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60524 (화)
- 비(碑), 갈(碣) 그리고 비문석(碑文石) 이야기
- 불교사찰 둘러보기 (16) : 불교이야기 (24)
오월
- 피천득(1910-2007) -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 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있는 비취가락이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서 무엇하리.
나는 지금 오월 속에 있다.
연한 녹색은 나날이 번져가고 있다 어느덧 짙어지고 말 것이다.
머문 듯 가는 것이 세월인 것을.
유월이 되면 원숙한 여인 같이 녹음이 우거지리라....
그리고 태양은 정열을 퍼붓기 시작할 것이다
밝고 맑고 순결한 오월은 지금 가고 있다....
=============================================================
앞 편에서 부도(浮屠)에 대하여 말씀드렸는데, 유명한 고승들의 부도 옆에는
부도비(浮屠碑)가 있어서 그 스님의 일대기나 또는 그 사찰의 창건과 유래 등을
기록하여 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렇게 비석에 기록된 내용이 있을 경우 이를 <비문석(碑文石)>이라고도 합니다.
=============================================================
먼저 일반적인 의미의 <비(碑)>에 대하여 살펴보고
다음에 불교사찰에 있는 <비문석(碑文石)>에 대하여 살펴봅니다.
< 경기도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 비문석 >
< 경기도 양주 회암사 지공선사 부도, 석등과 비문석 >
=============================================================
1. 비(碑)와 갈(碣)
(1) 비(碑)
- 비(碑)는 고인(故人)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을 말합니다.
- 비(碑)는 글자 그 자체에 이미 “돌”이라는 의미의 “돌 석(石)”변의 글자인데,
주로 돌을 다듬어 만들기에 빗돌, 비석(碑石), 석비(石碑) 등의 여러 말이 있으며,
여기에 새겨 넣은 글은 금석문(金石文)이라 하여 가장 확실한 역사서와 같이
당시의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어 귀중한 사료(史料)가 됩니다.
* 추사 김정희(秋史金正喜)는 서화가일 뿐만 아니라 금석학자(金石學者)로서도
유명한데, 북한산 비봉 진흥왕순수비(北漢山碑峰眞興王巡狩碑)를 판독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 국보 제3호(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재하며 비봉에는 모형본이
세워져 있습니다.)
- 비석의 시초는 옛날 중국에서 묘문(廟門) 안에 세워 제례(祭禮) 때 희생으로 바칠
동물을 매어 두던 돌말뚝에서 비롯되었다 하며, 또 장례식 때 귀인(貴人)의 관을
매달아 광내(壙內)에 공손히 내려놓기 위하여 묘광(墓壙) 사방에 세우던 돌을
말하기도 합니다.
- 그 돌을 다듬고 비면(碑面)에 공덕을 기입하여 묘소에 세우게 된 것은 훨씬
후세의 일이며, 당시는 비석이라 하지 않고 각석(刻石)이라 하다가 이것을
비석으로 부르게 된 것은 전한(前漢) 말기나 후한(後漢) 초의 일이라고 합니다.
- 우리나라에서 비석이 언제부터 세워졌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비로 가장 오래된 것은 AD 85년에 세워진 점제현신사비(秥蟬縣神祠碑 : 평남
용강 소재)이고, 그 다음은 압록강 대안의 집안(集安)에 있는 고구려 호태왕비
(好太王碑=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신라 진흥왕의 척경(拓境) 및
순수비(巡狩碑) 등입니다.
- 그 후 통일신라시대를 거쳐 고려시대에는 많은 비석이 세워졌으며,
조선시대에는 여러 종류의 비석이 성행하여 그 유품의 일부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 특히 고려시대에는 고승의 탑비(塔碑)가 많이 세워졌고, 조선시대에는 신도비와
묘비가 많이 세워지는 등 시대에 따라 비의 양식과 내용이 변화하였습니다.
- 비석의 종류로는 묘비(墓碑)를 비롯하여 능비(陵碑), 신도비(神道碑),
기적비(紀蹟碑), 기념비(記念碑), 순수비(巡狩碑), 정려비(旌閭碑), 송덕비(頌德碑),
애민비(愛民碑),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 등이 있으며, 그 밖에도 유허(遺墟),
성곽(城廓), 대단(臺壇), 서원(書院), 묘정(廟庭), 빙고(氷庫), 교량(橋梁),
제지(堤池) 등에 세우는 기적비(紀蹟碑)가 있고 그리고 사찰에서 세우는
탑비(塔碑)와 부도비(浮屠碑)가 있습니다.
- 그러나 특수한 비로는 개인의 일대기, 역사적 사건, 법령이나 포고문 따위를
새긴 것도 있는데 이 가운데 공지사항을 새긴 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비라 하기는
어렵고
- 또 하마비(下馬碑)나 제석(題石), 석표(石標) 등도 비문이 없는
단순한 표석(標石=푯돌)이므로 역시 비라 하기 어렵습니다.
- 여기서 표석(標石=푯돌)이란 어떤 것을 표지하기 위하여 새우는 돌로서
수준점(水準點)이나 삼각점(三角點) 따위를 표시하기 위한 것 등이 있습니다.
- 또한 돌에다가 개인의 시가나 산문을 새긴 것은 어떤 면으로 보면
기념비라 할 수도 있겠으나 비문의 통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므로
따로 다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
(2) 갈(碣)
- 비석은 대개 <부좌(趺座) = 좌대(座臺) = 대좌(臺座) = 비좌(碑座) = 받침돌>,
비석의 몸인 <비신(碑身) = 석비(石碑) = 비문석(碑文石) = 빗몸>과
비석을 덮는 상단부분인 <비두(碑頭) = 개석(蓋石) = 관석(冠石) = 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으나 요즈음 서민층의 묘소에는 지붕돌이 없이 비신만을 세우는
경우가 많습니다.
- 이렇게 지붕돌을 얹지 않고 머리 부분을 둥글게 한 것을 <갈(碣)>이라고 합니다.
- <갈(碣)>이란 글자는 우리에게 그리 친숙하지는 않은데,
- 요즘 무덤에 많이 세우는 위가 둥그스름한 작은 돌비석을 묘갈(墓碣)이라 하고
- 비갈(碑碣)이라 하면 비(碑)와 갈(碣), 즉 네모난 비석과 둥근 비석을 말합니다.
- 특히 작고 둥근 빗돌은 단갈(短碣)이라고 합니다.
< 천안 봉선홍경사 갈기비 (天安 奉先弘慶寺 碣記碑)
= 봉선홍경사 비갈(奉先弘慶寺 碑碣 : 1026년 조성 : 국보 제7호 >
- 충남 천안시 성환읍 대홍리의 봉선홍경사에 있는 고려시대의 화강석 석비로
국보 제7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 봉선 홍경사는 고려 초 8대 현종(顯宗 : 992-1031년) 때에 세운 대찰로서,
- 절이 세워지게 된 연유에 대하여 비에 자세히 적혀 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절을 세운 현종의 아버지는 본래 태조 왕건의 여덟 번 째 아들로 뒤에
안종(安宗)으로 추대된 사람인데 평소에 불법을 숭앙하고 법화경을 받들며
절을 지으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뜨게 되자 아들인 현종이 왕위에
올라 생부의 유지를 받들어 이곳에 절을 지을 뜻으로 현종 7년에 착공하여
5년만인 현종 12년에 200여 칸의 큰 절을 완공 하였다고 합니다.
- 절 이름을 “봉선(奉先)”이라고 한 것은 “선친의 유지를 받든다.”는
의미에서입니다.
- 이 비는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절을 세운 지 5년이 지난 고려 현종
17년(1026)에 세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비문은 당시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던 고려시대 최고의 유학자 최충(崔沖 : 984~1068)이 짓고,
백현례(白玄禮)가 글씨를 썼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 이 비는 갈기비(碣記碑), 비갈(碑碣)이라고 부르기는 하지만
거북받침돌과 머릿돌을 모두 갖추고 있어 석비의 형식과 다르지 않은데
어찌하여 <갈(碣)>이라는 말이 붙었는지 알 수 없습니다.
=============================================================
2. 비(碑)의 재료
- 비를 사용한 재료에 따라 분류하면 목비(木碑), 철비(鐵碑), 석비(石碑)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 현재 우리나라에는 목비(木碑)로서 현존하는 것이 비록 존재한다는 설은 있으나
공식으로 확인된 바가 없어 거의 없다고 할 수 있고, 철비(鐵碑)가 간혹 있을 뿐,
거의 전부 석비(石碑)입니다.
< 철비(鐵碑) >
- 우리사회에서 철을 자유로이 사용하게 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 중세 이전 우리나라의 철 생산은 원시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는데,
그러던 것이『태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407년 전국적으로 대규모 철광산
증설을 시행하였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이 때 개발된 철광산의 수가
전국적으로 78개소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15세기에 편찬된 『농사직설』에 따르면 철제 농기구는 지주 등 일부만이
소유할 수 있는 중요한 재산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당시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
이었던 농기구마저 지주 등 일부에게 한정되어 사용되던 시절이었기에
다른 용도로 철을 사용한다는 것은 많은 제약이 따랐습니다.
- 이러한 상황은 16세기 말 ~ 17세기 전반기에 거듭된 전쟁으로 관영수공업이
파괴되었으며, 국가로부터 제철업경영권을 위임 받은 “별장”이 세금을 내는
조건으로 철소(鐵所)를 사적으로 경영하게 되면서 획기적으로 변화하게
되었습니다.
- 조선시대 철비는 크게 현감, 관찰사 등 지방수령의 공덕을 기리기 위한 공덕비와
1684년 제작으로 서당을 운영하기 위하여 창립한 전남 진도 학계비(學契碑) 등의
사적비(史蹟碑), 보부상 들이 세운 송덕비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 철은 과거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의
대상이었습니다.
- 때문에 중요한 공덕비의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비를 건립하게 된 것입니다.
- 뿐만 아니라 철은 동양사상에서 악한 것을 물리치고, 지기(地氣)가 강한 곳을
누른다는 비보풍수(裨補風水)의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는데,
철비가 세워진 가문은 최고의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 철비는 17~18세기 들어 제작이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을 보이는데,
이것은 선정을 베푼 수령의 증가가 아닌, 역설적으로 원성을 듣던 수령이
직접 세우는 사례가 증가하며, 부를 축적한 중인계층들이 양반으로 신분을
바꾼 후 조상의 정통성을 가공하기 위해 철비를 세우는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라는 연구결과입니다.
< 포스코 역사관 잊혀진 문화재 철비(鐵碑)전시회 >
- 포스코 역사관은 개관 4주년 기념 특별전의 일환으로 2007. 7/3일부터 8/14일
까지 역사관 2층 로비에서 “잊혀진 문화재-철비(鐵碑)” 전시회를
개최하였습니다.
- 포스코역사관이 조사 결과, 전국 23개 지역에서 현존 철비 47기를 확인했으며,
이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철비는 1631년 제작된 충북 진천군
“현감이원명선정거사비(縣監李源明善政去思碑)”와 경북 경주시
“영장유공춘호영세불망비”이며, 다음으로 강원도 홍천군
“현감원만춘선정비(1661년)”가 있습니다.
- 여기서 “거사비(去思碑)”란 감사(監司)나 수령(守令)이 갈려 간 뒤에
그 선정(善政)을 사모(思慕)하여 고을 주민(住民)들이 세운 비석(碑石)이라는
뜻입니다.
=============================================================
3. 비의 구조
- 비석은 대개 비석을 받치는 <부좌(趺座) = 좌대(座臺) = 대좌(臺座) = 비좌(碑座)
= 받침돌>, 비석의 몸인 <비신(碑身) = 석비(石碑) = 비문석(碑文石) = 빗몸>과
비석을 덮는 상단부분인 <비두(碑頭)=개석(蓋石) = 관석(冠石)=지붕돌>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 부좌(趺座) = 좌대(座臺) = 대좌(臺座) = 비좌(碑座) = 받침돌
* 부(趺) : 책상다리할 부, 발등 부 - 가부좌(跏趺坐) 등이 있습니다.
- 좌대(座臺)는 비신받침으로 거북모양을 조각한 귀부(龜趺)와 네모로 깎은
방부(方趺)의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것이나 위에 직사각형의 홈을 파서
비신을 끼우게 되어 있습니다.
- 귀부(龜趺)라고 부르는 거북 모양으로 만든 비석의 받침돌은
그 자체가 비석의 받침돌이란 뜻으로 쓰이기도 합니다.
- 거북은 10장생(十長生 : 해-달-물-돌-구름-소나무-불로초-거북-학-사슴)의
하나로서, 그 등이 넓고 평평하여 영원함을 상징하는 동물 즉 거북이
수명장존(壽命長存)을 상징하는 신령스런 동물로 인식되어왔으므로, 비문을
후세에 영구히 전하기 위하여 가장 적절한 상징물로 간주되었기 때문입니다.
- 귀부의 귀두(龜頭)는 다양한 모습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형태는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太宗武烈王陵碑 : 국보 제25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통일신라 때부터 초기의 좌대는 거북의 생동하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많습니다.
- 그 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거북의 형상을 가진 좌대의 머리 부분이 점차
용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발톱이 날카로우며 매우 생동적으로 표현하게 됩니다.
- 이처럼 좌대의 머리 부분이 비록 용의 모습으로 변해갔지만 비문석을 올리는
받침자리는 거북의 등을 조형하여 만들고 있습니다.
- 조선시대에 이르면 거북의 좌대는 등 부분이 말려 올라가 연꽃모양으로 변하는
모습을 특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
(2) 비신(碑身) = 석비(石碑) = 비문석(碑文石) = 빗몸
- 거북의 형상을 한 좌대 위에 올려진 비신(碑身)에는 불교사찰의 경우
사적기(事蹟記=寺蹟記)나 스님의 일대기(一代記) 등을 기록합니다.
- 가끔 비면에 글씨가 새겨져 있지 않은 비석이 있는데,
이를 백비(白碑)라 합니다.
-------------------------------------------------------------
(3) 비두(碑頭) = 개석(蓋石) = 관석(冠石) = 지붕돌
- 비문석 위에서 비와 햇빛을 막아주는 지붕의 역할을 하는 부분입니다.
- 이 부분에는 이수(螭首)라 하여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얽혀있는 것을 조각한 것이
많은데 시대가 흐르면서 해태도 가끔 나타납니다.
- 여기서 <이(螭)>는 “뿔이 없는 용”을 뜻하는데, “이무기”라고도 합니다.
- 멀리 본다는 뜻을 가진 이 용의 모습은 구름 속에서 용트림하면서 여의주를
물고 있는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어 천상의 신비함을 더해줍니다.
* <이=리(螭)>를 “이무기(아직 용이 되지 못한 상태의 동물)”이라고도 하는데,
엄밀히 말하여 “이무기”의 한자는 <리(彲)>라고 합니다.
=============================================================
4. 아름다운 비석들
(1) 삼국시대
- 고구려 석비로 대표적인 것은 만주 집안현에 있는 광개토왕비(廣開土王碑,
414년)와 충북 충주의 중원고구려비(中原高句麗碑, 480∼481년 : 국보 제205호)
이고
- 백제 석비로 대표적인 것은 충청남도 부여의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654년
: 보물 제1845호)인데 여기서 “사택지적(砂宅智積)”은 이 비를 세운 사람의
이름입니다.
- 신라 석비로는 경상북도 영천(永川)의 청제비(菁堤碑, 536·798년 :
보물 제517호)와 충청북도 단양의 적성비(赤城碑, 545∼551년 : 국보 제198호),
경상남도 창녕(昌寧)의 신라진흥왕척경비(新羅眞興王拓境碑, 561년 :
국보 제33호)와 북한산순수비((巡狩碑 : 국보 제3호), 황초령순수비,
마운령왕순수비(568년), 그리고 경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 591년경)와
대구의 무술오작비(戊戌塢作碑 : 보물 제516호) 등이 유명합니다.
-------------------------------------------------------------
(2) 통일신라시대
-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인 석비는 역시 경주의 태종무열왕릉비
(太宗武烈王陵碑 : 국보 제25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 중국의 경우 주대(周代)에 시작된 목비가 후한시대·남북조시대를 거쳐
당대(唐代)에 이르러 비로소 이수·비신·귀부를 갖춘 전형적 중국 석비의 양식이
확립되었고 그 이후 석비의 전형이 되었다고 합니다.
- 이런 당대 양식은 위에서 소개한 태종무열왕릉비에서 비로소 이수 귀부를 갖추어
나타났고, 663년경 충남 부여 당유인원기공비(唐劉仁願紀功碑, 보물 제21호),
경주 무장사아미타불조상탑비(藏寺阿彌陀佛造像塔碑, 801년경 : 보물 제125호)
를 비롯하여, 경주 흥덕왕릉귀부(興德王陵龜趺, 837년경), 전북 남원 실상사증각
대사응료탑비(實相寺證覺大師凝寥塔碑, 861∼893년경 : 보물 제39호)가
있습니다.
- 또 전남 화순 쌍봉사철감선사탑비(雙峯寺澈鑒禪師塔碑, 868년 : 보물 제170호),
충남 보령 성주사지낭혜화상일월보광탑비(聖住寺址朗慧和尙日月寶光塔碑, 898년
: 국보 제8호), 충북 제천 월광사지원랑선사탑비(月光寺址圓朗禪師塔碑, 890년 :
보물 제360호), 전북 남원 실상사수철화상능가보월탑비(實相寺秀澈和尙楞伽寶月
塔碑, 9세기 후반 : 보물 제34호), 강원도 양양 선림원지홍각선사탑비(禪林院址
弘覺禪師塔碑, 886년 : 보물 제446호), 경남 하동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
(雙磎寺眞鑑禪師大空塔碑, 887년 : 국보 제47호), 경북 문경 봉암사지증대사적조
탑비(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923년 : 보물 제138호), 경남 창원 봉림사진경대
사보월능공탑비(鳳林寺眞鏡大師寶月陵空塔碑, 924년 : 보물 제363호) 등이
있습니다.
- 이들에 비하여 같은 9세기 후반에 건립된 전남 장흥 보림사보조선사창성탑비
(普林寺普照禪師彰聖塔碑, 886년경 : 보물 제158호)는 비신은 물론
귀부·이수까지 갖춘 완형의 석비입니다.
-------------------------------------------------------------
(3) 고려시대
- 통일신라 말의 양식을 계승한 고려 석비로는 경기도 양평 보리사대경대사탑비
(菩提寺大鏡大師塔碑, 938년 : 보물 제361호)를 비롯하여 강원도 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비(興法寺眞空大師塔碑, 940년 : 보물 제463호), 충북 충주 정토사
법경대사자등탑비(淨土寺法鏡大師慈燈塔碑, 943년 : 보물 제17호), 강원도 영월
흥녕사징효대사탑비(興寧寺澄曉大師塔碑, 944년 : 보물 제612호), 전남 강진
무위사선각대사편광탑비(無爲寺先覺大師遍光塔碑, 946년 : 보물 제507호),
전남 곡성 대안사광자대사탑비(大安寺廣慈大師塔碑, 950년경 : 보물 제275호)
등이 있습니다.
- 그리고 또 경북 문경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鳳巖寺靜眞大師圓悟塔碑, 965년 :
보물 제172호), 경기도 여주 고달사지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址元宗大師慧眞塔
碑, 975년 : 보물 제6호), 충남 서산 보원사지법인국사보승탑비(普願寺址法印國師
寶乘塔碑, 978년 : 보물 제106호), 전남 구례 연곡사현각선사탑비(鷰谷寺玄覺禪
師塔碑, 979년 : 보물 제152호), 전남 강진 월남사지석비(月南寺址石碑,
10세기 후반 : 보물 제313호) 등이 있습니다.
- 그리고 11세기 것으로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충북 충주 정토사홍법국사실상
탑비(淨土寺弘法國師實相塔碑, 1017년 : 보물 제359호), 강원도 원주 거돈사원공
국사승묘탑비(居頓寺圓空國師勝妙塔碑, 1085년 : 보물 제78호), 경북 칠곡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1132년 : 보물 제251호) 등이 있습니다.
- 또 충남 천안 봉선홍경사비갈(奉先弘慶寺碑碣, 1026 : 국보 제7호)에 이르면
귀두는 괴수형으로 용두화하여 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리고 있는 점이 특이하며,
물고기의 지느러미와 같은 날개는 귀두 좌우를 넓게 장식하고 있으며, 이수는
도식화한 운룡문(雲龍文)으로 그 형상은 모자를 쓴 듯 산의 모양을 하고 있으며
- 11세기 후반의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1085 : 국보 제59호)는 이수가 처마를 번쩍 들어 올린 듯한 지붕모양이고,
그 꼭대기에는 상륜부(相輪部)가 마련되었는데, 비신의 양측 면에는 운룡문을
조각하는 등 장식성을 강조하였으며, 귀부는 귀두 양쪽에 수염이 나고,
귀갑에는 왕(王)자를 새긴 네모꼴의 귀갑문이 전체를 덮고 있어
마치 수놓은 비단을 씌운 듯한 장식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 이러한 예는 12세기 후반의 경북 칠곡 선봉사대각국사비(僊鳳寺大覺國師碑 :
보물 제251호)로 이어진바, 귀부는 장방형의 대좌로 대신하게 되고,
이수는 옥개형으로 변하였습니다.
- 고려의 석비양식은 12세기 전반 무렵부터 서서히 통일신라 양식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여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규수형(圭首形 : 양쪽 모서리를 깎아
윗부분이 뾰족함)으로 변해갔습니다.
- 그 예로서는 경기도 용인 서봉사현오국사탑비(瑞鳳寺玄悟國師塔碑, 1185년 :
보물 제9호)와 경북 포항 보경사원진국사비(寶鏡寺圓眞國師碑, 1224년 :
보물 제252호), 그리고 충남 부여 보광사중창비(普光寺重刱碑, 1358년 :
보물 제107호), 충북 충주 억정사대지국사비(億政寺大智國師碑, 1393년 :
보물 제16호) 등이 있습니다.
* 위에서 말씀드린 강원도 원주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비(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碑,
1085 : 국보 제59호)는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는데, 당초에는 지난번의
2016. 04. 25일 올렸던 “스님들을 모신 곳, 부도(浮屠) 이야기” 중에 말씀드렸던
“강원도 원주 법천사(法泉寺)지광국사현묘탑(智光國師玄妙塔 : 국보 제101호)”와
2m 간격을 두고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지금은 탑비만 홀로 서있으며,
탑이 있었던 자리에는 터잡이돌만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 따라서 현재 수리중인 탑이 보존처리가 완료되면 탑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달라는
의견도 있는데, 이는 문화재위원회의 결정에 따를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
(4) 조선시대
-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의 비는 승려의 탑비가 대다수였지만,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사대부의 능묘비(陵墓碑)나 신도비(神道碑)가
주로 세워졌고, 그밖에 다양한 내용의 비가 세워졌습니다.
- 이들 조선시대 석비의 양식은 고려 후기 양식인 규수형(圭首形)입니다.
-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비좌도 장방형이 아니고 귀부를 갖춘 경우라도
귀두는 거북도 용도 아닌 괴물이 되고, 귀갑(龜甲)도 정형을 벗어나서
비좌에도 연잎을 많이 사용하게 됩니다.
- 또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의 전통적인 석비양식보다
당·송대(唐宋代)의 중국 석비를 더 많이 본받은 점이 주목됩니다.
- 그 예로는 개성의 연복사중창비(演福寺重刱碑, 1424년), 서울의 원각사비(圓覺寺
碑, 1471년 : 보물 제3호) 등이 있는데, 이들은 당대(唐代) 석비와 같이 이수와
비신이 한 덩어리의 돌로 이루어진바, 이수 부분은 엉클어진 이룡(螭龍)이 보주를
움켜쥔 형상을 하고, 중앙에 네모꼴의 제액이 마련되어 있으며,
귀부는 환상적인 용두가 아니라 단순한 귀두로 되어 있습니다.
- 이들 석비의 대표격인 원각사비의 경우 비신은 대리석, 귀부는 화강암으로
당비(唐碑)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세부의 조각에서는 조선적인 특색을 보였으며,
귀부의 귀두·귀갑은 모두 퇴화하였으나 석물로서는 괴량감(塊量感)을 보여주었고,
등에는 연잎을 새겨 변화시켰습니다.
- 그러나 이러한 당식(唐式)의 석비는 16세기 이후부터 쇠퇴하고, 고려시대 후반에
만들어지던 규수형과 옥개형을 단순화시킨 양식이 조선시대 말까지 계속되어
수많은 능묘비·대첩비·송덕비·사적비·효자비 등이 건립되어 한국을 석비의 나라로
불리게 하였습니다.
- 당대 석비를 따른 원각사비 계통의 예로는 17세기 전반의 서울 송파에 있는
청태종공덕비(淸太宗功德碑=삼전도비-三田渡碑 : 사적 제101호, 1627년)와
- 전남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ㆍ수미선사비(道岬寺 道詵國師ㆍ守眉禪師碑. 1636년 :
보물 제1395호) 등이 있는데, 특히 청태종공덕비는 전기 양식을 충실히 따른
대비(大碑)입니다.
- 고려 석비의 양식을 따른 예로는 전남 해남의 명량대첩비(鳴梁大捷碑, 1688년 :
보물 제503호), 전남 여수의 좌수영비(左水營碑) 및 타루비(墮淚碑, 1620년 :
보물 제1288호) 등 그밖에 18∼19세기에 세워진 수많은 신도비·묘비·사적비
·송덕비가 있습니다.
=============================================================
< 석비의 구조 >
=============================================================
이상으로 <비(碑), 갈(碣) 그리고 비문석(碑文石) 이야기>를 마칩니다.
그리고 이것으로 총 16회에 걸쳐 연재했던 <불교사찰 둘러보기>를
일단 끝내는데, 무언가 큰일을 마친 느낌입니다.
당분간 쉬었다가 이번 시리즈에서 못 다한 이야기를
나중에 다시 계속할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첫댓글 비가 내리는 아침 향긋한 커피를 마시면 하루를 엽니다. 소중한 자료를 찬찬히 정독하면서 뭔가 뿌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인가요. 다음에 어떤 내용이 게재될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김사장님의 필력에 다시 한번 감탄하면서 한 자
적었습니다. 최 경진
사장님, 잘 읽어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연재하였던 내용은 제가 평소 관심이 많았던 것이라 몇몇 책자도 구입하여 비교하며 작성한 결과입니다. 상세히 들어가게 되면 너무나 방대하여 겉핥기만 한 내용이라 오히려 부끄럽습니다.
학장님 우연인지 필연인지 어제 박물관 강좌에서 박물관 각실 방문 수업 중 저희 조는 2층 서예관에서 서예 전공 학예사의 설명을 들었는데 그곳에 전시된 흥법사 진공대사탑비 비신을 직접 보면서 설명을 들었습니다. 당태종 집자비라고 했는데 학장님의 강의 후라 더욱 마음 가까이 다가 왔습니다. 월요일 정림사지 오충석탑에서도 사전 학습으로 우등생 역할을..ㅎㅎ 박물관 강의를 들으니 더욱 학장님의 강의 수준과 그 폭이 넓음을 인식하게됩니다. 불됴 사찰에 대해 벌써 16회나 되었나할 정도로 흥미롭게 이끌어주셨는데 살짝 아쉽기까지...속편을 기대하면서 그간 수고하셨습니다.
사장님, 공부하시는데 도움이 되었다니 제가 오히려 고맙습니다. 이는 모두 사장님께서 올린 내용들을 세심하게 읽으신 결과이겠습니다. 불교사찰을 큰 윤곽으로 둘러보는 것은 일단 끝났기 때문에 다음에 어떤 내용으로 계속할 것인지는 아직 아이디어가 없는데 하더라도 한참 후가 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작년 이맘때 집안 광개토태왕 비각을 들어간 적이 있습니다. 원래는 못 들어가게 하나 그 때는 특별히 허락을 받아 직접 손으로 만지고 글자 한자 한자를 읽어 보기도 하였습니다. 예서체 고자로 되어 있어 많은 자를 읽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감개무량한 경험이었습니다. 박물관에서 조상 중 한분의 묘지명을 보았는데 거기 자손 중 많은 분이 족보에 빠진 것을 보고 놀란 적도 있습니다. 현 족보는 후손 중 계보가 있던 분들이 만든 것으로 보였습니다. 비석 비갈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집안에 다녀오셨군요. 굉장하십니다. 가까이의 구리시가 태극기 도시를 부르짖고 또 드라마에 나오는 고구려 대장간을 만들어 놓더니 광개토대왕비도 비슷하게 만들어 놓아서 구경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모조품을 보고도 많이 놀랐는데 원래의 자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보면 얼마나 감동을 받으려는지요. 잘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