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상우도(낙동강 서쪽)의 단성, 함양, 거창, 성주, 선산, 상주, 개령과 좌도의 울산, 군위, 비안, 인동 등 고을에서는 무리를 지어 일어나 소동을 일으켰는데 수령을 포위하고 조세를 줄여줄 것을 강제로 요구하거나 향리들을 쫓아내고 환곡 장부를 뺏아버렸다. 심한 경우에는 사람을 죽이고 불을 지르는가 하면 집을 부수고 재물을 훔쳐갔다. 이곳저곳으로 쏘다니면서 조금도 거리끼지 않았다. 이는 도적들이 아무렇게나 무리를 지어 일어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들을 탄압하고 진정시키는 것은 감사하기에 달려있으며, 죄의 무거움을 따져 개령 민란과 같은 일은 왕에게 보고하게 되었다. |
이번의 민란은 비록 전에 없는 난이었지만 원래 민심이야 어찌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겠느냐? 조정의 영이 여러 번 내렸으나 백성이 그것을 자세히 알지 못하여 처음에는 등소를 올릴 의논을 하다가 갑자기 거세게 일어났던 것이다. 이는 무지와 분별없음에서 나온 일이라 우리 성상께오서는 항상 백성을 근심하시고 전국의 쇠잔함과 삼정의 문란을 애통해 하셨다. 이에 대신들에게 명하여 이정청을 설치하셨다. |
해설 1862년 농민 항쟁은 거의 전국적으로 발생하였으나 지역적으로 구분한다면 하삼도에 집중되었다. 대개 지역 단위의 향회-등소-봉기-해산의 순서로 진행되어 고립적인 항쟁과 진압이 되풀이되었다. 그러나 전라도의 함평에서는 구체적인 개혁 요구 조건을 제시하기도 하였으며, 충청도 공주에서는 타지방 출신 사람들과 이서가 주모자로 참가하였고, 은진에서는 전라도 여산부를 공격하는 등 발전적 양상을 보여주었다. 또한 제주나 경남 개령에서는 읍권을 민중이 장악하자고 부르짖기도 하였다. 여기서 1894년 농민 전쟁으로의 발전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 철종 13년(1862)에 전국적인 농민 항쟁이 전개되고 수령, 이서에 대한 공격은 물론 항쟁의 양상이 치열해지자, 봉건 정부는 초기의 무력 진압의 방침을 철회하고 민란의 원인이 삼정 문란임을 인정하게 된다. 사태 수습과 회유책의 일환으로 전국의 양반 지식인들에게 삼정을 바로잡을 방안을 올리게 하여 이를 토대로 삼정 이정책을 강구하려 하였다. 조정에서는 봉건적 지배 질서를 유지하는 대민 유화책의 일환으로 삼정 이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실제로 삼정 이정청이 설치된 시기에는 회유책에 대한 기대 때문인지 농민 항쟁이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농민 항쟁이 잠잠해지자, 봉건 정부는 곧 바로 삼정 이정청을 폐지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