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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 | 그냥 41 | 2008-12-08 오후 7:00:53 |
이정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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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관원들은 관례적인 검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집을 나오기 전 헬렌이 가방에 넣어준 사과 몇 알을 발견했다. 사과는 압수당했다. 검사관이 내 서류가방에서 전단 몇 장(나는 전단 뒷면을 메모지로 사용했다)을 찾아내자 경찰은 그것에 큰 관심을 보였다. 세관원은 화를 내며 그 전단들을 쓰레기통에 처넣더니, 마음이 바뀌었는지 도로 전단을 꺼내 조심스럽게 한쪽으로 치워놓앗다. 그것은 내가 지난해 뉴욕 시에서 했던 일련의 강연을 알리는 전단이었다. 강연 주제는 '사회주의의 세기'였다. 세관원이 다음에 찾아낸 것은 '워싱턴 D.C. 소련사회주의공화국 대사관 출판부'라는 발신인 주소가 적힌 마닐라지 봉투 몇 장이었다. 나는 이 튼튼한 봉투들을 메모지를 담는 데 사용해 왔다. 세관원은 또 중도좌파 잡지인 <네이션>과 <가디언> 몇 부와 표지마다 '독립 사회주의 잡지'라는 글귀가 인쇄되어 있는 <먼슬리 리뷰> 최근 다섯 호를 발견했다.
고지식하게 이런 자료를 베네수엘라로 가지고 간 게 잘못이었다. 그걸 보고 경찰이 흥분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들은 나를 공항 본관에 있는 경찰서로 끌고가더니, 내 옷가방과 서류가방에서 모든 것을 꺼내놓고 본격적으로 조사에 착수했다. 그들은 내 몸을 철저하게 수색하고, 주머니에 든 것들까지 모두 꺼냈다. 그들은 내가 과일을 깎기 위해 늘 지니고 다니는 작은 주머니칼을 압수하고 내 여권과 비행기표를 챙긴 뒤, 짐가방과 나를 경찰차에 우겨넣고 좌석들 사이의 바닥에 스텐 경기관총 한 자루를 내려놓고서 카라카스로 차를 몰았다. 지난번 베네수엘라에 왔을 때는 공항에서 나올 때 8달러를 주고 택시를 타야 했지만, 이번에는 적어도 차비는 들지 않았다. 경찰의 에스코트는 보통 귀빈들에게만 제공된다. 나는 귀빈이 아닌데도, 베네수엘라에 머물렀던 22시간 내내 베네수엘라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았다.
우리의 목적지는 비밀경찰 본부였다. 그곳에서 조사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그들은 내 비누상자 속을 들여다보고, 구두약통을 열어보고, 작은 손전등 안에 혹시 뭐가 숨겨져 있는지 보려고 손전등에서 건전지를 꺼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내가 보는 앞에서 서류가방과 문서들을 조사하더니, 나중에 다른방으로 가지고 가 한 시간 정도 더 조사했다. 세 시간에 걸친 조사와 심문이 끝나고 오후 6시쯤 되었을 때, 안토니오 라미레즈라는 경감이 나를 자기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당신은 베네수엘라 체류허가를 받을 수 없습니다." 경감이 말했다. "당신의 비행기표를 보니 다음 행선지가 콜롬비아의 바란킬라더군요. 바란킬라행 첫 비행기는 내일 오전 11시 45분에 출발합니다. 우리가 당신을 위해 그 비행기를 예약해 놓겠습니다. 오늘밤은 마쿠토 호텔을 잡아드릴 테니 거기서 지내십시오."
호텔에서 나는 욕실이 딸린 호화로운 2인실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8시 30분에 경찰 두 명과 함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에서 저녁을 먹었다. 우리는(경찰 한 명과 내가 각각 침대 하나씩을 차지하고)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다. 내가 공항의 수하물 임시보관소에서 경찰에 넘겨질 때부터 22시간 후 공항을 떠날 때까지, 경찰의 감시인이 한순간도 내곁을 떠나지 않았다. 나랑 호텔방을 같이 쓴 감시인은 베네수엘라 시골 출신의 총명한 젊은이엿다. 그는 내가 스페인어를 더듬거리는 정도만큼 귀동냥으로 배운 영어를 더듬거릴 줄 알았다. 그래서 우리는 저녁을 먹으며 꽤 가까워졌는데, 우리가 서로 의사를 전달하려고 서툰 영어, 서툰 스페인어로 안간힘을 쓰는 모습을 보며 또 다른 감시인이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호텔방으로 돌아오기 전에, 내 파트너와 나는 해안을 산책했다. 찬란하게 별이 빛나는 밤, 카리브 해 위로 불어오는 상쾌한 바람이 낮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호텔에 거의 다 왔을 즈음, 젊은 경찰관이 진지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말했다. "우리와 함께 베네수엘라에 더 계시지 못하게 되어 서운하군요" 나는 스페인어로 "그래요, 나로서도 유감입니다." 하고 대꾸했다. 우리는 호텔 현관 앞에 있었다. 열쇠를 받아가지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는 우리는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날 비행기가 나를 내려놓은 바란킬라에서는 아무 문제없이 세관을 통과해 호텔에 방을 잡았다. 막 샤워를 끝내고 나오는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제복을 입은 두 남자가 나에게 입국관리소 신분증을 제시하더니, 어서 옷을 입고 자기들과 함께 콜롬비아 비밀경찰 본부로 가자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나는 그곳에 가서 또다시 조사를 받았다. 콜롬비아 경찰은 카라카스로부터 연락을 받고 공항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나 놓친 모양이었다. 공항 청사를 나와 이 나라에 처음 발을 딛는 순간부터 나는 요주의 외국인으로 찍힌 것이다. 나는 입국관리소 소장에게 내가 체포당한 상태이냐고 물었다. 그는 "아니오, 그저 구금상태에 있는 것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 구금은 나흘 간 계속되었다. 이 기간을 나는 바란킬라 비밀경찰 에디피치오의 유치장 독방에서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당하며 지냈다. 이 기간중 미국 영사가 면회를 와, 내가 추방당하기로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입국관리소 소장과 미국 영사와 팬 아메리칸항공사(나는 여행할 때 이 항공사를 이용하고 있었다)의 현지 간부들이 나의 왕복표를 취소하고 나를 첫 비행기에 태워 뉴욕으로 돌려보냈다. 뉴욕행 항공요금도 내가 지불해야 했다. 비행기는 카라카스에 들러 30분 간 쉬었다. 나는 통과하는 승객일 뿐이었는데도 또다시 공항 경찰에게 붙잡혀 그들의 사무실로 끌려갔다.
"내 짐이 저 비행기에 있소이다. 짐을 내려주든지 나를 비행기로 보내주시오." 하고 항의하자, 그들은 이륙 직전에야 나를 비행기로 돌려보냈다. 뉴욕에 도착하여 나는 변호사인 친구 데이브 프리드먼을 찾아갔다. 그 친구 말이 추방과 비행기표 압수는 납치와 사유재산 몰수에 해당하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나긴 법정 소송을 원하지 않는 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배릭 항공사로 가서 다시 남아메리카 왕복 항공권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카라카스를 거치지 않고 곧장 리우데자네이루로 갔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쿠바와의 연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것이 이번 여행의 주된 목적이었다. 이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 여행을 시도하던 다른 사람들 처지도 나보다 나을 게 없었다. 세계 각지에서 들어온 95건의 비자신청이 그 자리에서 거부당하거나, 대표들이 회의시간에 맞춰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허가가 연기되었다. 비자를 거부당한 사람들 가운데는 영국 학자인 J.D. 버널과 당시 가이아나의 국무총리였던 체디 제이건의 아내 재닛 제이건도 있었다.
이번 대륙간 회의에 즈음하여, 브라질의 재무장관 산티아고 단타스가 4백만 달러의 차관을 얻기 위해 미국에 왔다. 그는 몇 가지 부대 조건을 달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거의 다 얻었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이 부대 조건 가운데 하나가 회의를 저지하는 것이고, 회의를 저지하는 게 불가능할 경우에는 대표들이 리우데자네이루에 들어오는 것을 막는 게 아니었나 싶다. 회의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신문통신인클럽에서 열릴 예정이었다. 그런데 막판에 이 클럽 사용이 취소되었다. 그러자 해군 공창노동자들이 만을 사이에 두고 리우데자네이루의 마주보고 있는 니테로이의 강당을 내주었다. 이토록 어려운 상황에서 막이 오른 대륙회의는 민주주의 혁명과 더 나아가 사회주의 라틴아메리카를 이루기 위해 제국주의를 상대로 강력한 싸움을 조직하는 데 중요한 한 걸음이었다. 정부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군대의 동원에도 불구하고, 호의를 비난하고 회의의 무력저지를 선동하는 도발적인 신문의 전면광고에도 불구하고, 미국 국무성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회의는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 회의는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표들과 접촉했던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받아들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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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시아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극동과 근동, 중동, 일본, 중국, 시베리아, 중앙아시아, 소비에느 공화국, 인도, 실론,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석유가 풍부한 서아시아 등이 내가 가본곳들이다. 지구 땅덩어리의 대부분은 아시아 - 아시아가 가장 큰 대륙이다 - 이고, 인류의 절반 이상이 아시아에 살고 있다. 중국 한 나라만 해도 인구가 인류의 5분의 1이 넘는 7억 5천만이다. 인도 역시 인구가 5억에 달한다. 인간의 역사는 수천 년 동안 주로 아시아에서 씌여졌다. 유럽, 특히 서유럽은 세계 무대에서는 신출내기에 지나지 않는다. 1450년에서 1900년 사이에 서양은 아시아를 정복해, 아시아의 상당 부분을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1900년 이후 아시아는 지구상에서 지리, 인구, 부, 권력의 중심지로 다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의존에서 자족으로, 종속에서 주권으로, 하찮은 존재에서 지구의 주인으로 나아가는 아시아의 행진을 선도한 나라가 일본이다. 일본은 1895년에 중국을 패배시키고, 10년 뒤에는 러시아를 패배시킴으로써 세계 열강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일본은 1914~1918년 전쟁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가 1939~1945년 전쟁에서 패해 굴욕을 당함과 동시에 주요 도시들이 폐허가 되었고 1895년 이후에 전쟁을 통해 축적한 부를 빼앗겼으나, 놀랍게도 20년여 만에 이전의 지위를 거뜬히 회복했다. 경제를 놓고 볼 때 일본은 시계에서부터 25만 톤짜리 유조선에 이르기까지 무엇이든 생산할 수 있고, 자기네가 생산한 물건을 다른 공업국가들과의 경쟁에 밀리지 않고 당당하게 판매할 수 있는 아시아 국가이다. 캘리포니아 크기만한 공간에 억대의 인구가 밀집해 있는 일본은 전쟁으로 폐허가 된 도시들을 기록적인 시간 안에 말끔히 정비하고 자동화 경제와 현대화된 정치 체계를 건설함으로써 세계 5대 강국의 반열에 올랐다. 아직 최고 강대국이라는 위상에 걸맞는 군사조직은 미비한 상태지만, 워싱턴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고 착취하듯이 극동지역을 지재하고 착취하기 위해 일본을 이용해 왔고, 앞으로도 일본은 지리, 경제, 정치적 교두보 구실을 할 것이다. 사실상 일본을 움직이는 소수 독재체제는 일본 열도에 자리잡고 있는 미제국의 아시아 지부를 관리하는 매개자이다.
내가 일본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27년의 일이었다. 그후 얼마 만에 한 번씩 일본에 갈 때마다, 원료 부족을 메우고, 40년대 초반의 크나큰 전쟁의 잿더미에서 일어나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다시 우뚝 선 일본인들의 능란한 방법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1945년 전쟁이 끝난 뒤 처음 일본을 방문했을 때 동료 경제학자들이 도쿄와 오사카, 교토의 대학들에서 마련했던 모임이 특별히 기억에 남는다. 이들 모임에 참석한 대학원생들과 교수들은 미국 소수 독재체제와 미국의 아시아 정책, 미국 내의 정치적 반대에 관해 토론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왔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학계 모임이든 다른 모임이든 많은 모임에 참석해 보았다. 하지만 일본 경제학자들과 일본에서 가진 모임보다 더 수준 높고, 차분하면서도 유머가 있고, 주제에 대해 철저한 토의가 이루어졌다는 만족감을 느꼈던 적은 없었다.
중국은 세계적 강대국으로 발돋움하는 속도가 일본보다 느렸다. 일본은 한 세기 전에 현대화를 시작했다. 그러나 중국의 새로운 지배세력은 1949년에야 정부를 수립했다. 그 이전의 반 세기는 1900년 의화단사건과 함께 시작되어 혁명과 내전과 일본의 군사점령으로 이어진 격동과 혼란의 시기였다. 1900년 중국은 황제의 지배 아래서 농업경제에 의존하고 있었다. 중국의 국내 정치는 반봉건적 소수 독재세력에 의해 지배되었고, 대외 관계와 경제의 현대적 부문들은 서양 점령세력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오늘날 중국은 세계 주요 강대국 가운데 하나이다. 국내 정치는 불안하지만, 중국은 엄연히 주권국가로, 갑자기 싹트고 있는 민족주의와 경제의 현대화와 아시아의 문제들을 지도하는 위치로 부상하고 있다.
나는 운 좋게도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에 한 번, 1950년대에 한 번, 중국을 두 차례나 다녀올 수 있었다. 그 뒤에도 중국에 가려고 시도해 보았으나(1967~1968년에), 처음에는 워싱턴 국무성의 방해 때문에, 나중에는 중국의 영사관과 대사관들을 통제하고 있는 홍위병의 방해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57~1958년 겨울 한 달 간 체류하는 동안 나는 1927년 처음 갔을 때와는 판이하게 달라진 중국을 발견했다. 30년 전에 만연했던 사회혼란을 공산주의자들이 일소해 놓은 상태였다. 모든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제공되는 교육이 급속히 확산되고, 공업화가 열심히 장려되고 있었으며, 공장들은 새로운 기계들을 사용하고, 고안하고, 생산해내고 있었다. 농업과 상업과 수공업 분야의 협동조합들이 중국 경제의 중요한 특징이 되어 있었다. 농업과 상업과 수공업 분야의 협동조합들이 중국 경제의 중요한 특징이 되어 있었다. 해방 이후 토지와 다른 국가 자원들과 공익 설비들이 인민의 재산이 되어 있었다. 풍부한 에너지와 이상주의와 열심히 분투하는 모습 등이 그 시절 중국의 분위기를 말해 주는 상징들이다.
소비에트는 과학, 기술, 재정 면에서 중국을 최대한으로 원조했다. 실제로 수백 건의 프로젝트에서 소비에트 전문가들이 기술을 제공하는 가운데 중국 견습생들이 신기술을 배우고 중국 노동자들은 인력을 공급하고 있었다. 수많은 중국 학생들이 소련으로 건너가 연구소와 대학에서 공부하는 한편, 새로 얻은 지식을 소련의 생산업체에서 실습했다. 헬렌과 나는 장기간의 소련 체류 후에 중국으로 갔기 때문에, 사회주의 건설에 착수한 두 대국의 합동 후원 아래 진척되고 있는 이 가슴 뿌듯한 협력 프로그램의 양면을 볼 수 있었다. 2년 뒤인 1960년, 두 거대 사회주의 국가간의 협력사업은 돌연 끝나고 말았다. 소련 기술진이 중국에서 철수하고, 중국 학생들은 소련을 떠났다. 그렇지만 1951년에서 1960년 사이에 중국의 사회주의 건설은 놀랍도록 약진했다. 1960년 이후 과학과 기술의 현저한 발전은 중국인들의 에너지와 능력이 일구어낸 성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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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뵈요^^* 책을 읽어 가는 동안 우물안 개구리... 우물안 개구리....를 수도없이 외치게 됩니다 너무나 아는 것이 없고 그 좁은 지식을 마냥 다 인것처럼 생각해 왔던것... 저는 다시 15년 전으로 돌아가 다시 하나씩 새로 정리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시절 저는 그저 사회주의는 망했다고 우리의 대안을 찾는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었고, 교회를 다녀보았지만 도통 대안은 없어 보였습니다 또한 우리나라는 이제 노동자가 귀족화되고 있다는 말에 반박할 아무런 말도 준비하지 못했었기 때문에... ^^ 좋은 저녁 되세요 참 날씨는 많이 풀렸네요 두레박의 거국적 사업인 '함께 맞는 비'의 첫걸음 공지가 나온날이기도 하네요 낼 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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