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어
김 영 희
그날은 퇴근 후 바로 모임이 있어서 콩닥콩닥 즐거운 마음에 한껏 들뜬 기분이었다. 퇴근 시간을 기다리며 긴 하루를 보내고 드디어 일을 마치는 시간이 되었다. 주차해둔 차를 빼서 우회전하는데 덜커덕 차바퀴가 보도블록에 부딪히고 말았다. 열어 두었던 창문으로 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약속 장소가 멀지 않기에 도착해서 확인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약속 장소로 향했다. 주차하고 있는데 먼저 도착한 후배가 반갑게 인사를 해왔다. 바퀴를 확인해 보겠다던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안부를 물으며 함께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동안 밀렸던 수다를 반찬 삼아 저녁을 맛있게 먹었다. 맛있게 먹고 소화하기 위해 함께 걷기 운동까지 하고 나니 시간은 벌써 10시가 다 되었다.
집이 제일 먼 나를 배웅하며 주차장에서 출발하는 걸 지켜보며 인사하던 후배가 “언니! 조수석 뒷바퀴가 찌그러진 것 같은데 차 세워봐.” 한다. 아뿔싸! 아까 차 주차할 때 확인해야지 하고는 깜박한 것이다. 내려서 보니 이미 바람은 훨훨 공중으로 다 도망가고 마치 나이 들어 병든 노파처럼 쭈그러들어 있는 게 아닌가?
보험사에 서비스 의뢰하기 위해 전화기를 들었는데, 어느 보험회사에 가입 했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어찌나 긴장했는지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고, 시간은 벌써 10시를 훌쩍 넘었다. 10여 분 기억을 더듬은 끝에 찾은 보험회사에 서비스 차를 불러 견인해서 다행히 24시간 영업하는 타이어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사무실은 때 이른 더위에 오래된 에어컨이 찬바람을 숨 가쁘게 뱉어내고 있었고, 바닥엔 바퀴벌레가 스멀스멀 돌아다니고 있었다. 한기마저 드는 가게에 있으려니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와 밖으로 나왔다.
타이어 수리를 하고 있던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청년이 바람 빠진 바퀴를 빼내는 걸 보고 있다가 얼마 전에 읽었던 이기주 작가의 「언어의 온도」 중에서, ‘자동차 바퀴의 정식 명칭은 고무바퀴라는 뜻의 러버 휠(rubber wheel)이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왜 다들 타이어라고 불렀을까?’ 하는 의문을 제시하면서 ‘자동차 부품 중 가장 피곤한(tired) 것이 타이어’라고 한 말이 떠올랐다. 자동차가 달리면 쉴 새 없이 계속 굴러야 하는 타이어는 정말 피곤하고 지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 년 전쯤 엄마가 떠나시고 난 후 그 슬픔과 상실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내다 결국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쉬면서 마음을 추스르고 건강도 챙기려고 했었는데, 오히려 더 큰 우울감에 빠져들어 숨 쉬는 것조차 버거웠다. 어쩌면 직장을 다니며 바쁘게 살다 보면 시간이 빠르게 흐르고 슬픔이 잊혀질 것 같다는 주변 사람들의 조언에 다시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짧은 시간 정신없이 몸을 쓰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지역아동센터에 조리사 채용 공고를 보게 되었다. 조리사로서 일한 경력은 없지만, 아이들을 좋아하고 음식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니 사람 구하기가 힘들어서인지 채용되었다. 바쁘게 정신없이 3시간 땀 흘리며 몸을 힘들게 움직여 아이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해주는 그 일이 뜻밖에도 적성에 잘 맞았고 보람도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실수도 안 하고 잘 적응해 석 달쯤 지난 어느 날이었다.
갑자기 오빠가 돌아가셨다는 연락이 왔다. 이른 나이에 지병이 있어 수년 동안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면서도 꿋꿋이 잘 버티어 오던 오빠였다. 황망하고 아득한 마음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엄마가 돌아가신 지 넉 달밖에 안 되었는데…….
마치 지팡이를 짚고 힘겹게 버티고 있던 내게 그 지팡이까지 빼앗아 가는 듯해 주저앉고 말았다.
아직 마음으로부터 오빠를 보내드리지 못하고 슬픈 날들을 보내고 있던 10여 일 후 미리 계획되어 있었던 가족과 여름휴가를 다녀오게 되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지만, 가족과 지내다 보면 허전한 마음이 채워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2박 3일 동안 여행을 다녔다. 여기저기 멋진 풍경을 보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즐겁게 다녔다. 아니 함께 간 식구들이 나로 인해 기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표정은 웃고 있었지만, 마음은 지하 3층쯤에 있는 지하철 물품 보관소에 꼭꼭 넣어둔 채 유령처럼 몸만 잘 따라다녔다.
휴가를 보내고 일터에 나간 첫날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몸은 마치 물에 젖은 솜이불을 덮어쓴 것처럼 무거웠다. 내리쬐는 태양의 열기는 얼마나 뜨거웠는지 아스팔트가 지글지글 끓고 있었다. 더 이상 핸들을 돌릴 힘이 나에게 남아 있지를 않았다. 멍한 상태로 가다가 '쿵! 쉬이익' 차가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차를 세우고 보니 도로에 중앙 분리 철심에 타이어가 찢어지고 말았다. 각도를 10도 정도만 오른쪽으로 돌리면 되었는데 그럴 힘도 마음도 없었다. 바퀴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그 순간에 내 몸에서도 무언가 휘리릭 빠져 그 바람과 함께 공중으로 흩어져 가는 듯했다.
자동차 보험회사에 사고 접수를 하니 견인차가 와서 차를 끌고 갔다. 멍한 기분으로 타이어 가게에 도착해 수리 과정을 지켜보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다시 일하러 왔으면 좋겠다는 전화였다. 전화를 끊고 하늘을 올려 다 보았다.
파란 하늘에 두둥실 흰 구름 사이로 엄마와 오빠가 살포시 미소 지으며, 두 분이 손을 꼭 잡고 한 손을 내게 흔들며 “막내야! 우린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 인제 그만 슬퍼하고 건강하게 잘 지내라."라고 구름이 전해주는 듯했다.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우느라 앙상하게 뼈만 남은 마지막 오빠의 모습이 너무 많이 달려 피곤(tired)해서 평크 난 타이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모습이 자꾸 떠올라 마음이 저려 왔다. 그런 오빠와의 이별을 못 받아들이고 있었던 나였다. 그때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 어쩌면 오빠는 구순이 넘은 노모보다 먼저 떠나지 않기 위해 혼자만의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자식 먼저 보내고 슬퍼하실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버티고 있다가 먼 여행길을 엄마랑 같이 가려고 떠난 것 같다.
더 이상 슬퍼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잘 지내라는 그 따뜻한 손짓을 잊지 않기 위해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채워 나가는 나의 모습을 그린다.
너무 오래 달려 낡아 터져버린 타이어를 새 타이어로 바꾸어 차를 타고 달리니, 마치 새 신발을 신은 것 같다. 나도 새 신발을 신은 듯 마음을 가다듬고 가벼운 걸음으로 출근길에 나선다. 이제 내 마음의 타이어는 어떤 흔적을 남기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