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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고린도전서 9 : 4 - 12
제목: 바보 바울
일시: 2010. 10. 24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모든 사람들에게 권한이 있다.
바울은 4-11절까지에서 자신의 권리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먹고 마실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4). 하지만 그는 믿음이 약한 자들, 아직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마실 권리, 먹을 권리를 포기하였다. 그는 다른 이들과 같이 결혼을 할 수도 있었다(5). 하지만 그는 결혼하지 아니하였다. 쉴 권한이 있었다(6). 하지만 그의 인생의 여정은 고난과 시련이었다. 매를 맞고 죽음의 위기를 넘기며 여러 위험한 순간들을 지내었다. 그의 권한은 인간적으로 보호될 수 있는 것이었고 나아가 율법에서조차도 그의 권한을 인정한다. 신명기 24장 4절을 보라.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 일하는 소도 일하면서 자기가 추수하는 곡식을 좀 먹을 수 있는 혜택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율법에 나오는 그 소가 바로 사도바울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II. 사도바울은 바보가 되었다.
권한은 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자가 행사할 수 있는 마땅한 것이다. 쉴 권한이 있으면 쉴 수 있고 마실 권한이 있으면 마시면 되고 놀 권한이 있으면 놀면 되는 것이다. 권한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누구하나 항의할 수 없는 나의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권한을 쓰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바보라고 한다. 야 어째 니꺼하나 못 챙기냐! 할 말 있으면 다 하고 살아야지!
그러나 고린도전서 9장에 바보 하나가 나온다. 사도바울이다. 사도바울이 아니라, 바보 바울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의 권한을 쓰지 아니하고 바보처럼 당하고만 살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나 바보인지 그 좋은 것들을 다 포기하고 살고 있다. 베냐민 지파에 태어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으로 가말리엘문하생이라고 하는 엘리트 유대배경을 버린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이미 헬라의 문화와 언어를 알던 국제적인 감각도 다 버린다. 로마 시민권자로서 높은 정치계에 입문할 수 있는 기회도 버린다. 대신 매나 흘씬 맞고 돌로 맞고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고생 고생하면서 자신의 모든 권한을 뒤로 한다. 이런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가 바보가 되기로 작정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이다. 사도바울은 바보이기는 하지만, 모르고 된 바보가 아니라, 알고 된 바보이다. 그가 자신의 권을 쓰지 아니하고 모든 일에 참고 인내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 “... 그러나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2). 19-23절까지의 말씀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어떻게 행했는가 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예하고자 함이라.”
말씀을 자세히 보라. 그리스도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고 권한을 쓰지 않고 참는다고 했는데, 역으로 이야기 하면 권한을 쓰면 그리스도 복음에 장애가 생길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사도바울이 자유한 사람이지만,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몇 사람이라도 더 건지고 복음에 참예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 말은 낮아지고 겸손한 종의 모습을 갖지 아니하면 복음에 참예하기 어렵고 사람들을 건지기 어렵다는 말이 아닌가! 권한은 사용할 때 갈등이 일어난다. 권한이 서로 교차될 때 싸움이 생긴다.
한국에서 전철을 타면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이 자리이다. 전철을 타고 몇 코스를 갈 때도 자리가 내 앞에 있으면 권한이 생긴다. 아주 잠시 지만 말이다. 그런데 속상할 때는 아주머니가 빽이나 던지면서 아이구 난 허리가 아퍼서라든지 미애 엄마 이리와 하면서 주책없이 부를 때이다. 내 권한이 뺐기어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런데 그렇게 앉아 버린 아주머니에게 따지지 않는다. 권한을 포기하는 것이다. 또 내가 앉아서 가고 있는데,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앞에 계시면 내 권리가 있지만, 노인경로라는 권한이 생긴다. 이때 권한을 포기하지 않으면 갈등이 생긴다. 갈등이 생기면서 조는 척 하기도 한다.
사도바울이 바보바울이 된 것은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갈등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이 바보가 필요하다. 내 권한을 주장하다 보면 부딪힌다. 평화와 화목보다는 불화와 반목이 생긴다. 이제 바울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서 그의 마땅한 권한이 바뀌게 되었다. 그 전 같으면 쉴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결혼할 수 있는 마땅한 그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었겠지만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서 그것들은 아예 생각지도 않고 마땅한 것들이 바뀌게 되었다. 우리가 생각하는 마땅한 것이 바뀌지 않으면 갈등과 마찰이 일어난다. 마땅히 할 말이 무엇인가? 내가 할말은 상대방이 하고 상대방이 할 말을 내가 하면 갈등과 불화가 생긴다. 삶 속에서 얼마나 종종 상대방이 할 말은 내가 하고 내가 할 말을 상대방이 해서 마음에 상처가 있고 속이 상한가!
예)밀양에서도 보라. 전도연이 남편이 죽고 아들과 함께 밀양으로 오게 된다. 그런데 웅변학원에 다니던 아들이 그 웅변학원원장에게 살해당해 죽게 된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약국집 아주머니의 전도로 교회에 나오게 되고 말씀을 듣고 주님과 같이 용서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리고 옥에 갇혀 있는 그 살인범을 용서하기로 하고 그를 면회 간다. 그런데 그 살인범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자기도 그 감옥 안에서 예수를 믿게 되고 늘 성경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게 되었고 비록 자신이 전도연의 아들을 죽였지만, 주님의 은혜로 용서받았으니 마음에 평강이 있고 감사하다는 말이다. 이 말을 듣고 면회소에서 나오면서 그녀는 쓰러진다. 그 살인범이 할 말은 “할말이 없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저는 죽어 마땅한 죄인입니다, 마음이 심히 괴롭습니다”이여야 하는데 평안하다니! 그 살인범의 평안은 전도연이 해주어야 할 말이다. 평강은 살인범이 할 말이 아니라, 전도연이 할 말이었다.
삶속에서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일본은 이제 과거사를 잊고 잘 지내자고 한다. 하지만, 과거사를 잊자는 말은 한국에서 나와야 하는 것이고 일본은 그저 죄송하다고 하면 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지나간 과거를 잊자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선교를 후원하는 교회에 방문해서 이렇게 교회가 강남에 있고 물질의 축복을 많이 받아서 귀교회가 선교비 후원을 하는 것은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라고 말해서는 안된다. 언제나 무조건 어려운 처지에서 준다고 해라.
교회공사로 인해 힘이 드는 때에 한 친구교수목사가 방문했다. 그때 말하길 “안교수 라미나트 6층까지 올릴라면 죽어! 또 각 층에 타이루 돌덩이를 올리려면 얼마나 무거운지 알아 엘리베이터도 없는데... 그래서 교회식구들이 공사 중에 방문할 때 올라오면서 한 짐씩 가져올라오고 내려갈 때 쓰레기 갖다 버려주는 것이 돕는 일이었지”라고 했다. 그러면 뭐라고 해야 하나? “정말 힘들었겠구만 정말 대단해 고생많이 하네”이렇게 말해야 하는데 “나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목회할 때 시멘트 메고 공사를 하는데 자갈과 모래를 섞어서 미장하고...”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위로받으려다가 완전히 상처받았다. 아무것도 아니구만! 이라고.
아내가 꽃과 화분을 키운다. 꽃나무나 화분들이 시장에 앙게보트로 나온 것을 놓치지 않는다. 언제나 물도 주고 흙도 갈아준다. 그때 “여보 당신 좋은 취미 생겼네”라고 하면 안 된다. “교회를 쉔하게 하느라고 얼마나 힘들겠어”라고 해야지 대답이 “좋아서 하는 일인데”라고 나온다.
권목사가 겨울이 되어 눈이 오면 눈 쓰는 것을 즐긴다. 한 시간 눈을 쓸면 땀이 뻘뻘 나는 게 꽤 운동이 된다. 그래서 지난 겨울 눈도 잘 쓸었다. 올해도 그렇게 쓸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들은 “목사님 이렇게 수고하시네 제가 함께 해야 하는데”라고 하면서 돕기도 해야 한다. 그런데 “목사님은 운동 삼아 좋아서 하는 일이야”라고 말하면 나는 그래도 속상하다.
사도바울은 마땅히 행사할 권한이 있었지만, 그리스도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갈등될 만한 것을 없애기 위하여 자신의 권한을 쓰지 않고 참았다. 할말도 골라서 했다. 마땅한 바가 그리스도 예수를 만난 후에는 바뀌게 되었다. 그는 바보가 되었다. 화목의 제물이 되고 관계를 회복하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권을 쓰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III. 사도바울은 정말 바보였는가?
바울은 바보가 아니었다.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다. 그는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투자해서 영원한 것을 샀기 때문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은 때와 시기가 임하는 유한한 것들이다. 움켜잡으려고 하지만, 없어질 것들이다. 아무리 깊은 곳에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으려고 해도 그것을 잃어버릴 것이다. 사도바울은 그의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었다. 주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 하느니라”고 말씀하신다. 바울사도는 그리스도 복음을 위해 땅에 속한 그의 모든 것을 투자했다. 땅의 것은 도둑맞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하늘에 쌓는 우리의 소망을 영원한 것이다.
예)1956년에 자크 로우는 로버트 케네디의 사진을 찍었다. 케네디의 아버지 조셉은 로우의 사진에 감명을 받아 그에게 존 F. 케네디와 그의 아내의 사진을 맡겼다. 3년 후, 로우는 케네디의 대통령 유세의 공식 사진기사가 되었고, 케네디가 당선된 후에 로우는 케네디의 전담 사진사가 되었다. 로우는 매우 꼼꼼한 사진사였다. 그는 약 4만 여장이나 되는 존 F. 케네디와 그의 가족들의 사진 원판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중 300-400장의 사진만이 공개되었다. 살아있을 당시 루오는 그의 사진들을 어떻게 사용할지를 궁리했다. 매스컴이나 박물관에서 사진을 원할 때면, 그는 원판을 직접 들고 작업실에 가서 현상을 했다. 작업이 마쳐지며, 원판들을 직접 회수하곤 했다. 로우의 딸 토마시나는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신중하셨어요. 아버진 그 원판들이 가장 안전하게 보관되어 있다고 믿었죠. 집에서 불과 여섯 블록 떨어진 그곳에 원판들을 보관해 놓으시고는 마치 자기 침대 밑에 안전하게 감춰두신 것처럼 느끼시는 듯 했어요.” 4만 여장의 사진 원판들은 JP Morgan Chase 은행의 안전금고에 보관되어 있었다. 이 은행은 세계무역센터 제 5건물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바로 9.11 테러 사건으로 무너진 건물이었다. 많은 기술자들과 100톤 크레인, 지게차들, 덤프 트럭들이 동원되어 작업을 하며 금고를 건져내었다. 그러나 그들이 금고에서 발견한 것은 화재의 흔적뿐이었다. 안전금고는 불타고 남은 재로 가득 차 있었다. 타지 않고 남은 것들은 쇠와 돌들뿐이었다.
우리에게는 권한이 있다. 마땅히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다. 그러나 바울처럼 바보가 될 때 더 귀한 것을 얻게 된다. 영원한 것을 얻게 된다. 우리에게 권한을 포기해야 할 기회가 오면 하늘에 쌓는 축복의 통로가 됨을 기억하라. 이 땅에서 우리의 마땅한 권한이 하늘에 쌓여지는 축복이 됨으로 권한 포기가 챤스임을 알라. 권한은 영원한 것을 얻는 재료가 된다. 바울의 육적인 일이 영적인 일이 되었다. 그의 권한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이다. 마치 벌레를 먹고 아름다운 파라다이스 새가 되는 것처럼 육적인 모든 일들을 에너지화 하여 영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우리가 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라”(12절). 권한이 있다는 것은 장애물을 제거할 좋은 기회가 되는 것이다. 권한이 없으면 장애물을 제거할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권한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그 권한을 어디에 쓰는가? 권한을 행사하지 않고 양보하고 손해보는데 사용하는 것이다. 기가 막힌 사용법이 아닌가! 권리를 가져라. 왜? 포기하기 위해서 가지라. 상대방이 놀랄 정도가 되도록 권리를 가지라. 공부 많이 해서 높아져라? 왜 낮아지기 위해서이다. 돈도 많이 벌어라. 왜 그 돈도 귀하게 사용하고 남들에게 퍼주기 위해서 말이다. 권한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귀한 재료가 된다.
그래서 권목사는 권한이 있으면 좋은 기회라고 한다. 누가 11시에 공항에 와 달라고 하고 무엇인가 부탁하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피곤할 수 있다. 번거러운 일일 수 있다. 그러나 피곤하게 생각하지 말고 챤스가 왔다고 생각하라. 복음을 전할 기회이구나! 사람들에게 빚을 지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을 빚지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신나는 일이냐? 한결이와 이본이 새벽 1시에 도착한다나? 피곤하게 왜 그때 와? 물론 그날 알람을 맞추어 놓고 잤다. 이제 빚을 졌다. 내가 뒤셀돌프 새벽 1시에 가도 문 열어 줘야돼!
목회차원에서 그렇게 한다. 전도차원에서 그렇게 한다 라는 표현을 쓴다. 그 말은 내게 권한이 있어도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믿게 하기 위해서 즉, 복음을 위해서 그 모든 손해와 수고로움을 감수한다는 것이다.
예)한국에 전도 많이 하시는 어떤 분은 집 앞의 과일 집을 지나가도 늘 사간다. 살 때는 곯고 맛없게 생기고 아무도 안 사갈 것 같은 것부터 사간다. 왜 그런가? 전도차원이다. 안 팔릴 과일은 상인에게는 골치 아픈 것인데, 그것을 팔아주니 얼마나 고맙겠는가! 유통기한 넘기 전에 처리할 수 있으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구매자는 최선의 서비스를 받고 최상품을 가질 권리가 있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최하질의 상품을 가지고 담아주려고 하는 것도 제가 담을께요라고 하면서 서비스도 안받으려고 하는 것이다.
뭔가 부탁을 받거나 내 권리를 주장할 만한 데 포기해야 할 경우가 있으면 골치 아프게 생각하지 말라. “기회가 왔구나” 라고 해야 한다. “감사합니다” 라고 해야 한다.
이것이 사도바울의 모습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었다. 사도바울이 종에게나 자유자에게나 부한 자에게나 가난한 자에게나 풍부함에도 비천에도 처해 본 다양한 모습을 가진 것은 성육신적인 사역의 모습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그의 권리를 포기하시고 오신 것이다. 하늘 보좌를 버리고 영광과 특권을 버리고 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종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땅의 모든 권한을 쓰지 아니하는 것이 하늘의 영원한 것을 사는 것이다.
IV. 포기할 권이 많아지기를 축복한다.
이 한 주간을 권리를 쓰지 않고 버리는 바보로 살기를 축원한다. 바보가 되는 것이 왜 축복인가? 버릴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포기할 것이 있는 사람은 그래도 포기할 뭔가가 있다는 말이다.
바보가 축복인 것은 내게 가진 권리를 쓰지 않지만 더 값진 것을 위한 전망 좋은 투자이기 때문이다. 썩어지고 없어질 권한이 영원한 축복의 재료가 된다.
바보가 축복인 것은 채무자로 사는 것이 아니라, 채권자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권리를 쓰지 않으면 사람들은 내게 빚진 자가 된다.
포기할 권한이 많아지기 위해서 높은 위치에 서야 하고 많은 것을 소유해야 하고 많은 축복이 내게 넘치게 되어야 한다.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복음을 위하여 바보같이 권을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았다. 그리스도의 복음과 영광을 위하여 할말이 있어도 참을 각오가 되어 있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내 감정도 콘트롤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내 돈을 써가면서 내 시간을 써가면서 억울한 소리 들어가면서 일할 수 있겠는가?
이 한주간도 바보로 살아가는 주간이 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