오지 않는다.”라며 영주댐 건설에 대한 입장을 조심스럽게 전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길을 가진 무섬마을
된장공장을 둘러본 다음, 일행은 물돌이 마을로 유명한 문수면 무섬마을로 향했다. 안동의 하회, 예천의 회룡포처럼 무섬마을도 강물이 마을을 감싸는 마을이다. 우리말 ‘물섬’에서 연유되었고, 한자 지명은 수도리(水島里)를 그대로 쓰고 있다.
풍수학적으로도 매화나무 가지에 꽃이 핀 형세, 물 위에 연꽃이 뜬 형세라고 하여 기운이 좋은 땅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무섬마을은 뒷산이 태백산 끝자락과 소백산 끝자락이 만나 이루어졌고, 앞쪽은 태백산 물과 소백산 물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마을의 대부분 가옥은 ㅁ자형이며, 까치구멍집이라 불리는 태백산을 중심으로 경상도 북부지역에 분포하는 산간벽촌의 주택 형태다. 까치구멍집이라 함은, 부엌 연기가 자연스럽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지붕마루 양단의 하부에 만든 까치구멍에 의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을의 중심부 높은 곳에는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 ‘만죽재(晩竹齋)’가 있다. 반남(潘南) 박씨들이 난을 피해 안동에서 영주로 옮겨왔고, 반남 박씨의 박수(朴隨 1641∼1699)가 이곳 무섬에 터를 잡았다. 이후 선성 김씨(예안 김씨)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렸다. 그래서 무섬은 지금까지도 이 두 가문의 집성촌이다.
만죽재가 지어진 것은 1666년(현종7)으로, 원래 70여 칸 규모의 한옥으로 건축되었지만 겸양과 청빈의 의미로 ‘섬계초당(剡溪草堂)’이라고 초가의 이름을 쓰다가 박수의 8대손이 중수하며 당호도 바꾼 것이라 한다.
본채 우측 언덕 위에 2년 전에 복원된 서당이 하나 있는데 최근 입향조 박수의 뜻을 이어받는다의 의미에서 서당에 섬계초당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또한 만죽재는 한 번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13대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재미있게도 만죽재 앞에 있는 선성 김씨 집안의 고택에 ‘섬계고택’이라는 당호가 걸려있다. 분명 만죽재가 섬계초당을 이어받은 고택이고, 최근 서당에 섬계초당의 현판을 단 시점에서 김씨 집안에서 섬계고택의 당호를 쓰는 것은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만죽재의 주손 가운데 차남이나 삼남이 만죽재를 이어받지 못하여 주손에게 양해를 구하고 섬계고택이라는 당호를 쓰는 것은 온당한 일이지만, 단순히 섬계가 무섬의 옛 이름이라는 이유로 김씨 집안에서 쓰는 것은 도리에 어긋난 일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역시 만죽재 앞에 위치한 선성 김씨들의 대종가인 무송헌(撫松軒) 종택의 경우에도 영주시내 구성산성 옆에 살다가 문수면 적동리로 다시 대구로 이주하여 살던 종손이 단순히 문중사람들이 많다는 이유로 무섬에 들어왔지만, 작년 영주시의 노력으로 선성 김씨들의 대종가인 삼판서고택이 영주시 서천 변에 복원된 관계로 이제는 그곳으로 이주하는 것이 올바르다고 본다.
영주시에서도 선성 김씨인 김주영 영주시장이 현직에 있고, 삼판서고택도 비어있는 관계로 고택의 관리와 유지는 물론 지역민들과 관광객들에게 고택의 정취와 문화를 느낄 수 있도록 종손의 이주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된다.
국가의 돈으로 지은 고택에 일개 집안의 종손이 함부로 들어갈 수 있냐고 반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현재 우리나라 대부분의 고택이 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아 수리, 보수, 유지를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마을 입구에 있는 해우당(海愚堂) 고택은 1879년(고종16) 의금부도사를 지낸 해우당 김락풍(金樂豊 1825~1900)이 1875년(고종12)에 건립한 것이다. 무섬마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집으로서 전형적인 ㅁ자형 가옥이다.
앞의 대문을 중심으로 좌우에 큰사랑과 아랫사랑을 두었는데, 특히 우측의 큰사랑은 지반을 높여 원주에 난간을 돌려 정자처럼 누마루를 꾸몄다. 이 누마루에 ‘해우당’이라고 쓴 흥성대원군의 친필 현판이 걸려 있다. 아쉽게도 빈집이라 마당 한 켠에는 채전이 만들어져 있다.
무섬마을에는 대표적인 이 두 건물을 포함하여 김덕진 가옥, 김뢰진 가옥 등 4채가 도지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무섬에서 <별리>라는 시를 쓴 시인 조지훈의 처가로 잘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찾는 사람이 많다.
마을 둘러 본 다음 강가로 나오면 낮게 흐르는 강물 위로 수도교가 정면으로 보이고, 강 건너의 낮은 산턱도 보인다. 1983년에 세워졌다는 수도교는 전통적 마을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게 다소 육중하다. 그래서인지 마을 주민들은 마을 뒤편에 무섬교가 새롭게 생긴 관계로 수도교의 철거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이 수도교가 생기기 전까지는 마을에서 놓은 3개의 섶다리만이 뭍과의 유일한 통로였다. 상여도 가마도 이 섶다리를 통해 들어오고 나갔다.
상류에 있던 다리는 영주로 장을 보러 갈 때, 가운데 것은 아이들이 학교 갈 때, 하류에 있던 것은 농사지으러 갈 때 건너던 다리다. 장마가 지면 다리는 불어난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고,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다리를 다시 놓았다고 한다. 가을 마다 복원행사를 가지는 외나무다리로, 30년 전 방식 그대로 통나무를 자르고 이어서 다리를 만든다.
건설교통부가 선정한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 중 한 곳으로 선정된 이 외나무다리는, 영주시에서도 ‘무섬 외나무다리 축제’ 를 통하여 외나무다리 건너기 체험을 실시하고 있다.
우리 일행들도 아름다운 길을 걷기 위해 마을을 거닐다, 흐르는 냇물을 보면서 강 언덕을 걸어본다.
영주역의 바닥그림과 풍기 삼가저수지 주변에서의 식사
무섬마을을 둘러본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일단 영주시내로 향했다.
영주역 앞을 지나는데 사람들이 엄청 몰려있다. 어제 완성된 광장 바닥 그림을 보기 위해 인파가 몰린 것이다. 영주지역의 명소인 부석사 무량수전과 선비촌, 기차와 영주역 등의 전통과 현대의 조화로운 모습을 대형그림으로 그린 것인데 벌써부터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화제인가 보다.
지난 20일부터 22일까지 '대학내일'(대학생활 문화정보 주간잡지)이 주관하여 화가 3명, 스텝 3명, 서울지역 50개 대학 대학생 동아리 회원 400여명이 참여해 가로 25m, 세로 40m의 대형 영주상징물 그림을 역 광장에 그린 것이라고 한다.
영주에 소재한 KT&G 영주공장에서 다양한 대학생 동아리의 네트워크를 형성하면서 그들이 사회에 의미 있는 일을 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기회를 얻게 하고자 이번 프로그램을 계획 지원했다고 한다.
멋진 그림을 보고나서 식사를 어디에서 할까 고민을 하다가, 지난주에 갔던 풍기의 욱금리 삼가저수지 옆에 위치한 산수방 펜션 가든으로 훈제오리구이를 먹으러 갔다.
20여 년 전에 생긴 풍기읍의 삼가저수지 주변에는 최근 펜션과 식당, 별장 등이 엄청나게 생겨나고 있다. 고속도로 나들목이 가까운 거리이고, 소백산 비로봉 아래 비로사가 가까워 산과 절, 호수가 아름다운 곳이면서도 풍기읍에 속해있어 생활도 편리하여 별장지로 인기가 높은 곳이다.
나도 소백산에 등산을 갈 때면 자주 이곳을 지나고, 옛날 수몰이 되기 전 큰 이모님의 집이 있던 곳이라 그립기도 한 곳이다. 풍광이 좋고, 산과 물이 좋기도 하지만 정남향으로 집을 지을 수 있는 곳이라 욕심이 가는 곳이다.
얼마 전에 풍기에 왔을 때 아주 맛있게 먹은 훈제오리구이가 생각이 나 말을 했더니, 모두가 좋다고 하여 오리구이를 시켰다. 4명이 먹기에 적당하고 부족하면 죽을 별도로 준비해 주기에 좋다. 우리 일행은 저수지가 보이는 자리에 터를 잡고 신나게 고기를 구워먹고 나왔다.
영남4대 길지 가운데 하나인 닭실마을에 가다
나는 부석사를 거쳐 봉화의 닭실마을로 갔다가 다시 풍기로 와서 서울로 가는 길을 제안했지만, 다들 부석사는 이미 가본 곳이다. 포기하고 봉화로 가서 닭실마을과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의 생가로 알려진 계서당을 둘러보고 오자고 제안을 하여 우선 봉화읍 유곡리에 있는 닭실마을로 이동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충재 권벌(權橃) 선생의 후손인 안동 권씨들이 모여 사는 봉화읍 유곡리 닭실마을은 안동의 하회마을, 내앞마을, 경주의 양동마을과 함께 영남의 4대 길지라고 택리지는 말하고 있다.
충재 선생은 1507년(중종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 등을 거쳐 도승지가 되고, 1519년 예조참판이 되었다. 이어 삼척부사, 밀양부사를 거쳐 경상도 관찰사, 한성부판윤을 지냈으며, 이후 1545년(인종 1) 우찬성으로 의금부판사, 이 해 7월 어린 명종이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었다.
8월 을사사화(乙巳士禍)로 위사공신에 올랐으나 정순붕의 반대로 삭훈되고, 1547년(명종 2)에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된 죄로 구례에 유배된 후, 삭주에 이배되어 배소에서 죽었다. 선조 초에 복권되고, 영의정이 추증되었으며, 봉화의 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문집으로 <충재집> <우향계축> <사마방목> <문과잡과방목> <충재일기> 등 15종 184책을 남겼다. 과거 합격자명단인 <사마방목>은 보물 제524호인 <정덕계유사마방목>보다 17년이 앞선 것이고, <문무잡과방목> 역시 지금까지 간행되어 전해지는 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보물 제603호로 지정된 <정덕계유문무잡과방목>보다 6년이나 오래된 본이다.
<을사정난기>는 유일하게 남아있는 것이며, <충재일기>는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역사적 자료이며, 그의 다양한 저술서는 조선의 정치,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데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닭실마을 입구에 차를 세우고 주차장 옆의 노인정에 들어가 물어보니 마을 안쪽에 충재 선생의 종택인 솟을대문 집이 있다고 한다. 종택은 소박한 양반가의 전형이며 집 옆의 충재기념관에는 <충재일기> <연산일기> <근사록>등 문화재 467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다만 종가에는 최근에 상을 당했는지 사랑 좌측에 짚을 엮은 줄을 쳐서 상가임을 알리고 뒤편에는 상주와 종친들의 이름이 일일이 적혀있었다. 상중이라 종부 혼자 지키고 있는 것 같은 집안을 방문하는 것은 포기하고 정자, 사당, 기념관을 둘러보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 했다.
대문 밖의 청암정은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운 정자로, 미수 허목(許穆)의 친필 편액이 걸려 있었다. 풍광이 절묘하다. 얼마 전 국민 여동생 문근영이 주인공으로 나와 인기리에 방영된 TV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촬영지로도 알려진 곳이다. 봉화군에는 이외에도 170여개의 정자가 있다고 하니 과히 정자의 고장이다.
충재 종택에서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울창한 소나무 숲에 싸인 석천계곡이 있다. 이곳에는 권벌의 장자 권동보가 지은 석천정사가 있어 계곡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다. 충재 종택과 청암정, 석천계곡으로 이어지는 닭실마을의 경관은 명승 및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충재 선생의 고택 앞에 서서 마을을 둘러보니, 마을을 350도 정도 둘러싸고 있는 산이 있고, 그 가운데 암탉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에 집들이 들어서 있는 형국이다. 이래서 밖에서 보면 그냥 평범한 산으로 보이고 안의 넓은 터에서 후손들이 화를 피하면서 평안하게 살 수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종택과 청암정, 기념관 등을 둘러본 다음, 마을에 유명한 닭실전통한과공장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길가는 어르신이 여름이라 한과는 만들지 않는다고 하여 길을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인 이몽룡의 생가인 물야면 가평리 계서당으로 잡았다.
봉화읍에서 계서당으로 가는 길은 물야면 사무소나 축서사로 가는 길을 따라 가면 자동차로 1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인근에 오전약수터와 의상대사가 세운 축서사를 비롯하여 계서당이 있고, 길을 좀 더 나아가면 영주시의 부석사가 나온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의 생가를 방문하다.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溪西堂)은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선생의 집으로 현재 13대 종손부부가 살고 있다. 최근 다시 행랑채 공사를 시작하여 가뜩이나 어수선한 집이 더 정신없어 보였다.
도로에 인접해 있지 않고, 앞쪽은 논과 밭이 있고 좁은 길을 따라 1~2분 걸어가야만 언덕 아래에 집이 있는 관계로 도로 옆에 간신히 차를 세우거나 최근에 마련된 집과는 약간 거리가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들어가야 한다.
담장이 없고 본채와 행랑채, 사당이 있는 계서당은 좌측에 우사가 있고, 바로 앞에도 논과 밭이 있어 전반적으로 문화재로서는 높은 가치를 인정받기 힘든 측면도 있는 곳이다.
하지만 계서당은 특이한 것이 몇 가지 있는 한옥이다. 현대의 아파트와 비슷한 구조를 가진 사랑채에는 툇마루 천정에 일부지만 우물 정(井)자 모양의 문양이 있고, 우측 끝에는 남자용 소변기가 설치되어 있다.
또한 사랑채 아래의 벽면에는 다양한 문양이 있는데, 어른이 웃는 모습을 닮은 형상과 날개 짓하는 모습 등이 있어 눈길을 끈다. 한옥을 공부하는 사람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는 특이한 형상이라고들 한다. 고건축을 공부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가볼만한 곳이라 하겠다.
조선 최고의 국문 소설 가운데 하나인 <춘향전>의 초반부는 당시 유행하던 판소리나 민간설화에서 따온 듯하고, 후반부는 성의성의 스승인 산서 조경남 선생이 ‘계서(溪西) 성이성(成以性) 어사’를 모델로 글을 쓴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경상도 봉화와 영주에 살았던 성의성이 이몽룡이라는 학설은 <춘향전의 형성과 계통> <춘향전 비교연구> 등의 굵직한 저서를 출간한 연세대 국문학과 설성경 교수의 30년 넘는 춘향전 연구의 결과물이다.
계서당은 지난 1984년 국가지정문화재 민속자료 제 171호로 지정되었다. 계서당의 원주인은 성이성(1595∼1664))선생으로, 선생은 평생 청렴, 결백하여 검소하게 살았던 인물로서 사후 홍문관 부제학에 추서되었으며, 1695년 숙종21년 청백리에 녹선(錄選)되었으며, 1786년 정조10년 오천(梧川)서원에 주향되었다.
계서당은 광해군 때 남원부사를 지낸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의 아들 성의성이 광해군 5년인 1613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인적인 추측은 열 아홉에 안동에서 온 부인 금씨를 얻어 분가를 한 것으로 짐작된다.
이곳에는 그가 과거에 장원 급제해 어사로 부임할 당시 임금이 직접 내린 어사화, 어사 출두 시 얼굴을 가리고 직분을 행할 때 쓰는 얼굴가리개인 사선(紗扇) 및 창녕 성씨 족보 등 수 십 여점의 유물이 보관돼 있다.
건물은 정면 7칸, 특면 6칸의 ㅁ자형으로 되어 있고, 팔작지붕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계서당과 중문으로 연이어 있다. 건물 우측에는 선생을 추모하는 계서당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그의 부친 부용당 성안의 선생은 1561년(명종16년) 경남 창녕 출신이다. 고려 말의 충신인 두문동72현 중 성만용의 7대손이다. 1591년 문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32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소모관이 되었다.
퇴계의 수제자 가운데 한사람이며, 퇴계의 아들과 사돈이었던 영주출신의 경상우도 관찰사 백암 김륵 선생의 막하에서 활약하였다. 백암 선생은 당시 홀아비였던 성안의의 학문의 깊이와 사람 됨됨이를 믿고 자신의 종손녀(김계선의 딸)와의 혼인을 주선한다. 성안의는 재혼 직후 부모, 형제 전부를 고향 창녕에서 처가인 영주시 이산면지역으로 피난시켰다.
전쟁 후 영해부사, 남원부사에 제수되어 3년을 재직하고(이 때 성이성의 나이 13-16세로 춘향전과 연관된다.) 광주목사로 승진하였으나 얼마 후 영주로 돌아가 10여 년 간 후학을 가르쳤다. 1614년에는 처가 인근에 있는 이산서원 원장으로 재임하기도 했다.
봉화의 계서당이 1613년에 지어졌다고 하니 이 시기 정도까지는 처가나 처가 인근인 영주시 동면 문단리,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 신암리 지역에서 터를 잡고 성안의 일가가 살았을 것으로 추측 된다.
혹은 아들 성의성은 결혼 후 분가하여 봉화군 물야로 가고, 부친 성안의는 영주시 이산면지역에서 계속 살았던 것 같다. 영주시 이산면에서 봉화군 물야면까지는 대략 20~30리 길로 집을 두 채 정도 소유하지 않고는 왔다 갔다하면서 생활하는 것은 불가능한 거리다.
계서 성이성 선생은 1595년(선조28년) 임진왜란 중 영주시 동면 문단리에 있는 선성 김씨 집성촌인 외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친이 터가 좋다는 친정에 몰래 들어가 아들을 낳았다고 하니 대단한 일이다. 부친이 남원부사를 지내던 시기인 1607년부터 3년여 동안 남원에서 부친과 함께 생활하였다.
인조5년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 홍문관 교리, 응교를 역임하였다. 선생이 35세 때 부친상을 당하였으며 39세에는 사헌부 감찰, 예조좌랑,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다.
43세에 경상도 진휼어사, 호서 암행어사로 나섰으며 45세에는 병조정랑, 교리, 사간 등으로 배명받았으며, 46세와 53세에 호남 암행어사 등 네 차례에 걸쳐 어사를 지냈으며 46세에 합천현감, 54세에 담양부사 59세에 창원부사, 60세에 봉화로 돌아왔다. 61세에 진주목사, 66세에 강계부사 등, 다섯 고을에 대한 선정을 베풀자 고을민들은 송덕비로 답례하였다.
1660년 평안감사 임의백이 ‘관서지방의 살아있는 부처’라고 극찬하였지만, 슬하에 6남3녀를 두고 선생은 1664년 현종5년 향년 70세로 계서당에서 돌아가셨다.
말년에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에 있는 계서초당에서 한동안 생활을 했다고 한다. 부엌이 없고 방2칸과 툇마루만 있는 초당은 공부와 손님의 숙박 정도만 해결이 가능한 관계로, 이때도 외가나 외가 인근에 있던 부친의 옛집에서 생활을 했던 것으로 짐작이 된다.
선생의 묘는 외가 인근이며, 부친의 묘와 가까운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 손향원(巽向原)에 있다. 특히 선생의 다섯째 아들 문하(文夏)는 젊은 나이에 도산서원 원장을 역임하기도 하는 등 학문이 뛰어난 집안이다.
현재 성의성 관련 유적은 봉화군 물야면의 계서당을 비롯하여, 말년에 그가 머물며 공부했다는 영주시 이산면 신암3리의 계서정(초당)과 무덤이 있다. 특히 계서정의 현판은 당대의 문사 채제공 선생의 기문(記文)으로 알려져 있다.
계서당을 지키고 있는 종부는 “시집와서 30년 넘게 시할머니, 시아버지, 시어머님께 춘향전에 나오는 이몽룡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우리의 조상이라고 알고 있다.”라며 “몇 년 전 선성 김씨 종가에 가서 족보를 확인해 보니 부용당 할머님이 그 집에서 왔다는 기록도 확인했고, 그 집에서도 늘 이몽룡의 어머니가 우리 집안 할머니라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고 들었다.”라며 “원작과 달리 성씨가 다른 것은 당시 양반 문화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 많아 남녀의 성씨를 바꾸어 표기한 때문” 이라고 이몽룡 설화의 주장을 보충 설명했다.
두 집안의 이야기를 익히 들은 나는 사실이 100% 정확하다고 확신을 한다. 춘향전의 남자 주인공 이몽룡은 분명 계서 성의성 선생이다.
물야면 가평리의 계서당을 둘러보면서, 종부와 춘향전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최근 봉화군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고택의 수리 보수는 물론 상당수의 관광객들이 다녀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담장을 다시 만들어야 하고, 행랑채를 보수하고, 집 주변을 새롭게 단장하지 않으면 관광객들이 찾아오는데 불편이 많아 다시 오기는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속히 길을 넓히고 주차장도 크게 마련하는 것이 절실할 것 같아 보인다.
또한 영주에 있는 계서초당과 계서의 묘, 부친 부용당의 묘소 등과도 연계하여 관광 상품화하는 것도 중요할 것 같아 보였다.
영주시 풍기읍에서 생강 도너츠, 영주한우 쇠고기, 풍기인견을 사다
계서당을 둘러본 일행은 서울로 가기 위해 길을 잡았다. 중간에 풍기읍에 들러 인삼, 인견, 한우고기를 사야 하기에 서둘러야 할 것 같다. 시간은 벌써 오후 4시를 넘기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의상대사 창건한 고찰 축서사 가는 길인 물야면 사무소 방향으로 길을 잡아 나아간다. 축서사 가는 길목을 지나 물야면 사무소를 조금 못미처서 좌회전을 하면 부석사로 가는 소백로다. 당초 부석사를 가려는 계획도 있었지만, 다들 가본 곳이라 다음으로 미루고 부석면 사무소 방향으로 곧장 간다.
부석농협이 직영하는 주유소가 가서 휘발유를 충분히 넣는다. 하루 반나절을 돌아다녔더니 서울에서 가득 채워왔음에도 거의 바닥이 보이기 때문이다. 주유를 마치고 부석면소를 지나 단산면, 순흥면을 지난다. 어제 왔던 소수서원, 선비촌 등이 보인다. 참 좋았다.
이내 길을 내지르니 풍기읍에 닿는다. 동양대학(http://www.dyu.ac.kr) 구내를 지나 좌우측에 있는 본관과 부속건물도 보고, 좌측 끝에 있는 대한광복단 기념관(http://www.kwangbokdan.com)을 본다.
일제가 조선을 무단 점령한 초기인 1913년에 경상도 산골의 소도읍 풍기에서 설립된 대한광복단은 교통요지에 정감록을 보고 찾아온 외지인이 많아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기 편했고, 물산이 넘쳐 자금 확보도 쉬웠으며, 풍기지역의 반골정신과 충절의식이 쉽게 결합한 연유에서 유래한 것 같다.
풍기역 방향으로 길을 잡는다. 풍기인삼을 살까 고민을 한다, 영주에서 가장 유명한 특산품인 풍기인삼은 조직이 치밀해서 무게가 많이 나가고 향이 진하며 사포닌 함량이 높은 것을 유명하다. 나는 인삼을 즐겨먹기에 살 생각이 있었지만, 모두가 시큰둥하여 포기를 하고 만다. 다음에 혼자 오면 조금 사야겠다.
정감록에 나오는 한국 최고의 길지 중 으뜸이라고 하는 풍기는 길지가 가지고 있는 좋은 조건을 전부 가지고 있다. 3봉 2수의 길지 조건인 소백산의 도솔봉, 비로봉, 연화봉 아래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원천과 금계천이 풍기읍을 관통한다.
그 아래에 살면 가뭄, 홍수, 전쟁, 기근 등의 피해를 피할 수 있다고 하여 구한말부터 정감록을 보고 찾아온 이들이 많은 곳이다. 길지라서 그런지 외지인도 많다. 현재도 풍기읍 인구의 1/4 정도는 그들의 후손이다. 특히 그들은 후손은 풍기읍 금계리에 터를 잡고 풍기인삼재배와 풍기인견을 만드는 일을 주로 했다.
펄프에서 추출한 순수 천연섬유로 땀 흡수력이 탁월해 최고의 여름옷이라 불리는 풍기인견은 공장과 판매장이 100여 곳에 이르며, 블리스, 풍기인견백화점, 홍승애 풍기인견, 동명인견, 금풍인견 등 유명 판매점도 여러 곳 있다.
영주의 명품 농 특산물인 풍기인삼과 영주한우, 영주사과는 한국능률협회에서 전국 최초로 ‘웰빙인증’을 받았고, 풍기인견의 경우에도 국내 최초로 공산품 ‘웰빙인증’을 받은 바 있다.
풍기인삼 사는 것을 포기한 나는 일행과 함께 생강, 인삼, 허브, 커피 도너츠를 만드는 정 도너츠( http://www.jungdonut.com )로 가서 생강 도너츠를 4통 정도 샀다. 워낙 전국적으로 유명한 상품이라 모두가 한통씩 산 것이다. 오랜 만에 먹으니 맛도 좋아 사자마자 하나씩 시식을 하고 나왔다.
도너츠를 산 다음 쇠고기를 파는 곳으로 이동했다. 인구 1만 5천 명 정도의 소읍인 풍기를 인삼과 도너츠, 쇠고기, 인견 등을 사기 위해 이동하다 보니 모두가 같은 곳을 몇 번씩 도는 것 같다며 투덜댄다.
하기야 바닥이 좁은 곳이니 그럴 수밖에, 인견을 살 때도 3곳의 매장을 순례했는데 앞전 매장에 만나 사람을 다시 만나기 일쑤였다.
쇠고기를 사기위해 자친(慈親)과 늘 다니던 성내리 영주소백산한우집으로 갔다. 주인장과 인사를 나누고 차를 한잔 마시면서 각자 2근씩 구이와 국거리를 샀다. 서울로 가는 길이라 얼음포장을 부탁하여 시원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었다.
이번에는 최고의 여름옷이라 불리는 풍기인견을 사기 위해 이동한다. 이미 여름이 거의 다 지나가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기운을 느끼지만, 아직 여름이라 필요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풍기에서만 살 수 있는 인견이기에 모두들 좋아했다.
매장에 따라서 약간씩 디자인과 상품의 종류가 다른 관계로 우선 이불을 주로 파는 곳에 가서 까는 이불과 덮는 이불을 산 다음, 속옷과 남방, 원피스 등을 파는 곳으로 갔다. 속옷도 여러 개 사고, 원피스며 남방도 샀다. 또 다른 곳을 구경하고 싶어서 다른 곳도 가보았다.
디자인이 이쁜 곳도 있고, 실용성에 가격에 만족스러운 곳도 있다. 생각보다 싸지 않은 인견에 모두가 놀란다. 나는 풍기에서만 나는 특산품이고 여름이라 아무래도 비쌀 수밖에 없는 것 같다고 애써 설명했다.
그래도 모두가 만족을 하는 편이다. 서울에서는 좀처럼 구경하기 어렵고 인터넷으로 구매를 한다고 해도 색감이나 디자인은 직접 보는 것이 제일이기 때문이다.
인견을 사고서 잠시 차를 한잔 마시면서 매장 안에서 쉬다가 서울로 출발한다. 오후 6시를 조금 넘긴 시간이라 저녁식사를 하기는 일러 중간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어제 산 떡과 음료로 간단하게 하고 부족하면 다른 것으로 보충하는 것으로 하고 출발한다.
중앙고속도로 풍기 나들목을 들어서서 1시간 정도는 아주 편하게 나아갔지만, 원주를 지나 문막에 닿으니 차가 상당히 밀린다.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 어렵게 주차를 하고서 식사도 하고 세수도 하고 차도 한잔 마시면서 담소를 나누다가 지겹다는 생각이 들 정도가 들어 다시 출발을 한다.
너무 많이 쉬었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참을 쉬고 나니 피로도 풀리고 길도 어느 정도 숨통을 트고 있는 것 같다. 정말 다행스럽다. 중간 중간 약간씩 밀리기는 했지만, 서울까지 크게 정체되지 않고 4시간 만에 도착했다.
내일은 연우랑 영주에서 가져온 쇠고기로 국을 준비하고 생강 도너츠로 야식을 해야겠다. 즐거웠던 1박 2일의 영주, 봉화 여행이었다. 이제 늦더위는 조금 사그라들 것 같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