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이 천주교 친일행각의 책임자로 부각된 이 시기에 한국 천주교의 친일은 상당히 심각한 수준에 도달했다.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937년 7월 이후부터 1939년 5월까지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 보고된 친일행위의 건수는 아래와 같다. "천주교계의 부일협력 행위는 시국 관련 미사 2만 9622회, 시국 관련 기도회 5만 5452회, 국방헌금 3624원 23전, 위문금 932원, 병기헌납 보조금 422원, 위문대 691개, 시국강연회 및 좌담회 1만 1592회, 출정 장병 가족 위문 1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 각종 행사 165회에 이르렀다."
1938년에 서울 편창제사방직주식회사 노동자는 월 3원 내지 7원(식사는 회사가 제공)을 받았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위 금액 합계인 4978원 23전은 대략적으로 노동자 700명에서 1700명의 월급에 맞먹었다.
성금도 성금이지만 그 기간에 벌어진 친일 행사의 횟수가 무척 많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1939년 5월 이후의 친일까지 계산에 넣게 되면 천주교의 친일이 상당히 심각했다는 판단에 도달하게 된다.
장면의 친일은 한국 천주교의 친일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그래서 장면 개인에 대한 비판을 떠나, 한국 천주교의 일제강점기 행적을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장면의 친일은 정확히 알려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