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엿보기
코끼리가 쏟아진다(창비)
이대흠
1994년 《창작과비평》으로 작품활동. 조태일문학상, 현대시동인상, 애지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등 수상. 시집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상처가 나를 살린다』, 『물속의 불』, 『귀가 서럽다』,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등.
------------------------------------------------------------
이대흠은 새 시집 『코끼리가 쏟아진다』에서 이 시간과 감정의 역전적 순환을 “미래를 추억하는 방법”(「미래를 추억하는 방법」)으로 다시 애틋하게 명명하면서 이 방법을 하나의 명제로 부조부조해낸다. “흐려지면서 또렷해지고/지워지면서 선명해지는 기술”(「그리움의 탈색 현상에 대한 연구」)이라는 구절이 태어난 연유이다. 이 명제는 ‘사라짐’이 오히려 ‘나타남’의 원리이자 문법임을 또렷이 환기한다. 이 역설의 기술을 취한다는 것은 언젠가 잃어버린 ‘당신’의 목소리와 감춰진 낯빛을 살뜰하게 찾아내는 ‘환대’의 윤리를 시의 율법으로 삼겠다는 욕망이자 의지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시인은 어떤 시에서 “나는 당신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나는 당신의 내용에 포함되지 않습니다」)라고 토로한다. 이는 당혹스럽게도 ‘당신’을 향한 열띤 그리움과 순정의 만남, 곧 ‘혼대’의 실천이 실패로 끝났음을 고백하는 말처럼 느껴진다. 시인은 그 까닭은 자아가 ‘당신’인 “꽃을 위해” 속절없이 “푸르기만 했던 잎”(같은 시)에 불과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 말은 ‘환대’의 실패를 자인하는 회한의 말에 불과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은 ‘당신’을 향한 그리움이 ‘나’만의 독단적 정서나 자기 배반의 부정적 감정으로 돌변하지 않도록 자신을 경계하고 성찰하는 태도에서 충분히 확인된다. 예컨대 시인은 자기 부재를 확증하기에 앞서 “서둘러 사하지지 않을 것이이/젖은 마음 있으면/널어”도 괜찮다는 사랑과 희생의 “들숨 날숨”(「정취암에서」)을 깊이 호흡하고 있다. 이 내면의 정황이 『코끼리가 쏟아진다』를 일관되게 관통하는 핵심 감각의 하나임은 다음 시에서 여지없이 드러난다.
당신의 입에서는 말없음이 쏟아집니다 침묵의 폭설입니다 나는 당신의 망설임에 갇혀 고드름처럼 얼어갑니다 당신의 말은 여백만 새긴 시입니다 풍경을 감춘 말의 뒤편을 그려봅니다 당신의 말에는 색깔이 없고 형태가 없고 맛이 없습니다 닫힌 당신을 열고 싶지만 부서질 것만 같아서 나는 기다립니다
당신의 망설임이 당신을 다 감추지 못할 때면 당신의 망설임에서는 살구꽃 향기가 날 것입니다 아직------이라는 당신의 입술에서 꽃잎이 흩날립니다
-「당신의 망설임에서는 살구꽃 향기가 납니다」 부분
영원한 사랑과 그리움의 대상인 ‘당신’은 달콤한 밀어密語를 희원하는 ‘나’에게 침묵과 망설임, 여백만을 들려주는 “말줄임표의 눈송이”, 아니 “침묵의 폭설”이다. 그런 까닭에 “당신의 망설임”에서 “살구꽃 향기”가 난다는 ‘나’의 감각은 허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망설임이 당신을 다 감추지 못할 때”라는 제한적 조건을 붙여둘 수밖에 없었던 것이리라. 이쯤에서 ‘당신’을 향한 ‘나’의 소망이 그 어떤 비통과 슬픔도 깨끗하게 가셔낸 황홀한 연애의 기술이라는 믿음을 접어두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시인이 감출 수 없는 ‘당신’의 비통한 실존적 삶의 예로 “생의 가장 힘든 골목”과 “시간을 구부려 꽃을 만들어본 사람”(「당신에게 골목의 오후를 드리겠습니다」)을 지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나’의 진정한 관심이 ‘당신’의 좌절과 실패, 그래서 자꾸만 쌓여가는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이력과 그에 대한 관찰에 맞춰져 있음을 뜻한다. 이를 감안한다면 “살구꽃 향기”를 흩날리는 타자의 변두리 삶, 곧 ‘주변성’에 대한 관심은 다음과 같은 지점을 gif할 수밖에 없을 듯 하다. 사랑하는 ‘당신’을 억압하고 은폐 하는 끔찍한 현실에 대한 의혹을 잠시라도 멈추지 않는 행동이 그것이다. 이 지점에 『코끼리가 쏟아진다』가 ‘당신’을 숱하게 호명하고 예의 바른 높임말로 빛나게 짜여 있음에도, 말해지지도 살펴지지도 않는 그늘진 ‘당신’의 음성과 표정에 대한 연민과 애달픔이 거세게 출렁거리는 까닭이 숨어 있다.
-최현식(문학평론가), 시집해설 「‘그리움’을 탈색하고 환대한다는 것」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