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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영하 外 21인의『한국학의 즐거움』을 읽고(2012.4.22)
한국의 대표지식인 스물두 명이 말하는 한국, 한국인, 한국적인 것
한국인의 마음, 사랑, 음식, 책, 의학, 철학, 얼굴, 종교, 미술, 건축, 과학, 역사, 정체성, 경제, 드라마, 영화, 문학, 신화, 사유, 역학, 끼, 본성 등 스무 두 가지를 주제에 대해 22명의 전문가들의 글을 모아 놓은 『한국학의 즐거움』이란 책을 읽었다.
한국사람이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으며 외국인들 또한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일독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은 한국학이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기의 스물두 가지 글은 대중적인 차원에서 한국학의 다양한 주제에 일정한 견해를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가 밑거름이 되어서 앞으로 한국학이 무엇인지를 규정하는 작업이 더욱 활발해지길 기대한다.
책머리에
한국의 전통문화는 물론이고 현대 문화, 철학, 종교, 과학, 의학, 경제 등 가장 한국적인 것을 다양한 주제로 다루었다.
이 책을 통해 한국학을 하다보면, 과거에서 오늘날까지 한반도를 둘러싸고 진행되는 여러 가지 문화적 사건들이 커다란 지구사적 맥락 속에서 전개되어 왔음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2011년8월 연구책임자 주영하
1.장석주(시인)
한국인의 마음 - 멍든 가슴의 한(恨)
○마음, 그 생명의 소리
한국인의 마음이란 오랜 세월 속에서 한국인의 삶을 일구고 행동을 낳은, 내면에서 구성적이고 구조화된 힘의 질서를 뜻한다.
한국인의 마음은 정과 한과 흥에서 솟구쳐 일어나고, 말-살이와 몸-살이로 이루어지는 저마다의 생활양식으로 구체화하는 바탕이요 엄연한 실재다.
김소월이 민족시인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그의 시들이 한국인의 정한으로 사무친 마음을 잘 끄집어 낸 까닭이다.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김소월, 〈진달래꽃〉
정은 한마디로 따뜻한 마음이다. 저보다 작고 약한 것, 사정이 딱한 이녁을 향해 측은지심을 베푸는 게 정이다.
○한국인의 마음이 변하고 있다
은둔의 나라, 조용한 아침의 나라로 알려져 있던 조선은 아무 준비 없이 세계열강의 강압적 요구에 의해 나라를 연 뒤 외세의 피침과 역사의 높은 격랑을 견뎌내야만 했다. 눌리고 찢기고 빼앗긴 기나긴 역사 속에서 한국인은 마음에 깊은 멍이 들고, 이것은 한이라는 독특한 정서를 만들었다. 사회적 약자로 살면서 형성된 내면의 한은 한국인의 마음에서 특화된 정서다. 한은 눌리고 빼앗기며 생겨난 마음의 울혈이다. 이 한이 품고 있는 것은 슬픔과 분노다. 외부로 뻗쳐나가야 할 마음의 기세가 꺾여 그 내부에 앙금으로 쌓인 것이다.
한국인의 마음에는 아직도 권위주의, 연고주의, 획일주의, 순응주의, 반지성주의, 경제성장 제일주의, 공사구분 미비, 이중규범 따위에 감염된 그림자들이 도사리고 있다.
○한국인 마음의 숨은 실체들
무릇 마음이 우리의 행동과 의지를 낳고 가두는 감응의 양식이라는 것은 공감하는 바다.
한국인의 정서를 머금은 민요, 노래, 시가, 그림, 춤, 연희 따위는 한국인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료다.
아리랑의 슬픔은 주저앉아 신세한탄이나 하는 피동적인 슬픔이 아니라 질투, 배신, 절망, 아픔, 복수 등을 다 끌어안고 꿋꿋하게 일어서는 능동적인 슬픔이다. 아리랑은 한민족의 혼과 마음이 가장 잘 드러난 정서물이요, 초역사적 마음의 노래임이 분명하다.
흰 바람이 있어
백석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십오 촉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 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이며 배
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지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서 어린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느 사이엔가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골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아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쨈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백석은 식민지 시대에 태어나 제 뜻을 맘껏 펼치지 못한 채 이국을 떠도는 자의 마음으로 한국인의 원형적 심상을 이끌어낸다.
풍자는 강자와 맞서려는 약자의 수사적 전략이다. 이때 약자는 반드시 강자에 비해 도덕적으로 우월적 가치를 갖고 있어야 한다. 촌철살인의 풍자를 통해 강자의 어긋나 있는 겉과 속을 꿰뚫어보고 그 실상을 폭로해버린다. 그 풍자로 인해 거짓을 참이라고 우기는 강자의 검은 속셈은 단박에 발가벗겨지고 우스갯거리로 전락한다. 풍자는 그 대상의 정체를 까발려 일러바치고 대상을 조롱거리로 끌어내린다. 세속의 오욕으로 그 오욕을 넘어서는 수법이 바로 풍자의 방식이다. 그것은 대상의 권력이 엄연한 당대에 효과적으로 쓸 수 있는 전략이다.
반면에 해탈은 속됨을 부정하고 거리를 두는 수법이다. 그래서 당내 현실에 대해 초연한 태도를 취한다. 이것과 저것, 옳음과 그름, 검은 것과 흰 것을 구태여 가리지 않고 무심에 이르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초탈이요, 나쁘게 말하면 도피다.
풍자는 현세를 향하고, 해탈은 극락을 겨냥한다.
장석주
1955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났고, 1975년 《월간문학》신인상에 시가 당선되어 등단한다. 도서출판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도서출판 청하를 설립해 13년간을 편집발행인으로 일한다. 시인, 비평가로 서른 해를 넘겨 살면서 60여 권의 저서를 내고, 한편으로 동덕여자대학교, 경희사이버대학교, 명지전문대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국악방송에서 문화사랑방, 행복한 문학등의 진행자로 활동한다. 지금은 전업 작가로 시골에서 소박한 삶을 꾸리는데, 지난해 한 잡지는 그를 이렇게 소개했다. 소장한 책만 2만3천여권에 달하는 독서광 장석주는 대한민국 독서광들의 우상이다. 하지만 많이 읽고 많이 쓴다고 해서 안으로만 침잠하는 그런 유의 사람은 아니다. 스무 살에 시인으로 등단한 후 15년을 출판기획자로 살았지만 더는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되자 업을 접고 문학비평가와 북칼럼니스트로 활동했다. 급변하는 세상과 거리를 둠으로써 보다 잘 소통하고 교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안성에 있는 호숫가 옆 수졸재에 2만 권의 책을 모셔두고 닷새는 서울에 기거하며 방송 진행과 원고 작업에 몰두하고 주말이면 안식을 취하는 그는 다양성의 시대에 만개하기 시작한 마이너리티 들의 롤모델이다.
2.강신주(철학자)
한국의 사랑
자야라고 불렸던 어느 여인의 사랑
강박증자는 타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말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왜냐하면 타인을 파괴하는 영원한 현기증 속에서, 그는 타인이 계속해서 존재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캉,《세미나Ⅷ》
○사랑의 원형
한국인의 내면을 이해하려면 한국인의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닐까?
서양문명으로부터 강한 충격을 받았던 최초의 시절, 그녀가 겪어냈던 사랑은 아마 지금 우리 시대 사랑의 원형을 보여주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그녀를 통해 확인하고 싶다. 한국인의 사랑이 가진 단독성과 그 보편성을 말이다. 운이 좋다면 우리는 한국인의 내면 깊숙한 옹심이를 몇 개 건질지도 모를 일이다.
○조선권번의 기생 김영한, 백석을 만나다
1916년 경성 관철동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1932년 열입곱 살의 나이로 조선권번에 들어간다. 조선말기에서부터 경성시대까지 우리 국악의 전통을 이어왔던 금하 하규일이 바로 그녀의 스승이다. 진안군수를 지낼 정도로 주목을 받았던 하규일은 국권피탈 이후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우리 음악에만 전념하게 된다.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갖추고 있던 김영한은 완숙한 스승으로부터 여창가곡과 궁중무를 배우게 된다. 그녀는 점점 조선정악의 명인으로 유명해졌다.
김영한은 신현모의 옥바라지를 위해 일본에서 돌아와 함흥권번에서 조선일보 기자 생활을 접고 영생고보 영어 교사로 교편을 잡고 있던 스물 네 살의 미청년, 백기행(1912~1995)-필명 백석시인 을 만나게 된다.
백석은 김영한에게 자야(子夜)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중국 동진시대 군대에 간 남편을 기다리며 혼란한 시대를 탄식하던 여인이 있었는데, 그 여인이 바로 자야였다. 백석은 자신이 김영한에게 안겨줄 기다림의 비극을 예상이라도 했던 것일까?
○오늘부터 당신은 나의 영원한 마누라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1938년 3월 여성지에 발표)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리 없다
언제 벌서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기다리는 여자, 떠나는 남자
백석은 있는 그대로의 자야가 아니라 상상 속의 자야를 사랑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백석에 대한 자야의 사랑은 헌신적이었다.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반복되는 비극적 사랑
보살이란 타인의 고통을 나의 고통으로 떠안고 가는 구도자.
김영한은 자야라는 이름을 가슴에 묻고 길상화라는 법명을 가지며 보살로서 살아가게 된다. 그녀가 보여준 보살행의 화룡점점은 1996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대원각이란 요정을 길상사로 바꾸어 법정에게 기증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1996년은 김영한이 백석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책으로 묶은 그다음 해라는 점이다.
백석과 자야의 사랑, 그것은 동양과 서양, 혹은 과거와 현재에도 유사하게 반복되는 사랑의 비극을 상징한다. 가부장적 제도 속에 만들어지는 남성의 강박증적 정신구조와 여성의 히스테리적 정신구조가 존재한다면, 백석과 자야의 사랑은 아마 미래에도 반복될 것이다.
나타샤와 흰 당나귀로 분열된 채로 자야를 보았던 백석은 자야 자체에 직면하여 사랑해야만 한다. 동시에 백석의 욕망 대상이 되려고만 했던 자야는 당당하게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주체로 성장해야만 한다.
강신주
1967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철학자다. 그는 강단 철학에서 벗어나, 책과 대중 아카데미 강연을 통해 자신의 철학적 소통과 사유를 가능한 많은 사람과 나누고자 한다. 우리 삶의 핵심적인 사건과 철학적 주제를 연결시켜 포괄적으로 풀어간 《철학, 삶을 만나다》, 장자의 철학을 소통과 연대의 사유로 재해석한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원치 않는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 자본주의 매커니즘을 해부한 《상처받지 않을 권리》, 우리 시에 비친 현대 철학의 풍경을 담은 《철학적 시 읽기의 즐거움》, 기존의 연대기적 서술을 지양하고 56개의 주제로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 철학자들을 대비시킨 방대한 철학사《철학 vs 철학》, 고전이란 텍스트로 우리 삶을 조명하고, 우리 삶이란 텍스트로 고전을 다시 독해하는 《철학이 필요한 시간》등을 펴냈다.
3.주영하(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
한국의 음식
밥을 아니 먹으면 굶은 것이다
한국인의 음식을 통해서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하는 일 역시 충분히 가능하다.
○한국음식의 핵심, 쌀밥
우리나라 사람들이 다식(多食)에 힘쓰는 것은 천하에서 으뜸이다. 최근 표류되어 유구(流球,현재의 오키나와)에 간 자가 있었는데, 그 나라의 백성이 -너희의 풍속은 항상 큰 사발과 쇠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실컷 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 - 하고 비웃었다고 한다. 대개 그들은 전에 이미 우리나라에 표류되어 와서 사정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이다.(이익은 당시 일부계층에서 음식을 지나치게 소비하는 것을 두고 먹기를 적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중국 고전에 나오는 문구인 식소(食少)를 제목으로 하여 남겼다. 그 중의 일부 내용)
월사 이 상공이 명국에 사신으로 들어왔을 때에 한 재상이 날을 기약하여 집으로 찾아오라 하였더니, 기약한 날 그 재상이 공무가 있어 궐내에 들어가고 집안 식구에게 이 상공을 모셔서 그 재상이 궐에서 나오기를 기다리라 하였는데, 월사가 식전에 그 집에 가니 집안사람들이 그 재상의 말을 전하고 술과 안주로 대접하더니, 날이 늦으니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고자 하거늘, 또 떡과 과일로 대접하되, 밥을 아직 먹지 못한지라 굳이 가기를 청하니, 집안사람들이 그가 시장할까 하여 오전에 네다섯 번을 음식을 먹이되, 끝내 식전이라 하고 돌아가니, 그 재상이 돌아와 집안 식구의 말을 듣고 뉘우쳐 말하기를, 조선 사람은 밥을 아니 먹으면 굶는다고 여기니, 내 밥을 대접하란 말을 잊었노라. 하더라.(조선 정조 때 서유문(1762~1822)이 한글로 지은 중국 기행문집 《무오현행록》제4권의 내용)
쌀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급여나 세금으로 쌀이 쓰이도록 만들었다. 곧 쌀이 화폐를 대신하였다. 그것의 결정판이 바로 대동법의 시행이었다. 죽은 조상의 혼령을 저승으로 보내는 천도굿인 지노귀굿이나 새남굿에서도 조상의 혼령에게는 반드시 쌀밥을 올린다.
○쌀에서 나온 음식들
한국인이 오랫동안 먹어온 밥의 종류는 매우 많다. 보리밥, 콩밥, 팥밥, 차조밥, 율무밥, 수수밥, 옥수수밥과 같은 밥은 이름 앞에 붙은 재료로만 짓든지, 아니면 쌀과 섞어서 짓는다.
밤밥, 오곡밥, 고구마밥, 감자밥과 같은 밥은 쌀이나 보리와 함께 이름 앞에 붙은 재료를 섞어서 짓는다.
나물밥, 무밥, 산나물밥, 죽순밥, 콩나물밥, 김치밥 따위는 밥에 채소를 함께 넣어서 지은 밥이다.
○국물 많은 국과 짜고 매운 반찬의 비밀
한국인이 가장 즐겨먹는 국으로는 미역국, 콩나물국, 북엇국 등이 있다.
찌개는 뚝배기나 작은 냄비에 국물을 바특하게 잡아 고기,채소,두부 따위를 넣고, 간장,된장,고추장,젓국 따위를 쳐서 갖은 양념을 하여 끓인 반찬을 가리킨다. 된장찌개, 김치찌개, 생선찌개, 두부찌개가 대표적이다.
김치란 말은 한자어 침채(沈菜)에서 나왔다고 한다. 침채는 채소를 소금물에 절인다는 뜻의 한자어이다.
○식사, 엄숙한 시간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인만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모두 이용해서 식사를 한다.
입에 맛있는 것과 몸에 좋다는 것만 골라 먹고 마셔서 배만 채우면 인욕(人慾)에 머물게 되니, 이치에 어긋나지 않게 절도 있게 먹고 마시어 사람으로 하여금 천리(天理)에 이르게 해야 한다. -소학
먹는 것에 욕심을 부리는 일은 성욕(性慾)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절제된 식사를 해야 한다고 믿었다.
1970대까지 가정의 식사시간은 침묵의 시간이었다. 천리를 따르기 위한 엄숙한 식사가 바로 한국적인 식사였다. 그래서 외국인들은 한국인의 일상적인 식사가 매우 엄숙하다고 보았다.
주영하
1962년 경상남도 마산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민속학 전공 교수다. 2000년에 《음식전쟁 문화전쟁》과 《중국, 중국인, 중국음식》을 펴내면서 동아시아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인문학적 연구로 대중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2005년에 출판한 《그림 속의 음식, 음식 속의 역사》는 한국 음식의 역사를 그림 자료를 통해서 분석한 책으로, 한국 음식의 역사가 혹시 만들어진 전통의 산물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시하였다. 이 의문은 동아시아로 확장되어 현재에서 출발한 동아시아 음식의 문화적 측면을 살피기도 했다. 그는 오늘날 동아시아의 음식이 자본에 의해서 세계화 체제에 포섭되고 있다고 보는 학자다. 따라서 음식의 생산과 소비에 관한 담론을 시민 교류로 풀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최근에는 음식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를 음식학의 차원, 즉 자연과학, 사회과학, 인문학이 통합된 시선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동안 음식의 역사와 문화와 관련된 책으로 앞의 책 외에 《자폰 잔폰 짬봉》,《맛있는 세계사》,《음식인문학》등을 썼다.
4.강명관(부산대 교수)
한국의 책
조선의 출판, 독점적 지식의 생산
인간이 발명한 가장 유연하고 편리한 물질적 형태의 지식 고정물은 종이책이다. 종이책의 발명은 지식을 고정시켜 물질화하면서 유통의 편리성을 얻었다. 책의 발명 이후 지식은 거의 대부분 종이책을 통해 유통되었다. 전근대사회에서 책이야말로 인간을 의식화하는 거의 유일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금속활자와 사대부
1392년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 이데올로기로 삼아 건국되었다.
성리학은 지식인의 국가/사회 지배를 원칙으로 삼았다.
글을 읽으면 사(士)라고 하고, 정치에 종사하면 대부(大夫)라고 한다.란 말이 있듯, 사대부는 기본적으로 독서인이었고, 이 독서인이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되어 행정에 종사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생래적 특권을 갖는 귀족과는 달리 사대부는 성리학과 문학에 대한 교양을 반드시 갖추어야만 하였다.
○국가와 책의 인쇄
인쇄본은 매우 희귀한 것이었다. 가난하든 아니든, 인쇄본을 구할 수 없다면 사본을 만들 수 밖에 없었다.
○가장 중요한 지식, 사서오경대전과 주자대전
국가가 힘써 보급한 책은 《사서대전 四書大全》《오경대전 五經大全》, 《성리대전 性理大全)이었다. 大全들은 명나라 황제인 영락제 때 편찬한 것으로, 유가 경전에 대한 정통적 해석으로 공인되었다.
하지만 대전 시리즈 중 성리학에 대한 기본개념을 담고 있는 책인 《성리대전 性理大全)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이황이 조선 성리학의 상징적 존재가 된 것은 처음으로 《주자대전》을 완독하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사서대전 四書大全》《오경대전 五經大全》《주자대전》은 사대부들의 세계관을 만들어내었다. 이 책은 가장 중요한, 모든 지식의 중심이었다. 여타의 지식들은 모두 여기서 파생된 것이었다. 개인도 사회도 국가도 이 책들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외부에서 들어온 충격, 북경에서 들어온 새로운 책들
조선 지식인들은 필요한 책이 있을 경우 북경에서 구입하였다. 때로는 예부에 글을 올려 정식 외교 통로를 통해 책을 구입했지만, 대부분은 1년에 몇 차례 파견되는 사신단이 개인적으로 구입해왔다.
○조선의 책과 지식은 사대부를 위한 것
오직 사대부만이 책을 구입할 현실적 필요와 능력이 있었다.
조선은 지식인이 사회의 지배층이 된 희귀한 국가였다. 지식인, 곧 사대부들은 유학을 자기 지식과 교양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것을 사회와 국가에 실현시켰다. 아마도 유교가 이렇게 완벽하게 적용된 사회와 국가는 세계에서 흔치 않을 것이다.
강명관
1958년 부산에서 태어났고, 서울에서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잠시 머물렀다. 지금은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다. 하는 일은 주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그 외는 막거리를 마시든지 집 뒤에 있는 산에 올라간다. 그래서 공부하는 방의 이름을 책주산실(冊酒山室)이라 지었다. 그동안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조선의 뒷골목 풍경》《책벌레들 조선을 만들다》《공안파와 조선후기 한문학》《농암잡지평석》《열녀의 탄생》등을 썼다. 아주 오래된 에투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를 읽고, 언젠가 한국 풍속의 역사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을 준비하고 있다.
5.고미숙 (고전평론가)
한국의 의학
《동의보감》,몸과 우주의 아름다운 비전
《동의보감》만큼 한국적이고, 《동의보감》만큼 대중적인 유산도 없지만, 《동의보감》만큼 한국인의 일상과 동떨어진 텍스트도 참 드물다.
《동의보감》은 단순히 질병과 처방을 위주로 한 임상서가 아니다. 생명과 우주에 대한 원대한 비전 탐구서다. 따라서 그저 전통의학이 상징이 되어 박물관에 갇혀 있어서는 곤란하다. 세상 밖으로 나와서 한국인은 물론 전 인류적 자산으로 적극 활용되어야 한다.
○《동의보감》, 그 탄생의 드라마
선조는 참으로 복잡한 존재다. 선조의 등극과 더불어 조선왕조는 마침내 선초부터 이어져온 훈구파와 사림파의 긴 대결이 종식되면서 비로소 사림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림 내부의 분화가 가속되어 동/서, 남/북, 노/소 등으로 당파가 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때는 특히 북인 안에서 대북과 소북의 분화가 심각하게 재연되는 시기였다.
대북이란 선조의 후계자인 광해군을 미는 쪽이고, 소북이란 선조가 말년에 낳은 영창대군을 미는 쪽이다.
허준은 선조 승하의 책임을 물어 70세의 나이로 의주 땅에 유배를 갔으니 참으로 고단한 말년이었다. 그것도 광해군을 두 번이나 치료해주었다는 보은차원에서 사약은 피했다.
하지만 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고 했던가. 유배기간은 1년8개월. 놀랍게도 그 기간 동안 《동의보감》집필이 거의 완료되었다. 이때 한 작업은 자그마치 전체 분량의 절반쯤에 해당한다.
허준으로 인해 《동의보감》이라는 원대한 비전이 열리기도 했지만, 《동의보감》은 무엇보다 그 편찬자인 허준의 생을 구해주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구원으로서의 공부다.
해배 이후 곧바로 마무리 작업에 매진한 결과 마침내 72세의 나이로 《동의보감》을 완성하여 조정에 바친다. 시작한 해부터 따지면 무려 14년에 걸친 기나긴 여정이었다.
○ 허준, 거인의 무등을 탄 자연철학자
한의학에서 치유는 수술을 통해 특정부위를 잘라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원기를 되살려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대 의학에서 이미 시도 한 바 있던 해부학과 수술 등이 사라지게 된 건 이런 맥락에서다.
언어는 인간의 행위 중에 가장 사회화된 것이다. 언어로 소통을 하기 위해선 분류학적 체계를 잡아야 하고, 담론적 배치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양한 어휘력과 고도의 문장력이 필요한 건 말할 나위도 없다.
허준은 본성이 총민하고 어릴 때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경전과 역사에 박식했다. 특히 의학에 조예가 깊어서 신묘함이 깊은 데까지 이르렀다. 사람을 살린 것이 부지기수다.(의림촬요)
허준은 의사 이전에 학자였다. 전란과 유배로 점철된 14년이라는 긴 여정동안 그를 지탱시켜준 것도 그의 학자적 집념 또한 학문적 열정이었다.
선조는 허준에게 《동의보감》편찬의 원칙을 당부했다. 요컨대 기존의 의학적 전통을 집대성하고 양생술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을 조선의 백성이 널리 활용할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
허준은 엄청나게 거대한 한의학 전통에서 2,000여가지의 증상, 1,400여종의 약물, 4,000여 가지의 처방, 수백 가지의 양생법과 침구법을 뽑아냈는데, 그것은 한의학을 종합하기에 너무 많지도, 너무 적지도 않은 가장 적절한 분량이다. -신동원 의 《조선 사람 허준》(한겨레신문사,2001), 163면
아울러 《동의보감》의 서술방식에서 가장 흥미로운 건 양생과 임상의 서사가 풍성하게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동의보감》은 생명과 우주, 삶과 질병, 존재와 자연 등을 두루 포괄하는 비전 탐구서다.
거인의 무등을 탄 자연철학자, 이것이 세계기록문화의 보배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의 진면목이다.
○ 동의와 보감에 담긴 뜻은?
《동의보감》은 목차만 장장 100면이 넘는다.
내경편(몸 속의 모습)-외형편(몸 바깥의 모습)-잡병편-탕액편-침구편의 순서가 전부다.
동의라는 명칭이 이 책이 놓인 시공간적 좌표와 관련된다면, 보감은 이 책이 지향하는 용법과 계층의 보편성을 말해준다.
○ 몸과 우주는 하나다!-통즉불통(通則不通, 痛則不通)
신형장부도-
천지에서 존재하는 것 가운데 사람이 가장 귀중하다. 둥근 머리는 하늘을 닮았고 네모난 발은 땅을 닮았다. 하늘에 사시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사지가 있고, 하늘에 오행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오장이 있다. 하늘에 육극(六極)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육부가 있고, 하늘에 팔풍(八風)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팔절(八節)이 있다. 하늘에 구성(九星)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구규(九竅)가 있고, 하늘에 십이시(十二時)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십이경맥이 있다. 하늘에 이십사기(二十四氣)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24개의 수혈이 있고, 하늘에 369도가 있듯이 사람에게는 365개의 골절이 있다.
하늘에 해와 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두 눈이 있고, 하늘에 밤과 낮이 있듯이 사람은 잠이 들고 깨어난다. 하늘에 우레와 번개가 있듯이 사람에게 희로(喜怒)가 있고, 하늘에 비와 이슬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눈물과 콧물이 있다. 하늘에 음양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한열(寒熱)이 있고, 땅에 샘물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혈액이 있다. 땅에서 풀과 나무가 자라나듯 사람에게는 모발이 생겨나고, 땅 속에 금석이 묻혀 있듯이 사람에게는 치아가 있다. 이 모든 것은 사대(四大)와 오상(五常)을 바탕으로 잠시 형(形)을 빚어놓은 것이다.
오장육부 가운데 간과 담은 목, 심장과 소장은 화, 폐와 대장은 금, 신과 방광은 수, 이런 식이다. 이 오행의 상생상극이 생명을 살리고, 병들게 하고, 또는 죽게 한다. 고로 내 몸은 곧 내 안의 자연 또는 아바타인 셈이다. 그뿐 아니라 이 원리는 얼굴의 각 기관에서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눈은 목, 코는 금, 혀는 화, 입은 토, 귀는 수 등과 같이 12경맥을 구획하는 것도, 잡병과 탕액을 구성하는 이치도 모두 그러하다.
정신활동은 오장육부 및 신체의 각 기관과 연동되어 있다. 예컨대 간은 분노, 심장은 기쁨, 비위는 생각, 폐는 슬픔, 신은 두려움을 주관한다.
몸과 마음, 신체와 우주 사이의 능동적 소통을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소통이 막히는 순간 정기가 손상되고 병이 된다는 것. 통즉불통! 통하면 아프지 않다. 아프면 통하지 않는다. 이것이 《동의보감》이라는 거대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가는 기본음이라 할 수 잇다.
고미숙
1960년 강원도 정선군 함백면에서 태어났다. 고전평론가이다.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나비와 전사》,《공부의 달인, 호모 쿵푸스》,《임꺽정, 길 위에서 펼쳐지는 마니어 리그의 향연》,《돈의 달인, 호모 코뮤니타스》등을 썼다.
6.김교빈 (호서대 교수)
한국의 철학
한국인, 한국문화, 한국사상
한국 사상의 뿌리를 이루는 것으로 우리 조상들의 상상력이 담긴 신화도 있고 기층민의 삶을 형성해온 무속신앙도 있다. 그러나 높은 수준의 논리와 체계를 갖춤으로써 사상적 완결성을 보인 것은 유교, 불교, 도교이다. 물론 이 세 가지 사상은 모두 밖에서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오랜 시간 동안 우리 사회의 주요 문제를 분석하는 기준이 되었고, 우리의 삶을 개선시키려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 사상이 되는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 사상의 토대 위에서 우리 문화를 꽃피운 것이다.
○21세기의 화두, 문화
문화는 보편적이면서도 나름의 주소를 갖는다. 지역으로는 동양과 서양을 나누고, 종교에 따라 기독교, 이슬람교, 유교, 불교로 나눈다. 시대에 따라 전통과 현대로 나누기도 하고, 향유하는 주체에 따라 노동자 문화와 학생 문화 같은 표현도 나온다. 이러한 구분은 서로 겹치기도 하지만 민족이나 국가 단위에서 보편성을 갖는다. 그래서 중국 문화, 한국 문화, 일본 문화를 나누고, 그 안에서 다시 한국의 불교 문화 한국의 청소년 문화를 말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전통문화에 기반을 둔 문화상품을 통해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 애쓰고 있으며, 고유문화와 그 문화의 기반인 전통사상의 보존 및 확산을 통해 정체성을 유지, 강화하려 하고 있다.
○문화와 사상은 어떤 관계인가
한자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 문화는 남을 복종시킬 수 있는 근본적인 힘이 문화에 있다고 생각했음을 알수 있다.
서양의 문화 개념은 농경사회에 그 시원이 있는 셈이다. 그 뒤 키케로가 영혼과 정신을 갈고 닦아 인간의 능력과 재능을 길러낸다는 뜻으로까지 그 범주를 넓혔다. 그리고 이제는 인류가 자신의 이상을 실현해가는 과정에서 얻어낸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사회, 경제와 같은 모든 산물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쓰는 문화 개념 속에는 자연을 가공한다는 서구적 사고와 인문학적 사유에 기반을 둔 동양적 사고가 함께 담겨 있는 셈이다.
사상은 문화의 출발이자 핵심이며, 어떤 민족의 문화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 민족의 사상을 알아야 한다. 어떤 문화이든 그 속에는 그 민족의 인간관, 사회관, 자연관, 세계관, 예술관 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서도 오랜 세월에 걸쳐 민족의 사유체계를 이루어온 전통사상이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합침의 불교로 이어온 한국 불교
불교미술의 특징을 한국은 자비, 자애, 인자함을 뜻하는 자(慈)로, 중국은 위세, 위엄, 권위를 뜻한 위(威)로, 일본은 고통, 고뇌, 고민을 뜻하는 고(苦)로 표현한다.
한국불교의 핵심은 신라 불교이며, 그 중심에 원효가 있다. 원효는 승려의 몸으로 요석공주와이 사이에서 설총을 낳았으며, 탈 쓰고 항아리 두드리며 춤추고 노래 부르면서 불교를 전파하였다. 한국불교는 통(通)불교, 원융(圓融)불교, 총화(總和)불교라고 불리며, 다른 말로는 합침의 불교라고 한다.
원효의 화쟁 철학은 화엄철학이 그 바탕이며, 화엄의 기본 논리는 하나가 곧 전부요, 전부가 곧 하나라는 것이다.
합침의 불교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합치는 원동력이었으며, 오늘까지 이어지는 한국 불교의 원형이다.
○도덕으로 온 누리를 덮겠노라
동쪽에 흥인지문, 서쪽에 돈의문, 남쪽에 숭례문, 북쪽에 숙정문의 4대문을 세우고 가운데에 보신각을 두었다. 숙정문의 본래 이름은 숙청문(肅淸門)이며 지(智)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다라서 동서남북과 중앙에 유교의 기본 덕목인 인의예지신을 배치한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 경희궁의 정문인 홍화문, 덕수궁의 정문인 인화문,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보이듯 궁궐 정문 이름에 모두 화(化)자를 넣었다. 이 이름들에는 한결같이 유교 도덕으로 백성을 교화시키겠다는 소망이 담겨 있다. 서울은 그렇게 유교 이념으로 만들어진 계획도시였다.
성리학의 핵심이론은 이기론이었다. 하지만 같은 이기론에서도 이와 기 가운데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에 따라 학문의 성격이 달라졌다.
임금이 신하들과 아침, 점심, 저녁 세 차례에 걸쳐 매일 학문을 토론한 내용도 《경연일기》에 남아 있다.
○하늘에 담은 민족정신
도교와 도가사상은 많이 다르다. 도가사상이 노자와 장자를 중심으로 한 사상을 가리킨다면, 도교는 한나라 때 노장사상을 업고 만들어진 종교였다.
현실과 거리를 두는 것처럼 보이는 도교 속에 뜻밖에도 엄청난 민족주의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전통은 낡은 것인가?
전통은 낡은 것이 아니라 오래된 것이다. 낡은 것은 더는 의미를 갖지 못하지만, 오래된 것에서는 강한 힘이 나온다. 그 속에 누적된 우리 조상들의 사유체계와 삶의 지혜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전통사상은 오랫동안 우리의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왔다. 유교가 정치, 경제, 사회, 교육, 사회제도와 관습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면, 도교는 의학, 천문학, 지리 등 과학 분야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불교는 종교와 예술 등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의 문화심리 구조 속에 중요한 인자로 자리 잡고 있다.
김교빈
1953년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지금은 호서대학교 문화기획학과 교수다. 고등학교 시절 《논어》를 읽고 공부 방향을 정한 뒤 성균관대학교에서 한국철학을 전공하고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9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결성에 참여하여 진보적 입장의 동양철학 연구에 힘을 쏟았으며,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장과 학술단체협의회 상임대표를 지냈다. 1983년부터 기(氣)문제에 관심을 갖고 후배들과 공동연구를 하다가 한의학을 만나 《황제내경》,《동의보감》등을 읽으며 학문 영역을 넓힌 까닭에 현재 민족의학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1993년 《동양철학 에세이》를 쓴 뒤 쉬운 글로 동양철학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으며, 철학의 현실화 작업의 한 방법으로 문화콘텐츠에 관심을 갖고 인문콘텐츠학회 결성에 참여하여 초대 회장을 지냈다. 지은 책으로는 《양명학자 정제두의 철학사상》,《강좌 한국철학》,《한국철학 에세이》,《동양철학과 한의학》,《기학의 모험》,《이언적》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중국고대철학의 세계》,《기의 철학》,《현대중국의 모색》,《몸으로 본 중국사상》등이 있다.
7.이태호 (명지대 교수)
한국의 얼굴
바위에 새긴 한국인의 심상, 마애불
○ 화강암의 질감과 감성을 담은 한국적 불교미술
마애불은 벼랑의 바위 표면에 부조(浮彫)나 선조(線彫)로 만든 불상(佛像)을 말한다. 이런 마애불은 독립된 부조나 환조의 석조불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조각예술의 꽃이다.
미애불은 600년경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에서 시작하여 구한말 서울 주변의 마애불까지 1,500년 동안 꾸준히 200여 곳이 넘게 조성되었다.
마애불은 자연에 거스름 없이 삶과 예술을 조화시켜낸, 한국 문화의 서정과 한국인의 심성이 가장 절절하게 투영된 불교문화재이다.
○ 산악신앙․바위신앙의 전통과 마애불
우리의 마애불은 무속적 요소와 공존하면서도 그 토착의 존재를 손상시키지 않는 범주에서 조성되었다. 신선을 부처상으로 대체한 게 마애불인 셈이다.
암각화는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기 위한 성소(聖所)에 새겼을 것으로, 고대 사회의 제의(祭儀)문화와 관련한 바위신앙의 유적이다.
○ 미륵세상을 꿈꾸는 마애불의 시선
조각적인 조형미와 함께 부처를 조성한 위치 또한 하나같이 신령스러움이 깃들어 있을 법한 비경이다.
하늘과 땅이 동시에 열리는 공간에 조각된 마애불의 시선을 통해 아름다운 한국의 산하를 다시 음미하는 일이 마애불 답사의 가장 큰 행복이다. 또 그것을 사랑한 선조들의 마음과 종교적 정서, 그 부처상에 담긴 시대정신과 조각미를 읽으며, 자연과 예술이 어울린 풍광 속에서 가슴 벅찬 시간을 갖게 한다.
○ 마애불에 투영된 한국인의 마음과 얼굴
미륵은 56억7천만년 뒤에 용화수 아래서 성도(成道)하여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미래의 부처이다. 마애불은 종교적 대상으로서,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감명에 더불어 한국미를 맛볼 중요한 장소이다.
이태호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 및 박물관장이다. 홍익대학교 회화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 미학, 미술사학과에서 공부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국립광주박물관 학예연구사, 전남대학교 교수와 박물관장을 역임했고, 현재 문화재위원이다. 미술사를 공부한답시고 전국을 두루두루 답사한 지 30여 년이 훌쩍 넘었다. 웬만한 곳은 몇 차례씩 다녀서 발길 닿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회화사 전공이지만, 불교조각 분야인 마애불에 반해 그동안 120여 곳을 넘게 답사했다. 한국미술사 가운데 한국회화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하며, 《우리 시대 우리 미술》,《조선 후기 회화의 사실정신》,《미술로 본 한국의 에로시티시즘》,《조선 후기 그림의 기와 세》등을 썼다.
8.최준식 (이화여대교수)
한국의 종교
우리 종교의 향기로운 즐거움
○ 서로 다른 세계관의 평화로운 공존
공간적으로는 동서양의 대표 종교가 다 들어와 비슷한 세력으로 각축하고 있고, 시간적으로는 고대종교와 현대종교가 공존하고 있는 나라다. 고대종교는 흔히 무속이라 불리는 무교(巫敎)이다. 한국 무교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 아주 오래된 고대 의례까지 아직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 가장 두드러진 특징일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한국에 불교나 유교아 같은 중세(?)종교들이 세를 떨치고 있다. 한국 종교는 이렇게 천 몇백 년을 지내오다 근대가 되면서 대격변을 맞이한다. 동학으로 시작되는 우리의 신종교운동이 그렇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현대에는 서양에서 기독교(신구교)가 들어와 똬리를 틀었다. 동아시아에서 기독교인이 대통령이 되는 나라는 필리핀과 한국밖에 없다.
○ 우리 종교의 색깔
무당은 한국인의 심리를 가장 잘 아는 영적 상담가이다. 무교는 이 땅에 수천년 동안 있으면서 한국 민중과 호흡을 맞춰왔고, 그래서 그들의 심성을 아주 잘 알고 있다.
한국인에게 교회란 근대화나 세계화를 체험할 수 있는 좋은 통로가 되었다는 것이다. 조선 이래로 한국인들이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전적으로 기독교의 덕이다.
카톡릭은 점잖은 유럽 신사 같고, 개신교는 호쾌한 미국 남자 같은 느낌이 든다.
○ 즐거운 종교의 나라
한국은 종교적으로 즐기면서 배울 것이 많은 나라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볼 때에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종교 간의 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최준식
빠른 1956년생이다. 고향은 특정한 지역 대신 한국이라고만 말한다. 대학에서는 한국사를 전공하고 대학원에서는 종교학을 전공했다. 그러나 1992년에 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과에 부임하면서 한국 문화 연구에 진력하기 시작한다. 전공이 종교학인 관계로 방대한 한국 문화에 접근 할 때 주로 종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 그래서 나온 책이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1,2,3》과 《한국인은 왜 틀을 거부하는가》등이다. 한국인의 사회 문화에도 관심이 많아 10여 년 전에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라는 책을 내기도 했는데, 전공 관련서가 아니었는데도 독자들에게 꽤 호응을 얻었다. 그 외에도 여러 책을 냈지만 그다지 거론할 만한 책은 내지 못했고, 앞으로 연구 향방은 한국 문화와 종교 사이를 오락가락 할 듯하다고 말한다.
9.최완수(간송미술관 학예실장)
한국의 미술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겸재(謙齋) 정선(鄭敾, 1676~1759)은 우리 산천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하는데 가장 알맞은 고유 화법을 창안해서 우리 산천에 내재된 아름다움 까지 표출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의 대성자. 겸재는 화가이기 이전에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로 이어지며 완성된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이은 성리학자였다.
○율곡 학파의 적통을 이어받다
겸재는 《주역》의 근본원리인 음양조화와 음양대비의 원리를 화면 구성의 원리로 삼고, 다시 중국 남방 화법의 기본인 묵법(墨法)을 취해 음(陰)인 토산(土山)을 표현하고, 북방 화법의 기본인 필묘(筆描)를 취해 양(陽)인 암산(岩山)을 표현하는 독특한 기법을 창안해낸다. 암산과 토산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는 우리 산천을 표현하는 데 이보다 더 적절한 기법은 없다. 이렇게 이루어진 것이 겸재의 동국진경산수화법이다.
풍속화의 시조인 관아재 조영석은 겸재가 그려온《구학첩 九壑帖》에 발문을 쓰면 그 사실을 다음과 같이 명쾌하게 밝혀놓고 있다.
원백(元伯)의 이 화권(畵卷)은 먹 쓰는 데 흔적이 없고 선염(渲染)하는데 법도가 있어서 깊고 깊어 빽빽하고 울창하며 짙고 진하며 빼어나게 아름다워 거의 미남궁(米南宮)이나 동화정(董華亭)의 울타리 안에 들 만하니, 우리나라 300년 동안에 대개 이와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을 보지 못했다. 가만히 말하건대 우리 동쪽(나라)의 산수를 그린다는 사람으로 ������윤곽, 위치 및 십육준법(十六皴法)에 만 가지 흐름이 굽이치나 한 가닥 실처럼 어지럽지 않다.������는 말을 능히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 까닭으로 비록 쌓이고 겹친 봉우리들이라도 오직 수묵을 쓰는 한 가지 법식만으로 발라대고, 다시 그 향배나 원근․고하․심천과 토석의 평이하고 험준한 형세 따위를 변별하지 않았으며, 물을 그림에는 잔잔한 흐름이나 일렁이는 것을 막론하고 아울러 두 붓을 자아 승교(繩交, 노끈을 꼼)형태를 지었으니. 어찌 다시 (진정한) 산수(화)가 있었다고 하겠는가. 내가 일찍이 이렇게 논하니 원백도 옳게 여겼다. 원백은 일찍이 백악산 아래에 집이 있어 살았는데, 뜻이 이르면 문득 산을 대하여 사생하니 준 치고 먹 쓰는 데 마음속에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금강내외산(金剛內外山)을 드나들고 영남을 두로 밟았으며, 위로여러 명승에 노닐어서 그 물과 산의 형세를 모두 얻었으니, 그 공력의 지극함은 곧 거의 붓을 묻어 무덤을 이룰 만했다. 이에 스스로 신격(神格)을 창안하여 우리 동쪽 사람들이 한 가지 법식으로만 발라대는 고루함을 씻어내니 우리 동쪽 나라 산수화는 대개 원백에게서 비로소 새로 열렸다.
○우리 고유 화법인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하다
겸재 정선은 붓을 묻어 무덤을 이룰 만큼 지극하게 수련을 쌓아 진경산수화법이라는 새 법을 만들어 내었다.
국립박물관 소장의 《기사년화첩 己巳年畵帖》도 겸재가 74세 되던 영조 25년에 그린 것이다.
겸재는 76세 되던 영조 27년에 마지막으로 가슴 메이는 슬픔을 당한다. 시화쌍벽(詩畵雙璧)으로 평생 동안 지기를 허락하던 진경시의 대가 이병연이 81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 슬픔을 달래기 위해 겸재는 이병연과 함께 오르곤 했던 이병연의 집 뒷동산인 북악산 남쪽 서록, 즉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 뒤쪽 산등성이에 올라 자신의 집이 있는 인왕곡 일대를 바라보며 비 개는 정경을 장쾌한 필법으로 휘둘러낸다. 그것이〈인왕제색 仁王霽色, 1751년, 지본수묵 紙本水墨〉이다.
겸재의 10년 후배로 만년에 30여 년을 이웃해 살며 매일 왕래하며 겸재와 함께 그림에 정진하여 풍속화풍을 대성해낸 조영석은 다음과 같은 장문의 애사(哀辭)를 지어 겸재의 일생을 총평한다.
정공(鄭公)의 휘는 선(敾)이요 자는 원백(元伯)이여 겸재(謙齋)라고 자호(自號)하니 광산인(光山人)이다. 어려서부터 한양의 북쪽 동네 순화방 백악산 밑에서 살고, 나 역시 순화방에서 대대로 살며 공보다 10세가 어리니 내가 죽마를 탈 때 공은 이미 엄연히 관을 쓴 사람이었다. 그런 까닭으로 항상 공경하여 일찍이 너나들이를 한 적이 없다. 공은 그림으로 세상에 이름을 날리었고, 나 역시 그림 좋아하는 병이 있어서 대략 그 삼매경을 이해하였다. 그러나 나는 매달려 하지 않았고 공은 날마다 정진하고 익혀서 육요육법(六要六法)을 정밍하게 이해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대개 우리나라 그림 그리는 사람으로 이것을 아는 이가 없었는데 공에 이르러서 고화(古畵)룰 널리 보고 공부를 또한 독실하게 하여 앞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을 많이 내놓았다.
이런 까닭으로 이름도 날로 무거워지고 비단은 날로 쌓여 스스로 한가할 틈이 없었는데 또한 예운림(猊雲林)과 미남궁, 동화정을 배워 대혼점(大混点)으로 갑작스러움에 응대하는 법을 삼으니, 세상의 그림 배우는 사람들은 다만 공 중년(中年)의 권필(倦筆, 마구 휘두르는 필법)만 보고 속으로 그림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하여 다투어 서로 찡그린 것을 흉내내려 하였다. 그러나 그 짙고 진한 것은 세상에 미칠 자 없다.
매양 마음에 드는 그림을 그리면 나에게 보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우리 집 곁으로 이사 와서는 서로 수십 보 가까이 떨어져 있었으므로 각건 쓰고 청려장 깊은 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여 거른 날이 없이 30년에 이르렀으니 공의 일생을 알기로는 나만 한 이가 거의 없을 것이다.
공의 성품은 본래 부드럽고 안존하여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남과 사귐에 일체 겉으로 꾸밈이 없었다. 집안은 몹시 가난하여 끼니를 자주 걸렀으나 남에게 도리에 어긋나는 요구를 하지 않았고, 옳지 않게 남을 간섭한 적도 없었다. 또 경학에 깊어서 《중용》과 《대학》을 논함에 있어서는 처음과 끝을 꿰뚫는 것이 마치 자기 말을 하듯 하였다. 만년에는 또한 《주역》을 좋아하여 밤낮으로 힘썼으니 손수 뽑아 베끼기를 파리머리같이 하며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들은 한갓 공의 이름을 그림으로만 알고 공이 경학에 깊은 것이 이와 같음을 모른다. 어찌 이른바 위정공(魏鄭公)의 문사(文辭)가 직간으로 덮이고, 구양공(歐陽公)의 정사(政事) 재주가 문장으로 가려지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공이 하양과 청하를 거쳤으니 현감으로 양 읍을 다스려 영광스럽게 어머니를 봉양하였으며, 나이가 팔십을 넘어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니 영화가 3대에 미쳤다. 진실로 공의 인후한 덕과 성실하고 효성스런 독행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임금님께서도 공을 이름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그 호를 부르시니, 위로 공경재상에서부터 아래로 가마꾼에 이르기까지 공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없었으며, 작은 그림 한 폭을 얻어도 큰 옥을 얻은 듯 집안에 전해줄 보배로 삼으려 하였다. 맑은 관직을 두루 거쳐서 한 시대에 벼슬살이 잘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고요하기가 소나무 아래에 있는 사람(세상을 피하여 은둔한 사람)같았으니 어떠했겠나. 그러니 외물의 영욕과 청탁이 어찌 공에게 있었겠는가.
아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무오(戊午,1738)년 겨울에 공과 내가 약속이 있었는데 하루는 바람이 맑고 달이 밝았다. 공이 그 막내 자제를 데리고 와서 이르기를 내 마땅히 약속대로 하리라 하며 붓과 벼루를 찾아 들고 문짝 위에 절강추도도(浙江秋濤圖)를 그리는데 순식간에 휘둘러대니 필세(筆勢)가 기이하고 웅장하여 정말 볼 만하였다.
내가 시를 지어 이렇게 읊었다.
정로(鄭老)가 밤중에 호흥(豪興)이 일어, 문 열고 쳐들어와 벼루 찾는다.
얕고 깊게 먹을 갈아 신운(神運)에 맡기고, 좌우에서 등을 밝혀 눈 밝혀준다.
육필(六筆)을 함께 몰아 바람 천둥 치듯 하니, 세 문짝 모두 젖고 파도가 친다.
내 방은 이로부터 낯빛 더하고, 예원(藝苑)에 거연히 호사(好事)를 이뤘네
다음날 악하(岳下) 이공(李公, 秉淵)이 듣고 역시 그 운자(韻字)를 따서 지었다.
그날 나는 홀연 안음으로 제수되어, 말을 주어 떠나보내니 공과 잠깐 작별하고 갔다.
6년 있다가 만기가 차서 갈려 돌아와 다시 공을 대하니 문위의 그림이 새벽에 그려낸 것 같거늘, 다시 공에게 부탁하여 담채로 선염하려 하였으나 미적거리다가 해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에 나는 배천군수가 되고 공 역시 외읍으로 나갔으며 문 위 그림은 남이 빼앗아게게 되었는데, 이럭저럭하는 사이에 20여년이 지났고 공은 또한 돌아가서 사적이 쓸어낸 듯하니 정말 슬프구나.
내가 이제 늙어 움직일 수가 없어서 공이 돌아가고 장기(葬期)가 며칠 앞으로 다가왔으나 아직 가서 곡을 하지 못하였으니 공에게 잘못함이 많다.
공의 여러 자손이 만어(挽語)로 나에게 부탁하거늘 차마 한마디 말이 없을 수 없다. 이에 감히 억지로 병을 무릅쓰고 애사(哀辭) 한 통을 지어내 슬픔을 쏟아내노니, 이 하나로 공의 대강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사(辭)로 말한다.
두 번 골살이로 봉양하니, 좋은 반찬 거르지 않고, 삼세(三世)에 추은(推恩)하니, 영요(榮耀)가 극하구나. 성주(聖主)께서 그 호를 부르시니, 가마꾼도 그 이름 아네. 옛 사람들 이름이 이루어짐 중히 여겨서 혹는 의술로 혹은 검술로 혹은 바둑 장기로 하기도 하고, 심지어 빨간 불길 속에 몸을 던져 그 죽고 삶을 돌아보지 않기로 하였으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군자는 죽어서 이름나지 않는 것을 싫어한다 하였네. 비록 공 세우고 덕 세울 수 없었다 하나, 살아서 일세에 이미 이름났고, 죽어서 100대 이후까지 내려 갈 테니, 가히 죽어도 썩지 않는 것이라 말할 수 있네.
○세계 최고 수준의 우리 그림을 보여주다
겸재는 조선중화사상이 팽배하던 시기에 태어나서 조선의 고유사상인 조선성리학을 전공하는 사대부이자 그 조선성리학을 사상적 바탕으로 하여 조선의 고유색을 세상에 높이 드러내는 진경문화를 주도해간 장본인으로, 우리 산수의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그에 알맞은 진경산수화법을 창안해내어 우리 고유의 회화미로 표현해내는 데 성공한 진경산수화풍의 창시자이자 대성자였다.
최완수
진경시대 문화 연구의 대가이자 겸재 정선 연구의 일인자이다. 1942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으며, 서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했다. 1965~1966년 국립박물관을 거쳐, 1966년부터 지금까지 간송미술관 학예실장으로 있다. 그동안 서울대학교, 이화여자대학교, 중앙대학교, 연세대학교 등에서 강의를 했다. 지은 책으로 《그림과 글씨》《우리 문화의 황금기 진경시대 1,2》《조선왕조 충의열전》《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겸재의 한양진경》《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1,2,3》등이 있다.
10.임석재 (이화여대 교수)
한국의 건축
가장 한국다운 집, 한옥
조선시대의 양반가옥으로 한정할 수 있다.
○한민족의 전통과 함께한 한옥
한옥을 낳은 배경은 웅장하지는 않으나 변화무쌍한 산과 강, 사계절이 뚜렷하면서 빛이 좋은 해, 겨울에는 서북풍이 불고 여름에는 남동풍이 부는 것 등이 자연환경 요소이다. 문화요소로는 상대주의 국민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획일적인 것을 싫어하고 그때그때 각 집마다 사정에 맞춰 개성을 충분히 살린다는 뜻이다. 사상은 고려시대 때 융성했던 노장이 제일 큰 밑바탕을 이루며, 여기에 유교의 형식미가 가미되면서 완성되었다.
○햇빛과 친하고 바람이 잘 드는 한옥
한옥은 바람과 햇빛을 받아들여 이용하는 데 매우 뛰어난 가옥구조를 자랑한다.
통을 살린 배치구도는 곧 한옥의 공간적 특징으로 발전하는데, 물 흐르듯 막힘이 없는 구조가 그것이다.
○한옥의 다양성을 살려주는 마당의 미학
한옥은 마당과 함께 있어야 건물의 장점이 충분히 발현된다.
○규칙성을 거부하는 한옥의 창문 구성
창문은 방 안에 사는 사람이 외부와 소통하는 숨통이다. 창문도 크기, 형상, 위치, 개수 등에서 자유롭게 구성되어야 한다. 이런 자유가 한옥에 나타난 리얼리즘의 요체이다. 한옥의 창문은 한국의 전통적인 민족정서나 인간관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리얼리즘의 정수이다. 작은 창문의 방이 자녀의 방이고, 큰 창문의 방이 부모의 방이기 때문에 이런 은유는 더 제격이다.
○정이 깊고 기가 융성하는 한옥
정심(精深): 정이 깊은 상태-과시적 허망을 배제한 상태가 만들어낸 집의 정직한 품격
기성(氣盛): 정심이 발전해서 기가 전성을 누리는 상태
자연과 통하니 육체가 건강하고, 사람과 통하니 정신과 마음이 건강하다. 집이 인간에게 줄 수 있는 최고를 해준 셈이다.
○대청 천장은 높고 방의 천장은 낮다
대청은 넓고 방은 좁기 때문이다.
방이 작으면 천장이 낮아야 사람은 심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된다.
대청은 좌식생활과 입식생활이 함께 일어나는 곳이다. 좌식의 실내생활과 입식의 실외생활이 교차하는 중간지대이다.
○오르내림과 꺾임이 많은 한옥 구조의 휴먼 스케일
한옥에서 오르내림과 꺾임은 관절을 많이 쓰게 만든다. 그러나 절대 연골이 닳을 정도로 과하지는 않다. 관절을 많이 쓰면 뇌에 적절한 자극을 준다. 기단과 댓돌의 높이도 다양하다. 어떤 집에서는 무릎을 크게 굽혀 한 걸음에 오르고, 또 어떤 집에서는 잔 오름 두 번으로 나눈다. 한 집에서도 사랑채와 안채가 다르다.
○엉성함의 미학-기,예,교
건축재료를 생명체가 없는 단순한 물질로 보지 않았다. 그 가치와 존재를 존중해야 할 객체로 보았다. 우리의 전통 장인은 기술을 인간의 솜씨나 재주를 뽐내는 경연장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각 재료의 고유한 성질이 잘 발현되도록 도와주는 통로로 생각했다. 만약 재료가 사람의 손길 없이 자기 혼자서 스스로를 깎고 다듬어 건축부재가 되었다면 그렇게 되었을 법한 상태에 가급적 가깝게 놔두려 했다.
임석재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미시간대학교 건축학 석사, 펜실베이니아대학교 건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 건축학부 교수이다. 동서양을 망라한 건축 역사와 이론이 주전공 분야이며 현재까지 44권의 책을 저술했다.
11.정인경(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의 과학
오래된 과학기술, 문화적 감성으로 감응하기
○ 전통 과학기술은 고리타분하다!
내가 했던 말이라고는 겨우 용무늬 운운이었다.
○ 서양의 그늘에 가려진 것이 아닐까?
해외의 선진 과학관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우리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문화적 전통과 현대 과학기술과의 조화를 찾아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양에서 천문 관측 활동은 현대적인 의미의 과학기술이라기보다는 문화적 행위였다. 문화적 전통은 현재의 자신을 이해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찾는 중요한 참고자료이다.
○ 긴 역사적 안목에서 보면
중국이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여서 자기네 문화로 융화하기까지 800년이 걸렸다.
과학사에서 과학과 기술에 대한 단일한 이미지는 없다고 본다.
○ 우리가 모르고 지나친 것들
조선의 과학기술에는 기계로 대량생산된 물건이 아닌 직접 사람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 상식적이고 겸손한 세계관, 자연과의 조화로운 삶, 유교 인문주의의 중용과 절제의 미덕 등이 담겨 있다.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서양 근대과학의 틀에서 전통 과학기술을 해석하는 일이다. 한국의 전통 과학과 서양의 근대 과학은 패러다임이 다르다. 전통과학이 질적이고 유기체적인 자연관을 가졌다면, 근대 과학은 양적이고 기계론적인 자연관을 가졌다.
자연과 인간의 삶을 통합적으로 보는 시각에 주목했다.
○ 한국적인 것을 찾아 즐기기
조선의 천하도는 17세기 유학자들이 이상향을 그린 지도인데, 중세 서양에도 이와 비슷한 지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면 놀랄 것이다.
김정호는 대동여지도에 우리나라 산천을 하나의 살아 숨 쉬는 생명체로 표현했다. 백두산과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나온 산줄기와 물줄기는 땅 위의 뼈대와 핏줄이었다. 뼈대와 핏줄이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산맥과 강이 하나의 연결된 줄기로 표시된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자연관은 자연의 생태와 인간의 삶을 분리하기 않고 통합적으로 인식하였다.
한국의 전통마을- 경북 김천의 원터마을/ 충남 아산의 외암마을 : 이 마을은 자연생태계를 최대한 유지하면서 자원순환과 에너지 절감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을 꿈꾸네
과학관은 답을 주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는 곳이다.
정인경
고려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 과정에서 한국과학사를 전공했으며, 국립과학관에 관한 논문으로 고려대학교 과학학 과정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지금은 고려대학교 과학기술학연구소에서 과학기술, 역사, 과학관에 관한 연구와 글쓰기를 하고 있다. 최근 주된 관심은 한국의 문화적 토양에서 과학기술 하기이다. 과학관의 현장 경험을 통해 우리나라 교육 현실에서 과학기술 하기가 얼마나 어려운가 절감하였다. 어린이와 청소년 및 과학기술 전공자가 아닌 일반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과학기술의 문화적 감성을 잘 전달할 수 있을 까 고심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청소년을 위한 한국과학사》,《과학관 사이언스》등이 있다.
12.남경태(저술가)
한국의 역사
숨겨진 역사 코드, 반성하는 한국사
장차 엄정하고 체계적인 토대에서 정식 한국사 비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며, 여기서는 그 단초로 한국사 전체를 관류하는 몇 가지 비판 요소를 추출해본다.
○ 고조선의 문제
연속성이 없는 것은 역사가 아니다. 고조선, 특히 단군조선은 역사로 끌어안을 게 아니라 신화로 취급되어야 한다. 신화를 역사로 취급하면 민족적 자긍심을 주기는커녕 역사적 의구심만 키울 뿐이다.
○ 민족이라는 범주 착오
자발적인 사대, 중국화 드라이브는 신라에게도, 이후 우리 역사에게도 혹심한 피해를 남겼다. 당의 중앙집권 체제가 붕괴하자 신라도 그때부터 똑같이 말기적 증상을 보였고, 결국 중앙권력의 약화를 틈타 일어난 호족 세력에게 나라를 내주게 되었다.
○ 서양보다 앞선 중앙집권제
행정력과 정보력보다 유사종교적 권위가 중앙집권을 지탱한 것이다.
과거제를 시행할 만큼 중앙권력이 강했던 동양식 왕조에서는 과거제를 이용해 관리 인력을중앙에서 전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부재
우리 역사에서는 삼국시대 이후 원정은커녕 침략자에 맞서 나라를 지키는 전쟁에서조차도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친히 군대와 생사를 함께 한 사례가 전무하다. 11세기 고려의 왕 현종은 자신이 거란에 대해 강력한 압박정책을 추진했으면서도 그 보복으로 거란이 남침하자 멀리 전라도 나주까지 도망쳤다. 또 15세기 조선의 왕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남쪽에서 북진하는 일본군의 위세에 놀라 잽싸게 북쪽 끝단의 의주까지 피신했다. 당시 선조는 부끄러움을 알았던지 가족과 측근들만 거느린 채 한밤중에 폭우를 뚫고 몰래 야반도주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겨우 사흘이 지났을 때 대통령이던 이승만은 수도 서울을 사수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팽개치고, 수백 명의 피난민들을 희생시키며 한강 인도교를 끊고 남쪽으로 도망쳤다. 명색이 공화국 체제인 대한민국에서 국정의 최고 지도자가 대국민 약속을 어기고 국민을 희생시켜 제 목숨을 보존한 것은 엄연한 범죄 행위다. 하지만 전쟁이 끝나고서도 이승만은 처벌을 받기는커녕 거뜬히 대통령으로 재선되었고, 지금까지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이승만을 구부로 섬기는 세력이 있다.
○ 사대부 정치의 역사
조선의 사대부들은 공식적으로 권력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왕의 이름을 빌려 반대파를 제거하는 지극히 부도덕한 책략을 택했다. 그렇기 때문에 사화와 당쟁이 거의 예외 없이 모함과 중상을 통한 말만의 역모로 벌어진 것이다. 말만의 역모와 허울만의 반역자가 양산되고 각종 사화와 옥사가 빚어지는 조선 특유의 정치문화는 왕대 사대부 집단의 기묘하고 불건전한 이중권력 구조가 낳은 결과다.
국제적으로 중대한 시기에 황폐하기 그지없는 세도정치는 결국 나라를 신출내기 제국주의에게 빼앗기는 비극을 초래했다. 인맥과 파벌이 여전히 주요한 변수인 현대 한국의 정치문화는 멀리 사대부 정치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정경유착이라는 고질병
과거의 약한 역사를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그 약한 역사의 원인을 분석하고 비판해야 한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가 지금까지 미치고 있다면 과감히 끊어낼 필요가 있다.
남경태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한 후 1980년대에 사회과학 출판운동에 매진했다. 이후 인문학 대중화를 모토로 내걸고 역사와 철학 등 인문학에 관련된 책을 쓰고 옮겼다. 지은 책으로는 《종횡무진 역사》《개념어 사전》《철학》《역사》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비잔티움 연대기》《반룬의 예술사》《생각의 역사》《30년 전쟁》등이 있다.
13.김기봉(경기대 교수)
한국의 정체성
한국사 서술과 21세기 한국인의 정체성
한국인이란 누구인지 정체성의 변화를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 바로 한국사학자다.
○ 한국인 없는 한국사 극복을 위한 문화적 전환
한국인의 정체성은 외부의 도전에 대한 내부의 응전의 결과로 만들어진 역사적 형성물이다.
한국 역사든 한국 문학이든 한국 철학이든 모든 한국학이 해명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이처럼 시대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난 한국인들을 하나의 한국인으로 포괄하는 범주로서의 한국인이란 과연 무엇인지를 규명하는 일이다.
오늘의 한국인 없는 한국사 서술을 지양하기 위해서는 한국사의 문화적 전환이 필요하다.
○ 문화적 기억으로 보는 한국사
하나의 불법에 귀의하는 같은 신도라는 신념은 하나의 국왕을 받드는 같은 신민이라는 생각과 함께 국가의 통일에 큰 역할을 했다.-이기백 《한국사신론》,일조각,1999,77면
국가정체성을 형성하는 문화적 기억의 중심이 고구려인가 신라인가를 둘러싼 권력투쟁의 정점으로 일어난 사건이 묘청의 난이다. 고구려 정체성의 대변자인 묘청이 불교의 문화적 기억을 내세웠다면, 이에 대항하는 신라 정체성의 계승자인 김부식은 유교를 국가의 이념으로 제시했다. 신채호는 이 싸움에서 묘청의 패배를 종교, 학술, 정치, 풍속을 중국 사대주의의 노예로 전락시킨 전기가 되는 조선 역사상 1,000년 이래 제1대 사건으로 의미를 부여했다.
불교로 대변되는 낭가사상이 중국 유교에 의해 패배당하는 사건은 묘청의 난 이전 고조선시대부터 일어났다.
일연은 김부식의《삼국사기》라는 정사에 대한 지식의 고고학으로《삼국유사》를 편찬했다. 김부식의《삼국사기》기 정치라는 표층의 사건이라면, 일연의《삼국유사》는 심층의 문화적 기억을 발굴하는 고고학적 역사다.
태양에 바래면 역사가 되고, 월광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이병주
불교는 한국사에서 고중세의 1,000년 이상을 지배한 문화적 기억이다. 정도전과 같은 조선의 건국자들은 이 같은 불교의 기억을 지운 후 대신 유교라는 새로운 문화적 기억을 주입하고, 명나라가 주도하는 중화세계질서에 조선이 편입하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세우고자 했다.
북벌에서 북학으로 인식이 전환되는 것은 분명 탈중화화의 징조라고 볼 수 있다.
동학운동이 촉발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으로써 조선은 중화세계질서로부터 공식적인 해방을 이룰 수 있었다. 중화질서에서 벗어난 조선은 1897년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독립국임을 선언했다.
고종은 기자에서 삼한으로 문화적 기억을 바꾸는 방식으로 탈중화화하여 조선을 대한제국으로 탈바꿈시켰다.
한국사에서 현대란 식민지 근대 이후의 시대를 지칭한다. 해방 후 한국 역사학의 첫 번째 과제는 일제가 심어놓은 식민주의 문화적 기억을 상기하는 한국사를 쓰는 것이었다.
○ 문명교류사적인 한국사 서술을 위하여
한국 근․현대사 해석을 둘러싼 역사논쟁은 내전을 방불케 했다. 한국사를 구성하는 주체를 계속해서 민족으로 설정하려는 진보진영과 국가로 바꾸려는 보수진영 사이의 담론투쟁으로 전개되는 역사 내전은 결국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충돌이다. 이 둘의 양립을 지양할 수 있는 제3의 대안이 한국사를 국가와 민족이 아닌 문화적 기억으로 재구성하는 방안이다. 문화란 소통의 코드이면서 동시에 정체성을 형성하는 인자다.
문화적 소통으로 오늘의 한국 문화가 생겨났고, 이러한 문화를 문화적 기억으로 해서 한국인의 정체성이 생겨났다. 결국, 한국인이란 누구인가는 민족과 같은 혈통이 아니라 문화적 유전자로 해명돼야 한다.
오늘의 대한민국의 성공은 보편적 세계문명과 소통한 성과로 이룩된 것이고, 선진국으로의 도약 역시 글로벌 스탠더드에 얼마나 빨리 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기봉
1959년 대전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경기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대학의 역사가들이 주로 역사 지식의 생산에만 전념하는 데 반해, 그는 역사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자임한다. 역사란 기본적으로 삶의 비평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의 역사학 위기는 역사가 삶에 대한 비평적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에 발생했다. 역사가 동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위한 삶의 지도가 되려면 역사 지식의 생산뿐 아니라 어떻게 소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 성찰하는 역사 비평이 활성화돼야 한다. 그는 전문 역사학자들만 읽는 논문을 쓰기보다는 역사학 밖의 대중과 소통할 목적으로《역사들이 속삭인다:팩션 열풍과 스토리텔링의 역사》《팩션시대:영화와 역사를 중매하다》《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역사를 통한 동아시아 공통체 만들기》《가족의 빅뱅》등을 썼다.
14.류동민(충남대 교수)
한국의 경제
능력과 공정한 경쟁, 그리고 갈림길에 선 한국적인 것
○ 2011년 여름, 우리의 자화상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의 책이 공전의 베스트셀러가 되고, 정치 지도자부터 사회의 기층에 이르기까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외침이 일반화하고 있는 2011년 여름, 한국인의 자화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 목숨을 건 도약
○ 시공간 압축
시공간 압축이라는 개념은 경제지리학자인 데이비드 하비에 의해 확립되었다. 이 용어(시공간 압축 인용자)는 공간과 시간의 성질들이 아주 급격하게 변화하여 우리가 세상을 표현하는 방법을 바꾸어야 하는 과정을 가리킨다. 자본주의의 역사는 생활의 속도를 빨라지게 하는 특징을 가지는 한편, 공간적 장벽을 극복하는 능력이 커짐에 따라 세계가 때때로 우리 내부로 내려앉는 듯하므로, 나는 이를 가리켜 압축이라는 단어로 사용한다.
○ 공정한 경쟁: 능력주의에 대한 믿음
서구사회가 몇백 년에 걸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과정을 통해 얻어낸 기술의 근대성과 해방의 근대성이 한국사회에서는 불과 한 세대라는 짧은 기간 동안에 시공간 압축의 과정을 통해 획득되었다.
○ 스펙 쌓기 경쟁과 88만원 세대의 절망
능력에 따라 성공 여부가 결정된다는 믿음이 깨질 때, 개인이 반응하는 즉자적 방식은 분노와 절망이다. 개개인의 분노와 절망이 쌓여서 모일 때, 때로 그것은 사회적 분노와 절망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사회적 분노와 절망이 쉽게 폭발하는 것은 아니다.
○ 한국 경제성장의 원동력
한국경제성장의 원동력은 이러한 분노와 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시뮬라크르-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시뮬라크르는 원래 프랑스의 철학자 질 들뢰즈에 의해 제안된 개념이다. 시뮬라크르, 그 명사형으로서의 시뮬라시옹은 어쩔 수 없이 진짜를 복제․모방한 가짜이지만, 가짜 나름대로의 독립적인 역동성을 갖는 가짜를 가리킨다.
○ 한국적인 것, 그 변화의 갈림길에 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어냈던 한국적인 힘으로 다시금 고양될 수 있을 것인가?
잘 짜인 가짜 세상 속에서만 움직이는 잘 관리된 분노로 제한될 것인가?
류동민
1965년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다. 충남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이다 전공은 마르크스 경제학이다. 대학에서는 경제학설사도 가르친다. 경제학 자체가 근대 서구를 배경으로 탄생한 학문이니 만큼, 통상의 경제학설사 강의는 애덤 스미스에서 시작하여 존 메이너드 케인스로 끝난다. 즉, 서양 경제학설사인 셈이다. 가르치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점점 우리의 경제학, 우리의 경제학자, 우리의 경제학설사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서구적 기준에서 부족한 점이 있더라도, 우리 문제를 우리 학자가 우리 머리로 생각한 것들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지침을 얻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지은 책으로는 《정치경제학》《프로메테우스의 경제학》《경제학의 숲에서 길을 찾다》, 옮긴 책으로는《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이해》,《맑스의 경제학》등이 있다.
15.이영미(대중예술 연구자)
한국의 드라마
톡 쏘는 한 방의 매운 맛, 한국 드라마의 매력
○ 미드, 일드, 그리고 한드
흥미로운 것은 이렇게 뻔하고 불필요한 자극적 요소들로 뒤범벅인 한국 드라마가 여전히 인기를 누린다는 점이다.
텔레비전 드라마가 주도하는 한류가 분명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아시아권에서 그 재미와 매력은 상당한 호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 엉성한 뼈대에 풍부한 살
뼈대가 상대적으로 엉성한 대신, 거기에 붙는 살들이 매우 맛깔스럽고 풍부하며 매력적인 것이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이성적으로 쉽게 분석되는 뼈대의 취약성에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각 부분이 선사하는 여러 풍부한 매력들을 받아들임으로써 작품을 계속 재미있게 보게 되는 것이다.
○ 삽입노래와 명대사 장면의 중요성
○ 뜨거운 것이 좋아-가족과 운명
○ 청양고추의 맛, 한국 드라마
이영미
1961년 서울에서 태어나 자랐다. 대중예술 연구자이며, 20대 중반부터 연극과 대중예술 분야에서 평론과 연구 활동을 해왔다. 30대 중반부터 12년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에서 근무했고, 한국 방송 드라마의 역사를 정리하겠다는 각오로 직장을 던지고 전업 연구자의 길로 들어섰다. 그리하여 지금은 대중예술 연구 활동에 힘을 더 기울이고 있으나, 한국의 방송 드라마가 워낙 방대한 영역인데다가 옛 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읺아서 고고학 수준의 더듬기만 계속하는 중이다. 《한국대중가요사》《세시봉, 서태지와 드로트를 부르다》《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광화문 연가》《흥남부두의 금순이는 어디로 갔을까》《대학로 시대의 극작가들》등을 썼으며, 같이 지은 책으로 《한국현대에술사대계》(총6권)《남북한 공연예술과의 대화》《딱지본 대중소설의 발견》《아프레걸 사상계를 읽다》등이 있다.
16.김영진(명지대 교수)
한국의 영화
한국인의 캐릭터: 송강호, 설경구, 전도연의 몸짓을 통해 보다
한국에서 직선적인 영웅의 무용담은 그다지 실감나지 않는다.
상처 많은 역사를 경험하면서 한국인들의 유전자에는 삶에 승리하는 서사보다는 승리하지 못하더라도 지지 않을 수 있는 주인공을 응원하는게 더 있음직하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송강호, 설경구, 전도연이 맡은 주요 대표작들을 통해 현대 한국 영화의 캐릭터들을 소개하는 것은 곧 우리 시대의 가장 친근감 있는 캐릭터들을 스크린에서 만난 증거 목록이라 할 것이다.
○ 허허실실 단독자-송강호(일상적 인간의 균열을 드러내는 모습)
○ 덜 나쁜, 약간 돈, 야생동물 같은 영웅-설경구(악행에 둔감한 인간이 더 큰 악행 앞에서 분노하는 인간적 결단을 통하여 현대 한국영화의 캐릭터 요약)
○ 가면을 쓴 벌거숭이 여왕님-전도연(평범하게 살고 싶은 여자가 광기에 빠지는 상황을 겪으며 주체의 각성을 드러내는 데 탁월한 감성을 짚은 여배우다)
○ 우리가 비극적 영웅에 공감하는 이유
김영진
영화평론가이자 대학교수이다. 1995년부터 영화주간지 《씨네21》의 창간 멤버 기자로 일했으며, 2000년 이후에는 《필름 2.0》편집위원으로 활동했다. 2006년부터 명지대학교 영화뮤지컬학부 교수로 있다. 지은 책으로 《평론가 매혈기》《이장호 vs 배창호: 1980년대 한국 영화의 최전선》《영화가 욕망하는 것들》과 영문판《이창동》《박찬욱》《류승완》등이 있다.
17.정여울(문학평론가)
한국의 문학
처용과 평강공주 : 위대한 용서와 아름다운 복수 이야기
처용과 평강의 이야기 속에는 인간의 치명적인 한계와 눈부신 가능성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들이 공존한다.
○영웅 아닌 영웅들의 못다 한 이야기
처용과 평강은 세상에서 가장 아픈 상처를 눈부신 비상의 대체에너지로 활용한 멋진 인물들이다. 그들은 상처를 제대로 활용한 사람들, 버림의 미학을 인생 최고의 자산으로 삼은 희대의 전략가들이 아닐까. 처용은 용서로써 자신의 존엄을 지켰고, 평강은 공주라는 대단한 신분을 버림으로써 진정 자유를 얻었다.-정여울 문학평론가
○처용 : 시적인 울림에서 서사적 축제로
서울 밝은 달 아래 밤늦도록 노닐다가
들어와 자리를 보니 다리가 넷이러라
둘은 내 것인데 둘은 뉘 것인고
본디 내 것이었다마는 빼앗긴 것을 어찌하리오.
-향가(처용가)
아내를 빼앗긴 남편의 비애를 아름답게 승화시킨 향가 〈처용가〉가 민중의 희망을 담은 주술적 고려가요 〈처용가〉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수백 년의 시간을 거쳐 처용은 우아한 용서의 미학을 넘어 민중의 시끌벅적한 목소리를 대신하는 다중적 존잭다 된다. 역신은 그의 용서에 감복하여 자발적으로 처용을 신격화한다. 향가 〈처용가〉가 개인의 서정을 표현한 시적인 텍스트라면, 고려가요 〈처용가〉는 수많은 이름 없는 백성의 목소리와 삶의 흔적이 담긴 서사적 텍스트가 된다.
○ 평강 : 내게 주어진 운명의 보증수표를 버리다
어쩌면 그녀는 궁 밖으로 나가 자유를 쟁취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식언(食言)을 전략적으로 이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불행에 철저히 길들여져 행복을 받아들이는 방법조차 몰랐던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바보라고 부르는 온달이 지닌 잠재성을 알아본 유일한 사람이 바로 평강공주였다.
○ 그들의 시련, 그들의 기회
이 이야기의 아름답고 슬픈 피날레는 온달과 평강의 사랑 이야기를 불멸의 로맨스로 승화시킨다. 평강공주가 관을 만지자 관이 비로소 움직였다는 마지막 장면은 삶과 죽음 사이의 끔찍한 거리와 그 거리에도 끝나지 않은 사랑의 아름다움을 비극적으로 보여준다.
튀틀린 운명을 겸허하게 긍정하는 처용의 여유는 아름답다. 주어진 운명의 안일함에 굴복하지 않고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은 채로 가장 위험한 길을 선택한 평강공주의 용기는 더욱 아름답다.
정여울
서울대학교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 국문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봄 《문학동네》에〈암흑의 핵심을 포복하는 시시포스의 암소-방현석론〉을 발표하며 평론가로 데뷔했다. 이후 《공간》《씨네21》《GQ》《출판저널》《드라마티크》《신동아》등에 영화와 드라마에 대한 글을 썼다. 《아가씨, 대중문화의 숲에서 희망을 보다》《모바일 오디세이》《미디어 아라크네》《내 서재에 꽂은 작은 안테나》《시네필 다이어리》《국민국가의 정치적 상상력》(공저)을 썼고, 《제국 그 사이의 한국》을 옮겼다.
18.김열규(서강대 명예교수, 민속학자)
한국의 신화
천지개벽의 이야기
신화는 천지개벽(天地開闢) 이야기다. 시작의 시작에 관한 까마득한 이야기, 그것이 바로 신화다.
○ 까마득한 날에 글로벌리즘으로 시작된 한국 신화
신화는 인종이며 종족의 한계에 제약을 받지 않는다. 그것은 글로벌리즘의 언어이고 담론이다.
○ 고조선의 신화와 가락의 신화
-신과 동물과 사람, 그 삼위일체
천신으로 대표되는 하늘의 기운과 성수로 대표되는 대지의 기운이 어울려서 인간 생명을 창조한다는 생각을 단군신화에서 이끌어 내게 된다. 이것은 한국인의 인간성의 신화적인 원상이다. 으뜸 모습이다.
-오늘날까지 전해진 세이레와 백일
-수로왕과 신 지핌
공수는 한국의 무속신앙에서 쓰이고 있는 용어인데, 죽은 이의 넋을 무당을 통해서 전하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신령이 무당을 통해서 사람에게 전하는 말을 가리키기도 한다.
○ 혼례와 남녀관계
-까마득한 날, 신들의 짝짓기와 근세의 혼례
해모수 신화는 일대 서사시라고 해도 좋은데, 그중에서도 혼사는 엄청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실혼은 남녀가 실제로 짝을 짓는 것이고, 합법혼은 그 사실혼이 합당하다고 인정받는 절차다. 이처럼 혼례를 두 번 치르기 때문에 중혼제라고 하는 것이다.
부여의 해모수, 고구려의 온달, 그리고 신라의 서동은 모두 같은 절차를 거쳐서 장가를 가고 있다.
-신화가 말하는 남녀관계
권위의 상징인 하늘과 풍요의 상징인 물이 짝을 짓는 것으로, 우리 상고대의 신화는 왕과 왕비의 배우(配偶)를 이룩해낸 것이다.
○ 언어가 아닌 매체로 된 신화
-바위에 그려진 신화
울주의 암각화(천전리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
반구대 암각화는 한반도의 수렵시대를 대표할 역사적 유물이다.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많은 짐승의 번식과 함께 많이 잡히기를 빌면서 새긴 그림이다. 그림 속에 암수가 교미하고 있는 모양과 함께 덫에 갇히거나 태어나는 순간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도 그 점은 쉽게 헤아릴 수 있다. 요컨대 많이 번식시켜서 많이 잡자는 것이다.
팰로센트리즘(phallocentrism)-남근 숭배와 관련된 주술이다.
-춤추는 신화 , 강강술래
신화는 말로 나타나기 전에 춤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시인해도 좋다는 것을 보여주는 춤, 그게 바로 강강술래다. 시와 노래와 춤의 삼위일체가 연출되곤 한다.
김열규
1932년 경남 고성에서 태어났다. 젖먹이 시절부터 고등학교 마치기까지 줄곧 부산에서 자라났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한국문학과 민속학을 공부했다. 학부를 마친 후 중앙중학교와 중앙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석사과정을 마친 후에는 충남대학교 교단에 섰다. 이후 서강대학교로 옮겨서 29년 동안 교직에 몸을 맡겼다. 그러는 사이 농어촌을 두루 돌아치면서 민속 조사를 하는 한편, 신문과 잡지 등 언론계에서도 필자로서 제법 크게 활동했다. 하버드대학교의 객원교수와 버클리대학교의 연구교수도 거쳤다. 정년을 6년 앞두고 서강대학교를 그만두고는 인제대학교에서 11년간 전임교수직, 계명대학교에서 2년 동안 석좌교수직을 맡다가 73세가 되어서야 대학의 전임에서 물러났다. 지금은 고향으로 돌아와 대자연 속에서 유유자적하고 있다. 경상대학교의 대학원에서 강사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기호로 읽는 한국문화》《한국인의 에로스》《한국인의 혼례》등을 비롯해서 50여권이 넘는 책을 썼다.
19. 신병주(건국대 교수)
한국의 사유
조선의 탈성리학적 사유들
탈성리학 경향을 보이거나 성리학을 절충적으로 이해하려는 학자들이 있었다. 대표적인 학자로 화담 서경덕(1489~1546)과 남명 조식(1501~1572)이 있었고 , 이들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한 화담학파와 남명학파의 학자들에게 이러한 경향이 강하였다.
○ 개성의 정서를 담은 학자, 서경덕
○ 의(義)와 이(利)를 절충한 학자, 이지함
1573년에 포천 현감에, 1578년에 아산 현감에 부임하여 자신의 정치이상을 실현할 기회를 잡았다. 특히 포천 현감으로 있으면서 올린 상소문인 이포천현감시상소에는 그가 지향한 사회경제사상이 집약되어 있다.
제왕의 창고는 세 가지가 있음을 전제하고, 도덕을 간직하는 창고인 인심을 바르게 하는 것이 상책이며, 인재를 뽑는 창고인 인조와 병조의 관리를 적절히 하는 것이 중책이며, 100가지 사물을 간직한 창고인 육지와 해양 개발을 적극적으로 하는 것을 하책으로 정의했다.
이지함은 국왕이 도덕성을 갖추어야 하고, 국왕을 보좌하는 이조와 병조의 관리들이 청렴성을 갖추는 것이 사회문제 해결의 기본적인 방향이라고 설정했다.
○ 경(敬)과 의(義)의 실천을 강조한 학자, 조식
청건대 무거운 종을 보오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두류산과 꼭 닮아서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남명집 권1시(재덕산계정주)
신병주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서울대학교, 건국대학교, 국민대학교 등에서 조선시대 지성사, 조선 후기 사회와 실학, 한국사를 이끈 지성들 등 주로 조선시대의 사상과 문화를 주제로 강의했고,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로 재직했다. 지금은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이다. 역사의 대중화에 깊은 관심을 가져 KBS의 〈역사추리〉〈역사스페셜〉자문을 맡았으며, 현재 KBS와 EBS 역사 프로그램의 자문이다. KBS1라디오에서 신병주의 역사이야기를 진행하고 있으며, 남명학연구원 상임연구위원, 외교통상부 외규장각도서 자문포럼 위원으로도 활동 중이다. 《남명학파와 화담학파 연구》《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하룻밤에 읽는 조선사》《고전소설 속 역사여행》《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공저)《모반의 역사》(공저)《제왕의 리더십》(공저)《조선 최고의 명저들》《조선 중․후기 지성사 연구》《규장각에서 찾은 조선의 명품들》《이지함 평전》《조선을 움직인 사건들》등을 썼다.
20.조용헌(동양학자, 칼럼니스트)
한국의 역학
사주와 풍수의 즐거움
지득지미(知得知味)-스스로 얻어가는 재미 : 사주(四柱)와 풍수(風水)
사주는 천시를 알게 해주는 공부이고, 풍수는 지리를 알게 해주는 공부이다. 다시 말하면 사주는 시간을 알게 해주고, 풍수는 공간을 알게 해준다. 시공을 파악하고자 하는 욕구는 식욕, 색욕, 권력욕 다음으로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가 아닌가 싶다.
운명에 저항하면 끌려가고, 운명에 순응하면 업혀간다.-세네카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우주의 기운
사주팔자의 기본원리는 음양오행사상이다. 음양, 그리고 수화목금토 오행,다음에는 10간 12지이다. 이 간지를 가지고 사람의 팔자를 재단한다. 여기에서 만세력이 큰 역할을 한다. 만세력은 한자문화권의 전통적인 달력이다.
탯줄을 자르는 시간에 우주의 기운이 몸으로 들어온다고 본다. 우주의 기운이란 바로 별들의 기운이다.
○명리학의 고수들
서자평의 저술인 《연해자평》은 명리학의 대표적 고전이다. 우리나라에 서자평의 명리학이 들어온 것은 고려 후기로 보이며, 조선 초기의 《왕조실록》에도 명리학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다 보니 눈을 돌린 분야가 한의학, 풍수학, 명리학 같은 실용적인 학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이북의 인재들이 이 분야로 몰렸다.
풍수를 주 메뉴로 하고 사주를 양념으로 섞은 것이 바로 《정감록 鄭鑑錄》이다.
○ 돌 ․ 물 ․ 바람 , 생기의 뿌리
사주와 풍수는 음양오행과 60갑자를 공통분모로 사용하고 있다. 동양학의 기본은 몸이 예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은 닫혀 있고 머리만으로는 결코 알 수 없는 신비학이 바로 풍수이다.
피곤하면 명당이 아니고, 피곤하지 않으면 명당이다. 이것이 명당의 기준이다.
지자기가 몸에 들어오면 일차적으로는 건강이 좋아지지만, 이차적으로는 영성이 개발된다.
조용헌
동양학자이자 칼럼니스트인 청운 조용헌은 보이는 것을 통해 보이지 않는 것을 감지하는 혜안을 지닌 이 시대의 이야기꾼이다. 그는 강호를 좋아한다. 강호가 그를 키웠다. 강호의 바람을 먹으면서 천지를 종잡을 수 없이 돌아다녔으며, 이름 모를 바위 옆에서 이슬을 덮고 자며 별을 보았다. 그래서 터득한 분야가 강호동양학이다. 젊은 시절부터 한국, 중국, 일본을 두루 돌아다니며 수많은 장소와 공간, 사람들을 만나온 조용헌은 강호동양학의 3대 과목으로 불리는 사주, 풍수, 한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수식어를 찾아보기 힘든 직설법을 사용해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낸다. 《조용헌의 동양학 강의》《조용헌의 사찰기행》《조용헌의 소설 1,2》《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조용헌의 사주명리학 이야기》《방외지사》《조용헌의 고수기행》《조용헌 살롱》《그림과 함께 보는 조용헌의 담화》《조용헌의 명문가》등을 썼다.
21. 안대희(성균관대 교수)
한국인의 끼
전근대 마니아의 세계
마니아= 광(狂), 치(痴), 벽(癖), 폐인(廢人), 기인(奇人), 또는 오타쿠, 프로페셔널
마니아를 키워드로 하여 18세기 한국의 문화현성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광기와 끼를 광고하는 시대
마니아 정신을 부정해야 할 태도로 보지 않고 역동적이고 개성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한 기제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니아의 유형
-수집에 빠진 마니아
고서화, 금석문, 골동품 칼(김억), 서적과 벼루, 인장과 분재, 수석, 상복(윤양래)
-전문적 기예에 빠진 마니아
낯익지 않은 새로운 기술과 예술의 세계를 창조하기도 한다.
-취미에 목숨 건 마니아
여행가, 바둑, 수석 수집가, 애완용 동물 기르는 사람, 소설 탐독자 등 책을 베끼는 사람,
-독특한 형태의 마니아
집 짓는 취미, 책을 수선하고 제본
○18세기 마니아의 특징
-자신의 벽을 숨기지 않고 광고한다.
-신분을 따지지 않고 등장했다.
-벽의 주제가 모아져 집단이 형성되었다
-마니아를 인정하는 사회풍습과 패트런의 존재
○18세기 조선의 마니아와 21세기의 디지털 문명
-첫째로 18세기의 마니아는 조선왕조의 근간이 되는 주자학적 인간관, 세계관과 결별하여 주체적으로 살려는 의지를 보였다.
-둘째로 조선의 마니아는 집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았다.
-셋째로 조선의 마니아는 세상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기는 하지만 대안으로 후원자와 동지를 규합하기에 애썼다.
-네째로 소수이기는 하지만 조선의 마니아들을 보호하고 지원한 존재들이 있었다. 18세기 마니아를 역사에 매몰시키지 않고 드러낸 지식인과 그들을 후원한 권력과 부를 소유한 페트런이다. 무엇보다 군주인 정조가 어느 분야에 실력을 갖추었다면 발굴하여 기용하려는 정책과 배려가 보였다는 점은 지금도 생각해볼 문제다.
안대희
충남 청양에서 태어났고,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학박사이며,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지금은 성균관대학교 한문학과 교수이다. 정밀한 사유를 바탕으로 옛글을 고증, 해석함으로써 선인들의 삶을 풀어내는 작업에 매진하고 있다. 《고전 산문 산책》《조선을 사로잡은 꾼들》《선비답게 산다는 것》《정조의 비밀편지》《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등을 썼고, 《연경, 담배의 모든 것》《산수간에 집을 짓고》《한서열전》《북학의》《궁핍한 날의 벗》등을 옮겼다.
22. 윤구병(철학자)
한국인의 본성
아이, 농촌, 생명 공동체
○생명은 하나
○죽음을 부른 인간의 욕심
열매는 그 열매가 달린 나무의 죽음을 상징합니다. 그 나무가 죽어도 열매가 땅에 떨어져 새싹을 틔우고 뿌리내려 그 나무를 대신해서 새로운 그늘을 이룰 수 있다는, 개체 생명의 유한함과 종의 유지라는 생명계 일반의 생명 유지의 법칙이 전제 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입니다.
○손발 놀리고 몸 놀려야 산다
○고유한 삶을 되찾자
○모순이 필요한 세상
○생명의 젖줄, 자연
윤구병
1943년 전남 함평에서 태어났다. 공부는 제법 했으나 말썽도 많이 부리는 학생이었고, 고등학교 2학년 때는 무전여행을 떠났다가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위로 형이 여덟 명 있었는데, 가장 큰 형의 이름은 일병이고, 아홉 번째 막내로 태어나 구병이 되었다고 한다. 서울대학교 철학과와 같은 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뒤 월간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을 맡았고, 1981년에 충북대학교 철학과 교수가 되었다. 교수 생활을 하면서 1988년에 보리출판사, 1989년에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 몸담았다. 정년이 보장되는 교수직을 15년 만에 그만두고, 1995년 전북 부안군 변산으로 농사지으러 들어갔다. 공동체야말로 우리 삶을 온전하게 지켜줄 울타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이가 세운 변산공동체는 지금도 여전히 20여 가구 50여 명이 느슨한 지역 공동체 틀을 지키면서 논 2만3,000제곱미터(7,000평)와 밭 2만6,000제곱미터(8,000평)안팎을 일구고 있다. 이 가운데 매 끼니 밥 먹고, 경제적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식구는 스무 사람 남짓이다.
한국학의 즐거움
한국의 대표지식인 스물 두 명이 말하는 한국, 한국인, 한국적인 것
지은이 주영하외 지음
1판1쇄 발행일 2011년9월5일
1판2쇄 발행일 2011년10월24일
발행인 김학원
편집인 선완규
경영인 이상용
편집장 위원석 정미영 최세정 황서현
기획 나희영 임은선 최윤영 박정선 조은화 김희은 김서연 정다이
디자인 김형태 유주현 구현석
마케팅 이한주 하석진 김창규 이선희
발행처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출판등록 제313-2007-000007호(2007년1월5일)
주소 121-869 서울시 마포구 연남동 564-40
전화 02-335-4422
만든 사람들
기획 선완규
편집 김선경
디자인 민진기디자인
값 19,000원
첫댓글 정말좋은책보셨내요기회가되면꼭한번보고십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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