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명(권현희).hwp
1. 소명 : 궁극적인 존재 이유
나는 이 책을 엄마가 사주셨는지 까먹고 있었다. 커버를 열자 눈에 익은 글씨가 들어왔다.
현희가 선생님이 되어 기쁘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은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
그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을 누리는 삶이 되기를 축복하며
2006. 3.21 엄마 씀
저자는 주유소에서 나눈 불과 10분 정도의 대화로 자신이 목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과연 ‘종교적인 특정 구역 속에서 익사할 위험’ 가운데 처해 있는 건 아닐까? 비슷한 구역 안에서 살고 있더라도 늘 의식 있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리라.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성취하고 싶어 하는 갈망이 있단다. 내 인생보다 더 큰 목적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 살아갈 수 있어 참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2. 진정한 추구자는 그 어디에
처음에 ‘추구자 자신이 오히려 추적되고 있다’는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러나 추구에 담긴 비밀이 우리 인간이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데 있음을 읽은 후 그 말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그분께 소명을 받고자 애를 쓰지만, 실제로는 정작 하나님께서 우리를 애써 찾으시고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나는 이미 하나님께 추적당하고 있으며 그분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 잘 느껴지지 않는 순간일지라도.
3. 나는 누구인가?
최근 <시크릿>이라는 책을 읽으며 <긍정의 힘>과 무엇이 같고 다른지 생각에 잠겨있던 차였다. 정체성에 대한 세 가지 관점 중에서 두 번 째 것과 무척 유사하다고 여기면서 잘못된 용기와 의지력에 관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또한 운명이 사전에 결정되어 있다는 세 번 째 관점에 대한 오해도 다시금 풀 수 있었다. 내 자신에 대해서 불확실한 것들이 살아 갈수록 많아지지만, 하나님 안에서 그 분의 부르심을 좇을 때 진정한 자아가 될 수 있단다. 정체감에 대해 더 이상 고민하느라 시간을 흘려버리지 않고 그저 잘 좆아 가야 되겠다.
4. 모든 사람, 모든 곳, 모든 것
세속적인 것을 폄하하고 영적인 것에 몰두한 ‘카톨릭적 왜곡’에 대한 내용이었다. 카톨릭적 왜곡과 개신교적 왜곡 중에서 나는 주로 어떤 쪽으로 편향되기 쉬웠는지 돌아보니, 균형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기우는 배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는 과연 중심을 잘 잡고 일차적인 부르심에 대한 반응으로 이차적인 부르심을 잘 성취해 드리고 있는가? 이차적인 부르심을 잘 파악하고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이 맞을까? 우선적으로 일차적 소명 안에 있기 때문에 내가 어떤 이차적 소명을 가지더라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을 누릴 수 있다.
5. 하나님에 의한, 하나님을 향한, 하나님을 위한
이 장을 읽으면서 ‘일 중심과 관계 중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나치게 일 중심인 사람은 멋없이 딱딱하기에 그런 사람과 시간을 보내다 보면, 내가 기능적으로 이용당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반면에 지나치게 관계 중심인 사람과 지내다 보면, 그의 어떤 ‘빈틈’이 탁월한 인간미로 완벽하게 채워질 수 없음을 보고 실망하고 지칠 때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유일한 목적이 하나님을 만족시키는 것이지 그분을 위해 어떤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란다. 내가 무엇을 아주 잘하게 되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지낼 때는 항상 관계 중심이어도 되겠다.
6. 당신에게 걸맞는 일을 하라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 몇 가지 있다. 그러나 그 길로 가려면 또 돌아가야 되고 그래서 시간이 걸린다. 그래서 차라리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잘 하도록 노력해야겠다고 그 일에 대해 잊어버리려고 애를 쓴다. 대학생 때 누가 내 비전에 대해 물으면 항상 ‘텐트 메이커’라는 답을 하곤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것은 일차적 소명에 올인 할 때 느낄 수도 있는 궁핍함에 대한 두려움을 교묘하게 피할 수 있는 답이 아니었나 싶다. 사실 나는 아직도 내게 가장 걸맞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제너럴리스트가 아니라 스페셜리스트가 되고 싶은 마음도 있다. 존 콜트레인이 32분의 연주를 위해 그의 생애를 살아온 것처럼 나에게 올 그런 때를 지금부터 기대하며 준비해야겠다.
7. 역사상 가장 거대한 도전
어려운 장이었다.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한 가장 큰 도전은 바로 문화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따라 살고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병적일 정도로 사회로 소외되어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학생 때, 씨는 교회 안에서 실컷 뿌리면서 거두는 열매는 교회 밖이기를 기대했던 나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나는 요즘 그리스도인으로서 역사상 거대한 도전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중심을 잘 잡고 서 있어야겠다.
8. 하나님을 진정 하나님 되게 하라
나는 편의 위주의 시대에 걸맞는 달콤한 복음에만 익숙해 있는가, 혹은 단호한 하나님의 소환에 훈련되어 있는가?(p.111) 이 질문을 대할 때,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때로는 너무나 편하게 반응하고, 순종도 나의 자유의지에 따라 선택 가능한 것처럼 여기는 내 모습을 떠올려본다. 하나님께서 진정 하나님 되시도록 하나님을 경외하는 나의 마음 중심을 회복해야겠다.
9. 유일한 청중
사람은 누구나 존경하는 대상에게 그만큼 신경을 쓴다. 여러 위인들의 생애 가운데 하나님만을 유일한 청중으로 모셨던 예를 많이 확인하였다. 나는 간혹 부모님으로부터 너무 남을 기쁘게 하려는 행동 때문에 정작 내 자신이 피곤해지지 않도록 주의를 자주 받곤 하였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차츰차츰 스스로 깨닫기도 하였다. 사실 요즘처럼 남의 이목으로부터 자유로운 적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이때가 하나님만을 나의 유일한 청중으로 모시기 좋은 때인 것 같다. 10장과 이어지는 것 같다.
10. 불꽃 같은 인생
나도 나의 유일한 청중을 위해 나의 최대 잠재력을 이끌어 내고 싶다. 내게 소명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 ‘하나님 나라의 큰 그림 속에 내가 그려야 하는 부분의 그림을 잘 그리고 또 내 주변의 그림을 잘 그리도록 도와주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그런데, 어쩌면 이 답을 하는 나에게 언젠가부터 나 자신의 최대 잠재력보다는 내가 다른 사람의 잠재력을 인정해고 이끌어내면 된다는 교사의 입장에만 집중하면서, 내 자신이 도달해야할 최대한도에 대한 열정에 대해서는 조금씩 포기하기 시작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 회복되길 원하고, 나 자신의 최대한도에 대한 열정을 회복하고 싶다.
11. 책임성 : 과연 누구에 대한 책임인가?
지난 주말 기차를 타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기차표 개찰구에 표를 넣지 않아도 얼마든지 그곳을 지나 기차를 탈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단지, 무임승차 발각 시에는 몇 배의 벌금이 부과된다는 안내만 있었다. 이것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였으리라고 생각 되었다. 하벨이 말한 것처럼, 이것의 차이는 단지 우리의 양심과 성장 배경 이상인 것 같다. 아무도 보는 이가 없을 때 나의 진정한 책임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소명을 떠나서는 반응하는 것도 책임지는 것도 있을 수 없다’라는 말이 가슴에 남는다.
12. 소명의 사람들
이 장은 소명의 공동체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 개인주의적 성향에 저항하면서, 정기적이고 신실한 예배에 헌신하면서, 그리고 끊임없는 개혁을 이루는 가운데 공동체적 소명을 붙든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날마다 싸우는 싸움 중 하나인 것 같다. 나의 소명이 이러한 공동체적인 소명 안에 있는지 점검해본다.
13. 그 도를 따르는 자들
학기 말 포트폴리오에 들어갈 학생들의 신앙고백서를 읽으면서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정작 기독교인들로부터 생긴 오해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게 된 계기가 됐는지 보고 놀랐다. 기독교, 그리스도인, 기독교 라는 세 용어가 평생 따라다닐 때, 그 안에 숨어있는 책임감에 걸맞게 살아가야겠다는 부담감이 든다. 날마다 그 도를 따라 본향으로 걸어가는 삶의 여정, 그 끝을 아는 나의 여정은 참 복된 것 같다.
14. 고상한 마음이 짓는 탁월한 죄악
자존심의 유사어가 다음 같이 열거하고 있다. 이기심, 교만, 방자, 자기 본위, 허영심, 자고함, 건방짐, 자랑, 잘못된 자부심, 자기 만족, 자기 중심주의 등등. 유일한 청중 앞에 살면서도 그 청중이 하나님이 아닌 우리 자신일 때 그런 죄악에 빠지기 쉽다고 하고 있다. 화려한 타이틀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나의 삶을 살며, 후에 천국 문 앞에 섰을 때, ‘하나님의 자비를 겸손히 구하는 불쌍한 죄인 권현희입니다’ 라고 고백하는 낮은 마음 가진 자 되어야 겠다.
15. 네게 무슨 상관이냐?
질투는 경쟁의 요소를 도입함으로써 소명을 타락시킨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질투는 영적인 죄악이라고 언급되고 있다. 모차르트와 살리에리의 예에서 보듯이, 나 또한 비교의식에 빠져서 열등감과 우월감 사이를 시계추 같이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두 달란트를 받았을 때 다섯 달란트보다 적게 받았지만 그것을 활용하여 더 많이 남길 수도 있을 터인데, 남들이 더 많은 달란트를 받고 쓰임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의 것과 비교하고 불평하느라고 오히려 시간을 소모해 버리는 것 같다. 누가 어떻게 되든지 내 소명 가운데 충실하고 내 은사 가운데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그런 나에게 하나님은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를 하실 것이다.
16. 더 많이, 더 많이, 더 빨리, 더 빨리
터툴리안이 말했듯이, “하나님의 것 중에는 사고 팔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다”. 때때로 소명의 진가는 그 사람이 돈의 문제를 떠나서 어떤 선택을 하게 될 때에 판가름 나는 것 같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경제적인 것과 결별할 수 없는 존재이고 나 또한 그러하다. 빠지기 쉬운 유혹과 함정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맘몬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고자 하는 마음과의 싸움일 것이다. 돈의 염려를 내려두고 입히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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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현희 선생님, 바쁜 교직 가운데서도 어머님이 사주신 책 다 읽으시고 소명을 정리하심에 격려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