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행사와 통역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교수 곽중철
출처: http://www.jckwak.net
올해 우리나라가 주최하는 국제행사 중 가장 큰 것은 6월말의 세계검사연맹총회(IAP) 겸 검찰정상회의(WS)와 8월말의 대구 세계육상선수권 대회다. 필자는 2004년 영어, 불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등 4개 국어로 진행된 제9차 세계검사협회(IAP)의 동시통역 업무를 총괄한 바 있다. 금년 IAP와 함께 세계 각국의 검찰청장들이 모이는 WS는 유엔의 공식언어 6개에 우리말을 더한 7개 국어로 동시통역을 하게 되었다.
2004년 IAP 회의에 초빙된 외국인 통역사들은 한국 통역사들이 우리나라 대표들의 한국어 발언을 영어로 옮긴 통역이 “다른 어느 나라의 현지어 통역보다 우수해 전공 언어로 릴레이 통역하기가 참 쉬웠다”고 평가했던 기억이 난다. 이런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까닭은 주최측이 통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우수한 국내외 통역사들을 초빙하는 데 적절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다. 국제행사는 아무리 많은 투자를 해도 통역이 잘 되지 않으면 회의 전체 평가에 옥의 티가 된다는 것을 경험한 분들이 많다. 이번에도 주최 측이 이런 통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일찍부터 준비를 했기 때문에 회의 규모가 훨씬 커지고 공식 언어 수도 늘어났지만 훌륭한 통역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자신한다.
흔히들 국제회의 통역을 의뢰하는 분들은 통역사들이 그 많고 어려운 전문용어를 어떻게 할까 염려한다. 물론 전문용어는 어렵고 복잡할 때도 있지만 전문 통역사란 단 기간에 그런 용어들을 이해하고 활용하는 능력과 경험을 가진 자들이다. 훌륭한 통역의 관건은 그런 용어가 아니라 회의 내용을 이해하는 능력과 그 내용을 다른 언어로 옮겨 전달할 수 있는 기초 언어 및 소통 능력이다.
그런데 최근 세계에서는 3개 언어 이상이 쓰이는 이런 다국어 국제회의는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영어가 국제공용어가 되어 많은 행사가 영어라는 단일언어로 진행되는 추세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 때문에 몇 년 전부터 세계적으로 영어를 하는 사람이 늘어나면 통역을 할 필요가 없어지지 않을까라는 추측이 떠돌더니 궁극적으로 영어의 지위마저 흔들리게 돼 통역이란 작업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지난 달 말 구글의 슈미트 회장은 스위스의 다보스 포럼의 간담회에서 음성인식 자동 통역기를 포함하는 구글의 안드로이드3.0을 시연했단다. 이날 최초로 시연한 음성인식 통역기는 영어-스페인어용이었는데 두 직원이 태블릿PC에 대고 영어로 말하면 스페인어로, 스페인어로 말하면 영어로 완벽히 통역돼 나왔다는 것이다. 슈미트 회장은 "한국어를 포함해 15개 국어 음성인식 자동 통역기를 조만간 출시할 것"이라고 했단다.
몇 년 전부터 통역대학원 지원자들 사이에 “통역이 없어지는 마당에 통역대학원에 장래가 있나?”라는 질문이 나오는데 필자는 “우리 생전에는 기계가 완벽한 통역을 할 수 없을 테니 염려 마라”고 큰소리치고 있다. 한창 발전 중인 로봇이 한정된 기능을 완벽히 수행할 수는 있어도 인간을 완전히 대신할 수는 없듯이 통역기도 한정된 분야나 일정한 어역은 몰라도 변화무쌍하고 미묘한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말을 어떻게 완벽하게 통역한단 말인가? 그런 기계를 만들기보다 인간 각자가 완벽한 영어를 구사하는 일이 더 쉬울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우리나라에서도 영어를 공용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지도 모른다.
세상에 외국어를 하는 사람은 많지만 정말 잘 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우리 학교에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해 2년 꼬박 공부에 매달리지만 두각을 드러내는 제자는 많지 않다. 교편을 잡은 지 10년이 넘은 지금도 통역사는 타고나는 것인가 자문하고 있다. 그것은 어릴 때 외국생활을 많이 해 다른 학생보다 유리한 입장에서 출발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이다. 상대방이 하는 말의 뜻을 재빨리 간파하고, 아 해 다르고 어 해 다름을 눈치 채 1-2초 만에 순간적으로 생각을 정리해 다른 말로 옮기는 제자를 보면 ‘타고 났구나’라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토론에서 상대방의 공격성 발언에 대해 “그런 말씀을 하시면 나도 어쩔 수 없다”고 했을 때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라는 우리말 속담을 인용하는 통역은 타고난 것이다. 그런 통역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더 듣고 싶어진다. 우리 말을 영어로 옮기는 경우에서도 마찬가지다.
1년에 한두 명이라도 “아, 통역사로 타고 났구나”라고 느끼게 해주는 제자를 발견하는 순간이 그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특히 여성이 더 우수한 자질을 보이는 통역에서 남학생이 그런 자질을 보일 때는 더 반갑다. 면접 시험을 볼 때 그렇고, 국제회의에 배치한 졸업생들이 무대공포감을 떨치고 야무진 통역을 할 때 가슴이 뭉클해 진다. 인터넷 시대에 통역에 가장 중요한 모국어보다 영어 교육이 우선시되면서 우리말의 근원이 되는 한자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인지 그런 인재가 점점 더 줄어드는 것 같아 안타깝다. 하지만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던 제자들이 몇 번의 졸업시험을 거쳐 졸업한 후 국제회의장에서, 여러 직장에서 어엿한 전문 통역사로 사회에 기여하는 일꾼이 되는 모습을 보며 “통역사로 태어나지 못했어도 모자라게 타고 난 재능을 교육과 훈련으로 보완할 수 있다”고 자위한다.
대구 육상 같은 스포츠 행사에서 스포츠 기구의 회의 동시통역이야 전문가들한테 맡기면 되지만 각국 선수와 임원, 외국 관광객들의 통역은 언어 능력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손님을 위하는 주인의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 통역 자원봉사는 많은 사람이 필요 없다. 언어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진정으로 손님들을 위하는 마음이 있으면 손짓 발짓으로라도 그들을 감동시킬 수 있으며 그런 태도가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작년 11월의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 동원된 광저우 대학생들은 외국인 방문객을 대하는 친절한 마음을 느낄 수 있어 참 고마웠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 많아 보였다. 소수정예로 했으면 양 쪽이 모두 더 큰 보람을 느꼈을 것이다. 인력과 예산을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금년 8월 광저우 바로 옆 신도시 센젠에서 열리는 유니버시아드 대회에서는 어떤 방향으로 준비를 할 지 궁금하다. .
따라서 필자는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2015년 광주 유니버시아드, 아직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2018년의 평창 동계올림픽 대회를 조직하시는 분들께 회의 동시통역을 포함해 최소 인원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두는 길을 찾으라고 말씀 드리고 싶다. 그것은 가능하다. 1988년 올림픽 이후로 수많은 스포츠 행사를 주최한 우리나라 국민들은 이제 외국인을 두려워하지 않고 좀 모자라는 영어로나마 웃으며 안내할 수 있는 배짱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