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진 3거봉
==========================
송준길, 송시열, 송규렴에 대해 다양한 호칭이 있다. 송준길, 송시열은 문묘 배향 명현이다. 송시열, 송준길은 충청도 유림 오현[송시열, *송준길, 윤선거, 이유태, 유계]의 칭이 있다. 송시열, 송준길, 송규렴은 3송의 칭이 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13촌 숙질간[준길이 숙]이다. 두 사람의 조부가 다같이 이윤경의 딸을 아내로 맞아 동서가 되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진외가 쪽으로 재종간이다. 나이 한살 위인 송준길을 송시열은 13촌 숙으로가 아니고 재종형으로 늘 [춘형]이라 불렀다.
송준길은 송이창의 아들이다. 송이창은 신응시, 김계휘에게 배우고 이이, 송익필, 서기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회덕에서 김장생, 송갑조, 이시직 등과 시주를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이시직은 이석형의 6대손으로 조호익, 김장생의 문인이다.
송준길은 서울 정릉동에서 세 살 때 회덕 송촌으로 아버지 따라 내려왔다. 9세에 아버지의 지도를 받아 성리학에 입문하고 공자, 주자, 율곡의 학문을 공부했다. 18세에 사계 김장생의 문인이 되었다. 사계는 " 송준길은 자라 반드시 예가의 종장이 될 것이다."고 칭찬하였다. 조선조에서 예학의 쌍벽으로 김장생과 정경세를 꼽았다. 송준길은 이 영남 학파 예학의 대가 우복 정경세의 딸과 혼인했다. 김장생 못지 않게 우복에게 많은 영향을 받은 송준길이 우복이 죽자 사제의 복을 입었다. 사계가 별세하자 그 아들 신독제 김집에게 배웠다.
조선을 대표하는 성리학자, 예학자이며 대사헌 병조판서 등을 지냈다. 청서파의 집권을 도왔다.
김집, 송시열, 윤선거 등과 강독하고 토론하며 학문에 정진했다. 67세로 서거, 회덕 숭덕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문하에서 민유중, 황세정, 남구만 등이 배출되었다.
송준길의 명민함은 유별하며 글씨를 잘 썼다. 당대 선배 명필 이시직이 일찌기 말하기를 "네가 이미 나보다 낫다."고 경탄했다.
송시열은 송갑조의 아들이다. 송갑조는 최립의 문인이다. 송시열은 근면, 검소, 정직을 일생의 지표로 삼고 예를 실천했으며, 사회 풍속의 교화에 힘쓰고,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사계 문인으로 조광조, 이이, 김장생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의 학통을 이어받은 조선 중기의 거유이다. 문장이 강건하고 힘이 넘쳤다. 독선적이고 강직한 성품을 갖고 있으며 공자, 주자에 이어 송자라는 칭을 들었다.
속리산이 낳은 화양동 계곡은 금강산 남쪽에서 으뜸가는 산수의 주인으로 뭇 사람의 사랑을 받고 있다. 속리산 속에서 10리를 뻗은 화양천 맑은 물이 구비치고 훤칠한 바위와 층층의 소나무들이 화양9곡의 풍경을 아름답게 장식하고 있다. 금가루 모래와 기암괴석 사이로 물줄기가 흐르는 가운데 송시열의 서재와 별장이 그곳에 있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보내준 명나라 신종, 명나라 마지막 황제 의종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하던 사당도 있다. 우암 말년[1693년 건립]에 세운 강당,고봉산에서 흘러내리는 개천가에 자리잡은 남간정사는, 우암 사후 제자들이 우암의 저술을 모아 [송자대전]을 판각, 간행했으며 1697년 송시열, 송상민, 권상하의 위패를 모신 남간사를 건립했다. 대전 광역시 동구 소제동에 있던 우암 별당 기국정을 1926년 남간정사에 옮겼다. 대전시는 남간정사 옆에 우암사적 공원을 조성하여 공원 안에 남간사를 새로 지어 남간사의 위패 등을 모시고 있다. 장판각에 [송자대전] 목판이 보관되었다. 문인으로 이단하, 민정중, 권상하, 이여, 정호 등이 배출되었다.
송규렴은 파조 송남수의 증손이다. 우암 동춘 양 문하에서 공부했다. 19세 때 사마시에 합격하고 165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서천군수로 나가 치적을 크게 올렸다. 1667년 사간을 거쳐 집의에 올라 송시열, 송준길의 무죄를 상소하다가 파면당했다.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집권하자 공조참의, 대사간 등을 지냈다. 1699년 기로소에 들었으며 지중추부사, 우참찬, 예조판서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퇴하고 80세 때 지돈녕부사에 올랐다. 미호서원에 독향되었다. 송준길, 송시열과 함께 회덕향약을 지었다. 시호는 문희이다.
대제학
==============
송상기
새졸년; 1657년-1723년. 자는 옥여, 호는 옥오재이다. 송남수의 현손이며, 희원의 손자이고, 규렴의 아들이다. 우암 송시열의 문하에서 수업했다. 1684년 문과하여 검열을 거쳐 수찬이 되었다. 장희빈이 왕비가 되고 송시열, 김수항 등이 사약을 받고 죽자 통탄하며 두문불출, 고향에 은거하기를 6년이나 하였다. 감술옥사로 민비가 복위된 후 승지, 대사성,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지냈다. 1722년 신임사화 때 강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문장에 능하고 학식이 풍부했다. 시호는 문정이다. 노론의 중신이며 문하에서 김덕운이 배출되었다.
서원 배향
=========================
송방조, 송시영, 송갑조[송시열 집]
송국택, 송병화, 송병관[송국택 집]
송규렴, 송국헌[송상기 집]
송국택; 자는 택지, 호는 사우당이다. 송여림의 현손이며 양부는 송희명, 생부는 송몽인이다. 김장생의 문인이다. 1624년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 함길도 도사, 지평 등을 지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원손을 탈출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그뒤 형조, 공조, 예조의 참의를 거쳐 전주부윤에 올랐다. 회덕 정절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효정이다.
종묘 배향
==========
송시열
맺는 말
======================================
1,은진송씨 가문은 조선조 제일의 국립 중앙 예학 회덕 대학이라 할 수 있다.
--------------------------------------------------------------------------
은진송씨는 인산인해를 이룬 독실한 학자군을 거느리는 씨족이며, 제도권역내의 정치성이 비교적 얕은 호학 집단이며, 권력의 기반이나 체제를 갖추지 않은 노론 집권층의 종가이다.
은송은 조선조 제일의 국립 중앙 회덕 대학교이며, 인문사회 과학분야의 조선조 최대 석, 박사 집합체 대덕 연구 단지이고, 조선 왕실 교육 총괄 연구 기관으로 조선 임금 및 세자 세손 교육 전담 기구로 오늘의 대통령에게 경제, 외교, 통일 전반을 강론하는 대통령 자문 교수 집합체의 성격을 띈 조직이다.
3대 대제학과 6-7명의 대제학을 배출하여 학자로서 영광이 극에 달한 광김, 연리, 전리, 대서 등의 4대 최고 문형 가문과는 그 특성을 달리 하고 있다. 정상에 서지 않으면서 그 영향력이나 역할은 그들에 비해 결코 가볍다 할 수 없다. 그들의 화려함 대신 겸허함을 선택한 학자군이다.
3대 상신, 부자 상신, 형제 상신, 7대 판서에서 부자 판서 형제 판서 등의 벼슬을 자랑하는 문중 8강의 화려함을 멀리한 노론 집권층의 영수 가문의 탈권력욕 호학 가풍은 호방하고 영걸스럽다.
노론 100년 가문의 위세를 상징하는 회덕 은송 가문에는 상신 판서 대제학 대신에 독서성만 요란하고 손떼 묻은 장서들만 가득하다.
2, 군집성이 강한 군웅할거형 귀성이다.
--------------------------------------
한 씨족이 6-700년을 한 자리에서 계속 사는 것은 드문 일이다. 특히 정치와 사회의 격변이 일어나는 기호지방에서 자손이 전국 방방곡곡으로 뿔뿔이 흩어지지 않고 장구한 세월을 세거한 씨족은 더러 있기는 하나 은진송씨 같이 한 자리에서 빛을 발휘한 씨족은 유일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파조가 유명 인물일 경우 후손들이 하나로 잘 뭉친다. 파조의 무게가 가볍거나 현조가 아니면 구심점이 약화되어 가문의 단결력이 떨어진다. 파조는 분파의 제일 윗대 어른이며 가문의 영수요, 원로 문장이다. 은진 송씨는 파조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가문이다. 그런데 4-5대나 6-7대 내려 가면서 큰 인물이 계속 나와 가문이 번창하였다. 이런 가문은 춘추 전국시대 모양 군웅이 할거하는 형이다. 은송은 군웅할거형 가문이면서도 번창의 형세에 비해 손은 귀한 편이다.
3, 인물은 울긋불긋 복숭아밭 주렁주렁 과일형에 심산유곡 희귀삼밭 우뚝우뚝 산삼형이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과일 나무도 잎이 거의 다 떨어지고 한 두개 과일이 외롭게 달려있는 모습을 본다. 이것은 마치 몰락하는 양반 가문에 안간 힘을 쓰는 한 두명 남은 인물을 보는 느낌이다.
경술로 천거된 은진송씨의 많은 학자들은 마치 과일이 많이 달린 나무를 연상하게 된다. 무르익어 가는 봄! 울긋불긋한 복숭아밭에 주렁주렁 달린 과일을 보는 느낌이다.
4서6경에 정통하고 제자백가서를 두루 섭렵한 석학대덕들인 경연관이 회덕에서 쏟아져 나온 것을 보면 마치 울울창창 심산유곡에 산삼밭을 보는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