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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명만 거치면
1978년 데뷔해 많은 할리우드 영화에서 비중 있는 배역을 맡아 온 케빈 베이컨은
'케빈 베이컨 6단계 법칙' 으로 더 유명하다. 이 법칙은 미국의 어떤 배우라도 같은
영화에 출연한 배우끼리 관계를 따지다 보면 평균 6단계 만에 베이컨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한때 미국에서는 배우들이 케빈 베이컨과 몇 단계 만에 연결되는지 찾는
게임이 유행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영화배우 출신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은 베이컨과 연기한 적이
없지만 에디 앨버트라는 배우를 통해 두 단계 만에 연결됐다. 앨버트가 영화 <젊은
의사들> 에서 레이건과 함께 연기했고, <할리우드의 출세기> 에서는 베이컨과 연기
했기 때문이다. 이 법칙에 따르면 우리는 여섯 단계만 거치면 이 세상의 누구와도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다.
이 가설은 마이크로소프트의 에릭 호비츠가 발표한 연구로 더 눈길을 끌었다. 그는
자사의 인터넷 메신저 사용자 1억 8천만 명이 2006년 6월 한 달간 주고받은 대화
기록을 조사한 결과, 무작위로 추출한 한 쌍의 사람들이 평균 6,6단계를 거치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 중에는 최대 29단계를 거쳐야만 연결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전체의 78%가
7단계 이내에서 연결된 것이다. 이 연구 결과에 대해 에릭 호비츠는 "우리가 서로
정말 가깝다는 막연한 느낌이 실제로 전 인류에 적용되는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다. 어쩌면 우리는 모두 보이지 않는 인연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다시 살린 용기
1974년 10월 30일, 24세에 40연승 무패 행진을 달리던 조지 포먼이 도전자
무하마드 알리에게 KO로 패했다. 그로 인해 권투 선수로는 나이가 많았던
32세의 무하마드 알리는 권투 역사상 전설적인 승자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포먼은 그날의 충격과 계속된 패배로 결국 28세에 은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포먼이 1994년 44세의 나이로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놀란 사람
들은 노장 포먼이 다시 챔피언에 도전하게 된 과정을 듣고 감동했다.
권투계를 떠나 목사가 된 그는 많은 흑인 청소년들이 범죄에 빠져드는 것을
보고 체육관을 만들어 문제 청소년들에게 개방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운영
비는 바닥났고 체육관 문을 닫아야 했다. 그렇게 되면 갈 곳 없는 청소년들이
다시 범죄에 빠질 게 뻔했다. 그는 다시 링으로 돌아갈 결심을 했다. 38세의
자신이 성공적으로 재기한다면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
이다. 마침내 20kg의 과체충을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체육위원회는 그의 나이를
문제 삼아 경기의 승인을 거부했다. 포먼은 말했다.
"내가 재기하려는 이유는 '생명, 자유, 행복' 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바라
보는 청소년들에게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그는 때로 패배도 맛 봤지만 상대를 하나하나 쓰러뜨렸다.
그리고 마침내 20년 전 알리와의 시합에서 입었던 트렁크를 입고, 당시 챔피언
이던 무어러와 싸워 이겼다. 그의 승리보다 중요한 것은 패배를 두려워하지 않고
돌아온 용기일 것이다.
실수에 주목하라
사람들은 실수를 감추고 싶어 한다. 실수란 성공을 그르치는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수 속에서 빛나는 성공의 열쇠를 찾은 사람이 있다. '케빈
함' 이라는 한국계 이민 2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무언가를 검색할 때 주로 검색엔진을 이용하지만 때로 도메인을
주소 창에 입력하여 찾기도 한다. 케빈 함은 사람들이 최상위 도메인인 '.com' 을 입력
하다가 실수로 '.cm' 을 적는다는 사실을 포착했다. 그는 '.cm' 으로 끝나는 모든 도메인
을 자신이 만든 사이트로 연결되도록 만들고, 이 사이트에 관련된 광고를 유치했다. 예를
들어 'beer.cm' 도 메인을 입력하면 그가 만든 웹페이지로 연결되고, 그곳에 각종 맥주
관련 사이트나 광고를 띄워 사람들의 클릭을 유도하는 방식이다.
그는 이 같은 독특한 아이디어를 실현하기 위해 카메룬 정부와 접촉했다. '.cm' 은
카메룬 정부가 관리하는 국가 최상위 도메인이기 때문이다. 그는 카메룬 총리와 만나
일정 금액을 카메룬 정부에 지불하는 조건으로 도메인 사용을 허락받았다. 그는 '.co'
나 'om' 등의 도메인을 얻기 위해 콜롬비아와 오만 정부와도 접촉하고 있다.
사람들이 무심코 흘려버리는 작은 실수를 눈여겨본 그의 예리한 눈은 평범했던 한
청년을 약 30만 개의 도메인을 소유한 인터넷 거물로 만들었다. 내가 나의 실수를 탓하는
동안 누군가는 그것을 성공의 발판으로 삼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푸른 연꽃
사막, 극지방, 우주를 탐험하며 고대문명과 현대과학에 이르는 방대한 지식을
담은 만화 <땡땡의 모험>은 전 세계인의 필독 만화다. <땡땡의 모험>을 그린
벨기에의 만화가 에르제는 1981년 3월 19일, 45년 전 헤어진 중국인 친구 장충인
과 손을 맞잡고 "그립고 또 그립던 장, 지금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아는가" 라며
눈물을 글썽였다.
48년 전 에르제는 중국에 관한 만화를 그리면서 매주 일요일 오후 중국인 유학생
장충인으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동갑내기였던 그들은 오래지 않아 좋은 친구가
되었으며 함께 <푸른 연꽃>이라는 작품을 탄생시켰다. 중국의 건물이나 골목, 한자
등은 미술학도인 장충인이 그리고 써 주었다. 또 장충인은 2년 동안 벨기에에서
지내며 벨기에 사람들이 중국에 대해 무지하거나 편견이 많은 걸 발견하고 만화
속에서 바로잡고자 애썼다. 고마운 장충인을 위해 에르제는 만화 속 주인공의
중국인 친구를 '장' 이라 이름 붙였고, 배경 그림 간판 곳곳에 '충인' 이란 글자를
교묘하게 숨겨 두었다.
1935년 장충인이 중국으로 돌아가면서 두 친구는 헤어졌다. 그 뒤 2차 대전이
일어나고 중국이 공산국가가 되면서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에르제는 벨기에의
호텔마다 찾아다니며 중국인을 만나면 '장충인' 을 아느냐고 물었고, 마침내
1976년 오빠의 친구 이름이 '장충인' 이라는 중국인 여성을 만났다. 그렇게 해서
1981년, 28세살의 젊은 청년들은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이 되어 다시 만났다.
1983년 세상을 떠난 에르제는 "장과의 만남은 단순한 즐거움만 주던 내 만화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한 전환점이 되었다. 철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사실에
바탕을 둔 만화를 그리게 된 것이다" 라고 말했다.
상처 대신 희망을
"우리는 철모에 담긴 말이었다. 병사들이 가느다란 흠에 끼인 밀알처럼 겨우
몇 명만 남았을 때, 신병들로 또다시 보충되었다. 그렇게 철모는 수차례 채워
졌고 맷돌 아래서 사라져 갔다. V와 나는 최후의 생존자였다. 그는 매일 저녁
나처럼 전쟁을 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는 테라스에 앉아서, 고요히 흐르는
푸른 강을 바라보아야만 했다. 그러나 나처럼, 살아남은 다른 사람들처럼 견뎌
내야 했다."
프랑스의 소설가 장 지오노가 마흔에 쓴 글이다. 1차 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자원입대했다. 그러나 최초의 학살을 목격한 순간, 전쟁의 참혹함과 비인간성을
깨달았다. 순수한 영혼을 가진 구두수선공 아버지에 의헤 다듬어진 그의 마음은
전쟁에 동의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물쇠를 잠근 총을 들고 전장을 누볐다.
다리가 후들거리는 공포 속에서도 부모님에게 편지를 쓸 때면 자신의 고통을
말하지 않았다. 인간적 뿌리를 상기시켜 주는 유일한 존재가 바로 부모님이
었고, 그런 두 분을 안심시키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친구들이 죽는 것을 보았고, 독가스에 노출되어 두 눈을
다쳤지만 4년 만에 전쟁이 끝나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상처 입은
그의 마음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의 사상과 글은 전쟁과 자본주의,
산업문명에 반대했다. 소설 <나무를 심은 사람>도 지오노의 상처 입은 몸과
마음에서 나왔다. 그러자 지오노는 상처를 숨기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전쟁터
한복판에서 인간적 뿌리를 상기시켜 준 부모에게 편지를 쓰듯이.
왜 나인지 묻지 않겠다
1960년대 미국의 버지니아 주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곳으로 흑인은
테니스조차 칠 수 없게 법으로 정해 놓았다. 그런 곳에서 가난한 경비원의
이들로 태어난 아서 애쉬는 메이저 테니스 대회에서 최초로 우승한 흑인
남성이다. 그는 1968년 US오픈, 1970년 호주오픈에서 우승했고, 1968년과
1975년엔 세계 랭킹 1위를 차지하며 전설적인 테니스 선수가 되었다.
하지만 1979년 심장 질환으로 그는 선수생활을 마감해야 했다. 은퇴 후에는
테니스 코치와 방송 해설자로 활동했다. 그리고 동등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는 흑인들과 빈곤층 어린이를 위한 인권운동가, 자선 사업가로 더
활발하게 일했다.
그러나 1990년 그는 몇 년 전 심장 수술 때 받은 수혈로 자신이 에이즈에
감염되었음을 알았다. 그 후 애쉬는 더 열심히 사회봉사 활동에 뛰어들었다.
집에 가만히 앉아 죽음을 생각하기보다 불우한 이웃을 위해 활동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1993년 그가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뉴스 앵커조차 그의 죽음을 전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는 가장 인간적인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애쉬가 에이즈와 싸울 때 누군가 "왜 신은 당신에게 그렇게 무서운 질병을
주었을까요. 하늘이 원망스럽습니다." 라고 말하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들었을 때 '왜 나지?' 라고 절대 묻지 않았
습니다. 마찬가지로 내 죽음에 대해서도 '왜 나지?' 라고 묻지 않겠습니다.
내 고통에 대해 '왜 나야?' 라고 묻는다면 내가 받은 은총에 대해서도 '왜
나야?' 라고 물어야 합니다."
잘못을 바로잡은 청지기
이은은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어느 날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며
창릉에 갔다가 돌아온 날이었다. 먼 길을 다녀오느라 허기가 진 이은은 관청의
아전에게 다과상을 차려 오라고 명했다. 그러나 아전이 이를 거절했다. 이에
잔뜩 화가 난 이은은 그 아전을 해임시켰다. 그러고는 자기 집에서 청지기를
한던 김완철을 아전 자리에 앉혔다.
얼결에 아전이 된 김완철은 관청 사람들에게 왜 예전의 아전이 일을 그만두었
는지 자초지정을 물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아전은 잘못이 전혀 없었다. 당시
관청에는 '반과법(飯果法)'이라는 법규가 있는데, 정승이 외출할 때면 반드시
음식상을 차려 바치고 그 이후에는 음식상을 차리지 않도록 돼 있었다.
김완철은 이은에게 아전 자리를 내놓겠다고 말했다. 뜻밖의 반응에 당황한
이은은 무슨 일로 그러느냐고 물었다. 김완철은 이렇게 대답했다.
"외출할 때 음식상을 받고 나가신 대감은 법규를 어기면서까지 음식상을 또
차려 오라고 명하셨지요. 그 명을 거절한 것은 아전이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대감은 평소 아전을 아랫사람이라고 업신여겼기에,
대감의 명에 따르지 않았다고 그를 해임시켰습니다. 높은 자리에 오른 대감
꼐서 법규를 어기고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며 백성을 속이는데, 제가 대감 밑
에서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김완철의 그 말을 듣고서야 자기 잘못을 알게 된 이은. 결국 그는 뒤늦게
잘못을 인정하며 해임시킨 아전에게 사과하고 그를 복직시켰다.
늦잠 버릇을 고친 경쟁의식
<베르디>, <바르바라>, <베르나데트의 노래>를 쓴 독일 출신의 유대인
작가 프란츠 베르펠은 표현주의의 대표적 작가이자 독톡한 종교적 경지를
표현해 세계적 문호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대작가로 성공하기 전 베르펠
에게는 큰 단점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한 번 잠이 들면 도통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낮잠을 자는 것이었다.
그가 젊은 시절 베를린에 머물 때였다. 자신의 약점을 잘 아는 베르펠은
잠들기 전에 늘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아침 일찍 깨워 달라고 부탁했다. 아주
머니는 온갖 방법을 동원해 잠자는 그를 깨웠지만 어떠한 것도 통하지 않았다.
하루는 이를 보다 못한 아주머니가 묘책을 떠올렸다. 하숙집에는 당시 유명한
서정 시인 하이젠그라파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베르펠은 평소 그에게 라아벌
의식을 갖고 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베르펠의 귀에 대고 이렇게 외쳤다.
"베르펠씨, 빨리 일어나세요. 옆방의 하이젠그라파씨는 벌써 일어나 시를
세 편이나 쓰셨답니다."
그러자 아무리 깨워도 일어나지 못했던 베르펠이 갑자기 눈을 번쩍 떴다. 그리
고는 얼른 책상 앞으로 뛰어갔다. 그 뒤 아주머니는 베르펠이 일어나지 않을 때마다
하이젠그라파의 이름을 들먹였고 베르펠은 늦잠 버릇을 고치게 되었다.
남보다 더 잘 하겠다는 경쟁의식은 때론 스스로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밑거름이
된다.
마음의 병을 고치는 의사
서른이 갓 넘은 한 젊은이가 자선 학교를 열어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들을 모아
기르며 공부를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추운 겨울날, 말썽도 가장 많이 피우고
성격도 거친 한 소년이 없어졌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소년을 애타게 찾는
그를 보고 동네 사람들은 도둑질이나 하고 말썽만 잔뜩 일으킬 아이를 찾아서
무엇하냐며 오히려 혀를 찼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자 마을 사람들도 하나 둘 그를 도와 소년을 찾기 시작했고
결국 마을의 낡은 창고에서 마른 풀 더미에 웅크리고 잠든 소년을 발견했다.
젊은이는 외투를 벗어 소년의 몸에 덮어 주고, 소년을 껴안았다.
그러자 따뜻한 온기를 느낀 소년은 그의 가슴으로 파고 들면서 "엄마..." 하고
잠꼬대를 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에게
젊은이는 소년이 잠에서 깨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기 전, 어린 저는 아버지는 의사이면서 왜 아버지의
병은 못 고치내고 투정을 부렸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그래, 나는 온 스위스 사람
들의 병을 고쳐 주려고 생각하였단다. 그러나 사람의 몸을 아프게 하는 병보다는
사람의 마음을 괴롭히는 마음의 병을 고치는 사람이 되었더라면 더 좋을 뻔 하였
다. 아들아, 너는 이 다음에 사람들의 마음의 병을 고쳐 주는 의사가 되어라' 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아버지가 말씀하신 마음의 병을 고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
지만 저는 이 소년의 마음을 사랑으로 고치려고 합니다."
그 뒤 자선학교로 다시 돌아온 소년은 누구보다도 착한 아이가 되었다. 사람의
힘으로 소년을 구했던 그 젊은이가 바로 훗날 가난한 아이들과 고아의 아버지로
불린 페스탈로치이다.
명연주의 비결
피아니스트 시기스몬드 탈베르그는 뛰어난 소질 외에도 엄격한 훈련으로
세계적인 명연주가가 되었다.어느 날 탈베르그에게 대규모 음악회에 출연해
달라는 의뢰가 들어왔다. 그 음악회는 연주자라면 한 번쯤은 꼭 서 보고 싶어하는
음악회였는데, 탈베르그 역시 언젠가는 그 음악회 무대에 서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하지만 탈베르그는 한마디로 거절했다.
"지금까지 이 음악회 무대에 서기를 거절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왜 거절하시는 겁니까?"
주최측 관계자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묻자 탈베르그가 말했다.
"나도 물론 그 음악회에서 신곡을 연주하고 싶지만 그날까지 연습을 끝마칠 수가
없기 때문에 사양하는 겁니다."
"그 동안 내가 만나온 음악가들은 대부분 삼사 일이면 연습하기에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같은 분이 하실 수 없다니요."
그러자 탈베르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적어도 1,500번 이상 연습합니다. 연습이 부족하면
출연하지 않습니다. 하루에 50번씩 연습한다 하더라도 한 달은 걸립니다. 아무리
우수한 연주가도 연습하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이길 수 없습니다. 언젠가는 실력이
바닥나게 마련이지요. 내 연주의 비결은 재능이 아니라 끊임없는 연습의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찌 내가 연습을 줄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때까지 기다려 주신다면
기쁘게 승낙하겠지만 만약 그럴 수 없다면 거절할 수 밖에 없습니다."
최후의 만찬
<최후의 만찬>을 그리던 무렵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극도로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가 그를 방문했다. 오랜만에 만나는 고향 친구였지만 새
작품에 골몰해 있던 터라 그는 반가움보다 부담감이 앞섰다.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얘기를 나누었는데 우연히 친구가 그의 그림에 관해 몇 가지
충고를 했다.
그런데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 터라 신경이 곤두서 있던 그는 친구의 말이
마음에 거슬렸다. 그는 몹시 화를 냈으며 마음이 상한 친구는 얼굴을 붉히며
가버렸다.
친구가 나가 버리자 그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캔버스로 다가섰지만 웬일인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아무리 예수의 얼굴을 그리려고 해도 잘 되지 않았다.
"왜 이런 거야? 도대체 집중이 되지 않으니."
그는 마침내 붓을 집어 던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그림이잘 그려지지
않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때 그의 머리 속에 얼굴을 붉히며 나가버린
친구가 떠올랐다.
'아 그랬구나. 왜 그림이 안 되는지 이제 알 것 같다. 마음이 이렇듯 선하지 못한데
어떻게 예수의 얼굴을 그린단 말인가.'
그는 즉시 옷을 챙겨 입고, 친구가 머무르고 있는 곳을 찾아갔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친구도 환한 얼굴로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친구에게 사과를 하고 돌아온 그날 밤 다빈치는 비로소 예수의 성스러운 얼굴을
완성할 수 있었다.
학문적 양심보다 소중한 것
추사 김정희 이래 최고의 서예가로 꼽히는 소전 손재형. 그는 일본이나 중국의
서법에서 탈피한 독창적 서체를 개발함은 물론 특히 옛 선인들의 글씨와 그림에
식견이 뛰어났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재형의 짧은 감상을 적은 '관기'가 붙어 있는
글과 그림은 진품으로 믿고 거래했다.
어느 날 구도도 엉성하고 낙관조차 재대로 찍히지 않은 작품에 손재형의 관기가
붙어 있는 것이 발견돼 미술계가 떠들썩해졌다. 그런데 그 뒤로도 같은 일이 빈번히
발생해 소란이 끊이지 않자 그의 제자들이 손재형을 찾아갔다.
"선생님 요즘 추사, 겸재, 혜원, 단원의 작품이라고 나돌고 있는 가짜 그림을
보셨습니까? 한눈에 봐도 졸작인데 선생님의 관기를 달고 버젓이 진품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꼐서 정말로 그것에 관기를 써 주셨는지요?"
소전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암, 그랬지."
"가짜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셨을 텐데, 왜 그런 일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의 원망에 소전은 잠시 침묵한 뒤 입을 열었다.
"전쟁 때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모두들 고생이 참 많았지. 다급했던 사람들이
내게 그림을 들고 와서 관기를 써 달라고 애원하더군. 그 그림을 팔아 굶고 있는
식구들에게 밥 한 그릇이라도 먹이고 싶다고 말이야. 어떤가? 자네들은 학문적
양심을 지켜야 한다며 굻주린 그들을 모른 척 할 수 있겠는가?"
소전의 말에 제자들은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하고 조용히 고개를 떨구었다.
버려질 뻔한 명화
근대 회화의 아버지로 불리는 세잔은 처음에 법과대학에 들어갔다가 죽마고우인
에밀 졸라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그림을 그려 온 화가들도
버티기 어려운 미술계에서 스물두 살 늦은 나이에 그림을 시작한 세잔은 미술학교
입학시험에 낙방하는 등 많은 시련을 겪었다.
어느 날 세잔은 열심히 그림을 그리다가 붓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자 홧김에
그리던 그림을 아무렇게나 구겨 휴지통 속으로 던져 버렸다. 그리고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머리를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며칠 뒤 다시 붓을 들었지만 이번에도 그림은 휴지통 속으로 던져졌다. 한동안 그는
이렇게 그리던 그림을 구겨 내동댕이치는 것을 반복했다.
'아, 내 그림 그리는 재능이 이것밖에 안 되는 걸까?'
어느 날 그는 이런 생각에 괴로워하며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연히 아내가 무엇인가를 소중하게 매만지는 모습을 보았다. 조용히 다가가
살펴보니 아내는 방금 전에 그가 구겨 버린 그림을 정성스럽게 펴서 벽장 속에 넣는
것이 아닌가.
세잔은 아내가 밖으로 나간 뒤 벽장을 열어 보았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자신이
휴지통에 버렸던 그림들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는 새로운 희망을 느끼며 얼른
그 그림들을 들고 화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것들을 수정해 작품을 완성했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난 작품이 바로 세계의 명작으로 손꼽히는 <목욕하는 여인들>,
<전원 풍경>이다.
용서는 생명을 구하는 일
아프리카 어느 부족 마을에서 한 청년이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이 충격적인
사건으로 온 마을이 벌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어수선해졌다.
며칠 뒤 청년의 친구가 자수를 했다. 말다툼 끝에 힘껏 밀었는데, 그만 죽어
버렸다는 것이다. 아들을 잃은 부모는 분노에 휩싸여 살인범을 결코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복사하고 말겠다고 외쳤다. 그러나 마을의 독특한 풍습에 따라
재판은 1년 뒤에 할 수 있었다.
세상을 떠난 청년의 가족은 1년 상을 치르는 날 강가로 나갔다. 곧 친구를
죽게 만든 청년도 마을 사람들에 의해 끌려나왔다. 부족장이 재판을 시작하
겠다고 선언하자 마을 사람들은 청년이 전혀 움직일 수 없도옥 온몸을 꽁꽁
묶어 강물 속으로 던졌다.
부족장이 유족들에게 말했다.
"자, 이 사건의 판결을 내려주시오."
부족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족들은 강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꽁꽁
묶여 바닥으로 가라앉은 청년을 끌어올렸다. 유족들은 힘을 합쳐 청년을 강가로
밀어올리고 자신들의 손으로 오랏줄을 풀어주었다. 마침내 유족들이 청년의 생명을
구하는 것으로 재판은 끝이 났다. 1년 전 유족들이 청년에게 가졌던 복수심도 함께
사라졌다.
이 부족의 재판은 청년을 강물 속에서 죽게 내버려두거나 건져서 생명을 구하는
것 모두 유족의 선택임을 보여준다. 죽게 놓아두면 정의는 실현되겠지만 유족들은
오히려 평생 슬픔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청년을 지켜
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노를 버리고 청년을 구해주면 그들이 베푼 자비가
슬픔을 거두어 간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누구나 복수를 원하게 된다. 하지만 분노와 슬픔을 잊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다.
계포가 약속을 지키다
'계포일낙(季布一諾)' 이라는 말은 한 번 약속하면 반드시 지킨다는 뜻이다. 이 말은
중국 초나라 사람인 계포에게서 유래됐다. 계포에게는 계심과 장공이라는 두 동생이
있었다. 계심은 힘이 장사였고, 장공은 머리가 뛰어나 동네 사람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게포는 두 동생에 비해 내세울 것이 별로 없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계포는
주눅들지 않고, '비록 타고난 힘과 지혜는 없지만 나도 노력하면 남보다 나은 장점을
가질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계포가 소리쳤다.
"그렇다! 약속을 지키자. 이제부터 한 번 입 밖에 내어 약속한 것은 꼭 지키는 사람이
되자."
그 뒤 계포는 아무리 사소한 약속이라도 승낙한 것은 끝까지 지켰다. 어느 날은 친구들이
"계포, 마을 앞에 있는 호수를 헤엄쳐 건널 수 있겠어?" 하고 묻자 계포는 당연히 건널
수 있다고 하면서 내일 만나자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틑날 비바람이 몰아쳐 약속 장소에 나온 사람은 계포뿐이었다. 그날 저녁 계포를
찾아 친구들이 호숫가로 달려갔을 때 그는 비에 흠뻑 젖어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다. 그걸
목격한 친구들은 계포를 약속 잘 지키는 용감한 사람으로 여겼고 그 이야기는 온 동네로,
온 나라로 퍼져나갔다.
항우와 유방이 천하를 다툴 때 계포는 항우의 부장으로 싸웠다. 그러나 항우가 마지막
싸움에서 패하고 쫓기는 몸이 되자, 유방은 현상금 천금을 걸어 계포를 수배하고 그를 숨겨
주는 사람이 있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 하나 고발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를 유방에게 천거하기까지 했다.
마침내 계포는 유방의 조정에서 벼슬을 하면서 의로운 일에 힘썼고 모든 이의 신임을 받게
되었다. 그 뒤 '황금 100근을 얻는 것보다 계포의 한 마디 약속을 듣는 것이 더 낫다' 라는
말이 유행했다.
내 입만 입인감?
고 김남주 시인이 경찰을 피해 산속 절을 찾아갈 때를 회상하며 쓴 수필이다.
[노인은 이곳에 사는 산지기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거의 30여 년 동안
'낼모레 저승사자가 잡아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할망구' 와 함께 산속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 산지기 노인이 심고 있는 나무는 감나무였다.
"할아버지, 따 먹을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이런 산중에다 감나무는 뭣 하려고
심어요?"
"내 입만 입인감? 아무라도 와서 따 먹으면 그만이제."
나무라는 듯한 노인의 대꾸에 나는 여간 부끄러운 게 아니었다. 내깐에는
사람들이 협동하여 한 해의 노동을 끝내고 콩알 하나라도 수확한 것이 있으면
둘로 쪼개 나눠 가지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 왔는데, 그런 내가 노인의 생각에도
미치지 못하는 질문을 해 설익은 내 속을 내비친 것 같아서였다.
원래 이곳에는 십여 년 넘게 자란 감나무가 네댓 그루 있었다. 그래서 절을
찾는 사람들이 고개를 넘기 전에 여기서 잠시 쉬면서 감 몇 개씩을 따 먹곤
했는데, 노인에게는 그게 그렇게 모양이 좋을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런데
지난 겨울에 혹독한 추위를 만나 그 나무들이 모두 얼어 죽어 버렸다.
노인은 다시 감나무를 심을 양으로 호미를 잡았다. 나는 노인의 허락을 묻지
도 않고 괭이를 집어 들고 구덩이를 파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오랜만에 하는
육체노동이었다.
가을을 끝낸 들녘에서/ 감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때/ 그때 사람 사이 좋은
사이/ 그때 우리 사이 아름다운 사이.
이 따위 생각을 떠올리며 노인과 헤어져 절을 찾아 고개를 넘었다]
휘슬러의 깨달음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러시아에서 보내고 워싱턴에서
그림을 공부한 제임스 휘슬러. 그는 사실주의를 추구하면서도 마네,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리면서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을 개척해 나갔다. 그래서
때로는 사람들이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해 엉뚱한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1877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고 <불꽃>을 선보였을 때 러스킨이 그의 작품에
대해 혹평을 늘어놓았다. 그는 이에 격분해 소송을 걸어 승리했지만 대중들은
난해한 그림을 그리는 휘슬러에게 오히려 등을 돌렸다.
작가 마크 트웨인과 있었던 일이다. 평소 휘슬러와 친분이 두터웠던 트웨인이
어느 날 그의 화실에 놀러 왔다. 휘슬러는 트웨인에게 차를 대접하기 위해 화실
한편에 있는 스토브에 주전자를 올리고 있었다.
그때 트웨인은 이상한 그림을 발견하고 그림에 다가갔다. 그리고는 물감이 채
마르지도 않은 작품을 손으로 만지려고 했다. 깜짝 놀란 휘슬러가 얼른 달려와
트웨인 앞을 막아섰다. 그러자 트웨인은 고마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참 배려도 깊군, 하지만 괜찮아, 나 장갑 꼈어."
휘슬러는 트웨인의 말에 깜짝 놀랐다. 그는 채 마르지도 않은 자신의 작품을
행여 망치지나 않을까 뛰어들었던 것인데, 트웨인은 자기 손에 물감이 묻을까
그가 걱정해서 뛰어온 줄 알았던 것이다.
휘슬러는 그제야 같은 사물을 두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생각을 품을 수 있
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작품도 그렇게 자신의 의도와 다르게 비쳐
질 수 있다는 사실도, 그 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섭섭함을 덜 수 있었다.
흔들리는 샹들리에
이탈리아의 과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태양중심설, 종교학자의 무지를
비판하는 책을 출간해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가택연금 상태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피사대학 의학부 학생이던 19세 때였다. 수업 과목 가운데 하나인
성당 미사에 참석한 그는 지루해져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샹들리에를 구경하다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흘린 듯이 샹들리에만 계속
관찰했다. 샹들리에는 바람에 따라 큰 폭으로 흔들리기도 하고 작은 폭으로
흔들리기도 했다. 그런데 그 폭이 크든 작든 간에 왕복 시간에는 차이가 없는
것 같았다. 시계를 가져오지 않은 그는 의대생답게 자신의 맥박을 짚어서 그
왕복 시간이 똑같다는 것을 측정했다.
그는 미사가 끝나자마자 정신없이 자기 방으로 뛰어갔다. 각종 물체를 끈에
매달아 흔들어 보는 실험을 밤새 계속했다. 그리하여 추를 매단 끈의 길이가
같다면 추의 크기나 진폭에 상관없이 1회 왕복 시간은 일정하다는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발견하고 수식으로 정리해 냈다. 해시계, 물시계, 모래시계
에서 톱니바퀴와 추를 이용한 오늘날의 시계로 발전한 것은 갈릴레이의 '등
시성의 원리' 덕분이다.
갈릴레이는 자연 세계가 수학으로 표시될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여 준 과학
자다. 기존의 모든 이론과 상식을 의심했던 과학자 갈릴레오는 중세 최대의
물리학자이며 근대 과학의 창시자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것은 19세의 젊은
나이에 흔들리는 샹들리에도 그냥 지나치지 않은 관찰력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책 읽는 값
단재 신채호는 역사학자, 언론인으로 살며 1936년 여순 감옥에서 옥사할
때가지 조선의 독립이라는 한 가지 목표만을 위해 흐트러짐 없이 살았다.
1910년 그가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 <대한매일신보> 에서 주필로 일할 때
의 일이다, 신문사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면 종로의 고서점 거리를 ㄷ
자 모양으로 순례했다. 그러나 책을 살 형편이 안 됐던 그는 고서점마다
들러서 읽기만 했다. 그러니 고서점 주인들은 그를 못마땅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다.
하루는 신채호가 월급 주머니를 서점 기둥의 못에 걸어 놓고 책을 읽었다.
읽고 싶은 부분을 다 본 그는 주머니를 그대로 둔 채 서점을 나가 버렸다.서점
주인은 신채호가 두고 간 주머니를 열어 보고 월급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늘
책을 읽기만 하고 사지 않는 신채호가 얄미워 돌려주지 않았다.
그런데 한 달이 지나도 신채호는 월급 주머니를 찾으러 오지 않았다. 오히려
서점 주인이 그를 불러 세워 돌려주지 못한 것이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어느 날 신채호가 그 서점을 들르자 주인은 반갑게 맞으며 주머니를 건넸다.
신채호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이 돈은 책 읽은 값으로 주인장에게 드린 것입니다."
그렇게 신채호는 부정기적으로 받은 월급을 평소 책을 읽기만 해서 미안했던
서점의 기둥에 일부러 걸어 두고 가곤 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서점에어 읽은
책들을 통해 '독립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쟁취하는 것이다' 라는 깨달음을
얻고 고조선과 묘청의 난 등 역사연구에 새로운 해석을 시도, 민족사관을 수립
했다.
그림 속의 눈동자
옛날 중국의 화가 중에 명화를 곧잘 베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명화를
가진 사람에게 그림을 빌려 그것을 똑같이 그린 다음 돌려줄 때는 원화
대신 자신이 몰래 베낀 가짜 그림을 되돌려 주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절에 갔다가 주지 스님의 방에 걸려 있는 그림 한 점을 보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스님, 그림의 구도가 너무 좋습니다. 며칠만 빌려 주시면 저 그림의
구도를 좀 배워보고 싶습니다."
스님이 승낙하자 그는 당장 그림을 가지고 집을 돌아온 뒤 며칠 동안
집안에만 틀어박혀 그림을 베끼기 시작했다.며칠 뒤 그는 다 그린 그림을
보녀 흐뭇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정말 똑같군. 점 하나 틀리지 않게 그렸으니 스님도 속아 넘어가시겠지?"
그런데 다음날 그가 내놓은 그림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던 스님이 갑자기
화를 버럭 내며 그에게 큰소리를 말했다.
"네 이놈, 내 진짜 그림은 어떻게 했느냐? 당장 내 그림을 가져오너라."
스님의 호통에 깜짝 놀란 그는 모든 사실을 털어놓은 뒤 쏜살같이 뛰어가
진짜 그림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는 스님에게 어떻게 그림이 가짜인 것을
알았느냐고 물었다.
"네 눈엔 소의 눈동자 속에 소를 끌고 가는 목동의 모습이 보이지 않더냐?"
스님의 말대로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았더니 과연 소의 눈동자에 소를 끌고
가는 목동의 모습이 있었다. 게다가 소를 끌고 가는 목동의 눈에도 소가 그려
져 있었다.
사람에 대한 믿음
백범 김구 선생이 상해 임시정부에 있을 때 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김구
선생이 그를 만나려고 하자 비서는, 일본에서 건너왔다는 그 젊은이는 독립
운동에 몸을 바치겠다고 떠들고 다니지만 일본말과 한국말을 섞어 쓰고 임시
정부을 가정부(假政府) 일본식으로 부르는 등 그의 말과 행동이 의심스럽다며
만류했다.
그러나 김수 선생은 젊은이를 만나기로 했다. 젊은이는 독립운동을 하려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가난과 병만 얻어 상해로 온 일이며, 오랜 일본 생활과
그곳에서 배운 일본어 때문에 자신이 처한 곤란한 사정을 이야기하고 당분간
만 거둬 달라고 부탁했다. 김구 선생은 젊은이의 남루한 옷차람 뒤에 숨겨진
사람됨을 한눈에 알아보고 당시로서는 큰돈인 천 원을 선뜻 내주며 생활을
돌보게 했다. 물론 차용증 같은 것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며, 오직 젊은이의
사람됨만을 담보로 잡은 셈이었다.
이 젊이이가 훗날 일왕을 저격하고 일본 형무소에서 순국한 이봉창이었는데,
일본으로 떠나기 전 이봉창은 "내 평생 나를 완전히 신임해준 분은 김구 선생
님뿐입니다. 그 분이 나를 그토록 믿어 주시는데, 내가 어찌 목숨인들 아낄 수
있겠습니까? 나는 그 분에게서 나라를 사랑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라며 생사를
알 수 없는 길을 떠나면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김구 선생은 이봉창에게 보여 준 신임을 많은 젊은이들에게도 베풀었는데,
같은 겨레를 믿는 일이 곧 또 다른 독립운동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 주었던 것
이다. 김구 선생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도리 중에 가장 으뜸인 것이
어질 '인(仁)'이며, 그 다음이 믿을 '신(信)' 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큰아들의
이름은 김인이라고 지었고, 둘째 아들은 김신이라고 지었다.
인생의 가르침이 담긴 편지
소설<장 크리스토프>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로맹 롤랑은 스무 살이
될 무렵 작가가 될 것을 결심했지만,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자신의 결심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누군가로부터 조언을 받고 싶었지만 마땅한 사람도
없었다. 그렇게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톨스토이의 소설을 읽고 난 롤랑은
다급하게 종이와 펜을 찾아 들고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톨스토이의 소설에 깊은 감명을 받은 그는 자신의 고민과 함께 인생의
교훈이 될 만한 가르침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 롤랑은 기대를 안고 톨스토이
에게 편지를 보내긴 했지만 답장이 오리라는 확신하지는 못했다. 톨스토이는
당시 대문호로서 전세계에 이름이 알려진 유명 작가였기 때문에 무명의
젊은이가 보낸 편지에 답장을 해줄 리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뜻박에도 답장이 왔다. 롤랑은 내용을 보기도 전에 대문호가
보여 준 겸손한 태도에 깊이 감동했다. 그래서 그날 이후로 자신에게 오는
어떤 편지에도 일일이 답장을 보낼 정도였다. 톨스토이가 보낸 답장에서
롤랑은 단 한 문장 때문에 작가가 되겠다는 자신의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그것은 "작가로서의 참다운 조건은 인류에 대한 사랑" 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작가가 된 뒤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을 반대하며 자신의 조국인
프랑스에게 전쟁을 그만둘 것을 외쳤다. 또 독일의 히틀러 내각이 자신에게
괴테상을 주려고 하자 자유를 억압하는 정부가 주는 상은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이렇듯 롤랑은 애국심보다는 인류애를 먼저 생각하고, 부당한 일에는 "모든
사람에게 반대하는 한 사람' 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한 통의 편지 떄문
이었다.
충성스럽고도 용맹한 정충신
조선 시대 무관인 정충신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갔다.
어느 날 권율 장군의 장계를 가지고 의주 행재소에 있는 병조판서 이항복을 찾아
갔다. 이항복은 정충신이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는 학문과 무예를 닦으라고 권유
했다. 이항복은 정충신을 집으로 데려가 <사서>까지 가르쳤고 정충신은 그해 가을
무과에 급제했다. 훗날 정충신은 이항복이 유배를 가자 함께 따라갈 정도로 아버지
처럼 모셨다. 이항복은 죽은 뒤에도 정충신은 3년 동안 상주처럼 생활했다.
정충신은 평안병사로 있을 때였다. 청나라와 우호조약을 맺어야 하는데, 청나라가
잔혹하고 사나운 오랑캐라고 소문이 나 있어서 사신으로 가려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정충신이 자진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청 태조는 조선 사신의 기를 완전히 꺽어
놓기 위해 오만한 태도로 정충신을 맞았다.
"너희 나라에 아무리 사람이 없기로서니 너같이 작은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단 말
이냐?"
"조선에서는 예의를 갖추는 나라에는 대인을 사신으로 보내지만 힘만 믿고 예의가
없는 나라에는 소인을 사신으로 보내고 있습니다."
청 태조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다시 물었다.
"조선에서는 나를 일러 도적이라고 한다던데 내가 무엇을 훔쳤다고 그렇게 말하느
냐?"
정충신은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천하를 훔치는 것보다 더 큰 도적이 어디 있다고 그리 말씀하십니까."
그 말을 들은 청 태조는 정충신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껄껄 웃었다. 그리고 그를 정중히
상석으로 모셔 크게 환대했다
가장 사랑해야 할 때
로레인 핸스베리의 원작 <태양 아래의 건포도>에는 잊지 못할 장면이 나온다. 미국
국적의 한 아프리카계 가족이 아버지 명의로 1만 달러에 달하는 생명보험금을 지급
받았다. 어머니는 이 유산으로 지겨웠던 할렘 빈민가를 벗어나 시골에 정원이 있는
집을 짓고 살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똑똑했던 딸은 그 돈으로 의과대학에 들어가겠
다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큰아들이 친구와 사업을 할 수 있도록 보험금을 자신에게 달라고 애원했다.
그는 사업으로 성공을 거두면 집안 형편이 더 좋아질 거라고 가족을 설득했다. 어머니는
내심 마음에 걸리면서도 결국 아들에게 그 돈을 건네주었다. 그러나 마른하늘에 날벼락
이라고, 동업을 하겠다던 아들의 친구가 돈을 챙겨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여동생은
온갖 욕을 퍼부으며 오빠를 비난했다. 아무리 욕을 해도 오빠에 대한 원망이 풀리지
않았다.
그때 어머니가 조용히 말했다. "내가 그렇게 오빠를 사랑하라고 가르쳤거늘." 딸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랑이라고요? 어디 사랑할 만한 구석이 있어야 말이죠."
그러자 어머니가 말했다.
"애야, 누구에게나 본받을 만한 점이 있다는 것을 명심하거라. 네가 이 점을 깨닫지
못 한다면 뭘 배워도 다 소용없다. 너는 오빠를 위해 눈물을 흘려 본 적이 있니? 우리
가족이 그 돈을 잃어버렸다는 사실 때문에 억울해서가 아니라 네 오빠가 겪었을 고통에
대해서 말이다. 얘야, 너는 사람을 가장 사랑해야 할 때가 언제라고 생각하니? 그 사람이
일을 잘해서 자랑스러울 때? 그렇다면 넌 아직 멀었다.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으로 감싸
줘야 할 때는 바로 그가 좌절할 때, 자신조차 믿지 못하고 세상으로부터 고통받고 있을
때란다."
대 시인의 노력
[달팽이 뿔 위에서 무슨 일을 다투는가?/ 부싯돌 속 불빛처럼 빠른 세월에 맡긴
몸/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즐기리/ 입을 열고 웃지 못 하면
그가 곧 바보라네.
중국 당나라 때 시인 백거이의 시다. '낙천' 이라는 호로 더 널리 알려진 백거이는
이백, 두보와 함께 당나라 3대 시인 중 한 명이다. 지식인들에게 사랑 받았던 이백,
두보의 시와 달리 백거이의 시는 서민들에게 사랑받았다. 글을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그의 시를 외웠고, 그의 시를 베껴 배나 절의 기둥, 벽에 붙였다. 심지어
그의 새로운 시가 나오면 사람들이 그 시를 베껴 쓰기 위해 종이를 사 가는 바람에
장안에 종이가 바닥나는 사태가 벌어질 정도였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백거이는 운이 좋게도 살아 있을 때부터 시인으로서 대단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아무리 유명해져도 그가 시를 지을 때의 자세는 한결같았다.
그는 새로운 시를 지으면 집안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노파에게 가장 먼저 읽어주었다.
한 마디로 백거이는 가장 무지한 사람에게 자신의 시를 평가하게 한 것이다.
시를 다 읽어주어도 노파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면 백거이는 다시 붓을 들고 더 쉬운 한자를 찾아 적었다. 그러고는 또 노파
앞에서 시를 읊었다. 노파가 다시 고개를 저으면 그는 더 쉬운 한자를 찾고자 고민을
거듭했다. 그처럼 백거이는 노파가 공감할 수 있을 때까지 수없이 고치고 다듬는
노력을 한 것이다.
더 나은 상황을 만들기 위해, 더 발전하기 위해 '노력' 한다면 오늘보다 못한 내일은
있을 수 없다.
수탉이 낳은 알을 가져오라!
진시황은 만년에 죽음이 두려워 감무 대신에게 불로장 생약이라
불리던 수탉의 알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집으로 돌아간 감무 대신은 시름에 잠겨 먼 산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어린 손자 감라가 할아버지가 곁에 다가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었다.
"폐하꼐서 수탉이 낳은 알을 가져오라 하시는구나."
"할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게 좋은 생각이 있어요. 사흘 뒤 저와 함께
궁에 가 주세요."
평소 감라가 재치 있는 말과 영특한 생각으로 주변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이 여러 번 있었기에 감무는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흘 뒤 궁 앞에 도착한 감라는 할아버지께 혼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감무 대신 손자를 먼저 들여보냈다. 잠시 뒤 진시황 앞에 선
감라가 말했다.
"저는 감무 대신의 손자 감라입니다. 할아버지께서 아기를 낳고 있어서
저 혼자 왔습니다."
진시황은 터무니없는 대답에 기가 찼다.
"남자가 어떻게 아기를 낳는단 말이냐? 어디 황제 앞에서 거짓말을 하느
냐?"
"수탉도 알을 낳는데 남자라고 왜 아기를 낳지 못 하겠습니까?"
그제야 왕은 감무 대신에게 한 명령이 잘못임을 인정했다. 이후 총명한
감라는 진시황의 명을 받아 열두 살에 외국사신으로 보내졌는데, 진나라에
대적하는 연나라와 조나라를 싸우게 만들어 진나라 영토를 넓히는데 큰
공을 세웠다.
씨앗과 빗자루의 힘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8개월 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에 아버지를 잃었다. 같은 해 자신을 키워준 할머니마저 돌아가시자
그는 유기 공장과 도매업을 하는 상점을 사환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성실한
그를 신뢰해 그를 열다섯 살에 보부상을 할 수 있도록 독립시켜 주었다.
보부상으로 착실한 기반을 닦은 그는 스물네 살에 유기 공장을 차려 정주
지방의 유망한 기업가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러일전쟁으로 두 차례나 파산했다. 이승훈은 절망하지 않고 잿더미
에서 일어나 다시 회사를 차렸다. 누군가 그의 대단한 의지력에 대해 칭찬
하자 이승훈은 말했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갈 때 자기 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 일이 없습니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생계를 꾸려야 했던 이승훈.
하지만 그는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스스로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와 시련
을 이겨낸 씨앗이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빗자루가 되고자 했다. 회사를 운영한
이익으로 일제에 대항할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오산학교를 세웠을 때 그는
"민족의 한구석을 깨끗이 쓸고 닦는 빗자루가 되자" 며 화장실과 운동장까지
손수 청소했다.
1930년 세상을 떠난 그는 탁월한 기업가, 교육가, 독립운동가로 이름을 남
겼다. 함석헌은 스승 이승훈을 가리켜 '성실한 사람, 열심히 부지런하게 사는
사람' 이라고 말했다. 씨앗과 빗자루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그에게 가장 어
울리는 수식어일 것이다.
나누기 위해 돈을 벌다
요리를 좋아하는 영화배우 폴 뉴먼은 크리스마스 때 자신이 만든 드레싱을
이웃에게 선물하곤 했다. 1980년 크리스마스 때도 뉴먼은 친구인 작가 허츠너와
함께 드레싱을 만들고 있었다. 이웃들에게 선물하고도 남을 만큼의 드레싱을
바라보던 그는 허츠너에게 말했다.
"혼자 먹기 아까운데 이 드레싱을 팔면 어떨까?"
깜짝 놀란 허츠너는 뉴먼을 말렸지만 뉴먼은 "나는 단 한번도 계획을 세운 적이
없는 가장 어리석은 사업가" 라며 무작정 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반응은 엄청났다. 그들의 어설픈 사업은 놀라운 성장을 거듭했다. 100%
무방부제 천연재료로 샐러드 드레싱 시장을 석권하며 스파게티 소스, 팝콘,
레모네이드에 이르기까지 세계시장에 우뚝 선 '뉴먼스 오운' 이 탄생했다.
자본금 1만 2천 달러에 첫해 수익금만 92만 달러. 돈을 번 뒤 뉴먼은 마음속에
품고 있던 일을 실천했다. 해마다 12월이면 회사의 수익금 전액을 의료연구와
교육사업, 환경운동을 위해 자선단체에 기부한 것이다. 그리고 새해 첫날 은행
에서 대출을 받아 빈손으로 사업을 다시 시작했다.
1985년 뉴먼은 전 세계 28개국에 난치병 어린이를 위한 '산골짜기 갱단 캠프' 를
만들었다. 캠프 이름은 뉴먼이 출연한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 에서 부치 캐시다
와 선댄스 키드가 이끌던 갱단에서 따 왔다. 이 캠프는 병마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매년 뉴먼스 우운의 통장은 텅텅 비지만 그들의 마음만은 넘치도록 채워지고 있다.
기러기 아빠, 로렌츠
회색기러기 마르티나는 태어나자마자 가느다랗게 뜬 실눈 사이로 누군가를 보았다. 웬
남자였다. 마르티나는 그 모습을 마음 깊이 각인시켰다. '아, 우리 아빠구나!' 아빠도 빙그레
웃는 듯 했다. '꿱 꿱 꿱, 난 앞으로 아빠만 따라다닐 거예요." 그때 누군가가 그 남자를
불렀다. 이봐, 콘라트 로렌츠!"
콘라트 로렌츠(1903~1989)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동물행동연구가이자 의학자이다. 의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로 인해 의학공부를 했지만 어렸을 때 감명 깊게 읽었던 <<닐스의 모험>>
속 동물들이 늘 그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1928년 의학박사가 된 이후 그는 본격적
으로 동물학 공부에 빠져들었다. 1933년 동물학 박사 학위를 딴 그는 1935년, 마침내 새들의
본능적 행동방식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며 동물학자로서 주목을 받는다. 그 무렵 그는 회색
기러기를 관찰하고 있었다.
로렌츠는 원래 집오리를 관찰할 계획이었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지자 호수 근처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회색기러기 알을 관찰 대상으로 삼았다. 그는 어느 날 기러기 새끼들이 알에서
부화하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로렌츠는 새끼를 잠깐 관찰하고 놓아줄 요량으로 한 마리를
집어 들었다. 새끼 기러기는 한동안 로렌츠를 바라보았고. 그 뒤 로렌츠가 새끼를 둥지 안에
넝어주려 할 때, 이를 거부하며 로렌츠만을 따라다녔다. 어쩔 수 없이 기러기에게 마르티나란
이름을 붙여주며 자신 옆에 있게 했다. 그는 마르티나를 관찰하며, 야생 기러기들은 상대가
어미가 아니더라도, 알에서 깨자마자 처음 본 상대를 따라간다는 '각인효과' 를 발견했다.
더불어 이 각인은 태어난 지 16시간 안에 형성되면 그 대상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로렌츠는 이 연구를 통해 모든 동물의 출생 직후 경험이 성장한 뒤의 행동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논문을 발표했다.
로렌츠의 이 연구는 인간이 동물을 길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했고, 더 나아가 인간행동
심리학 연구에도 많은 힌트를 주었다. 로렌츠는 1973년 비교행동학 연구업적으로 인정받아
노벨생리. 의학상을 수상했다. 그 뒤 그는 생태학자로, 친환경주의자로 적극적인 삶을 살았다.
하지만 나치를 지지했던 전력 때문에 과학자로서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 했다.
전쟁기념관 형제의 상
서울 용산의 전쟁기념관 앞마당에는 화강암으로 쌓아올린 돔 위에 높이
11미터짜리 '형제의 상' 이 서 있다. 군복을 입은 두 남자가 서로 껴안고
있는 '형제의 상' 은 가슴 뭉클한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황해도 평산군 신암면에 형 박규철과 동생 용철 형제가 살고 있었다. 광복과
분단으로 이어진 시대의 혼란 속에서 형은 동생에게 가족을 부탁하고 홀로
월남했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박규철은 참전해 많은 공을
세우며 소위로 진급했다.
박 소위는 도망치는 북한군 사단을 추격하게 되었고 충북 단양군 죽령에서
마지막 결전을 벌였다. 하루는 박 소위가 자신에게 호통 치는 어머니 앞에서
엉엉 우는 이상한 꿈을 꿨다. 이튿날 공격 중에 땅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린
북한군에게 총을 겨누며 도망치치 않으면 살려주겠다고 외쳤다. 바로 앞에
엎드린 적은 동생이었던 것이다.
박 소위는 북한군이 쏘아대는 총알을 아랑곳하지 않고 뛰어가 동생을 껴안
았다. 동생도 형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았다. 형이 국군 진영으로
동생을 데려왔을 때 서로에게 총을 겨누었던 형제의 비애를 지켜본 많은 병사
들이 눈시울을 적셨다. 그 뒤 형제는 같은 소대에서 근무했다.
이 이야기는 박 소위인 전우가 1989년 전쟁기념사업회의 한국전쟁 참전수기에
공모해 입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그리고 전쟁기념관을 열면서 조형물로
만들어지기에 이르렀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 에도 영감을 준 '형제의 상' 은
단순한 조형물이 아니다. 형제에게 총을 겨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싸워야 했던
전쟁의 아픔인 것이다.
마지막 달걀 한 알
'대한민국 김관식.' 명함에 그렇게 새기고 다니던 시인 김관식은 전후의
황폐한 시대를 오기와 기행으로 살아냈다. 어려서부터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똑똑했지만 술로 병을 얻어 1970년 37세로 생을 마감했다.
18세의 김관식은 시를 배우겠다고 미당 서정주를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어느 날 김관식은 서정주의 처제를 보고 첫눈에 반하고 말았다. 그는 서정주
에게 처제를 달라고 졸랐다. 서정주는 "그거 좋지" 하고 허락했다. 그러나
정작 그녀나 그 집안에서는 그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목구비가 어지간히
못난 데다 나이도 네 살이나 어렸기 때문이다.
그는 아예 그녀가 사는 이웃에 하숙을 하며 날마다 그녀를 보러 갔다. 그래도
그녀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자 그는 마지막 수단을 썼다. 음독 자살
소동이 그것이었다. 그녀는 병원에 입원한 그를 찾아왔고, 어여쁜 그녀의
순정이 목숨까지도 버리겠다는 시인의 애절함 앞에서 꺾이고 말았다.
그리하여 김관식과 방옥례는 1954년 1월 최남선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던 그에게 병까지 찾아왔다. 결국 아내가 공장에
나가 식구들을 보살펴야 했다. 어느 날 아내는 공장에 나가면서 삶은 달걀
하나를 내놓았다. 음식을 넘기지 못해 굶기만 하는 남편이 걱정돼서였다. 그러나
김관식은 달걀을 다시 아내의 도시락에 넣었다. 일하는 사람이 더 배고플 테니
아내가 먹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내가 출근한 뒤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날 아침의 달걀 한 알은 죽음을 앞둔 시인이 사랑하는 아내와 철없는 어린
아이들의 앞날을 걱정하는 마음을 마지막으로 표현한 것일지도 모른다.
전보 한 장
명탐정 셜록 홈즈를 탄생시킨 추리 소설가 코난 도일은 기발한 장난을
치기 좋아했다. 어느 날 그는 사회적으로 제법 놓은 지위에 있는 몇 명의
친구를 골라 똑같은 내용의 전보를 띄웠다.
"이런 내용의 전보를 받으면 누구든지 깜짝 놀랄 테지."
코난 도일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때 부인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여보, 혼자 뭘 그리 중얼거리고 있어요?"
"그게 말이오. 사람들은 흔히 자기는 전혀 죄를 안 짓고 사는 것처럼 뻔뻔
스럽게 행동하거든. 그래서 정말 죄짓지 않고 사는지 알아보기 위해 내가
전보를 띄웠다오."
"전보를 뭐라고 띄우셨는데요?"
"'탄로 났으니 어서 도망치시오' 라고 써서 평소 가장 도덕적으로 행동하는
친구들에게 보냈다오. 결과가 너무나도 궁금하군."
다음 날 코난 도일은 전보를 띄운 친구 집을 차례차례 방문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집에 있는 사람이 없었다. 집에 돌아온 그는 한숨을 쉬며 부인에게
말했다.
"여보. 내 친구들은 모두 죄를 지었나 봐."
"모두 숨고 없던가요?"
"모두 어제부터 나가서 안 들어온다지 뭐요. 그래서 어디 갔냐고 물었더니
가족들도 모른다는 거야. 그 정도면 알 만하지."
코난 도일은 한 마디를 적은 전보 한 장으로 친구들의 됨됨이를 알 수 있었다.
한스가 구조한 사람
풍랑을 만나 조난을 당한 가족들의 애타는 마음을 감격과 환희로
바꾼 어느 소년의헌식적인 희생정신
몇해 전 네덜란드의 작은 바닷가 마을에서 실제 있었던 일로, 한 소년의 헌신적인
자기 희생을 통해 그것이 가져다 주는 큰 보상에 대해 깨닫게 해준 사건이다.
소년이 살고 있던 그 마을은 주민 모두가 고기잡이로 생계를 잇고 있었기 때문에
긴급 상황에 대비한 자원 구조대를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바람이 거세게 불고 구름이 밀려오더니 곧이어 사나운 폭풍이 고기잡이
배 한 척을 에워싸기 시작했다. 위험에 처한 선원들은 급히 구조 신호를 타전했다.
구조대 대장이 경보 신호를 울리자 주민 모두가 바닷가 마을 광장에 모였다. 구조대가
노를 저어 거센 파도와 싸우며 앞으로 나아가는 동안 주민들은 랜턴으로 바다를 비추며
해변에서 초조하게 기다렸다.
그로부터 얼마 뒤, 안개를 헤치고 배가 돌아왔다. 주민들은 환성을 지르며 그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런데 지친 구조 대원들은 모래사장에 쓰러지며 주민들에게 이렇게 보고했다.
인원이 넘쳐 더 이상 구조선에 태울 수 없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 남자를 뒤에 남겨
둬야 했다는 것. 한 명을 더 태우면 구조선까지 파도에 휩쓸려 모두 목숨을 잃고 말았을
것이라는 실로 안타까운 사연을 전하며 그들은 울먹거렸습니다.
구조대 대장은 애가 타서 그 외로운 생존자를 구하기 위한 다른 자원 봉사자를 찾았다.
이 때 열 여섯살 먹은 한스가 걸어나왔다. 그러자 한스의 어머니는 그의 팔을 잡으며
애원했다.
"제발 가지 마라. 네 아버지도 10년 전에 배가 난파되어 돌아오시지 못 했단다. 네 형
파울도 며칠 전에 바다에서 실종이 됐구. 내게 남은 건 한스 너 뿐이다. 제발, 에미는
하나 남은 너까지 잃고 싶지 않단다."
한스가 말했다.
"어머니, 전 가야만 해요. 모두가 '난 갈 수 없어. 다른 사람이 이 일을 해야만 해!' 하고
말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이번에는 제가 나서야 해요. 그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려졌
다. 다시 한 시간 정도, 한스의 어머니에게는 영원처럼 길게 느껴지는 시간이 무심하게
지났다. 마침내 구조원들이 탄 배가 다시 안개를 뚫고 돌아왔다. 뱃머리에는 한스가 서
있었다. 손으로 나팔을 만들어 마을 사람들이 소리쳐 물었다.
"실종자는 어떻게 됐니?"
그러자 지친 몸을 가누면서 한스가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네. 구조했어요. 저의 엄마에게 말씀해 주세요. 실종자가 바로 우리 형 파울이었다구요!"
이 소리를 전해들은 어머니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렸다.
헤세의 아내
철학적 통찰력과 감성적인 언어로 <<데이안>> <<유리알 유희>>
<<수레바퀴 아래서>>를 쓴 헤르만 헤세, 그는 독일 최고의 소설가이자
시인으로 꼽힌다. 그러나 헤세는 두 번의 이혼과 전신병 등으로 불행이
끊이지 않았다.
헤세의 삶에 희망이 싹튼 것은 세번째 아내 니온 아우슬렌더를 만나면서
부터다. 1992년 처음 만난 그들에게는 각자 배우자가 있었다. 그러나 마흔
다섯 살의 헤세는 아내와의 불행한 결혼을 끝내려 하고 있었고, 스물일곱
살의 니온은 헤세의 작품을 접하면서 이미 그를 깊이 사랑하고 있었다.
헤세는 재판에서 변태적 인간, 노이로제의 불면증 환자, 정신병자라는 불
명예스런 판정을 받고서야 이혼할 수 있었다. 두 번의 불행한 결혼은 헤세
에게 평생 동안 영향을 미쳤다. 니온과 결혼한 뒤에도 각방을 쓸 정도였다.
게다가 급격히 나빠진 시력은 그를 더욱 우울하게 했다. 마음을 굳게 닫은
헤세 곁에서 묵묵히 자신의 사랑을 지킨 니온은 헤세가 죽는 날까지 33년
동안 무려 천오백 권의 책을 헤세에게 읽어 주었다. 또한 헤세가 아이를
원하지 않아 아기를 갖고 싶은 소망도 고양이를 키우는 것으로 대신했다.
'당신은 신비로운 마술사 같아요. 나는 다시 열네 살 어린 소녀가 되어 당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당신은 나의 애인이자, 보호자, 남편이며 내 인생에 가장
큰 행복을 가져다 준 기적이지요.'
헤세는 니온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 <<유리알 유희>>를 집필해 1946년 노벨
문학상의 영광을 거머쥐었다. 자신을 버리는 니온의 헤세를 향한 사랑. 그녀는
받는 사랑보다 주는 사랑이 더 크고 행복한 것임을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