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옥과 최창학 - 최고의 거상(巨商)과 금광왕(金鑛王)
한정주 한국사천자문
巨商稼圃 甲富鑛昌
(거상가포 갑부광창)
큰 상인은 임상옥이요, 큰 부자는 금광왕 최창학이다.
巨(클 거) 商(장사 상) 稼(심을 가) 圃(채마밭 포)
甲(갑옷 갑) 富(부자 부) 鑛(쇳돌 광) 昌(창성할 창)
1).18~19세기 조선 최고의 거상(巨商) - 가포 임상옥
역관(譯官)들은 17세기 조선을 둘러싼 국제관계와 자신들의 특수한 지위를 십분 활용한 역관무역으로 막대한 부(富)를 축적하긴 했지만, 사실 상업 활동을 전문으로 하는 상인(商人)집단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국제 무역에 참여한다는 것은 거대한 이득을 챙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나라에서 금지한다고 해서, 상업 활동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한 전문적인 상인 집단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할 수 있는 국제 무역 시장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라는 점은 삼척동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들 상인 집단은 갖가지 불법과 편법을 총동원하여 이 국제 무역 시장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상인 집단이 사신 길에 따라 나서거나 책문에서 열리는 후시(後市 : 밀무역 시장)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역관들의 도움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역관과 상인의 관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쪽은 역관들이었습니다. 역관의 협력과 묵인이 없으면, 상인 집단은 결코 국제 무역 시장에 발을 붙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숙종(肅宗)의 집권 말기(末期)로 접어든 1707년경, 의주부(義州府)에 세금을 내는 상인들은 합법적으로 청(淸)나라 상인과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한 소위 '책문후시(柵門後市) 양성화 조치'가 나오면서 국제무역 시장은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됩니다. 이때부터 상인 집단은 독자적으로 국제 무역 시장에 나설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역관과의 관계 역시 종속관계가 아닌 대등한 위치의 경쟁관계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문적인 상인집단이 그동안 장사 수완보다는 특수한 지위와 권한을 이용해 국제무역 시장에서 주도권을 행사한 역관들을 추월하고 따돌리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었습니다. 더욱이 17세기 말 청나라와 일본이 직접 교역 길을 터, 역관들은 청일(淸日)간 중개무역을 통해 얻는 이득까지 잃게 되었습니다. 결국 18세기 중·후반으로 들어갈수록, 역관들은 국제 무역 시장에서 상인 집단에게 밀려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이렇듯 18세기 들어 크게 변화한 동아시아 국제 무역 환경 속에서, 청(淸)나라-조선-일본 간의 국제 무역 시장을 주도하는 거대한 전문 상인 집단들이 등장합니다. 만상(灣商)이라고 불린 의주(義州) 상인과 송상(松商)이라고 불린 개성(開城) 상인 그리고 내상(萊商)이라고 한 동래상인(東萊商人) 등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이들 중 '책문후시 양성화' 이후 대청(對淸) 무역의 중심도시가 된 의주(義州)를 본거지로 세력을 확장한 만상(灣商)은 가장 거대한 국제 무역 시장인 청나라와의 교역을 장악했습니다. 이 때문에 18~19세기 조선 최고의 거상(巨商)은 바로 이곳 만상(灣商) 곧 의주(義州) 상인에서 배출되었습니다. 그 최고 거상은 바로 가포(稼圃) 임상옥(林尙沃)입니다.
의주 출신인 임상옥은 만상인 아버지 임봉핵의 영향을 받아, 청나라 말에 익숙했고 또한 청나라에 관한 정보와 지식에도 밝았다고 합니다. 그는 18살 때부터 아버지를 대신하여 북경(北京)에 드나들면서 청나라와의 국제 무역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됩니다. 그러나 임상옥이 만상(灣商)을 따라 북경을 드나든 첫 10년간은 뼈아픈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쓰라린 실패의 경험을 통해, 무엇보다 신용을 지키는 일이 중요하다는 '상도(商道)'와 시장이 움직이는 원리 곧 '상리(商理)'를 깨닫게 됩니다. 그가 조선 최고의 거상이 될 수 있는 밑거름이 되어 준 청(淸)나라와의 인삼 교역에서 막대한 이득을 챙긴 것도 역시 이때 어렵사리 깨달은 '상도'와 '상리' 덕분이었습니다. 인삼(人蔘)은 만상이 청나라 상인과의 국제무역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조선의 특산품이었습니다.
그런데 1821년 임상옥이 엄청난 물량의 최상품 인삼을 사들여 사신 길에 따라 나섰을 때, 청나라 북경의 상인들이 인삼 가격을 인하하기 위해 불매동맹(不買同盟)을 맺고 조선의 인삼을 일체 구입하지 않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당시 사신 길에 인삼을 짊어지고 따라 나선 많은 조선 상인들은 큰 손해를 볼까 봐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런데 임상옥은 자신의 인삼은 물론 팔리지도 않는 다른 상인들의 인삼까지 모두 사들여, 청(淸)나라 상인들에게 "인삼을 모두 불태워버리겠다"고 알렸습니다. 청나라 상인들은 설마 하는 마음으로 임상옥이 인삼을 불태운다는 현장에 나타났는데, 그는 실제로 그 많은 인삼을 불태우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놀란 청나라 상인들은 그를 적극 만류하고 나섰고, 임상옥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종전 가격보다 더 비싼 가격으로 인삼을 모두 처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두둑한 배짱과 뛰어난 장사 수완으로 청나라에서 막대한 이득을 취했고, 이를 밑천 삼아 조선 최고의 거상으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정 통제하의 국제 무역구조에서 임상옥이 '상도'와 '상리'만을 좇아 부(富)를 쌓고 지킨다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습니다. 옛말에 '작은 부자는 개인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지만, 큰 부자는 나라에서 만들어준다'고 했습니다. 임상옥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순조(純祖) 시대에 들어와 세도 가문 중의 하나인 반남 박씨의 실력자 박종경(朴宗慶)의 정치적 지원에 힘입어, 조선상인 중 최초로 국경지대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했습니다. 인삼 무역권을 독점한 대가는 말할 필요도 없이 정치 자금을 제공하는 것이었습니다.
'정경유착'을 통해 국제 무역 시장을 독점한 임상옥은 더욱 큰 부(富)를 쌓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상옥은 나랏일과 백성구제에도 자신의 부(富)를 아낌없이 사용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공적이 인정되어 상인의 신분으로는 드물게 곽산 군수에까지 오르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일부 조정 대신들로부터 탄핵을 받자,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군수 직을 버리고 의주(義州)로 물러난 후 백성구제와 이인(異人 : 속세의 삶을 떠난 사람)의 생활을 즐겼다고 합니다.
2).일제 시대 신흥부자의 전형적인 모델 - 금광왕 최창학
1945년 11월 23일, 27년 만에 초라하게(?) 귀국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 김구(金九)가 첫날 밤을 보낸 곳은 죽첨장(竹添莊)이었습니다. 당시 죽첨장은 대지 1,584평에 연건평 265평의 규모와 위용을 자랑한 지하 1층에 지상 2층의 일본식 대저택이었다고 합니다. 훗날 경교장(京橋莊)으로 이름을 바꾸고, 안두희의 총탄에 암살당한 그 순간까지 김구 주석이 숙소이자 집무실로 쓴 이곳의 본래 주인은 최창학(崔昌學)이라는 사람입니다.
임시정부의 주석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초라하게 귀국한 김구 선생에게 숙소와 집무실을 제공할 정도였으니까 얼핏 최창학이라는 인물이 무슨 대단한 애국심을 가진 인물처럼 여겨질 테지만, 사실은 정반대였습니다. 일제 시대 '최대의 황금왕(黃金王)'이라고 불린 최창학은 임전보국단(臨戰報國團)의 이사가 되어, 일본 육군에 비행기 8대를 헌납한 대표적인 친일 매국노였습니다. 자신의 친일 행적을 모면해 볼 속셈으로 김구 주석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어쨌든 이번 이야기의 주제는 그가 어떻게 '조선의 황금대왕'이라고 불릴 만한 거대한 재산(財産)을 모았는가에 있는 만큼, 김구 주석과 관련한 일화는 이만 줄이겠습니다.
소위 '골드 러시(gold rush)'라고 불리는 황금의 시대는 19세기 중반 미국에서 일어난 사회 현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도 '골드 러시'라고 할 수 있는 황금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제 강점기인 1930년대였습니다. 전봉관 교수가 쓴 『황금광시대』에 실려 있는 『삭주금광채광관』에서 목병정은 "지금 조선은 그야말로 황금광시대이다."라고 하면서, 전국 방방곡곡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조선의 산천과 모든 사람들이 금광 이야기에 미쳐 있다고 당시의 시대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황금 열풍 속에서 실제 '금 벼락'을 맞은 사람은 불과 몇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이토록 모든 사람들이 황금에 매혹되어 미쳐버리다시피 한 1930년대의 '조선의 골드 러시'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최창학이었습니다.
1923년, 당시 30대 중반의 최창학은 조선 최고의 '금 벼락'을 맞게 됩니다. 그는 평안북도 벽촌(僻村)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30여 세가 다 되도록 시장판과 노름판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그는 또한 같은 시대 한반도 북쪽 지역의 많은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금 벼락'을 꿈꾸며 금광(金鑛) 주변을 얼씬거린 반 건달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여러 해 동안 보고들은 금광에 관한 경험과 지식으로 우연찮게 자신의 고향 근처인 평안북도 구성군 관서면 조악동에서 금광 하나를 발견합니다. 이때 최창학이 발견한 금광은 전국 최고의 금맥(金脈)을 자랑하는 광산이었다고 합니다.
이 때문인지 최창학이 발견한 삼성금광(三成金鑛)은 개발한 지 5년도 되지 않아, 일찍이 개발된 운산금광(雲山金鑛) 및 대유동금광(大楡洞金鑛)과 더불어 조선을 대표하는 3대 금광으로 자리 잡게 됩니다. 사업 수완이 뛰어났던 최창학은 금만 캐는 식으로 돈을 벌지 않았습니다. 그는 금맥이 풍부한 양질의 광구(鑛區)는 자신이 개발하고 그 밖의 광구는 다른 사람에게 임대해 경영하는 방식으로 또한 엄청난 부(富)를 쌓았습니다. 최창학이 이룬 '벼락부자 신화'에 매혹 당한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삼성금광을 찾아왔기 때문에, 임대 경영 사업은 그에게 금(金) 이외에 '돈 벼락'까지 안겨주었습니다. 그 후, 그는 삼성금광의 성공을 밑바탕 삼아 구성과 의주, 삭주 일대에 수십 개에 달하는 금광을 운영하면서 조선 최고의 '황금대왕(黃金大王)'으로 군림했습니다.
1928년, 최창학은 '벼락부자 신화'의 본산지인 삼성금광을 당시 일본 최대 재벌인 미쓰이(三井)에 현금 1백 30만 원을 받고 팔아넘깁니다. 삼성금광을 넘긴 그는 곧 경성(京城)으로 활동본거지를 옮겼는데, 이때 그가 가진 자산은 3백만 원 곧 요즘 환율로 계산하면 3천억 원에 달했다고 합니다. 궁벽한 시골의 반 건달 인생에서 '금 벼락'을 맞고 조선 최고의 부자 반열에 오른 최창학을 보면서, 1930년대 조선의 백성들은 자신도 '벼락부자'가 될 수 있다는 꿈과 야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꿈과 야망을 좇아 너도나도 '금광'을 찾아 나선 것입니다.
경성(京城)으로 본거지를 옮긴 최창학은 죽첨정(竹添井 : 현재 충정로)에 죽첨장(竹添莊 : 현재 강북삼성병원 자리)이라는 호화 저택을 짓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금 벼락과 돈 벼락'으로 바뀐 자신의 인생을 마음껏 즐겼습니다. 1938년 최창학은 자신 소유의 금광에 속한 광구 76개를 일본광업(日本鑛業)에 6백만 원에 팔아넘기는 또 한 번의 '대박 신화'를 연출합니다. 10년도 지나지 않아 3백만 원의 자산을 두 배에 이르는 6백만 원이 넘는 거액으로 뻥튀기한 최창학의 이야기는 조선의 백성들을 사로잡고도 남을 신화(神話) 그 자체였습니다. 어느 누구도 부럽지 않은 부귀영화를 이룬 최창학은 서서히 권력에도 눈을 돌려, 태평양전쟁 당시 일제의 전쟁 책동에 적극 협력하는 친일 매국 행위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해방 이후에는 친일 매국행위를 반성하고 죄 값을 달게 치루겠다는 식의 행동을 하면서, 김구 주석과 한독당(韓獨黨)에 자신의 재산과 운명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김구 주석이 아닌 이승만(李承晩)이 정권을 차지하면서, 그의 화려한 신화(?)는 서서히 막을 내리게 됩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이승만 정권 하에서 탈세 혐의로 재판을 받던 최창학은 1957년 10월 심장마비로 죽고 맙니다. 해방 직후 무려 1천 3백여만 원(요즘 환율로 약 1조 3천억 원)에 달했다는 그의 재산은 분단으로 인해 북쪽에 있는 금광과 토지를 잃는 바람에 2/3 정도가 날아가 버렸습니다. 또 그 나머지 재산도 일부는 한독당의 정치자금으로 사용되고, 일부는 한국전쟁 및 이승만 정권 하에서 사라져 버렸다고 합니다. 1923년부터 시작된 최창학의 '벼락부자' 인생은 불과 20여 년 만에 1조 3천억 원의 자산을 굴리는 대성공 신화(神話)를 낳았지만, 해방 이후 15년도 지나지 않아 먼지처럼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말았습니다. 벼락처럼 성공한 조선 최고의 황금왕 최창학의 신화는 또한 그렇듯 벼락처럼 무너지고 사라져버렸습니다.
31 賜帶尊像 恩寺息笛 사대존상 은사식적
천사옥대와 장륙존상이요, 감은사와 만파식적이다.
賜(줄 사) 帶(띠 대) 尊(높을 존) 像(모양 상)
恩(은혜 은) 寺(절 사) 息(쉴 식) 笛(피리 적)
32 祚榮弓裔 自稱後句 조영궁예 자칭후구
대조영과 궁예는, 스스로 고구려의 후계자라고 일컬었다.
祚(복 조) 榮(영화 영) 弓(활 궁) 裔(후손 예)
自(스스로 자) 稱(일컬을 칭) 後(뒤 후) 句(글귀 구)
33 藝欽秀代 渤擴疆域 예흠수대 발확강역
무왕(大武藝)과 문왕(大欽茂)과 선왕(大仁秀)시대에, 발해는 영토를 넓혔다.
藝(재주 예) 欽(공경할 흠) 秀(빼어날 수) 代(대신할 대)
渤(바다 이름 발) 擴(넓힐 확) 疆(지경 강) 域(지경 역)
34 慧超五竺 矩堂見聞 혜초오축 구당견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구당 유길준의 서유견문록이 있다.
慧(슬기로울 혜) 超(뛰어넘을 초) 五(다섯 오) 竺(나라 이름 축)
矩(모날 구) 堂(집 당) 見(볼 견) 聞(들을 문)
35 元曉華嚴 知訥曺溪 원효화엄 지눌조계
원효의 화엄사상과, 지눌의 조계종이다.
元(으뜸 원) 曉(새벽 효) 華(빛날 화) 嚴(엄할 엄)
知(알 지) 訥(말 더듬거릴 눌) 曹(무리 조) 溪(시내 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