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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히드 사건( - 事件, 영어: Lockheed bribery scandals)은 미국의 록히드 사에서 195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까지 항공기를 팔기 위해서 여러 나라에 뇌물을 뿌린 일련의 사건이다. 이 사건은 서독, 이탈리아, 네덜란드, 일본의 정치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국에서는 이 사건의 영향으로 L-1011 트라이스타의 실패로 위기에 빠졌던 록히드가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다.
갑오개혁 실시
1894. 7. 27
김홍집 | 1894년 7월 27일 개화파 인사들을 중심으로 한 갑오개혁이 시작되었다. 내정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군국기무처가 설치되었고, 박정양·김윤식·유길준 등의 개화파 인사들이 개혁사업을 추진했다. 국왕의 권한이 축소되고 의정부가 정치의 중추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청국 연호를 폐지하고 개국기년 사용을 의무화했다. 또한 신분제 철폐, 죄인연좌법 폐지, 조혼 금지 및 과부재가 허용 등 갑오농민전쟁에서 제기된 요구가 반영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내각은 한국 최초의 법령인 홍범14조를 발표하는 등 적극적인 근대적 개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의 간섭이 더욱 심해진 이후 개혁은 거의 일본의 뜻대로 진행되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박찬승의 한국근현대사 연구실은 근현대사 논문을 통해 갑오개혁 전후의 역사적 배경을 설명한 자료를 제공한다. 원광대학교 사학과 홈페이지는 갑오개혁의 내용과 의미에 관한 자료를 제공한다. 인터넷 스쿨 홈페이지는 갑오개혁을 통해 갑오개혁 법령과 홍범14조의 내용을 소개한다. 한 개인 홈페이지는 갑오개혁 때 추진되었던 행형제도의 개혁 내용을 정리한 근대적 행형의 탄생을 제공한다.
6·25전쟁 휴전협정 체결
1953. 7. 27
휴전회담 조인식(1953. 7. 27) | 1953년 7월 27일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었다. 6·25전쟁은 중공군이 개입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압도당한 국제연합(UN)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1951년 1월말 방어에서 공세로 전환해 서울을 재탈환하고 북진을 계속했다. 이후 UN군측과 공산군측은 전쟁의 제한에 관한 묵시적인 합의하에 상호 대공세를 피함으로써 전선의 이동이 없는 진지전의 형태로 전환되었다. 1951년 6월 23일 UN 주재 소련 대표 Y. A. 말리크가 미국 라디오 방송을 통해 38˚선을 경계로 전쟁 이전의 위치로 복귀할 것을 제의하면서 휴전회담이 시작되었다. 전쟁포로 교환 문제, 양측의 경계선 문제 등에 이견을 보이다가 1953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새 정부가 들어서고, 소련의 지배자 스탈린이 사망하면서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결국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과 북한의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및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사이에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휴전협정의 실시를 감독하기 위해 군사정전위원회가 설립되었다. |
관련 인터넷 링크
[한글 사이트]
<월간중앙>은 기사 '남북접촉 막전막후 500일 드라마'를 통해 휴전협정 이후 남북관계 일지를 소개한다. DMZ에 심는 나무 홈페이지는 휴전협정 조인의 상황을 자세하게 묘사한 글 'DMZ의 사회학적 접근과 이해'를 제공한다. 그밖에 WhoFind에서 제공하는 1950~55년 한국사 연표를 통해 6·25전쟁의 전개와 전쟁 전후의 주요 사건들을 살펴볼 수 있다.
[영어 사이트]
Oklahoma Internet Online의 한국전쟁 사이트는 한국전쟁의 간략한 연대표와 당시 UN군 참전상황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한국전쟁 프로젝트 사이트는 잊혀진 DMZ 등 다양한 관련 자료를 제공한다. Park Net은 한국전쟁 참전군인 기념 사이트를 통해 한국전쟁 관련행사 등의 정보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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