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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42:1-4 , 히6:1-2 상한 갈대와 꺼져 가는 등불
올해 설날을 5일 앞둔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에 있는 재개발 지역에서 철거를 강행하려는 경찰과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이 4 층 옥상에서 충돌해 결국 불이 신나로 옮겨 붙어 5명의 철거민이 사망하고 17명이 부상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강제 진압이라는 거센 야권의 비판에 경찰청잘 내정자는 눈물을 흘리며 옷을 벗었고 추모 집회가 잇따랐습니다. 이 사건은 국회의 방송법 개정안과 함께 전 국민의 이목이 집중된 사건이었습니다.
두 달이 지난 지금 이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 49 제가 끝난 지난 월요일부터 철거가 재개되었습니다.
상가를 기반으로 삶의 터전을 이루던 사람들은 경찰의 폴리스라인을 뚫기 위해 결사적으로 몸싸움을 하다가
포크 레인에 의해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건물을 보며 땅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고 일부는 실신하고 말았습니다. 거기에는 철거민들을 옹호하며 현 정부를 비판했던 야권도 없었고 막강한 언론도 국민적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만 참사가 빚어지기 전이나 후나 나아진 보상 없이 삶의 터전을 잃은 철거민들의 눈물과 절규만 있었을 뿐입니다.
어느 정권 때나 마찬가지로 국가가 시행하는 재개발 사업이 주민들의 저항으로 중단되는 것을 보셨습니까 ?
혐오시설이 아닌 토지공사 수용 계획 하에 있는 재개발지가 민원 발생으로 취소되는 것을 보셨습니까 ? 그런 일은 단 한건도 없었습니다.
국가의 계획, 공권력 집행은 확정 고시가 되면 개개인의 이해와 편리와 상관없이 진행되더란 말입니다.
저는 이 모습이 바로 인간의 실존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 필연적으로 인생은 이 세상에서 철거를 당합니다.
한번 죽은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이것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하나님이 정하신 막강한 법입니다. 때가 되면 죽음의 철거대원은 허락이나 동의 없이 들이닥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인생을 끌고 갑니다.
인생에게 내려진 사망의 법이 집행될 때는 사정이 없습니다. 정해진 때가 되면 하나님의 공권력은 어김없이 집행됩니다.
인생들은 자신이 영적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육신의 삶만이 전부인 줄 알고 세상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삽니다.
우리의 매달 소득은 새벽부터 출근하여 저녁 늦게까지 열심히 일한 한 달의 인생과 바꾼 것입니다.
그 돈으로 가족이 먹고 쓰는 문제를 해결합니다. 계산해보면 목숨을 400 번 정도의 한 달 소득과 바꾸면 육신은 철거를 당합니다.
돈은 중요합니다. 중요하기에 사업을 하던지 직장 생활을 하던지 우리는 내 생명을 다달이 돈과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열심히 일하다 몸이 피곤하여 병원에 갔더니 중병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때 의사에게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살려만 달라고 아무리 애원하지만 해결할 수 없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자에게 돈은 무용지물입니다. 사람이 죽음 앞에 서면 돈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배움으로 살아갑니다. 열심히 공부해서 나이 40에 박사 학위를 받습니다.
박사라는 지위를 얻기 위해 40년의 인생을 사용하고 또 박사라는 지위가 또 그를 30 년간 부려 먹습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죽음이 찾아옵니다. 그 때 박사라는 지위는 목숨을 일분도 연장해 주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을 얻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권력의 달콤함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그 권력이 자기 인생을 하루라도 더 연장 시킬 수 있습니까 ? 죽음 앞에서는 무용지물입니다.
인생은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하여 투쟁하지만 결국 얻은 것 같으나 얻지 못하고 그냥 빈손으로 철거당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식을 잘 양육해서 좋은 학교에 보내기 위해 인생을 바칩니다.
그러나 잘 길러 대학 보내고 결혼 시키면 그 다음 부터는 부모를 쳐다도 안보는 자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부모가 자식을 향해 사랑으로 키운 것뿐이지 자식에 대해 기대할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
자식은 부모에게 육체적 고통, 정신적 고통만 줄 뿐 부모의 고통을 나눌 수 없고, 부모의 목숨을 일분도 연장해 줄 수 없습니다.
부지런히 돈 벌고 일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사냐고 물으면 다들 “ 먹고 살려고요” 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나이도 먹으면 죽고 밥그릇도 많이 먹으면 죽습니다. 제일 고등 사기꾼이 밥그릇입니다.
먹으면 산다더니 먹어도 죽습니다. 하루 세끼 꼬박꼬박 먹어야 산다고 했지만 결국 죽습니다.
밥그릇은 한 때의 배를 채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영원히 살게 할 수는 없더란 말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70년 80년 살다가 때가 되면 철거를 당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강력한 법입니다.
인생들이 조금만 삶의 본질을 돌아볼 줄 안다면 그렇게들 허망하게는 살지 않을 것입니다.
인생의 유일한 목표는 예수 잘 믿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철거당할 때 옮겨갈 영원한 천국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는 인생은 착하게 살지 않을 수 없고 아름답게 살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잘 믿는 것 그것이 인생의 목표여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전 인생하고 맞바꿔야하는 중요한 일입니다.
세상의 유물주의는 휘몰아치는 태풍과 성난 파도같이 인간의 삶과 마음과 생각을 잔인하게 믿음으로부터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는 일 년을 살면 일 년을 철거당하고, 십년 살면 십년 철거당하고 오십년 살면 오십년 철거당하고, 마지막 숨질 때는 모조리 철거당해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지금도 죽음의 녹이 쓸고 있습니다.
저는 철거당하는 사람들을 많이도 지켜보면서 생명의 철거만큼 진지하고 두려운 일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압니다.
예수를 믿어도 마지막 철거의 현장 앞에 서면 두렵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금주에 잠시 인천에 다녀왔습니다. 저게 많은 사랑을 주셨던 94세 되신 권사님이 올 초부터 건강이 나빠지셨는데 저를 보고 싶다하시기에 바쁜 시간 내서 다녀왔습니다. 권사님이 제 손을 꼭 잡고 인사를 이렇게 하십니다.
“목사님 이제는 다시 못 볼 것이구만요. 이제는 못 볼 것이구만요.” 그러시면서 움푹 패인 눈에 눈물이 고이십니다.
“권사님 이 땅에서는 못 보지만 이 다음에 우리 천국에서 보잖아요. 권사님 잘 가셔요.” 그리고 축복기도 해드렸습니다.
요단강을 건널 때 지옥의 사자가 아닌 천국의 사자들의 의해 들림 받아 천국으로 이사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고 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제 철거반원들이 들이 닥칠지 모릅니다. 죽음의 철거반원은 항상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우리가 운전할 때나 잠잘 때나 일할 때나 어디에서도 우리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믿음으로 살아가며 죽음의 철거반원이 갑자기 들이 닥치지 못하도록 깨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잘 믿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곳곳에 숨어 있는 지옥의 철거반원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다시하번 예수 잘 믿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사명이 끝나는 날 천국의 철거반원들에 의해 당당히 천국으로 이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인생이 무엇이며 이 인생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먼저 읽은 이사야서 3 절 말씀을 보시면 인생을 상한 갈대라고 말씀을 해주고 있습니다.
땅 중에서 갈대가 자라나는 땅은 황무지이며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버려진 땅입니다.
갈대는 좋은 경치를 제공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농사짓는 사람에게는 가장 보기 싫은 풀 중의 하나입니다.
쓸모없는 땅에 아무짝에도 쓸데없이 나는 것이 갈대입니다. 거기에다 갈대가 상해 있으니 이것은 저주받은 모습입니다. 쓸모없는 땅에 쓸모없는 갈대에 상한 모습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입니다.
저주받은 땅에 저주받은 인간에게 무슨 희망이 있습니까 ? 오직 죽음뿐이지요.
인간의 또 다른 모습은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기름이 없어 꺼져가는 등불은 마지막으로 심지를 먼저 태웁니다. 거기에는 매퀘한 냄새와 끄을음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지구를 인간들이 개발이라는 끄을음으로 더럽히고 환경 파괴를 일삼아 지구가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인간이 품어내는 그 독으로 세계는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 지구상에 인간만 없어지면 지구는 깨끗해질 것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상해 버린 갈대는 꺽어 내면 그만입니다. 끄을음 나기 전에 심지는 눌러 꺼버리면 됩니다.
철거해 버리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상한 갈대를 꺽지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겠답니다. 왜요?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누구든지 멸망치 않게 하려하심이라
세상을 사랑하시고 인생을 멸망치 않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꺽이지 않고 꺼지지 않고 있는 겁니다.
우리는 가끔 이것을 잃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떳떳해 지려고 합니다.
성하고 쓸만한 갈대이고 기름이 채워진 등불처럼 그런 자리에서 신앙을 시작한 줄 압니다.
아닙니다. 인생은 모두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 그 자리에서 신앙을 출발하여 성한 갈대로 기름이 채워져 갈 뿐입니다.
유난히도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태어난 어느 동네에 나그네가 방문하여 마을의 촌장에게 물었습니다.
‘이 마을은 어떻게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태어났습니까? ” 촌장의 대답은 뜻밖에도 “ 어린아이들만 태어났을 뿐입니다. ”
그렇습니다. 아무도 태어날 때부터 훌륭하게 태어나지 않습니다. 모두 제 앞가림 못하는 핏덩이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수십 년의 자라나는 과정을 거치며 훌륭한 인물로 만들어지기도 하고 반대로 쓰레기 같은 인간이 되기도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이 바로 그렇습니다. 출발의 자리는 상한 갈대요 꺼지가고 있던 등불이었습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앞에 있는 목사도 태어날 때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저를 잘난데서 거룩한데서 부른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과 똑같은 자리였습니다. 아니 어쩜 여러분들보다 더 못한 자리였습니다. 여러분은 제 고민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감당 못해서 밤을 설쳐야 하고 말은 해야겠는데 어떻게 전해야 할지 쩔쩔매야 하는 고민을 아십니까?
저의 약한 심성과 부족한 역량을 가지고 하나님이 저에게 시키는 그 분의 뜨거운 사랑과 그 분이 우리에게 갖고 계시는 안타까움을 어떻게 대변해야 될지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울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성도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듣고, 어려운 이야기를 듣고, 기가 막힌 상황을 볼 때마다 그걸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겁니다.
산에라도 올라갔다 와야 간신히 견딜 수가 있습니다. 제 솔직한 이야기를 이해하시겠습니까?
목사는 분명 성도들 앞에 하나님의 대표자입니다. 신성한 일의 대표자입니다.
그래서 훨씬 신앙적으로 완성과 완벽한 모습의 상징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잘못을 해도 목사는 잘못을 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 말을 해도 남보다 다른 사람, 언행과 심성이 다른 사람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지만 또 다른 메시지를 보여 주어야 할 대표자입니다.
즉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 중에 조건이 나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꾼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걸레같은 자리에서부터 출발된 사람인 것을 기억케 하는 사람으로서 솔직해야 하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 하나님의 부르심은 좌절이나 포기가 없다는 것을 기억케 만드는 장본인이어야 합니다.
‘저 또한 걸레 같고 시궁창 같은 자리에서 출발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여러분들도 오십시오. ’
그것을 보여주고 권면할 수 있어야 하는 삶의 메시지가 목사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보여주면 목사가 영력이 없고 믿음도 부족하고 인격도 안 된다고 오히려 실족해 버립니다.
목사의 약함을 보여 주면 그것 때문에 더 신앙에 도전을 받아야 하는데 “ 목사님이 뭐 그래”이래 버리니까
그래서 목사가 고민이 있고 갈등이 있고 긴장이 있습니다.
신앙의 첫 걸음은 도덕도 아니고 윤리도 아니라 오직 믿음입니다.
상한 갈대를 꺽지 않고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기대는 믿음이 출발입니다.
상한 갈대인 나 대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꺽이셨습니다.
꺼져가는 심지인 나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마지막 피를 다 흘리셨습니다.
꺽어 버려도 되고 꺼뜨려도 되는 걸레 같은 나를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꺽이시고 꺼뜨리심을 당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영광을 쫒아가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된 권세로 살게 하시며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복된 자리로 우리를 값없이 초청하셨습니다.
상하고 기름 떨어진 우리를 철거하지 않고 복된 자리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 주셨단 말입니다.
그럼 뭐 하시려고 걸레 같은 우리를 불러 주신 것입니까 ? 그것이 뒤에 읽은 히브리서 6장의 말씀입니다.
죽은 행실을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게 하려는 목표 때문에 불러 주셨답니다.
누구나 예수를 처음 믿는 그 순간 죽음과 저주의 속박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영원한 자녀가 됩니다.
그러나 수준은 아직도 비참합니다. 아직도 저주받은 상한 갈대수준이요 꺼져가는 등불입니다. 신분만 바뀌었을 뿐 수준은 그대로입니다.
예수를 믿는데도 상처가 있고 미움이 있고 아픔이 있고 갈등도 그대로 있습니다.
여전히 독한 생각과 말과 행동이 베어 나오고 남도 괴롭게 합니다. 이것이 죽은 행실입니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데도 착하지 않고 남들이 보기에 “ 예수 믿는데 뭐 저래” 이 수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은 행실인 상한 갈대와 꺼져가는 심지 수준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수준인 완전한 데로 나가라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 된 수준은 무엇입니까 ?
상한 갈대를 꺾지 않으시고 꺼져가는 심지를 끄지 않으신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된 수준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대신 꺽어지고 피를 흘려 나를 성하게 했으니 나도 그 자리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신앙입니다.
구체적으로 원수를 사랑하는 수준입니다. 원수를 생각하면 설날 먹은 떡국이 넘어올 정도지만 그를 위해 축복해 주는 수준입니다.
왼뺨 맞으면 상대방을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더 때릴 수준에서 오른 뺨 대줄 정도까지 나아가는 수준입니다.
겉옷 빼앗으려면 속옷 까지 벗어 줄 수 있는 그 수준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한번만 용서 해 주고 거들 먹 거리지 말고 7번씩 70 번을 용서해 줄 정도의 수준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수준으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 에베소서는 예수님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셨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섬기는 같은 믿음으로 형제가 된 교회 안에서 부터 원수를 사랑하는 그 수준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라고 주님께서 친히 교회의 머리가 되신 것입니다. 그런데 속상하게도 우리는 이 수준으로 나가려 하지 않습니다.
다른 성도에 대해 조그만 일에도 틀어지고 작은 일에 상처 받고 잘되는 꼴을 못 봐주고 사소한 일에도 화를 냅니다.
왜 그렇게 미운 사람이 많고 못 마땅한 사람이 많은 줄 모릅니다.
그래서 얼마나 많은 교회가 분쟁을 겪고 있고 또한 얼마나 많은 성도의 가정이 고통을 당하는 줄 모릅니다.
이것이 바로 죽은 행실입니다. 여전히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로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상함을 고치는 소금이요 세상을 환히 밝히는 교회여야 하는데 오히려 교회가 더 상해있고 더 끌을음만 피웁니다.
요한 계시록에 있는 7곱 교회를 향해 하나님은 분명히 말하잖아요. 니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 결국 죽은 행실을 버리지 못하자 찬란했던 초대 교회는 역사의 무대에서 철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죽은 그 수준을 넘지 못하면 결국에는 내가 꺽이고 내 등불이 꺼져 버립니다. 왜냐면 상함과 꺼져감은 곧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은 시간이 얼마나 되었나요? 그런데 아직도 감정이 상하고 마음이 상해 있습니까 ?
서운하고 불만입니까? 신앙의 심지는 있는데 충성과 헌신을 위해 타오를 기름이 없습니까 ? 사랑이 없습니까 ?
그럼 아직 우리는 아직도 살았다 하는 이름만 있지 실상은 죽을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출발도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철거당할 시간은 가까워 오는데 아무것도 준비한 것이 없는 것입니다.
영광된 마지막 결승선을 바라보며 전력 질주해야 되는데 출발선에 앉아서 어리광만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 안에는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여식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몇 번 가보더니 어느 날 그러는 겁니다. “ 아빠 배울 것 하나 없다. ”
학교 들어가기 전에 한글 다 뛰고 두 자리 더하기, 빼기까지 다 했으니 시시할 수 밖에요.
그러더니 3학년이 된 요즘은 죽을라 그럽니다. 왜요 더하기 빼기 뿐만 아니라 곱하기 나누기 다하잖아요. 정신 없는 겁니다.
우리 신앙이 주일에 성경책 들고 교회만 오는 것으로 끝나면 배울 게 없어요. 예수 믿는 의미도 없습니다.
그러나 정말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고 축복 받으려고 한다면 죽을 각오로 달리지 않고는 안 되는 겁니다.
하루아침에 거룩한 수준으로 저절로 올라가는 것이 아닙니다. 힘써야 올라갑니다. 죽은 행실을 버리기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엄청난 자기 절제와 경건의 연습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영광스런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어려워도 그 자리로 가야 합니다. 죽은 행실을 버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복된 자리로 가야 합니다.
죽은 행실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 갈 수 없습니다. 지금 내 자리가 어디에 있는지를 보십시오.
상한 갈대수준이요 꺼져가는 등불입니까 ? 빨리 그 자리에서 도망하십시오. 철거반원이 들이 닥칠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신 영광된 자리로 빨리 가셔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 믿는 것이요 그것이 사는 길입니다.
주일 날 예배 봐주고 헌금 바쳐 주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믿음의 책임을 다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상하시고 꺽이신 것은 나의 죽은 행실 고치고 하나님 닮은 자녀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럼 그리로 가야 합니다. 그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정말 성도다운 아름답고 영광스런 수준의 자리로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책임입니다.
제가 이 설교를 정확하게 4 년 전에 했습니다. 그 때 이 설교를 들으신 분이 여기 몇 분 계십니다.
그 때 상한 갈대에서, 꺼져가는 등불에서 절망과 죽음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성해지셨고 채워지셨습니다.
그 때의 수준과 지금 있는 수준이 바뀌었다는 것을 여러분의 양심과 삶이 증거하고 있습니다.
오늘 교회에 처음 나오신 분들이 계십니까 ? 여러분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도와주십시오. 제가 꺼져가고 있답니다. 꺽여가고 있답니다. 제발 저를 도와 주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꺽지 않고 끄지 않으시려고 오늘 이렇게 불러 주셨으니 도와 주십시요, 살려 주십시오가 나와야 합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신앙은 인격 도야나 정서함양 정도가 아닙니다.
신앙은 영원히 죽느냐 영원히 사느냐가 판가름 나는 것입니다. 지옥의 철거반원을 이기는 싸움입니다.
그러니 신앙을 제대로 알고 상한 자리, 꺼져가는 자리에서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매어달리는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이렇게 출발하는 인생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생명으로 축복하시며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하십니다.
이 마음이 없이 출발한 믿음은 아무리 열심히 믿어도 그것은 자기기만이요 , 자기 최면이요 자기 위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 생활오래 하면 필연적으로 이 자기기만과 자기 최면, 자기 위로가 따라옵니다.
처음에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모습은 간데없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뭔가 믿는 것으로 당당해 지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이 도와 주시면 좋고 안 도와 주시면 말라는 식의 배짱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은 행실 버리고 완전한 데로 나아가는 것 또한 걸레 같은 나를 살려달라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겸손뿐입니다.
날마다 내 자신이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이라는 믿음 안에서만 더 높은 하나님의 자녀된 수준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과 교회와 성도 누구 앞에서도 떳떳해 질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제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23년 만에 동창회에 참석했더니 오랜만에 본 친구들이 하나같이 제게 이렇게 묻습니다.
“ 너 정말 목사 맞냐 ? 난 믿어지지 않는다. ”묻는 진의가 무엇일까요 ? 옛날에 목사가 될 구석이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욕도 잘하고 싸움도 잘하고 나쁜 짓만 골라서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목사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너희도 믿어라” 세상은 될만한 사람이됩니다. 쓸만한 사람이 쓰임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한 갈대를 고쳐 쓰시고 꺼져가는 등불에 기름채워 쓰십니다. 믿음의 사람을 축복하십니다.
상한 갈대라서, 꺼져가는 등불이라서 제발 도와 달라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만을 쓰십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지금은 동창회에 나가면 친구들이 제 앞에서 굉장히 조심합니다. 왜요 ? 친구지만 이제 많이 보니까 목사 같거든요. 옛날 그놈이 아니거든요.
집사로 섬기는 여자 친구들은 저한테 말을 놓지 못합니다. 역시 여자들이 신앙이 좋긴 한 것 같습니다.할렐루야
여러분에게 꼭 부탁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세상 앞에서는 믿음 만큼은 더 뻔뻔해 지셔야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내게 “ 예수 믿는 사람이 뭐 그래 ” 라고 내게 말한다면 “ 그래서 예수 믿는다 ” 라고 뻔뻔하게 대답해야 합니다.
수준이 안 되고 한심스런 존재이기에 그래서 좋아지려고 예수 믿는다고 대답하는 것만큼 확실한 대답이 없는 것입니다.
내가 잘난 사람이라서 예수 믿는 것이 아니고 너처럼 형편없기에 예수 믿는다는 것을 솔직하게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베짱입니다. 이 배짱이 믿음입니다.
그러나 마음은 울어야 합니다. ‘아직도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교인인가 ? 내가 아직도 죽은 행실 수준인가?’
한탄하면서 예수님께 도움을 청해야 합니다. 나 좀 도와 달라고 매어 달려야 합니다.
그러나 이런 비통하고 간절한 마음이 없고 떳떳하다면 그 사람은 정말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일 뿐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이 설교를 들으면서 마음속에 나는 상한 갈대요 꺼져가는 등불로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면 여러분은 분명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나 자만하지는 마시고 더 분발하셔서 죽은 행실을 날마다 버리고 더 완전한 수준으로 나아가십시오.
우리 모두 곧 철거될 죽음의 자리를 벗어나 하나님의 자녀 된 수준인 원수 사랑의 수준으로 나아가는 성장의 삶을 시작하시고 더 노력할 수 있는 성도가 되시 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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