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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과 사화
김효로(21세)공과 안동 예안 오천 군자리 유래.
김용석(23세) 담암공 유사와 거촌 쌍벽당과 용산 보덕단 유래.
연산군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어머니를 잃고 어린시절을 고독하게 보냈다.
연산군의 내면에 숨겨져 있던 광폭한 성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2년 집권중 무오, 갑자의 두 번에 걸친 사화를 통해 엄청난 인명을 죽였다.
자신을 비판하는 무리는 한사람도 곁에 두지 않은 독재군주로 군립했다.
사화란 사림의 선비들이 화를 당한 것을 말한다.
공신과 외척을 포함하는 인척 세력을 훈구파라한다.
도학적 사상을 기반에 둔 사람으로 과거를 통해 등용된 사림이 사림파다.
세조시대에 형성되었으며 이들이 서로 대립하다가 사림파가 제거된 사건이다.
※사림파와 훈구파
포악한 정치와 폐륜으로 신하들에게 쫓겨난 왕이 패주 연산군이다.
왕의 권능과 권위에 도전하여 임금을 축출 시킨다는 사건은
왕 자신은 물론 당시에 사람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으로 세상 천하가 뒤집어지는 사건이다.
후세 임금은 패주 연산처럼 쫓겨나지 않기 위해 대단한 조심을 하였다.
역모를 두려워하여 역모사건에 조금이라도 관련되자는
가차 없이 중벌로 다스렸고,
신하들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귀여겨듣게 되었다.
조선시대에 일어난 큰 사화가 연산 때 두 번,
중종 때 한 번, 명종 때 한 번으로 4대 사화라 이야기한다.
벼슬길에 나가있는 관리들은 누구나 이 사화를 피할 수가 없었다.
이 사화들을 알아야만 조상님들의 행적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사화란 사림파와 훈구파의 권력 다툼으로 선비들이 입은 피해를 말한다.
훈구파는 공신이나 외척 등 권력을 쥔 사람들로
이들은 토지와 노비를 많이 가진 부자들이다.
도학적 사상을 가진 사림파는 훈구파를 비판하며 새로 등장한
신진 세력으로, 고려 말
역성혁명에 반대하여 농촌에 숨어 살았던 온건파 신진 사대부들이다.
이들은 조선 건국 후 100여 년 뒤 15세기 말엽에 과거시험을 거쳐
중앙 무대에 진출하였다.
훈구파는 사림파가 눈에 가시처럼 여겨져 먼저 공격을 가한 것이 무오사화이다.
(계몽사)
무오사화
무오사화는 연산 4년(1498)에
김일손 등 신진사류가 유자광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에 화를 당한 사건이다.
사림파가 중앙에 등용되어 벼슬길에 나온 것은 성종 때부터
그 중심인물이 김종직이었다.
그는 임금의 신임을 얻어 주로 삼사(三司: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에
자기 제자들을 등용하며 세력을 갖게 되었다.
이들은 훈구파를 욕심이 많은 소인배라 무시하며,
훈구파는 새로 등장한 사림파를 야생 귀족이라 업신여기면서
서로 반목과 배격이 그치질 않았다.
사림의 김종직과 훈구의 유자광이 일찍이 개인 감정이 있었다.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춘추관 사관(史官)으로
훈구파 이극돈의 비행을 낱낱이 사초(史草)에 기록한 일로, 김일손과 이극돈 사이에
틈이 생겨 이극돈과 유자광이 사림파에 보복을 하게 되었다.
연산 4년(1498) 실록청이 개설되어「성종실록」이 편찬되자
실록청 당상관이었던 이극돈은 김일손이 기초한 사초에 삽입된
김종직의「조의제문」이라는 글은
세조가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빼앗은 일을 비방한 것이라고 연산군에 고해 바쳤다.
연산군은 김종직의 선동한 것이라고 여겨
이미 죽어 땅 속에 묻혀있는 김종직의 관을 파내어 시체의 목을 베었다(부관참시).
수많은 선비들이 죽음을 당하고 관직에 쫓겨난 사건으로
사초에 문제가 발단되었다 해서 사화(史禍)라고도 쓴다.(학원사, 세계대백과사전)
무오사화의 참혹한 사람들의 희생을 보고 많은 사람들은 벼슬 길을 단념했다.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안주하면서
후학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내려는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
21세 안동 군자리 입향조 휘 효로(양간공파, 밀직부사공파)
1454년(단종3)-1534년(중종29) 조선 전기 학자. 자는 순경. 호는 농수.
아버지는 증 참의 회(淮)이며 어머니는 증 숙부인 안강 노씨
1480년(성종12) 생원시에 3등 8인으로 합격하였으나
과거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았다.
청렴결백을 신념으로 삼고 남과 사귀되 구차하지 않았고
남의 약함을 보고도 관용을 베풀었다.
부귀를 구하지 않고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았으며
이조참판에 추증 되었다.
증 통정대부 이조참의 효로 묘갈명
공의 휘호는 효로요, 자는 순경이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자
외조 경산 현령 노웅에게 자랐으며 이름은 효로로 하였고, 그 후로는
증조부 효지(孝之)에게 양육되고 예안현 오천 마을에 살았다.
경자년 생원시에 합격한 후로는 과거를 일삼지 않고,
시골에 살면서 청렴과 결백으로 신조로 삼고 남과 사귀되 구차하지 않았다.
남의 약함을 보고도 관용의 정신을 베풀었다. 제사를 받들되 정성되이
공경을 다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효제로서 하였다.
가업은 겨우 구차함을 면할 뿐이요,
부유함은 구하지 않고 친구가 찾아오면 늘 반갑게 맞이하였다.
말을 할 때에는 반드시 적선한 뒤에 경사 있다는 말로써 권유하였다.
일찍이 공의 조행이 탁이 하였으므로 향천을 받아 장차
현달하게 되었을 것인데 마침내 이루지 못하니 애석 하도다.
아! 공과 부인이 다 같이 장수하였고 공의 자손들이
번창하고 준수하여 아름다운 덕과 꽃다운 향기가 연달아
그 집을 빛내는 이가 계속 나도다.
전에 이른바 적선한 뒤에 경사가 있다는 말이
지금에 더욱 중험이 되고 세상에 착한 일을 하는 자
또 한 그 권하는 바를 알리로다.
명 하노니!
선비가 몸을 닦는 것은 세상에 쓰이려 함만은 아니로다.
몸가짐이 개제하니 복록의 터전일세
저 좋은 임천에 공이 사셨고 많고 많은 자손들이 유업을 이었도다.
누가 하늘의 정한 이치가 여기 있지 않는다고 이르는가.
모든 사람들은 이 글을 볼지어다. 퇴계 이황 찬
안동 예안 오천 군자리(君子里)의 유래
안동군 와룡면 오천(외내)은 광산김씨 예안파(밀직부사)의 500년간 세거지이다.
고려 말 조선 초에 제용소감을 지낸 김무가 경기도 교양에서 안동으로 낙향하였고 ,
그의 손자 회(淮)가 풍산 도양(안동 풍천)에 살았다.
그의 아들 효로(증 이조참판)가 연산조 때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출세를 단념하고 풍광이 수려한
예안에 입향하여 그 후손들이 오늘날까지 살아오고 있다.
이곳에 정착하자 문운(文運)이 융성하여 입향조 효로의 아들
연(운암)이 문과에 급제로 탁영시에 뽑혀
관찰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 선정과 청직으로 선망이 높았다.
그의 아들 후조당 부필(문순공)이 퇴계의 고제(高弟)로 학력이 뛰어나
수차 천거를 사양하니 ,퇴계선생이
“후조당 주인은 절조가 굳세어, 임명장이 내려와도 반기지 않네,
앉아서 빙설 같은 매화 향기를 대하여, 도의 존재를 눈여겨보며
읊조리기만 하네”.라는 칠언 절구에 보듯이
벼슬을 탐내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뜻이 있음을 말해 준다.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문순공의 시호를 제수 받았다.
퇴계의 시호가 문순공인지라 스승과 제자의 시호가
같을 수 있느냐는 시비가 있었다.
그러나 나라에서 문순공의 문하에 다시 문순공이 나니,
어찌 두 가문의 영광이 아니겠는가라는 회답으로
시비가 온당치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바 있다.
부필의 아우 부의(읍청정)가 또한 진사로 퇴계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정심 하였으며
선생의 명을 받아 선기옥형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역동서원(고려 말 명신 우탁 선생을 모신 서원) 창건시에
후조당은 많은 사재를 내어 창건 주역이 되었다.
아우 읍청정으로 서원 대 역사를 주관케 하고 역사를 마친 후
퇴계 선생은 당시 기라성 같은 명현 석학 중에 읍청정을
역동서원 초대 원장으로 예우한 것을 보아 그 인품을 알 수 있다.
운암 연의 아우 유(탁청정)가 진사로서 학덕으로 추앙되고
탁청정의 아들 부인(산남) 부신(양정당) 모두 퇴계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났으며 특히 산남공은 북병사로 공훈이 많았다.
막내아들 부륜(설월당)이 산남 양정당과 동문수학하여 당대에
선망이 높았으나 세상 사람들은 후조당(김부필),
읍청정(김부의), 산남공(김부인), 양정당(김부신),
설월당(김부륜), 일휴당(금응협), 면진재(금응훈)를
이르되 오천 칠 군자라 칭한다.
그 당시 한강 정구선생이 말하기를
『오천일리(烏川一里)는 무비군자(無非君子)』라고 칭송 한데서
연유하여 오늘의 군자리로 명명하게 되었다.
이들은 모두 퇴계선생 문하에 동문수학한 덕망 높은 학자들로
형제와 종반들이며 두 분 금씨와는 내외종간으로 한 시대를 흔들었다.
후조당의 아들 해(근시재)는 어릴 때 성현의 가르침에 뜻을 두어
도학과 천문지리, 예학, 병서, 의학 분야에도 정통하였다.
약관에 대과 급제로 벼슬이 한림에 이르렀으나 곧 사임하였는데
임진에 왜란이 일어나자 ,
그는 분연히 의병을 모집하여
깃발을 드높이니 의분에 넘치는 선비들이 운집하였다.
안동 유림의 추대를 받아 경상좌도의 의병장이 되었다.
종형인 김기(24世)가 정재장 겸 소모사가 되어 의병을 모았다.
종제인 설애 김강(24世), 극재 김평(24世) 형제와 족손인
도봉 김득렴(26世), 쌍벽당 김언구의 손자 김백웅(27世)이 이에 따라
순식간에 수만 명이 모여들어 경상좌도의 의병이 편성되었다.
유림의 선비들이 충의로 굳건히 뭉쳤기에 함창 당교 전투와
예천 용궁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당교 전투에서 적장의 목을 베어 순찰사였던 몽촌 김수에게 바치니
의병 중 첫째라 칭찬하였다.
예천 송구천에 진을 치고 많은 적병과 적방을 죽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 5월 밀양에 내려가는 적군을 추격하다가,
경주의 진중에서 전사하니 38세의 아까운 나이였다.
이조판서로 추증되고 그가 남긴 향병일기는 의병으로
활약한 내용이 소상히 기록되어있다.
근시재의 집안은 공의 유지를 받들어 장남 광계(매원)가 정묘, 병자 양 호란에
예안현 의병장으로 죽령까지 진출 삼전도에서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 귀향하여
사징불기하고 숭정처사로 일생을 마쳤다.
설월당(부륜)의 아들 영은 광해조에 벼슬하여
인조반정으로 광해가 물러나매 불사이군의 절의로 신왕의 부름을 끝내 사양하였다.
높은 정절로 군신지의의 사표가 되니 문정공의 시호를 제수하였다.
이렇듯 광산김씨 예안파는 대대로 혁혁한 정충고절이 많이
배출되었으니 추로지향인
안동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으로 명성을 드높였다.
영남 유가의 전통을 지닌 고장 오천 마을이 1970년대
안동댐 공사로 인해 그 수려한 유산이 망망대해 호수로 돌변하였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안동 사회의 저명인사들과 후손들의 주선으로
묘우, 선재, 정자나무, 종택 등을 문화재로 지정
건물을 일절 새로운 곳, 와룡면 오천리에 옛 모습대로
집단 이전하여
오천 세가의 꽃다운 이름이 세상에 영원히 전하게 되었으니 다행이다.
특기할 일은 문화재 이전 공사 중 밀폐된 누상 공방에서 얻어진
2000여점의 고문서와 희귀한 문헌 고서 유물들은
선대에서 끼쳐준 귀중한 유산으로 학계와 세인들에 놀라움을 주었다.
오천 신 단지의 위치가 도산서원 가는 연도에 있어
많은 관광객과 유물을 찾는 사계 학자와 학도들이 답지하고 있어
하계 수련 도장으로 충효 윤리 교육의 전당으로서
활용되어 새로운 가치관으로 평가되고 있다.
탁청정은 1541년 김유 당시에 건립 된 것으로 (주요 민속사료 226호)
정자 안에 농암 이현보, 퇴계 이황 등 어질고 이름난
선비들의시구(詩句)가 현판 되고 『탁청정』편액은 한석봉이 쓴 것이다.
후조당(주요 민속자료 227호)은 선조시인 부필이 창건하였으며
공의 당호를 따라 붙인 것이니 대청에 있는 현판은
퇴계 선생의 글씨이다. 위의 두 정자는 『국가 문화재』이다.
탁청정 종택은(경북 유형문화재 26호), 재사와
사당은(경북 유형 문화재 27호),
침락정은 경북 유형문화재 40호로 지정되어 있다.
옛 건물들은 안동지방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유물 전시관인 숭원각에 보존되어 있는 역사 자료이다.
내용은 희귀 고사 및 문집류 2500점과
고려 말기 1350년대의 호적을 비롯하여, 조선조 500년간의
교지, 호적, 토지문서, 노비문서, 분재문서,
각종 서간, 서찰 등 1000여 점이다.
그 중 고문서 7종 429점(보물 1018호)과
전적 13종 61집(보물 1019호)이
문화부에 의해 보물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이곳에 보존 또는 소장된 문화재는 민속 또는
연구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 이들 자료들 대부분이
1982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의하여 정리되어
『광산김씨 오천 고문서』라는 사료로 발간되었다.
23세 성균진사 담암공 휘(諱) 용석 유허비명
복주(福州 안동)의 구담은 용궁 예천 양군의 접경이라 앞으로 낙동강을 굽어보니,
삼읍(三邑)의 백성들이 연안을 따라 살매
집이 서로 연하여 대촌을 이루었다.
북으로는 용궁산이 있고 그 상(上)에 고 진사(故 進士) 담암
김선생의 무덤이 계시다.
선생의 휘(諱)는 용석(用石)이요, 자는 연숙이니 성화년간(成化年間)에 나셨다.
대대로 경성 동문밖에 살아 계셨다.
이십 세 되시는 성묘 3년에 진사과에 합격하셨고 점필재 김선생
문하에 유학하셨다. 연산 초에 가권을 이끌고
구담에 와 은거하시니 부인의 고향이다.
공이 몰(沒)하시매 자손들이 그 집을 8, 9세를 전하여 지켰다.
공의 묘전석에 다만 성(姓) 휘(諱)만 있고 현각(顯刻)이 없었다.
공의 아들 팔인(八人) 자손들이 문아(文雅)로 전업하였는데
공을 위한 신후(身後)의 사적(事蹟)이 이다지
몰몰(沒沒)함은 어찌된 연고인고....
세상에 전하기를 공이 임종 시에 안상(案上)에 쌓인 문적을 가져 오라 하여 불살랐다.
이는 이름을 세상에 남기지 않게 함으로
자손들이 유지를 받들어 석면(石面)에 자세히
기록하지 아니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제 공의 시대가 근 삼백 년이 되었으며 당시
사적은 상고할 수 없으나 홀로 남추강 효온 사우록에
공의 성명이 기록되어 있다.
강중화, 응정사가 말하기를 공이 소시(小時)에
성균관에서 주문공의 고사를 의방(依倣)하여 향약(鄕約)을 설립하고
월 초하루, 보름에 소학을 태학관에서 회강(會講)하였다.
그 선임된 분이 모두 장안의 일시명사(一時名士)라
이렇듯 김용석, 연숙과 신종호, 차소와 박연, 문숙과 손효조, 무첨과 정경조,
효곤과 권주, 지경과 정석형, 가회와 가백신,
자온과 김윤제, 자주는 그 가장 우수한 분들이라 하였다.
끝으로 말하기를 세상에서 시기(猜忌)하는 자 다투어 말하기를
저희들은 소학효자의 계원들이 아닌가.
공부자(孔夫子)의 사성십철(四聖十哲)이 있는 것 같도다 하였다.
추광공은 일시에 뛰어난 분으로서 소허(少許 : 제이) 가인(可人)이라 허락(許諾)하였다.
장안 준사를 열거함에
공이 가장 우수하다 하였으니 공을 가히 알 수 있다.
그 당시 성묘(成廟) 인재를 양성하여 일시재사(一時材士) 가(可)히 성(盛)하다 하였다.
그 향약을 태학관에서 설립하고 소학을 강론함은
고도(古都)를 창명(倡明)하여 이 세상에 펴고자 함이었다.
조물이 시기하여 막는 자 있어, 공이 사도(학문의 길)를 가히
행치 못할 것을 알고 다시 과거(대과)에 응시치 않으셨다.
동문우(同門友)로 한훤 일두의 현(賢)으로 이 학(學)을 몸소 후세에
전하고자 하였으나 마침내 화를 면치 못하였다.
정암 선생은 한훤 선생에게 수학하여 이 학(學)으로 일세(一世)에
사험코자 하다가 기묘사화를 입으셨다.
우리 동방(東方)이 편소(偏小)하나 어찌 이다지 고도(古道)로 상배(相背) 되는고,
간절히 생각건대 선생은 학술이 순정하고
지혜와 생각이 깊고 컸다. 천문과 세시(歲時: 세상의 일이 돌아가는 정황)를 미리 아시고,
종일(終日: 때, 시기)을 기다리지 않으시고초연히 은둔하시었다.
무오, 갑자 양대 사화에 동문들은 가루가 되었으나, 광채를 보존하고
여생을 마치시되 신분과 명예의 매몰 됨을 한탄치 아니하시니,
주역에 이르기를
기미를 알고 있는 것은(知幾지기) 신과 같다 하였으니, 선생을 이룸이 아니겠는가?
말하기를 외인(外人)이 선생 묘산(墓山)에 투장한 자 있어
고을 원이 선생 묘전 비석인줄 알아보고 놀랐다.
울어 가로되 “이 노선생(老先生)의 유해가 이곳에 방치된 줄은 생각지도 못하였도다”. 하고
제문을 지어 제를 지내고 갔다고 한다.
그러한 즉 그 당시에 선생의 처소를 모르는 자가 많았다 할 것이다.
금년 봄에 구 세손 광현이 유적의 매몰 됨을 괘념하여
동종(同宗)에 창의(倡義)하여, 선생사적 약간을 기록하여 유허비를
세우는 것이 어떠할꼬 하니, 다 배례하고 승낙함으로 이에
광현이 그 일로 찾아와 비문명(碑文銘)을 청하였다.
광정이 또한 외손이 됨에 노혁(老洫)으로 사양치 못하시고 삼가 받아
서(敘)하고 명(銘)하여 가로되!
계림(경주)의 운이 다 되어가고 낙엽이 떨어질 것 같으니
왕자공께서 거친 땅에 오셨다.
왕자의 관복을 벗으시고 백성들과 혼거하셨다.
유풍(遺風)이 아득하니 넓은 세상에 뉘가 짝할꼬...
손(孫)에 길(佶)이 계시니 고려를 도우사 자손이 창성하여 이어서 8평장이 계셨다.
수 십 세를 지나며 벼슬자리가 규조(圭組)처럼 많았네.
공에 이르러 상서(尙書: 이조 판서를 지낸 형 충목공)의 아우이시다.
젊어서부터 명망이 높으사 곧 제세(濟世) 할 뜻을 갖으셨다.
저 성균관에서 준사(俊士)와 소매를 같이 하셨네. 향약을 베풀어
가학 하시매 그 경과 그 윤이로다.
유관(儒冠)이 밝고 빛나며 키 큰 말이 거북 타고 용 같은 명을 멸시하였네.
활을 당기고 독을 품은 무리가 있으니
시국(時局)을 점(占)하고 기상을 보아 패도를 아니 할 수 없다.
기미(機微)를 알고 멀리 떠나시니 낙동강 가이(岸) 안동 구담이로다.
문을 닫고 외출치 않으시니 뉘가 그 기미를 알리요, 신실하고
명철한 그 덕을 오래도록 그 빛을 남겼는데
그 아름다운 행적을 숨기고 가려져 빛나지 아니하였다.
익위사 세마 평원 이광전 근찬
23세 담암공 휘 용석 유사와 봉화 거촌 쌍벽당, 용상 보덕단 유래
낙동강 연안 안동 구담방면 대촌 입구에 유허 비각이 있으니
성균진사 담암 김선생의 유허비로 약 오백 년 전 연산 폭정으로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
가솔을 이끌고 낙향 은거한 사실을 말해준다.
담암공은 양간공의 십대손이며 문장이 명세 하신 퇴촌공의 증손이요.
강화부사(수)의 셋째 아드님으로 태어나셨다.(1453-1523)
대대로사환으로 이어진 명문의 후예로서 서울 동문 외에 사셨다.
선생은 일찍이 당대 거유 점필재(김종직)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문이 성취되어 진사시에 합격 하였다.
주문공의 고사에 의해 향약을 설립해 태학관에서 소학을 강의하시며
실사구시의 학문을 강구하시니 그때 선임된 분이 모두 당대의 명사였다.
장안 준사 가운데서 공이 가장 우수하다고 추강 남효온은 사우록에 적어
공의 높은 학덕과 인품의 고매함을 실증하였다.
공은 세상 변화의 기미를 알고 낙향 은거 하였는데 그 후 얼마 아니 되어
무오․ 갑자 양대 사화로 사문(師門)의 화가 극에 달했다.
동문수학한 일두 정여창, 한훤 김굉필, 탁연 김일손 등 이름난 분들이
참혹한 화를 입어 혈육마저 보전치 못하였다.
홀수 초수야로(물고기와 산짐승)와 함께 산수간에 자취를 감추니
세상과 인연을 끊는 초연한 군자였다.
공은 슬하에 팔 형제를 두었는데 모두 문학재명으로 추증을 받았으나
관로에 나아갈 뜻을 버리고 임하(林下)에서 학문연구에만 점심하였다.
셋째 아들 시는 무과로 성주목사가 되었으나,
공의 계명을 따르지 않았다고 혹편(酷鞭)을 가하였다.
연유인즉 자손들에게 “성균 진사만은 안 할 수 없으나,
대과에 참여하지 말라” 는 공의 계명을 어겼기 때문이다.
이토록 공은 세상 공명에 초연하였고 임종 시,
서안에 있는 문적을 불사르고 타계하시니 이는 후손들의 신명을 보전케 함이다.
장손 득렴(도봉공)은 유일제 문인으로 구중생진하여 추증 되었고
임진란에 창의 하여 근시재 김해와 함께 군공(軍功)을 세웠으며
그 후 대대로 구담에 사시며 문학 재사가 끊이질 않았다.
둘째 아들 균(습독관)은 봉화 거촌에 터를 잡아 언구가(쌍벽당)
집의 문호를 열었다.
넷째 아들 주는 퇴계 선생과 동방진사로서 은거 구지하여
안동 와룡 이계에서 터를 잡았다.
셋째 아들은 중절하시고
일곱째 아들 지(참봉)는 문행이 있다.
그의 아들 언박과 손자 익 부자는 생원 진사로서 학행이 높고
효행으로 대대로 이어가니 이는 담암공이 끼친 음덕이다.
오백년의 긴 역사 속에 공의 유적을 더듬는 바는 유허비뿐인데
세파에 붙들려 유허 비각이 장터 한가운데 파묻혀 있으니
멸몰 될까 두려운 마음뿐이다.
봉화 거촌의 쌍벽당 지방 문화재로 지정
봉화군 거촌 마을은 담암공의 둘째 균이(습독관) 터를 잡아
그의 아들 언구(상벽당)가 중종조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술과 덕행으로 성망이 높았으나 영달을 구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 득려(잠계)는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생원이 되었고
친상 삼 년을 시묘(侍墓)사리를 했다.
잠계의 아들 백웅은 임진란에 의병장으로 군공을 세웠다.
이곳 거촌에 정착한 후 자손 대대로
문장과 학행으로 추중된 분이 많아 봉화 거촌의 문호를 빛내었다.
쌍벽당의 건물은 건축연대가
오래 되고 구조에 특이성이 있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정화하여 수호하고 있다.
셋째 시는 무과 급제로 성주 목사를 지내고
그의 아들 언진과 언수 형제가 모두 생원과 진사였고
언수의 손자 여종은 귀산검사를 지냈는데 후손들이 대대로 성주에 살고 있다.
끼치신 그윽한 향기 꺼지지 아니하니, 지나가는 길손도 공의 덕을 추모하였으니,
저 숨은 군자를 향사(享祀) 할 것을 생각했네.
공의 자손들이 효사(孝思)로 추모하니 세사(歲祀)를 결(缺)함이 없도다.
개연히 하회함은 뜻이 유열(遺烈)에 있도다.
향사 모시는 법을 글로 남기어 이로써 후세 자손들에게
경계하게 함이로다.
담암공은 안동 용계서원과 돈정사에 배향되셨다.
사림 숭모지지(士林崇慕之地) 용산 보덕단의 유래
유일재(언기)는 담암공의 휘 주의 둘째 아들로
중종 16년(1520) 구담에서 출생하여 부모를 따라 와룡면 이계로 이사하였는데
어린 시절부터 학업에 전념하였다.
일찍 백담 구봉령과 함께 청양산에 들어가 십 년을 공부하고
성균 생원시에 합격한 후 다시 진취할 뜻을 버리고
육영사업을 낙으로 삼았다.
만년 가야에 학당을 세워 유일재라는 편액을 걸고 후학을 교도하니
한때는(1561-1588)생도가 칠십 명이나 되었다고,
신오봉(지제집)에 기록 되었고,
문도의 수가 수 백 명이었는데 재주에 따라 교양하여 ,
학문이 성취되어 현달 한 분도 있다.
문학과 조행으로 후진을 가르쳐 한 시대의 사표가 된 분도 있으니,
복주(안동)의 문학을 풍성하게 한 것은 오직 선생의
창도(倡道)에서 이루어 졌다는 칭송을 받았다.
퇴계선생이 타계하신 지 4년 후에 사림(士林)이 선생을 위해
여강서원을 짓고 유일재 선생을 초대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동문들과 더불어 원규를 제정하여 초윤 권문해가
안동부사 재임 시에 청원하여 서원을 국학으로 승격 시켰다.
그 글의 내용이 천하의 명문으로 전한다.
문도 중에 정랑 권위, 판서 박곡장, 승지 신지제, 참판 권태일은 현달한 분이요,
지헌 정사성, 방담 권홍, 책지 남치리, 매헌 권반은
후진 교육에 전념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1588년 3월 15일 선생이 영면하신 후 문인 권태일(참판)이
스승의 은혜를 보답하기 위해 동문들에게 통문을 보냈다.
돈이나 곡식을 수습해 용산 선생의 묘 아래에
보덕단을 쌓아 사림에서 보덕단을 받들어 온지 삼백 수십 년에 이른다.
정조조 때에는 용계서원을 창건하여
70년을 원향(院享)으로 받들기도 했는데 서원이 훼철되자,
보덕단을 복설하여 수호해 왔는데 지난 정묘에 단소 경내를 정리하였다.
단비와 용산 보덕단 정비를 세워 사림숭묘 지지로 성역화 하여
매년 음력 초정에 향사를 봉행한다.
선생은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 득연(갈봉)은 구중생진으로
선조 임진란에 창의(倡義 의병을 일으킴:)켰다.
의창(義倉:곡식창고, 재난때 사용)을 설치해
후방 관장에게 소홀함이 없이 충효양전(忠孝兩全)의 도리를 다 했다.
명나라 장수 장무덕, 양호, 진천룡, 주공유 등이 공의
인품에 감화되어 증시 및 서문에 이르되 ,
갈봉은 진실한 군자로 가구유운(佳句流韻)의 시상을 이두지가
재세함과 같고 ,교우의 신의는 안편중과 같고
중신은 자로와 같다고 하며 존경했다.
인조(1623) 개국 후에 심징불기 했다. 친상에 시묘 3년 하시고
선영하에 지수전을 지어 많은 후학을 교도하고 학구에 전심하였다.
지수정가와 시조 60여 수를 남기니 국문학 연구에 귀중한 자료를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 사미인공 등과 년대가 거의 같이하는 작품으로
학자들의 연구 재료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그의 아들 광주(생원공)는
문명이 떨쳐 5대 진사 집으로 명가의 지칭을 받았다.
둘째 득숙(만취헌)은 구백담 문인으로 문장과 학행이 한때를 진동하여
영남 좌우 도에서 많은 선비들이 재주를 겨룰 때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와 장원을 다투었다.
좌김우정(左金右鄭)의 설로 문명을 떨쳤는데 선공상중(先攻喪中)에 슬프다.
29세로 일생을 마치니 애석 하도다.
그의 아들 광부(오매당)와 증손 세환(긍구당)은 박통경사하고 조리가 간결하여
집안의 명성을 높였고
대대로 도학과 무학재사가 끊이질 않아 가야파의 명성을 그 지방에 떨쳤다.
셋째 득의(청취헌)는 숙부 언령에 출계(양자)하였는데 재학이 겸전해서
임진란 때 백형 갈봉공과 창의하였다.
그의 아들 광원(석당)은 문장과 학행으로 사류에 추증되어 여러 번 천맹에 올랐으나
임하에서 늙어 죽기를 바라니 세칭 남주고사라 하였다.
그의 아들 진구와 손자 태운(운정)이 또한 문학이 높아 양대 진사를 하니
담암공으로부터 운정까지 7대 진사집으로 선생의
후손에 면면히 학문의 운이 크게 융성하였다.
저 유구한 백세에 뉘가 그 상세함을 알리요..
공의 자손들이 대대로 그 규범을 지켰도다.
꽝산김씨종보
광산김씨종보. 광산김씨약사. 광산김씨사. 퇴촌공파보.
2023년 6월.
편집자 대구경북 종친회 전부회장 善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