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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은 행사가 많은 달이기는 한 가 보다.
산에 오르기 좋은 기온에 꽃까지 만발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인원이 많아야 할 것 같았던 산행이, 50여 인 신청에서 줄줄이 취소를 하더니
회장인 박ㄱㅅ씨와 사무국장인 박ㅌㅅ여사까지 불참해서
차에 오른 사람은 40인 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박스 하나를 슬며시 점령하고 맞은 자리를 건너다 보니
김ㅈㅅ씨도 혼자서 박스를 차지하고 있었다.
김씨는 김ㄱㅅ여사의 남편으로 부인 대신 참가했기에
산악회의 12번 산행 중 처음이었고, 그 앞자리에는 마을금고 최대리의 부인이
역시 처음 참가해서 해 맑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맞음편 자리의 우ㅈㅇ여사와 너무 다정하고 얼굴도 닮아 보였기에 어떤 사이냐고 물었더니,
우여사가 자연스럽게 딸이라고 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사실은 의모녀라고 해서 정말 홉사한 이미지에 다시 놀래졌다.
버스는 오랫만에 경부고속도로로 달렸지만
그간 거의 이용하던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와 별로이 다를 것은 없었다.
우리나라의 도로변에 가장 많이 심긴 나무는 벚나무 인것같다.
특별히 군락을 이룬 곳은 없었지만
메비우스의 띠처럼 끝없이 계속 되는 길가에 활짝 피어있었다.
좌석의 빈자리가 있다는 것은 허전한 일일 수도 있으나
실제로는 활동이 자유로운 공간이 있다는 것이다.
쾌적한 자리에 보기만해도 흥겨워지는 창밖의 봄 품경이
휘파람이라도 불고 싶을 기분이었기에 3시간의 버스 여행은 긴 시간이 아니었다.
목적지인 창녕군 고암면 옥천리에 도착한 시간은 10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꽃터널을 이룬 동학사 등의 입구와는 달리 등산입구엔
벚나무 몇그루가 동구 밖의 풍경처럼 한가로이 피어 있을 뿐이었다.
다른 어느 곳보다 긴 포장길이었다.
버스 속에서 회장불참으로 인사한부회장 김ㅇㅈ씨 뒤에
"꽃이 좋다니 천천히 가며 구경하자"고 부탁을 한 탓인지.
장상무가 선두에 섰고,
늘 선두에서 섰던 이ㄱㅈ대장과 김ㅇㅈ부회장이 후미에 섰기에 행보는 느렸고 여유로왔다.
입구에서 500미터 쯤 지나자 작은 다리가 나왔고, 다리에 서서 올려다 보니
모퉁이를 돌아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층층히 돌을 쌓은 시내가 보였다.
깨끗해 보이기는 했지만 너무나 인위적이었기에 그렇게 까지는 하지 않았겠지만
돌을 쌓을 때, 세멘트가 쓰여졌을 것 같은 생각까지도 들었다.
거기서도 포장길 이기에 평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는 길이 계속 되었고,
길 아래로는 시원한 그늘이 드리운 곳도 있었으나
자연스럽게 놓여있는 바위 밑으로 웅덩이를 이루며 맑은 물이 흐르는 아늑한 길은 아니었다.
그저 잘 정리된 냇물이 있을 뿐이었다.
관룡사까지는 그런 길을 허가 된 차량이 오가는 길이었고,
나는 "내일은 절대로 오늘 보다 젊은 날일 수가 없고, 여생의 가장 젊은 날인 오늘에 사진도 많이
남기고, 즐겁게 보내자"는 말을 하면서
진부한 말이어도 동조를 해주는 여사님들과 재잘 거리며 올랐다.
관룡사에서 고개를 들어 보니 바위를 세우고 늘어 놓아
병풍 같은 벽을 만들어 놓은 듯한 바위산이 보였고, 그것이 관룡산이라고 했다.
거기 부터는 세멘트길이 끝나고, 전형적인 산 길이었다.
특별히 기이하게 생긴 바위도 없는 산엔 우람한 큰 나무도 없었고,
4-5미터 정도 큰 나무 사이로 눈에 띄는 꽃도 피어 있지 않았기에
더욱 평범한 산길 같이 생각되었다.
후미에 쳐져서 따라가기에 바빴던 지난 산행과는 달리
김부회장,이대장,엄ㄱㅇ씨가 천천히 앞 뒤를 오가며 살펴 주었기에 같이 가는 일행도 많았고,
분위기도 화기애애했다. 늘 그 쯤에서 되돌아 가던 김ㅊㅅ씨부부도 결심한듯 따라 왔다.
정상부분인듯 바위길로 들어서는 곳에 약수터가 있었다.
동그란 큰 단지처럼 물받이를 만들어 놓은 곳으로 가는 호스가 삐죽이 나와 있었고,
물이 비교적 힘차게 뿜겨져 나오고 있었다.
손잡이가 있는 프라스틱 표주박에 물을 받아서 들이키니
아주시원해서 다시 한 번 받아서 마셨다. 갈증을 날리는 아주 좋은 물맛이었다.
거기서 부터 길은 가드레일 겸 와이어가 매어 있는 바위길이었다.
한손으로 와이어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스틱 두 개를 몰아 잡으며
힘겹게 올라 가다가 때로는 틈새에 발을 디디며 기어서 올라야 되는 길이었다.
이ㄱㅇ여사가 "이렇게 험한 줄 알았으면 않올라 올걸" 하는 말을
두어차례 했지만 등산로로 개발된 길이 그런 곳이 한두곳 없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역시 약자일 수 밖에 없는 부회장 김ㅅㅅ여사는 자주 쉬었고,
그때마다 나도 같이 주저 앉았다. 그런 나를 보면서
엄ㄱㅇ씨가 "너무 오래 앉으면 일어나기 싫을 수도 있다."고 오래 쉬지 말 것을 권했다.
엄씨는 나보다 6-7세 정도 나이가 적었지만 전혀 힘들어 보이지 않는 체력은
평소의 생활 때문일 것이다. 나는 하루 1시간 정도걷는 운동을 하는 하지만
걷는 길은 평지였기에, 이런 험한 오름 길을 1시간 쯤 오르면 한계에 도달하고 만다.
조금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엄씨는 이 산의 등산로를 설치할 때
가드레일의 와이어를 맨 철기둥을 어깨에 메고 올랐었다고 했다.
그러니 맨몸으로 산을 오르는 것은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리라.
김여사와 나 같은 약자를 고려하지 않고, 능력대로 갔다면
관룡산을 거쳐 화왕산을 향하고 있을 사람이었다.
어느 때보다도 동지애가 느끼졌고, 강자로부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람으로서의
평온감을 느끼는 순간순간들이었다.
이 산이 다른 곳과 다른 것은 나무로 된 사다리 같은 게단이 없다는 것이었다.
등성이에 이르자 전혀 바람이 없는 날씨였으나 맞은 편에서 올라 오는 공기로 시원했다.
사인이 맞지 않아 선두는 관룡산의 정상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고 했고,
우리는 거기서 점심 도시락를 폈다.
오늘은 경성식당의 김ㄱㅅ여사가 점심을 마련해서 돌렸기에,
모두 같은 반찬이었지만 1시가 넘은 시간이라 시장기를 느끼고 있어서,
김치와 김의 간단한 반찬에도 잘지은 찰밥으로 맛있는 식사였다.
올라 올 때는 더웠기에 평탄하지 않아도 그늘을 골라 앉았지만
식사가 끝나자 땀이 식어 한기가 느껴졌다.
"추워서 걸어야 겠다"고 전ㅁㅎ양이 일어나자 서둘러 관룡산 정상으로 출발했다.
불과 150미터 정도의 거리였지만 이미 지쳐 있는 다리로 작은 경사에도 힘들었다.
"누가 나를 밥을 먹인거야."하면서 김ㅅㅅ여사가 웃었다.
밥을 먹기 전보다 더힘들었기 때문이다.
관룡산 정상은 가장 높은 곳이면서도 눈을 확 잡아채는 풍경은 없었다.
그간 여러차례의 산행으로 웬만한 것에는 별스러움을 느끼지 못할 만큼
눈이 무디어 졌기 때문일까? 거기서 인증샷이라고 의미를 붙일 사진을 몇장 찍고,
화왕산으로 향했다. 정말 평범한 산등성이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키 이상으로 큰 오래 된 진달래가 빽빽했지만 아직 봉우리를 벌리지 못하고 있었다,
남쪽 지방인 경남이면서도 높은 곳에 있기에 피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쉽지만 산에 오른다고 바라던 풍경이 주어지지는 않는 다는
그간의 산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달래며 내려왔다.
1키로쯤 내려 왔을까? 자동차도 다닐만큼 넓은 길이 나와서 4거리가 되었고,
이대장의 얼굴을 바라보자 직진을 해야 된다고 했다.
그리 크지 않은 나무들이 울타리를 이룬 길을 따라
차가 귀한 시절 이웃 마을에 놀러 가는 것처럼 느릿한 걸음을 걸었다.
비슷한 길이 계속되자 쉴만한 벤치가 있으면 쉬면서 한담을 나누고 싶었지만
지루하다고 느끼는 것은
이미 빠져 버린 다리 힘으로 걷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무거운 발을 옮기던 중, 김ㅅㅅ여사가 원ㄱㅅ여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핸폰을 눌렀지만 통화 가능지역을 벗어났는지 전화가 되지 않는다고 했다.
조금 전의 그 갈림길에서 지름길이 있으면 내려간다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어찌 됐는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모퉁이를 돌아서 다시 전화를 두드렸지만 역시 되지 않는다고 했다.
불안했지만 괜찮을 거라는 막연히 낙관하면서 걷다보니 작은 오르막도 고개였는지
고개마루 부분에 드라마 허준의 찰영세트라는 고옥이 있었고,
사진에서 보이는 건너 편은 사진으로 보던 화왕산이 보였다.
관룡산을 내려 오면서 덜핀 것을 보았는데, 그곳은 햇빛을 많이 보는 지형인지,
진달래가 활짝피어서 보이는 곳 모두를 분홍빛으로 덮고 있었다.
그 장관에 모두의 얼굴에서 와아- 하는 함성을 지르는 듯한 표정이 보였고,
이곳저곳에서 카메라와 스마트폰으로 풍경을 담고 있었다.
몇장의 사진을 찍던 중. 임이사장의 부인이 ㅇㅅ여사가 배낭을 풀고,
먹을 사이가 없었다고 잘라 놓은 사과를 꺼내서 보이는 회원들에게 골구로 나누어 주었다.
"제가 이래서 여사님들을 따라 다녀요. 남자들 아무 것도 가지고 오지 않아서 실속이 없어요."
하고 인사를 하면서 두 쪽을 받아서 입에 넣었다.
이만 때 쯤의 사과나 배는 대개 냉동창고에서 꺼내 온 것이라 싱싱한 맛이 없은 것인데
이 사과는 가을의 그 사과처럼 싱싱하고 물이 많고 달았다.
천천히 걸어서 산성으로 둘러쌓인 화왕산의 성문에 다다랐을 때,
옆에서 걷던 김ㄱ ㅅ씨가 "형님 이제 낯도 익었는데, 모르는 사람처럼 하오를 하지말고
말 놓으세요. 몇년 선배시던데..."하고 말을 했다.
사람이 45세 정도를 넘기면서 부터는 얼굴을 보고 나이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선배들의 얼굴은 기억하지만 후배들의 얼굴은 기억하기 어렵고,
기억하기 어려운 그들 중에는 나보다도 더 나이가 먹어 보이는 사람도 있어서
선뜻 말을 놓기가 어렵다.
산행을 하지 않았으면 그저 데면데면 했을 사이가
또 하나 형아우를 하는 사이가 된 것이다. 산행의 힘을 또 한번 깨닫게 되는 순간 이었다.
김씨는 오늘 여러 곳의 모임이 있었고 다른 한 곳은 이곳으로 온 것을 알면
"그럴 수가 있느냐?"는 비난을 받을만한 곳도 있지만
우리 산악회가 좋아서 이쪽으로 왔다는 것이다.
다른 어떤 자리에서 "이렇게 분위기가 좋을 수가 없다는 말이 오갔지만
정말 우리의 대성금고 산악회는
전국의 어느 산악회보다도 분위가가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성문이라는 곳을 지나자 위로 성벾을 따라서 등성이로 화왕산 정상으로 가는 길이 있었고,
다른 하나는 비스듬히 화왕산 아래로 지름길이 되고 있었다.
거의가 윗 길로 향한 것 같았지만 어쩌다가
뒤에 처진 몇명의 여사님들과 지름길로 들어섰다.
질긴 와이어를 멍석쩌럼 짜서 까페트처럼 깔아 놓은 길 옆으로 숲을 이룬 갈대가
잔 바람에 너울거리고 있었다.
겨우내 눈바람에 시달렸던 억새가 가끔씩 꺾인 채로 퇴색해 있는 모습이,
초겨울이라면 하얀 갈대꽃이 얼마나 멋졌을 까하는 생각이 들게했다.
사실은 갈대의 멋진 풍경을 만들기 위해 갈대 철이 지나면 불을 질러
묵은 갈대를 태우고,새로운 갈대를 키웠다고 했다.
그때 불타는 화왕산이 그야말로 火王 같은 모습였는데,
불태우던 중 사고로 인명 피해가 있고,
갈대 태우기를 중단해서 묵은 갈대가 남아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갈대 밭은 끝에는 내려가는 길이 있었고,
그 길 위로 산에 매달려 있는 듯 보이는 바위가 보였다.
거기 앉아서 윤ㅌㅅ여사의
"나는 지쳐서 죽어도 저렇게 돌아 오지는 못하겠어".하는 말에
맞장구를 치면서 회원들을 기다렸다.
김ㅅㅅ여사는 화왕산 정상을 밟고 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바로 그 아래 길을 가로 질러서 내려 왔다고 했다.
그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이 다시금 감탄 스러웠다.
거기서 회원 모두가 모여졌고, 기념촬영을 한 뒤 산을 내려왔다.
이미 산등성의 평탄한 길에 익숙해져버린 다리에 내려 오는 길은
복병처럼 느낄만큼 뜻 밖의 길이었다.
주변의 돌을 쌓아 계단을 만든 길은 60-70도의 경사를 이루며
지루할 정도로 계속 되었다. 적당한 정도의 길이었다면
내려 오는 마음에 아쉬움을 남기고 왔으련만,
한번 발을 잘못디디면 굴러서 다칠 수 있는 길을 전전긍긍하며 내려 오면서
이 길이 그래도 내리막인 것만을 다행스러워했다.
참 묘한 산이었다.
산의 북쪽은 어떤지 모르지만 우리가 올랐던 남쪽을 향하던 곳은
산을 오르고 내리는 부분만 절벽을 이루고,
등성이는 화전민이 밭을 일구어도 될만큼 평평하기 때문이다.
한 없을 것 같던 비탈길이 끝나고 길이 완만한 곳에 이르자
이채롭게도 체력 단련을 위해 도시의 공원에 설치 된 것 같은 기구들이
만들어져 있었고,벤취는 몸을 누울 만큼 넓직한 평상 같은 것도 놓여 있었다.
이 쪽편으로 산에 오를 사람들이 오르기 전 워밍업을 하던지
산을 내려 온 사람들이 뭉친 근육을 풀라고 설치한 것이겠지만
다른 곳에는서 보지 못하던 것이라 신기했다.
그 곳을 지나자 몇채의 집들이 보였고,길은 세멘트 길이었다.
올러 오던 곳보다는 벚꽃이 흐드러 졌고,
옅은 바람에도 꽃잎이 꽃낙엽을 이루며 휘날리며 떨어졌다.
그 꽃잎이 떨어 지는 모양을 보자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라
곁에 있던 '이ㅇㅅ'여사와 윤ㅌㅅ여사에게 그이야기를 했더니
공감을 느끼듯 들어 주었다.
벗꽃이 바람에 지는 모습을 보면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는 사랑에 대한 미련과
그 허무함이 느껴진다.
그래서 봄이 지날 때마다 한번씩 "봄날은 간다."란 영화를 보았지만 금년에는
벚꽃 휘날리는 길을 여사님들과 걷던 것으로 만족하며 다시 보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주차장에 이르러 아까의의 자리에 배낭에 올려 놓은 시간은 4시30분이었다.
다행이 원ㄱㅅ여사는 지름길을 잘 찾아 내려와서 기다린지 오래였다.
송이버섯전골이라는 것을 먹기 위해 식당에 갔지만
송이버섯의 엄청난 희소성에 비해 싼가격의 음식은
되는대로 집어 넣은 것 같은 해물로 인해 냄새조차 변변하지 않았다.
5시를 좀 넘어서 버스에 올랐지만 생각보다 어려웠던 산행으로 기운이 빠졌는지,
흥을 돋우는 음악에도 불구하고 1시간 정도는 모두 조용히 앉아 있었다.
올 때 옆좌석의 앞자리에 앉았던 최대리의 부인이 비어 있었던 내 박스로 옮겨 왔다.
어제까지 한동네에 살면서도 그 여인은 워킹맘이었고,
나는 하루의 대부분을 집안에 처박혀 사는 까닭에 서로 모르고 지낸 사이였다.
그런 것이 신기했는지, 내게 "무엇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나는 퇴직한 까페쟁이라는 말을 했는데, 그 까페쟁이란 것이
더 미스테리를 느끼는 것 같아서 설명을 해주어야 했다.
이야기를 하던 중. 나이을 물어 보았다. 내 나이를 말해주자 아주 신기해했다.
"그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젊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동안을 타고 나기는 했어도 내가 덜 늙기는 하는 가 보다.
돈과 명예에 초월하면 덜 늙는다고는 하지만 내가 그런 경우라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시 관광차 노래방이 시작 되었고, 나도 그 분위기에 휩쌓여 갔다.
내 딸과 나이가 비슷한 나이일 것 같은 최대리의 부인이
차안의 광경을 신기해 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시대가 너무 급격히 변해가고 있기에,
어느 때보다도 세대차를 느끼는 시대이다.
엄청 신기해 보일테지만 그것이 언젠가 이ㄱㅈ대장이 말하던 한국적 문화인 것이고,
어쩔수 없이 구세대로 치부되는 나는 그것에 동화되어야 자연스러운 것인지도 모른다.
조작해 놓은 노래방 점수가 두번이나 100점을 기록하고,
몸치인 몸을 뒤뚱거리는 동안 버스는 아침에 출발했던 농협 앞에 도착해 있었다.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 입니다
좋네요
멋진사진과 좋은글 잘읽고갑니다 감사합니다 ~~
산행 잘하고 갑니다~
참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멋진사진감사합니다
좋은 글과 사진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