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KBS 1TV 시니어토크쇼 <황금연못>에서 신혼여행이라는 주제로
자문단들의 추억담이 재미있게 진행된 적이 있다.
그 이야길 듣다보니, 나의 신혼여행 추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50여 년 전의 어느 초봄.
결혼식을 마친 우리는 속눈썹 길게 달고 입술엔 루즈 빨갛게 바르고
얼굴엔 밀가루로 떡칠한 것 같이 쳐다만 봐도 속이 거북한 진한 화장을
하고 신혼여행길을 나섰다.
지금 생각하면 그 얼굴을 보고 남편 속이 얼마나 울렁거렸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진한 화장을 싫어했으니까}
어찌됐건 설레는 마음으로 떠난 신혼여행.
그때는 지금처럼 해외는 물론이고, 제주도도 상상도 못하던 시대였다.
보통 부산 해운대와 온양 온천이 가장 인기 있는 신혼 여행지였는데
우리는 온천보다 바다가 있는 곳이 좋을 것 같아 신혼 여행지를
부산 해운대로 정했다.
그리고 신혼 첫날밤을 묵을 호텔을 잡아야 하는데,
남편은 신혼여행이기도 하고, 첫날밤은 좋은 곳에서 보내고 싶다고
이름만 들어도 간 떨리는 고급 호텔에 나를 데려갔다.
가격을 물어보니 하룻밤 숙박하는데 3천원!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 정도였는데 하룻밤에 3천원이라니
꽤나 비싼 가격이었다.
하지만 신혼여행 첫날이니 아까운 마음을 꾹 참고 룸을 잡고
여장을 풀기 위해 호텔에 들어가니 촌에서 온 티가 저절로 난다.
복도에는 빨간 융단이 깔려있는데 신발을 신어야 하는 건지 벗어야 하는 건지,
또 종업원이 안내를 하는데 팁을 주어야 하는 건지.
도무지 남의 옷을 빌려 입은 것 같은 거북함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네온사인이 찬란하게 비춰지는 아름다운 해운대 밤바다를 바라보니,
황홀한 것이 지금 생각해도 달콤한 첫날밤이었다.
(그날이 가슴 떨리는 진짜 첫날밤이었는지는 비밀이다 ㅎㅎㅎ)
그렇게 평생 잊지 못할 가슴 뛰는 꿈결 같은 첫날밤을 보내고,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하는데 추가요금 600원을 더 내라고 하는 게 아닌가!
아니 따로 사용한 것도 없는데 무슨 추가요금이냐고 물어보니 서비스 요금이란다.
3천원 숙박비도 간 떨리는 금액이었는데, 추가 요금이 600원이라니.
호텔은 원래 이런 건가. 우리가 어수룩해 보여서 사기 치는 건 아닐까.
서비스 요금이면, 방에 있던 수건이라도 가지고 나올 걸 그랬나?
별의별 생각을 다 하며 추가 요금을 계산하고 남편과 호텔을 나왔다.
아까운 마음을 뒤로하고, 사진사와 함께 본격 관광을 시작했다.
해운대 모래사장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보며
“나 잡아봐라~“
하며 영화의 주인공이 되어 뛰기도 하고
생전 처음 케이블카도 타고
다리 아프다고 하면 신랑이 업어주기도 하고.
우물 안의 개구리가 세상 구경을 하면서 어찌나 행복한지
세상에 우리 둘이만 존재하는 것 같이 솜사탕처럼 달콤한 사랑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저녁에는 일본식 다다미방을 600원에 얻어놓고 밥도 먹고
시장 구경도 하자고 여관을 나섰다.
광복동거리를 활보하면서 이것저것 사먹고
부채과자도 한 봉지사서 숙소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남편과 나도 신혼여행의 단꿈에만 빠져있었는지,
여관 위치가 잘 생각이 나지 않아
동네를 몇 바퀴나 돌았는지 모르겠다.
낯선 동네에서 둘째 날은 혹시 노숙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몇 시간을 걸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겨우겨우 찾은 여관.
따뜻한 곳에 몸을 뉘일 수 있다는 기쁨도 잠시,
밤이 깊어지니 옆방 ,복도, 등등에서 싸움하는 소리, 이상야릇한 괴성에
잡다한 소음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값싸다고 마음 편해 했더니 비싼 호텔이 소음도 없고 좋기는 좋았던 것 같다.
신혼여행비 2만원을 가지고 떠났는데
하룻밤 호텔 비 아낀 돈으로 책상을 샀으니
그 소음쯤이야 감내해야 하지 않을까? ㅋㅋ
(부록)
그리고 신혼여행하면 또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가 더 있다.
바로 남편과 나의 두 번째 신혼여행은 아니고~~
아주버님의 신혼여행이다.
왜 남의 신혼여행이 기억나냐고?
다 이유가 있다.
아주버님이 군대에서 잠시 휴가 나오셔서
속도위반으로 결혼 한 우리보다 몇 달 늦게 결혼식을 하셨는데
시간이 허락치 않아 멀지 않은 부석사로 신혼여행을 가시게 되었다.
시아버님은 집에서 잔치음식을 해서 손님들을 치르는데
작은며느리가 임신 중인데 힘들고 고생한다고
아주버님이랑 형님 신혼여행 가시는데 우리 부부를 같이 갔다가 오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참 말이 안 되는 일인데,
철없던 우리 부부는 부석사까지 따라가서 관광까지 함께 하고,
신혼 선배답게 여관까지 안내해주었다.
(서비스 요금까지 따로 받는 비싼 호텔도 아니고, 시끄러운 다다미방도 아닌
적당한 여관으로.. 그리고 외출할 일이 있으면 꼭
여관 이름과 위치를 기억하라는 팁도 함께~^^)
그리고 차마 같은 여관을 얻어 옆방에 자긴 민망해서
부석 시내로 나오는 달구지를 얻어 타고 집으로 돌아온 기억이 있다.
(그나마 그때라도 눈치 있게 집으로 돌아와서 다행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주버님 내외 신혼여행 가시는데
따라간 동생과 제수는 철도 없고 신문 사회면 한 귀퉁이에 나올 일이다.
안 그래도 속도위반으로 결혼식 추월까지 한 동생 부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ㅋㅋ
정 많고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집안으로 시집온 나는
첫 단추를 성공적으로 꿰어 지금도 평생을 신혼여행을 하면서 산다.
첫댓글 "그날이 가슴 떨리는 진짜 첫날밤이었는지는 비밀이다....ㅎㅎㅎ"
진짜 첫날밤이 아니라는 말씀 아닙니까? ㅋㅋㅋ
저도 젊었을때 친구와 부산의 값싼 여인숙에 투숙했던일이 있는데
그야말로 난장판......여자의 숨넘어가는 소리. 우는 소리....등등
좋은 추억이었습니다~~
그저 비싸도 호텔이 좋지,
여관은 5일 장처럼 시끌시끌 해서 잠도 못 자고
호텔에서 첫날 밤(?) 꿈 같은 밤이었습니다...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