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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바른신학 바른신앙 원문보기 글쓴이: 이성민
한국교회의 뿌리 깊은 기복신앙
오늘 한국교회의 인본주의 신앙과 성장지상주의 신앙의 밑바닥에는 기복신앙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다. 기복신앙의 뿌리를 뽑지 않고는 결코 한국교회의 수많은 문제들을 제거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여기서 기복신앙이 가져오는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하고자 한다.
1. 복음의 변질
여러 국어 대사전을 찾아보았지만 "기복"(기복신앙)에 대한 사전적 정의가 분명하지 않았다. 단순히 복을 비는 행위를 "기복"이라 정의하고 있다. 아마 기복이란 말은 옛날에 어머니들이 나무, 바위, 일월성신에게 제사상 차려 놓고, 가정의 형통과 건강, 자식의 출세를 위해서 빌던 행위에서 유래한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에서 기복신앙의 선을 긋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말에서 '영육간에 복을 주옵소서'라 할 때, 영혼에 축복뿐 아니라 육적인 축복도 달라는 말에는 강한 기복의 의미가 담겨있다. 육적인 축복이란 말은 잘못 사용된 것이다. 사도바울은 성도에게 주신 자유로 "육체의 소육"을 따라 살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살라고 충고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 요한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은 모두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하였다(요일2:16). 예수께서도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로 염려하지 말라 하셨다(마6:25). 성도는 이 세상에서 육적인 것에 관해서는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임을 알아야 한다(마5:45). 성도가 악인과 불의한 자보다 이 세상에서 더 받는 것은 영적인 축복이다.
기복을 전하는 사람들은 주로 구약의 믿음의 조상들의 예를 많이 인용한다. 그러나 성경의 해석상에서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와 같은 역할을 한다. 계시가 완성되기 전까지 영적인 축복에 관해서 설명할 때 눈에 보이는 세상의 모형을 사용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계시가 완성된 이후에는 육적인 것은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아직까지 눈에 보이는 것으로 영적인 것을 측정하려는 사람은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제 영적인 것은 성령으로 분별하게 된다(고전2:13). 그런 의미에서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율법적인 냄새를 풍기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가지고 무슨 신비한 것처럼 열을 올린다.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는 모든 육의 축복은 위험한 것이다. 예수께서 많은 병든 자들을 고치셨지만,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을 때는 눈을 빼어 내고, 손을 도끼로 찍어 버리라고 경고하셨다(마5:29-30). 가정을 세우신 주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와 영혼에 유익이 되지 않으면 부모와 처자, 형제와 자매를 버리고, 심지어 자기의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눅14:26). 그리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고 가난하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눅14:33). 사도바울 또한 물질(부와 돈)을 사랑하는 탐욕은 일만 악에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육적인 것(물질, 건강, 생명, 시간)들을 전적으로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사용하는 사람은 보화를 하늘에 쌓는 삶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농부가 밭을 갈다가 발견한 보화를 얻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팔아서 밭을 산 것처럼, 성도의 이 세상 삶은 보화를 얻기 위해서 육적인 모든 것을 지불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다른 극단의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그것은 지나친 종말론적 신앙이다. 1992년에 기세를 떨친 다미선교회와 같은 현상이다. 그들의 구호는 오직 "예수 천당"이다. 예수 천당이 나쁜 구호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것은 성도의 푯대요 소망이다. 그러나 우리가 천당가기 위해서 예수 믿는 것은 아니다. 천당 가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이시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이 더욱더 중요한 일이다. 이 땅에서 천국을 맛보지 못한 사람은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고 사도 바울은 기록한다.
참된 성도는 조급하게 "예수 천당" 외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 거룩하고 온전한 성도의 삶을 살 때 늘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은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천국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여기에 지금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이 세상의 것들에 연연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조급하게 예수 천당만 외치지도 않는다.
2. 위선적 신앙인의 양산
가난, 질병, 고통이 모두 저주로 가르치게 되면, 가난하고 병들고 고통 당하는 자들은 믿음 없는 자로 비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자들은 교회를 기피하던지 아니면 믿음 없는 자로 비치지 않게 하려고 자신의 결점을 숨기고 믿음 좋은 성도처럼 위장하게 될 것이다. 곧 기복신앙을 가르치는 교회는 위선적 신앙인을 길러내는 텃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기복 성향을 띄는 교인들이 대형교회를 선호하는 지도 모른다. 자신을 적당하게 숨기고 거룩한 성도처럼 행동하기에 가장 안성맞춤이기 때이다. 물론 모든 대형교회가 기복적이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목적인 숫자에 치중하는 한국교회의 위선적 허상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기복의 가르침은 세속 교회와 교인을 양산하게 된다. 교인들은 자신의 믿음 좋은 것이 경쟁적이고, 처세술에 뛰어나고, 계산에 밝아야 인정받게 되는 것을 알게 된다. 이들은 적극적인 사고와 탁월한 방법론을 계발하게 되고, 이런 면에서 오히려 세상 사람들보다 한 발 앞서 가는 세속 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세속교회들은 스스로 교인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실행해 보이고 있다. 교회들이 행하는 사업을 보면 알 수 있다. 선교라는 명목아래 세상의 모든 알짜배기 사업에 모두 손을 대고, 성도들의 기복적인 구미에 맞추기 위해서 제정을 집행하는 것이 이러한 교회의 특성이다. 교회의 제정은 소외된 자들에게 집행되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가장 투자하기 싫어하는 곳에 교회의 제정이 사용되어야 마땅하다.
성경중심에 나오는 욥기에서 욥의 신앙은 성경전체를 바치는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욥의 위대한 신앙이 어디에 있습니까. 욥은 동방에 의인이요 가장 부요한 자이었다. 사단이 욥에 관해서 하나님께 무엇이라고 훼방하였습니까? 하나님,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주께서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욥1:8-9)라고 간교한 사단이 말한다. 이 말은 하나님, 욥이 건강하고 자식 잘되고 사업에 복을 주시니까 욥이 하나님을 그렇게 경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단에게 욥을 시험해 볼 것을 허락하셨다. 욥은 일순간에 열 자식을 다 잃어버리고, 모든 재산은 산산이 흩어지고, 자신은 죽음에 이르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의 비참함을 본 아내조차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남편을 저주하였다. 그러나 욥의 위대함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는 이러한 고난과 고통가운데서도 한 마디 말로도 하나님을 배반치 않았다는 것이다. 처참한 환경이 결코 그의 믿음의 변화를 주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불굴의 믿음이다.
참된 믿음은 공중권세 잡은 자가 가져다 주는 세상의 고통과 고난가운데서도 믿음의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그들의 믿음의 소망이 이 세상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도바울의 말씀처럼, 성숙한 성도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빌4:11-12). 사도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라고 하여 고난과 고통, 환경을 초월한 위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기복신앙의 소유자들은 이러한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므로, 기도할 때마다 이러한 것들을 들고 나아와서 자신의 욕심을 따라 중언부언하는 기도를 드리게 된다. 성도는 고난과 고통을 당하여도 그곳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감사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의인은 의의 고난을 통해서 장차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됨을 인하여 감사해야 한다.
3. 신[론]에 대한 왜곡
기독교 신앙은 신본주의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개인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욕망의 산물이다. 기복신앙은 인간중심의 신앙 곧 인본주의적 신앙을 낳게 한다. 그러므로 기복신앙은 반 기독교적 신앙이다.
기복신앙은 인간의 탐욕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김과 같이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가져오게 한다. 그리스. 로마의 신들이 신관의 의도에 따라 만들어 내어진 것처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조작되어 지는 신은 성경에서 계시된 하나님이라 할 수 없다. 기적을 원하면 기적을 일으키는 신으로, 아름다움을 원하면 아름다움을 주는 신으로, 물질을 원하면 풍요로운 물질을 주는 신으로 신관들은 그들의 욕망에 따라 다양한 신을 조작해 내었다. 그들의 신의 공통점은 신의 거룩함은 말하지 않고, 인간의 탐욕과 욕망에 대해서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을 약속한다. 만일 신관이 이러하다면 일본 사람들이 남의 신을 믿을 수 없기에 자기만의 신을 섬기는 것이 옳은 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인간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신이 아니라 자신의 뜻에 따라 행하시는 주권적 신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이해할 때, 성부 하나님은 창조주로, 성자 하나님은 구속의 주로, 성령 하나님은 성도를 온전케 하시고 거룩케 하시는 성결의 하나님으로 믿는다. 기독교의 신관에 있어서 많은 신학자들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접근하려다가 잘못된 오류와 자기 주장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출3:14, I AM WHO I AM)라고 말씀하였다. 이 말은 나의 존재가 바로 나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자기 존재의 표현이다. 하나님은 홀로 한 분이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고, 스스로 뜻하신 것을 행하시는 분이시다. 인간의 타락한 욕구에 만족되어지는 신이 아니시다.
기복신앙이 만들어 내는 대표적인 오류는 신관에 대한 왜곡이다. 특히 한국교회에 자리 잡고 있는 성령 하나님에 대한 그릇된 오해는 하나님을 기형적인 하나님으로 만들어 놓았다. 성령은 전통적인 샤마니즘이나 무당들이 행하던 주술적인 영이 아니다. 성령은 바로 주권적 하나님이시다. 예정과 선택, 그리고 부르심과 버리심에 관여하시고, 구속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성결의 영으로 성도의 거룩함을 보증하시는 분이시다. 단지 인간이 원하는 것을 위해서 움직여지는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부흥사가 '불 받으라' '성령 받으라'라고 외친다고 임하는 신 아니라,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요3:8), 자신의 의지와 주권을 따라 움직이시는 성령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관(신론)은 바른 기도를 드리게 한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이방인들처럼 기도할 때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였다. 중언부언은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지 않고 인간의 욕심에서 나온 기도이다. 반드시 기도는 응답 받아야 믿음이 좋다는 것도 잘못된 생각이다. 그리고 모든 것을 구하라 하였다고 자신의 탐욕에서 나오는 모든 것까지 구하라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그 이상의 것은 탐욕에서 나온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여야 한다. 주기도문의 대부분은 하나님의 나라와 뜻을 위하여, 용서를 위하여, 시험에 들지 않기 위하여, 모든 악으로부터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라 하였다. 기도는 이 땅에서 인간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거룩한 성도로 흔들림 없이 서기 위해서 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다른 많은 종교들의 기도와 기독교의 기도가 구별되어 지는 것이다.
4. 사단의 속삭임
여기에서 세상 사람들이 복을 비는 기복과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복신앙이 전적으로 다른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단순히 요행으로 복을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기복신앙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기복을 행한다는 사실에 그 위험성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인 능력으로 이 세상에서 형통과 평안을 구하고, 부귀영화를 취하는 신앙이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사단으로부터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그 첫째는 40일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굶주린 예수께 사단이 "네가 말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4:3)는 것이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능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많은 굶주린 백성에게 배부름을 주어라는 것이다. 아마 이렇게 하게 되면 굶주린 백성들이 구름 때처럼 몰려오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인간의 삶이 물질적 풍요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통해서 만이 참된 행복과 평안을 얻게 됨을 말씀하셨다. 탐욕에 굶주린 자가 아니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자가 참으로 복이 있는 자이다.
둘째는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고 명한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와 능력으로 성전의 가장 높은 곳에서 초자연적인 기적과 능력으로 모험적인 믿음의 행위를 하라고 주문한다. 그것이 가장 거룩하고, 가장 정상의 믿음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까지 인용하면서 속삭인다. 그때 예수께서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마4:7)고 말씀하셨다. 참된 성도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며, 헛된 모험적인 믿음과 기적으로 사람을 현혹하지 않는다. 한국교회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믿음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시험하고 있는가? 많은 이단의 무리들이 이러한 성향을 뛰고 있다. 이러한 교인들은 자기 교회와 목사가 가장 능력이 있고 신령한 것처럼 선전한다. 참된 성도는 안목의 정욕과 교만에 빠지지 않은 어린아이 같은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
셋째는 마귀는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장담한다.
얼마나 많은 주의 종들이 세상의 권세와 부귀영화를 잡으려고 공중권세 잡은 마귀에게 엎드려 절하고 있는가?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의 저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로마 교황 교회는 이미 이 부분에서 사단에게 엎드려 절하였다고 개탄하고 있다. 로마교황 교회뿐이겠는가?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이 이 허황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가? 이 땅에서 부귀영화와 영광을 취하려는 교권주의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며 섬기는 자로 내려가야 할 것이다. 로마교황 교회의 구조적 모순이 오늘날 개신교에서 또 다른 기형으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의 교단과 교파의 분열은 저마다 머리되려는 자가 많은 연고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목회자들이 왜 그렇게 교회를 대형화하려고 하는지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교황적 권위를 바라는 자들은 그 생각을 버려야 할 것이다.
얼마전 한 형제가 나의 사무실로 찾아와서 시 연합 부흥회에 가서 강사 목사로부터 받은 충격적인 말을 전하여 주었다. 강사는 교육관 몇 개 짓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며, 자기가 원하면 교인들이 전세금을 빼서라고 교회에 갖다 바치니까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형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좋은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세계최고의 교회건물을 지었다는 말을 들으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교인들의 전세금이 한 목사의 자기과시를 위해 사용되었는지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거대한 건물을 세우고 바른 방향으로 나아간 적이 한번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나는 목회현장에서 교회성장이라는 족쇄에 매여 신음하는 목회자들을 많이 보았다. 교회성장이 목회자의 영적 능력을 가늠하는 잣대로 사용되는 현실에서 교회성장에 대한 스트레스와 방법론을 찾다가 지쳐 스러져 가는 목회자들을 보았다. 이러한 추세에 편성하여 교회개척 일 이년에 수 백, 수 천명의 교인들을 모았다고 선전하는 교회들도 간혹 있다. 물론 목 좋은 곳에 자리잡아 이동교인들이 그렇게 모이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교회들로 인하여 수십, 수 백개의 작은 교회들이 희생을 당하는 것을 목격하였다. 보편적 교회의 화목을 위해서 치명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형교회들은 점점 더 개교회주의화 하고 있다. 목회자가 온전한 자 일진데, 나와 같은 교인 두 사람만 제자를 삼아도 하나님의 나라는 2배 성장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옥토에 떨어진 씨앗은 100배, 60배, 30배의 결실을 한다고 말씀하셨다. 목회자가 일평생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100명의 옥토와 같은 사람을 제자로 삼는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100배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작다고 하겠는가? 무조건 모인 사람의 머리 수만 따진다면 교회에 사람 많이 모인 것과 축구장에 사람 많이 모인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사람은 외모로 판단하지만 주님께서는 중심을 보시는 분이시다. 이제 한국교회는 스스로 현혹시키는 숫자 노름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교회를 세속화하는 것이다.
인류의 어머니 하와는 간교한 마귀의 속삭임에 현혹되어 그만 금단의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이 이야기는 인류역사의 가장 비극적이고 참담한 사건이다. 그러나 오늘날 얼마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금단의 열매를 바라보면 황홀해 하고 있는지 생각하면 가슴 아픈 일이다. 바라보지 말아야 할 것을, 심지어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유심히 들여야 보고 있을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3:5)라고 한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태초의 인간을 미혹한 마귀는 동일한 약속으로 그리스도를 미혹하였고, 지금도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이 세상에서 하나님 같이 되는 영광을 취할 것을 속삭이고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자녀의 능력과 권세로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취하라고 속삭이고 있다. 성도는 마귀가 제시하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담대하게 물리치고, 섬김과 희생의 삶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금단의 열매를 범하게 한 간교한 사단의 속삭임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그 이상의 것을 취하고 누릴 것을 재촉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복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겸손과 섬김과 거룩한 순종과 청결한 삶이다.
한국교회에 불고 있는 기복신앙은 마귀의 속삭임이다. 모든 타락의 원인이 바로 거기에 있다. 기복신앙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순전하고 신령한 말씀을 사모하며(벤전2:2), 하나님을 시험하는 모험적 믿음과 기적을 제하며(신비주의), 섬김과 희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할 때 마귀의 미혹은 사라지고 성령의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새로운 부흥이 싹트게 될 것이다.
나의 기도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늘 감사케 하옵소서.
내 자신을 비우고, 낮아지게 하옵소서
사악한 욕망을 버리게 하시고 성령으로 열매 맺게 하소서.
주여, 주의 인자와 긍휼 베푸소서.
아멘.
김진오 목사/https://blog.daum.net/leedooseon/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