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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2월 5일 수요일
[(홍) 성녀 아가타 동정 순교자 기념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아가타 성녀는 이탈리아 남부의 시칠리아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신심이 깊었던 그는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봉헌하고자 평생을 동정으로 살았다. 아가타는 철저하게 동정을 지키려다가 데키우스 황제 박해(249-251년) 때 그를 차지하려던 지방 관리에게 혹독한 고문을 받고 순교하였다. 성녀에 대한 공경은 초대 교회 때부터 널리 전파되었다.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라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가르치시는 것을 보고 많은 이가 못마땅하게 여기자, 예언자는 제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하신다(복음).
제1독서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신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12,4-7.11-15
형제 여러분, 4 여러분은 죄에 맞서 싸우면서
아직 피를 흘리며 죽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5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시면서
내리시는 권고를 잊어버렸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을 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6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이를 훈육하시고
아들로 인정하시는 모든 이를 채찍질하신다.”
7 여러분의 시련을 훈육으로 여겨 견디어 내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을 자녀로 대하십니다.
아버지에게서 훈육을 받지 않는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11 모든 훈육이 당장은 기쁨이 아니라 슬픔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그것으로 훈련된 이들에게
평화와 의로움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12 그러므로 맥 풀린 손과 힘 빠진 무릎을 바로 세워
13 바른길을 달려가십시오.
그리하여 절름거리는 다리가 접질리지 않고
오히려 낫게 하십시오.
14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아무도 하느님의 은총을
놓쳐 버리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또 쓴 열매를 맺는 뿌리가 하나라도 솟아나 혼란을 일으켜
그것 때문에 많은 사람이 더럽혀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십시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6,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 고향으로 가셨는데 제자들도 그분을 따라갔다.
2 안식일이 되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많은 이가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을까? 저런 지혜를 어디서 받았을까?
그의 손에서 저런 기적들이 일어나다니!
3 저 사람은 목수로서 마리아의 아들이며,
야고보, 요세, 유다, 시몬과 형제간이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우리와 함께 여기에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4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5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6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는 것에 놀라셨다.
예수님께서는 여러 마을을 두루 돌아다니며 가르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또는, 기념일 독서(1코린 1,26-31)와 복음(루카 9,23-26)을 봉독할 수 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의 처음과 마지막 부분에 ‘놀라다’라는 낱말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에 대한 놀라움은 그 놀라움의 이유가 되시는 분에 대한 찬미로 이어지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은 오히려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뒤틀린 감정을 가집니다. 그들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은 무엇일까요?
자신들의 경험과 스스로 안다고 믿는 생각의 틀입니다. 삼십여 년 동안 한동네에서 살아온 사람을 겉으로만 아는 얄팍한 이해의 한계로, 또 목수는, 마리아의 아들은, 야고보와 유다의 형제는 그렇게 훌륭한 가르침과 기적의 능력을 지닐 수 없다고 믿는 편견으로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자주 평범하고 자연스러운 일상 안에서 비범하고 초자연적인 것, 곧 은총을 주십니다. 아픔이 낫기를 바라는 사람의 믿음은 치유자의 능력을 활발히 일으킵니다.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 ”(마르 6,5)라는 말은, 치유가 일방적으로나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이 아니라 믿음을 통한 쌍방의 상호 작용이라는 것을 알게 해 줍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앓는 사람을 ‘모두’ 고쳐 주신 예수님의 보편적 능력이 고향에서는 “몇몇 병자”(6,5)에게 한정됩니다. “너희가 믿는 대로 되어라.”(마태 9,29)라는 말씀과 달리 그들에게는 믿지 않는 대로 되었습니다. 익숙한 것을 하느님 안에서 새롭게 보는 능력, 스스로 안다고 여기는 대상을 지금 이 순간 보이는 대로 새롭게 바라보는 능력을 청합시다.(국춘심 방그라시아 수녀)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오늘 축일은 맞이하시는 아가타 동정 순교자는 체칠리아, 루치아, 아녜스 성녀와 더불어 로마 교회의 네 동정 순교자로 널리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아가타는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시절, 이탈리아의 최남단 시칠리아 섬 카타니아 지방 명망가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다방면에 출중했던 그녀는 당시 총독의 눈에 띄게 됩니다.
아가타에게 완전히 빠져 제 정신을 못 차리게 된 총독은 그녀가 싫다는 데도 불구하고 집요하게 청혼을 거듭합니다. 그럴 때마다 단호하게 청혼을 거부하자 심기가 완전히 불편해진 총독은 그녀가 그리스도교 신자임을 알고 법정으로 넘깁니다.
재판정에서 아가타는 갖은 잔혹한 형벌을 다 받지만 꿋꿋하게 견뎌냅니다. 한 차례 끔찍한 고문을 잘 견뎌낸 그녀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다시 옥으로 돌아갈 때마치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처럼 만면에 희색을 띤 채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갔으며, 고문으로 인한 처절한 고통을 기도로써 이겨냈습니다. 그리고 모든 고통을 주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다음날 다시 재판정으로 끌려 나온 아가타의 태도는 더욱 의연했었고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습니다. 형리들은 빨갛게 달군 쇠로 그녀의 가슴을 도려냈지만 그 끔찍한 고통 중에서도 그녀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는 정결에 대한 사랑으로 이와 같은 형벌을 받고 있습니다. 제 구세주 하느님, 이 고통을 잘 참아 이기도록 도와주소서.”
다시 감방으로 돌아온 다음 날 베드로 사도가 치료 약을 가지고 나타나자 아가타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 사도님! 저는 세상의 약으로 제 육신을 고치는 것을 절대로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말씀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새롭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런 아가타의 의연한 모습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총독은 날카로운 유리 파편과 불타고 있는 석탄 위에 아가타를 뒹굴게 했다고 합니다. 전신에 화상을 입고 숨을 거두어가던 그녀는 이윽고 마지막 순간이 오자 다음과 같은 기도를 바쳤다고 합니다.
“착한 스승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님, 당신은 제가 박해자의 고통을 이기게 하셨으니 감사하나이다. 주님, 제가 당신 불멸의 영광에 도달하게 하소서.”
오직 주님과 온전히 일치해 있었던 아가타였기에 그 어떤 외부로부터의 고통에도 좌지우지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었습니다. 그녀에게 두려운 것 오직 한 가지는 주님과 멀어지는 것뿐이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콜로라도엘 다녀왔습니다. 콜로라도 덴버에 있는 신부님과 인연이 있어서 다녀왔습니다. 지난 1월 12일에 제가 덴버를 찾았습니다. 마침 1월 14일은 신부님의 서품 23년이 되는 날이어서 더 뜻깊었습니다. 신부님은 덴버의 좋은 곳을 안내 해 주었습니다. 온천엘 다녀왔고, 신들의 정원(Garden of the gods)에 다녀왔습니다. 온천은 그 자체로도 좋았지만, 왕복 6시간 동안 신부님과 이야기하는 것이 더 좋았습니다. 신부님은 ‘콜로라도’의 뜻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콜로라도의 뜻은 스페인 말로 ‘색이 붉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콜로라도의 바위는 붉은색이 많았습니다. 신들의 정원의 이름의 유래도 들었습니다. 그 지역을 발견한 사람이 처음에는 ‘맥주의 정원(Beer Garden)’으로 정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의 이름이 주피터와 주노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그곳의 이름을 ‘신들의 정원(Garden of the gods)’로 정했다고 합니다. 이름이 참 중요하다는 걸 새삼 느꼈습니다. 콜로라도는 물이 좋아서 맥주가 맛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맥주의 정원이라고 했다면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술’이 생각났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신들의 정원이라고 했기에 아름다운 자연을 보면서 하느님을 찬미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세례명을 생각합니다. 형들과 동생은 생일에 맞추어서 세례명을 정했습니다. 큰형은 9월에 맞추어서 미카엘, 작은형은 12월에 맞추어서 사도 요한, 동생은 10월에 맞추어서 프란체스카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저는 5월인데 가브리엘로 정했습니다. 5월이면, 마티아로 해도 좋았을 텐데 부모님은 가브리엘로 정하였습니다. 저는 왜 그렇게 정하였는지 묻지는 않았지만, 저의 세례명 가브리엘이 좋습니다. 가브리엘이 천사라서 좋았고, 가브리엘은 하느님의 뜻을 전해서 좋았습니다. 가브리엘이 하느님의 뜻을 전하면서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어서 좋았습니다. 사제가 되어서 말씀을 선포하고, 하느님의 뜻을 전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저의 세례명과 제가 하는 직무가 비슷해서 좋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도 새로운 이름을 정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 또한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나약하기에 물속에 빠지기도 했고, 두려움 때문에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지만, 예수님의 말씀처럼 베드로는 굳건한 반석이 되었습니다.
서울대교구 부제, 사제 서품식이 있습니다. 멀리 있지만 새 부제와 새 사제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함께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34년 사제 생활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부족한 저를 이끌어 주셨고, 교우분들은 저를 이해해 주셨고, 저를 위해 기도해 주셨습니다. 부족하지만 제가 하고 싶었고, 사제라면 당연히 해야 할 직무를 새 사제들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사제는 ‘시대의 징표’를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아픈 곳을 정확히 진단해야 올바른 처방을 내릴 수 있습니다. 시대의 징표는 사색, 독서, 경청을 통해서 찾을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꾸준한 독서가 필요합니다. 사제는 ‘말씀’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교회의 서적, 가르침을 가까이해야 합니다. 말씀은 강론을 통해서 선포되기에 강론 준비를 충실하게 해야 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고, 말씀이 우리와 함께하셨고, 말씀이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기도는 갈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도는 여유를 가지고 해야 합니다. 기도는 꾸준히 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사제는 샘이 깊은 물과 같습니다. 뿌리 깊은 나무와 같습니다. 사제는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는 삶을 사셨습니다. 주어진 십자가를 충실하게 지고 가셨습니다. 가난한 이, 아픈 이, 외로운 이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행동하는 사제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 많은 기적을 보여주지 못하였습니다. 고향 사람들이 마음을 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교우분들이 마음을 열어도 시대의 징표를 모르는 사제가 있다면,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기도에 게으른 사제가 있다면, 행동하지 않는 사제가 있다면 복음의 꽃은 피기 어려울 것입니다. 새 자세들이 가는 새로운 임지에서 복음의 꽃이 활짝 피기를 기도합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서 성령의 뜻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서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사제와 교우가 만나서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꽃피고, 희망이 열매 맺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들아, 주님의 훈육을 하찮게 여기지 말고 그분께 책망받아도 낙심하지 마라.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도록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
<당신을 알아갑니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의 당신은
내 안의 당신을
고스란히 품고 있되
늘 한없이 너머 있습니다
내 안의 당신은
내 밖의 당신을
늘 아주 조금밖에는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당신이
미처 담아내지 못한
내 밖의 당신은
마치 당신이 아닌 듯
내게 낯설게 다가옵니다
모르는 내 밖의 당신은
당신이 아니요
아는 내 안의 당신만이
오로지 당신이라며
당신 담은 나를 닫으면
내 밖의 당신을
오롯이 담아야만
비로소 있을 수 있는
내 안의 당신마저
더 이상 있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없어도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 밖에 당신이 있습니다
내가 있으니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습니다
내 안에 당신이 있습니다
당신이 있는 내 안에
아직 내가 알지 못하는
내 밖의 당신을 모십니다
나는 당신을
늘 그렇게 조금씩
몰랐었지만 알아갑니다
나는 당신이 아니기에
당신을 송두리째 알 수 없지만
나는 당신이 아님에도
당신을 늘 그렇게 알아갑니다
마침내 내가 당신이 되면
참으로 당신을 알 수 있으리니
열린 마음으로 느린 걸음으로나마
당신을 알아갑니다
오늘의 성인
성녀 아가타(Agatha)
신분 : 동정 순교자
활동지역 : 카타니아(Catania)
활동연도 : +249/251년?
같은이름 : 아가다, 아가따
교회의 빛나는 인물들 : 성녀 아가타
‘아가타’라는 이름은 ‘착하고 어질다’라는 뜻을 담고 있는 이름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전통에 따르면, 아가타는 시칠리아섬의 부유하고 권세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일생을 하느님께 봉헌하기로 결심한 아가타는 남자들의 청혼을 모두 거절하였다. 권시아누스라는 집정관도 아가타에게 거절당한 사람 중의 하나인데, 그는 데치우스 황제가 일으킨 교회박해 때 아가타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아가타를 체포하여 끌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아가타는 권시아누스의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님, 모든 이의 주님이신 분! 당신은 제 마음을 아십니다. 당신은 저의 간절한 열망을 아십니다. 저의 모든 것을 가지소서. 저는 당신의 양입니다.
제가 악을 이기도록 하여 주소서”라고 기도를 바쳤다. 이에 분노한 권시아누스는 아가타의 굳은 신심과 의지를 꺾으려고 ‘아프로디사’라는 여자 포주가 운영하는 사창가로 보냈다. 그러나 아가타를 유혹하여 타락시키려던 이러한 시도마저 그녀의 굳건한 신앙을 이기지 못하였다.
그 후 아가타는 권시아누스에게 다시 불려가 심문을 당하였으나, 여전히 자신의 확고한 뜻을 굽히지 않아 감옥에 보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가타가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굽히지 않자, 권시아누스는 온갖 고문을 가하였다. 권시아누스는 이 모든 고통을 기쁨으로 견디어 내는 아가타를 보고 크게 격분하여 그녀의 젖가슴을 잘라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렸다. 이에 아가타는 “잔인한 군주여, 내 몸을 이렇게 고문하고도 당신은 부끄럽지 않습니까? 당신은 여인인 어머니의 젖을 빨지 않았던가요?” 하고 질책하였다.
권시아누스 집정관은 그녀를 다시 감옥으로 돌려보내면서 어떠한 치료약이나 음식물도 주지 못하도록 하였으나, 아가타는 환시를 통해 하느님이 보낸 사도 베드로로부터 가슴의 상처를 기적적으로 치유받았다.
나흘 뒤에 아가타가 다 나은 것을 보고도 권시아누스는 또다시 그녀에게 고문을 가하고 감옥에 처넣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가타는 “주님, 저의 창조주시여, 당신은 제가 어릴 때부터 저를 언제나 보호해 주셨나이다. 당신은 세상의 사랑으로부터 저를 택하시고, 고통을 견딜 인내를 주셨습니다. 제 영혼을 받으소서”라는 마지막 기도를 바친 뒤 숨을 거두었다.
아가타가 순교한 뒤에 팔레르모와 카타나 지역에서 그녀를 성녀로 공경하는 관습이 생겨났고, 그 관습이 확산되었다. 530년경 카르타고 교회의 미사 경본에 아가타의 이름이 삽입되었으며, 5세기와 6세기의 [예로니모 순교록]과 고대 [카르타고 순교록]에는 2월 5일에 아가타가 순교한 것으로 수록되었다.
또한 교황 그레고리오 1세(590-604)에 의해 로마 미사 경본에도 수록되어 전체 교회에서 공경을 받게 되었다.
성녀 아델라이드 (Adelaide)
활동년도 : +1015년경
신분 : 수녀원장
지역 : 빌리히(Willich)
같은 이름 : 아델라이다
성녀 아델라이드는 구엘데르(Guelders)의 백작 메긴고즈(Megingoz)의 딸로서 독일의 쾰른(Koln)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그녀의 부친이 세운 본(Bonn) 근교 빌리히 수도원의 원장으로 지내다가 쾰른의 성 마리아 수도원에 들어가 원장으로서 임종할 때까지 봉사하였다.
쾰른의 수도원 역시 그녀의 부친이 세운 곳이다.
그녀는 회원들로 하여금 라틴말을 배우게 할 만큼 진취적이었고 지혜로웠다.
쾰른의 대주교 성 헤리베르투스(Heribertus, 3월 16일)는 모든 어려운 문제에 그녀의 자문을 구할 만큼 성녀 아델라이드를 존경하였다.
그녀는 아델라이다(Adelaida)로도 불린다.
성 인제누이노(Ingenuinus)
활동년도 : +7세기
신분 : 주교
지역 : 브릭센(Brixen)
같은 이름 : 게누이노, 게누이누스, 인게누이노, 인게누이누스, 인제누이누스, 제누이노, 제누이누스
성 인게누이누스(또는 인제누이노)는 독일 티롤(Tyrol) 지방 브릭센 근교 세벤(Seben, 현재는 존재하지 않음)이라 불리는 작은 마을의 주교였다.
그는 주교좌를 브릭센으로 옮겼고, 유배중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날 그와 함께 기념하는 브릭센의 주교로는 11세기의 성 알부이누스(Albuinus)가 있다.
성 인게누이누스는 게누이누스(Genuinus, 또는 제누이노)로도 불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