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는 사람이 살고 있었네(2)
-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 관극기
강의를 하고 있는데 극단 <공연예술 전위>의 대표이며 상임 연출자인 전승환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오늘(11월 21일)부터 나흘간 시민회관 소극장에서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공연하는데 한 번 오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강의 끝나는 대로 달려갈 참이었다. 부산 연극계에서는 이런 소문이 있다.
"김문홍 선생이 요즘 공연장에 얼굴을 잘 보이지 않는데 어디 아픈 거냐?"
공연 때마다 극장을 찾는데 내가 갑자기 얼굴을 보이지 않으니 뭔가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평소에 부산지역 극단의 공연을 거의 빠지지 않고 보는 편이다. 일년에 줄잡아 60편 정도의 연극 공연을 관람하는 편이다. 그렇다고 매 작품마다 다 공연평을 쓰지는 않는다. 뭔가 가슴에 와 닿는 것이 있어야 평을 쓴다. 연극은 영화와는 달리 사회적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보는이(관객)의 의식과 생각을 변화시키고 심지어는 행동까지 변화시키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를 연극의 사회적 기능이라고 한다. 이는 문학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회적 메시지가 없다면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를 통해 보는이의 심금을 울리는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보고 나서도 아무런 감흥이나 여운이 남지 않는 연극은 공연 비평을 쓰지 않는 편이다.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마지막 장면>
< 연극 '세일즈맨의 죽음'의 포스터 문안>
<세일즈맨의 죽음>은 미국의 극작가 아서 밀러(1915-2005)의 대표작이다. 이 작품은 그가 1948년에 탈고하여 이듬해인 1949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되어 그해 퓰리쳐 상과 뉴욕 연극비평가상을 안겨 준 바가 있다, 그 이후로 이 작품은 세계 곳곳에서 공연되는 '현대의 고전' 으로 지금까지 널리 사랑받고 있다. 미국의 1세대 극작가를 유진 오닐이라고 한다면 아서 밀러와 테네시 윌리암스는 그 뒤를 잇는 2세대 극작가이다. 우리에게는 여배우 마릴린 먼로와 결혼(1956년)한 남자로 더 알려져 있다,
주인공 윌리 로먼은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있는 가장이다. 그는 34년 간이나 구두 와판원으로 미국의 각 지역을 떠돌아 다녔지만 어느 날 갑자기 파면된다, 거기다 항상 믿고 있던 큰 아들 비프 로먼마저 직장을 잡지 못해 실망만을 안겨 준다. 결국 그는 보험료를 타내기 위해 스스로 자동차 사고를 가장하여 목숨을 끊는다. 아내인 린다 로먼은 이제 주택 할부금마저 다 끝났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무모한 짓을 했느냐며 오열한다. 결국 그는 윤흥길의 소설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처럼 현대문명과 자본주의 사회가 마음껏 부려 먹다 결국은 쓸모가 없어 폐기처분되어 버린다. 이 시대의 쓸쓸한 가장의 자화상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한 여운을 남긴다. 집안의 조그만 텃밭에 씨앗을 심는 것이 큰 희망이라던 윌리 로먼은 결국 종이처럼 구겨져 내버려지게 된다.
<륄리 로먼 역을 맡은 원로배우 전승환 선생이 스스로 분장을 하고 있다.>
<윌리 로먼의 부인인 린다 로먼 역을 맡은 여배우 이민영이 스스로 분장을 하고 있다>
오후 6시 30분. 공연 1시간 전이다. 배우와 스탭 들은 이 때가 매우 바쁘다. 배우들은 분장을 하고, 자신의 소품과 의상을 챙기느라 눈코 뜰 새가 없다. 더러는 대본을 펼쳐 놓고 아직 잘 와워지지 않는 부분을 암송하며 외우기도 한다, 스탭들은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최종 점검을 한다. 조명 오퍼레이터는 조명 디자인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음향 오퍼레이터는 음향 디자인을 꼼꼼하게 살피며 다시 한 번 조명기기와 음향기기를 조작하기도 한다, 주인공은 윌리 로먼 역을 맡은 배우 전성환은 올해 나이가 일흔 둘이다. 50여 년을 한결같이 연극만을 해온 셈이다. 극단의 상임 연출자이며 대표인 전승환의 실형이기도 하다. 한국동란 때 이북 원산에서 피난을 와 부산에 눌러 앉아 버렸다. 현재는 영화와 텔레비전 드라마에도 심심찮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대사의 발성이 아주 정확하고 섬세하며 전달력이 강하다. 부인 린다 로먼 역을 맡은 여배우 이민영은 올해 나아기 사십 초반인데도 아직까지 미혼인 채로 연극과 영화, 그리고 텔레비전 드라마에 부지런히 쫓아 다니고 있다, 술 솜씨가 남자들 뺨칠 정도로 가히 수준급이지만 마음은 그와는 달리 아주 여리고 곱고 착하다.
<막이 내려진 채로 관객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적요와 긴장 속의 무대>
<시민화관 소극장의 텅 빈 객석도 어딘가 모르게 긴장감이 돌고 있다.>
<배우 대기실 겸 분장실에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 화면에 무대가 보인다.>
막이 내려져 있는 무대.
요즈음은 극장에 들어가면 무대에 막이 내려져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무대를 환히 볼 수가 있다, 관객들은 무대를 바라보면서 잔뜩 호기심과 기대감을 가지고 나름대로 상상을 해 볼 것이다. 이처럼 관객들에게 호기심을 주고 상상력을 유발할 수 있는 무대가 '좋은 무대'이다. 그렇지 않은 무대 정치는 그저 물리적인 구조물에 불과할 뿐이다. 보통 무대는 좌, 우, 그리고 후면은 막혀 있고 관객석을 향한 쪽만 뚫려 있다. 이런 무대를 '프로시니엄 무대'라고 부르는데, 사실주의극(리얼리즘극)을 공연하는 전형적인 무대가 바로 프로시니엄 무대이다. 사실주의극이란 19세기 후반에 생긴 연극 양식으로 흔히들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입센을 사실주의극(근대극)의 아버지라고 일컫는다. 사실주의극은 우리의 일상이나 현실을 그대로 모방하여 무대 위에 재현하는 양식의 극이다. 그래서 무대장치 역시 현실 속의 모습과 그대로 닮았으며, 배우들의 연기나 대사, 의상 역시 우리들의 일상, 대사, 움직임과 그대로 닮아 있다. 오늘 공연하는 <세일즈맨의 죽음> 역시 사실주의극이다.
<세일즈맨의 부인 린다 로먼이 남편의 무덤 앞에서 독백을 하고 있는 마지막 장면>
<공연이 끝나고 출연 배우들이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커튼콜의 모습>
드디어 공연이 끝났다.
러닝 타임(공연시간)이 2시간 20분이다. 배우들은 커튼콜이 끝나면 분장실로 돌아가 분장을 지운다. 즉, 역할 속의 인물에서 현실의 배우로 다시 돌아오는 것이다. 이처럼 공연 중에는 배우들이 현실 속의 자신을 잊은 채 역할 속의 인물에 들어가 연기를 하게 된다. 이를 몰입 혹은 감정이입이라고 한다. 이렇게 배우나 관객이 현실 속의 자신을 잊은 채 극속에 몰업히여 자신도 극속의 인물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극적환상'(dramatic illusion)이라고 한다.
공연장을 나온 배우들은 근처의 식당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오늘 공연을 반성하게 된다. 그래서 내일 공연에서는 그러한 실수가 다시 되풀이 되지 않기를 결심한다, 오늘 공연은 배우들이 긴장하여 원래 공연 시간보다 10분 정도를 초과했다고 한다. 이제 배우들은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공연을 끝내고 돌아가는 배우들의 뒷모습은 무척 쓸쓸하다.그래서 세계 5대 연출가로 꼽히는 영국의 연출가 피터 브룩은 이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연극은 한 번 공연하고 나면 사라져 버리는 허망한 예술이다. 그런데도 배우들은 다시 또 연극을 하기 위해 부나비처럼 연극 속으로 몰려든다. 왜 그럴까? 거기에는 뭔가 불가사의한 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두 시간 정도의 공연을 보여 주기 위해 거의 60여 일을 피땀 흘려 연습했던가?
며칠 정도의 공연을 하기 위해 이렇게 먼 길을 달려 왔던가?
그리고 마지막 날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나면 연극은 허망하게 사라져 버린다.
그래도 막은 오른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앞에서 배우들을 기다리고 있는 연출자(좌)와 드라마트루거(우)>
<공연이 끝나고 남자 분장실에서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분장을 지우고 옷을 갈아입고 있다.>
영화는 연출(감독)의 예술이지만 연극은 흔히 배우의 예술이라고들 한다.
즉, 연극의 핵심과 주체는 배우이다. 누가 그러지 않던가. 연극의 역서는 곧 배우의 역사라고. 연극의 역사는 이처럼 배우와 관객의 상호 교류의 역사라고 말이다. 그런데 연극배우의 현실은 너무나 궁색하고 가혹하다. 현재 부산지역에서 일급 배우라고 해봤자 한 번 출연하면 출연료(개런티)가 백만원 남짓이다. 연슴과 공연을 함쳐서 두 달 정도를 잡으면 한 달에 50만 원 정도인 셈이다. 일년에 네 번 정도 출연하면 많이 하는 편인데 그래 보았자 총 수입이 4백 만원이다. 월 평균 40만도 되지 않는다. 그래서 배우들은 보통 시간제 아르바이트나 직장에서 임시직으로 일한다. 그래서 요즈음은 연출자는 출연 배우들의 스케줄을 고려하요 연습 일정을 짜야 한다. 그래서 신인 배우들은 서울의 대학로로 진출하는데, 거기는 이미 전국에서 꿈 많은 배우들이 상경하여 포화 상태이다. 지금 영화에 한창 뜨고 있는 배우 김윤석이나 이재용, 그리고 서울 연극계에서 최고 대접을 받고 있는 박지일 같은 배우는 부산 출신의 연극배우로서 아주 드물게 성공한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여배우 길수경이 카메라를 들이대자 귀엽게 포즈를 잡고 있다.>
<세일즈맨의 연극 대본이 의자 위에 놓여져 있다>
<객석 쪽에서 바라본 무대 모습. 거실이 있고 그 위는 아들 둘이 기거하는 2층 방.
거실 앞은 마당이나 길거리로 설정되어 있다. 왼쪽 침대는 부부의 침실>
세일즈맨의 부인 린다 로먼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 대사는 바로 이 연극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 연극은 번역자의 해설처럼 "...개인의 꿈과 희망이 현실과 조화하지 못하고 뒤틀리다가 사라져 가는 과정을 누구나 공감할 수 있게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일"(강유나) 것이다. 이 작품이 반세기 동안 꾸준히 시공을 초월한 인기를 누리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린다 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라고는 하지 않겠다. 윌리 로먼은 엄청나게 돈을 번 적도 없어.
신문에 이름이 실린 적도 없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인품을 가진 것도 아니야.
그렇지만 그이는 한 인간이야. 그리고 무언가 무서운 일이 그이에게 일어나고 있어.
그러니 관심을 기울여 주어야 해. 늙은 개처럼 무덤 속으로 굴러 떨어지는 일이 있
어서는 안 돼. 이런 사람에게도 관심이, 관심이 필요하다고. (2011년 11월 22일)
<주인공 윌리 로먼 역을 맡은 부산의 원로배우 전성환의 등장을 기다리고 있는 후배 배우들의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