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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녀 쉼터를 만들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된 어린 청소녀들을 보호하고 선도하는 일에 헌신하시던 OOO 목사님께서 지난 4월, 서울연회에서 은퇴하셨습니다. 고상하고 편안한 삶을 즐기며 살아갈 수도 있었겠지만, 오랜 기간을 비행청소녀 상담가로 봉사하시던 이분은, 50대에 접어들어 쉼터를 마련하고, 거리의 청소녀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일주일에 며칠을 청소녀들과 함께 지내며 엄마 역할을 해야 했기에, 남편과 두 아들을 둔 주부로서 쉽지 않은 사역이었지만, 대학교수인 남편과, 잘 자라 직장인이 된 두 아들은 그분의 빈자리를 묵묵히 감수할 뿐 아니라 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든든한 후원자였습니다. 부모들의 무관심과 학대, 심지어 성폭행을 포함한 친아버지의 물리적인 폭력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뛰쳐나온 아이들입니다. 목사님은 그런 아이들과 함께 음식을 만들어 먹고, 필요한 경우에는 정신과나 산부인과 등, 병원을 데리고 다니며 진료를 받게 하고, 학교에서 말썽을 일으키면 학교에 찾아가서 선생님들께 빌며 계속해서 학교를 다닐 수 있도록 사정을 하고, 아이들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꿈을 찾고 그 꿈을 이루어갈 수 있도록 재능 교육을 시켜주었습니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며 성장한 아이들은 고등학교를 마치고 여러 아이들이 대학에 진학하거나 취업을 하고 독립하여, 때때로 이 쉼터를 찾아오곤 합니다. 불우한 환경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학대를 받고 가정 폭력에 시달리며 사회의 그늘에서 살아가던 소녀들이, 부모를 대신한 누군가의 사랑과 헌신을 힘입어 반듯하게 일어나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것을 볼 때, 사랑의 힘은 정말 위대하다는 사실을 느끼게 됩니다.
김 목사님 은퇴후에 이 사역을 이어가실 분은 OOO 목사님이십니다. 이분은 우리 교회 초기 멤버였던 전혜만 장로의 부인이십니다. 전혜만 장로님은 저와 함께 우리교회 어린이 교회학교 교사로도 봉사하였는데, 대학 졸업후 부천에서 개업을 하게 되어 부천제일 교회로 출석하게 된 분입니다. 장로님과 가족들의 이해와 협력이 없다면 목사님이 이러한 시설을 맡아 봉사하기란 불가능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13년 전, 이 쉼터가 문을 열 때부터 해마다 몇 차례씩 방문도 하고 지금까지 후원을 계속해 왔는데, 수고하신 OOO 목사님 은퇴 후에 편안한 노후가 되시기를, 그리고 새로 오신 OOO 목사님이 그 힘든 사역을 잘 감당하실 수 있도록, 교우들의 더 많은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인간은 관계 속에서 태어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입니다. 부부관계, 자녀와의 관계, 친구 관계,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들과의 관계, 이웃관계 등, 수많은 관계 속에 살아갑니다. 그 관계를 잘 맺고 유지하며 성숙시켜 나가는 것이 행복의 비결입니다. 부부관계도 그렇고 가족관계도 그렇습니다. 가족관계에서 실패하면 아무리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코 인생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관계에 앞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그분의 피조물입니다. 피조물로서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지켜나가며, 더욱 친밀하고 성숙한 관계를 유지해 나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의 비결입니다.
우리의 가정은 끊임없이 사탄의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가정을 끊임없이 흔들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시험하는 사탄의 공식이 하나 있습니다. 사탄은 먼저 우리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라, 네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선택하고, 너 스스로가 주인 되어 살아가라’고 부추깁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선악과를 따 먹은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나님은 명하셨지만, 보기에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명령을 어김으로 하나님의 뜻에서 빗나가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사탄의 계략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지고 나니, 이제는 부부의 관계도 어긋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가장 친밀한 관계여야 할 부부 사이에, 서로 옷을 만들어 입고 자신을 감추기 시작하였습니다. 드러내지 못할 부끄러운 부분들을 서로에게 감추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책임은 배우자에게 미루며 서로를 비난하고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왜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하나님이 물으시자, ‘당신이 내게 준 저 여자가 주어서 먹었다’고 핑계를 댑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아냉에게 돌리고, 하나님께로 돌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탄은 우리로 하여금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빗나가게 만들고, 그 다음에 인간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부부의 관계가 빗나가기 시작하면 그런 가정 안에서 형제들의 관계도 깨어집니다. 형제가 서로 시기하고, 형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하는 형제 살인으로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한 가정이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발단은 이렇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똑같이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가인과 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과 그의 제사만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제물만 받으시는 것이 아니라, 그 제물을 드리는 예배자의 인격을 또한 살피십니다. 가인은 받지 않으시고, 아벨만 받으신 것입니다. 예배자로 살아가는 우리의 몸, 우리의 삶, 우리의 인격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의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먼저 자신을 살펴야 하는데, 자신을 실핀 것이 아니라 동생을 시기하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가인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 나가 에덴 동편 놋 땅에 거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아담과 하와의 가정을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아벨이 죽고 가인이 떠나간 아담의 가정에 새로운 자녀 셋을 허락하셨습니다. 그리고 셋도 가정을 이루고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에노스입니다.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셋의 가정,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기 위하여 허락하신 이 가정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가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섬기는 가정이었던 것입니다. 진정한 가정의 회복은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먼저 하나님과 내가 온전한 관계 안에 있을 때 우리는 인간관계에서 성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크리스챤 가정생활에 있어서 가족관계에 대하여 권면하고 있습니다. 먼저, 아내에게 말씀합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해야 할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것이 주 안에서 마땅한 일이기 때문에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것이 마땅하다는 것인지 설명해 주었으면 좋았겠지만, 바울은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남편들은 ‘나의 아내가 이 말씀을 평생동안 가슴에 품고 살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내들은 가만히 있는데, 남편들이 이 말씀에 은혜를 받아서 아내로 하여금 자신에게 복종할 것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맞지 않습니다. 아내들에게 주신 말씀이니 이 말씀은 아내들이 가슴에 담을 일입니다. 복종은 노예의 덕목으로 사람들은 이해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은 힘이 없으니 억압을 당하고 노예처럼 굴종을 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에베소서에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엡5:21). 그리스도를 경외한다면 남편과 아내가 서로서로 존중하고 복종하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남편들이 가슴에 담아야 할 말씀은 이것입니다.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고 괴롭게 하지 말라’. 어떻게 사랑하라는 말은 없고, 단지 괴롭게 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모질게 대해서는 안된다’고 번역한 우리말 성경도 있습니다. 그러나 에베소에 보낸 편지에 보면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고 말씀하였습니다. 교회를 사랑하셔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생명 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 것처럼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하되 목숨 걸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아내가 무엇으로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는지 살펴야 하고, 아내가 괴로워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아내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 남편의 의무입니다.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열 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두 개의 돌판 중 한 개에는 하나님에 관한 계명이 적혀져 있었습니다. ‘나 이외 다른 신을 네게 두지 말라, 나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 내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길 것인가’ 하는 질문제에 대한 대답입니다.
또 하나의 돌 판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계명이 적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인간관계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계명들입니다. ‘부모를 공경하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덕질하지 말라,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 거짓 증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정직해야 하고, 도덕적으로나 성적(性的)으로 순결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관계의 계명 가운데 첫째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인간관계에 있어서 첫번째로 요구되는 것이 바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부모 공경이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의 첫 번째에 나오는 걸까요?
부모 공경의 문제는 단순한 인륜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이 있다면 생명입니다. 생명의 근원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생명을 이 땅에 보내실 때 누구를 통해 보내셨습니까?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은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나게 하시고, 가정을 이루게 하십니다. 이루어진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들을 이 땅에 보내십니다. 부모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의 생명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모는 하나님의 생명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입니다. 내 생명에 있어서 하나님의 동역자인 부모님께 공경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관계에 관한 계명 중에서는 가장 먼저 부모 공경이 강조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순종하면 물론 부모님이 기뻐하시겠지만, 하나님이 먼저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를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그를 축복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부모된 이들에게 주시는 말씀도 있습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낙심할까 함이라’고 그 이유를 말씀합니다. 자녀들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가능성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뜻이 있고 기대하심이 있습니다. 그 꿈과 기대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일러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내가 일생 동안 어떻게 살고, 무엇을 위해 헌신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아갈 것인지, 내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그 뜻 안에서 자신의 인생을 설계하고, 힘써 주님을 의지하며 기도하며 나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의 자녀들을 통하여 마음껏 역사하시고 우리 자녀들의 삶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우리 자녀들이 자신감과 용기와 신앙을 가지고 그와 같은 삶을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양육하고 도와주는 것이 부모의 사명입니다.
그런데 때때로 우리 부모들이 가끔씩 자녀를 낙심시키고 마음에 상처를 주게 되는 것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부모의 욕심 때문에, 혹은 나의 모자라는 인간성 때문에, 원치 않지만 자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자녀를 낙심시키기도 하게 됩니다. 세상에 하기 힘든 일이 부모 노릇이라고 하는 고백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칼 게바우어라고 하는 독일 사람이 쓴 책으로 우리 말로 <아버지로 산다는 것>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에 보면, 우리 시대 아버지 16명의 이야기가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16명의 아버지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들은 서로가 다른 모습입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어떤 희생이나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던 헌신적인 아버지를 떠올리며 존경한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폭력을 휘두르던 무서운 아버지를 떠올리거나, 자식을 사랑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랑을 표현하는 법에는 너무나 인색하고 미숙하였던 아버지로 기억하기도 합니다. 그의 기억에 아버지가 아예 없었던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한결같습니다. 이전의 아버지 세대와는 다른, 새로운 모습의 아버지가 되고자 애를 쓴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주고 아이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노력합니다. 그러나 좋은 아버지가 된다고 하는 것이 너무나 힘이 듭니다. 자신의 경험들이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현실적인 삶이 발목을 잡기도 합니다.
어찌 아버지들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이 시대의 엄마 노릇도 마찬가지입니다. 백소영 교수가 여러 해 전에 쓴 <엄마되기, 아프거나 미치거나>라는 제목의 책이 있습니다. 이 시대에 엄마가 되고 엄마 노릇을 한다는 것이 여성들로 하여금 아프거나 미치게 한다는, 다소 충격적인 제목의 책입니다. 이 책에 보면 엄마들의 모습을 몇 가지 유형으로 정리해서 보여줍니다. 어떤 엄마는 엄마로서 자녀들을 제대로 양육하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에 젖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이 실수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비하합니다. 아니면 무한한 책임감을 가지고 아이들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자 애를 씁니다. 최근에 화제가 되었던 어떤 드라마에서, 수험생 딸을 어떻게 해서든지 서울대 의대에 보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떤 엄마는 이렇게 말합니다. “예서야, 나는 네 인생 절대 포기 못해”. 아이의 행복을 위하여라면 엄마인 나는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너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라면 나는 지옥에라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크리스챤으로서 우리는 고민이 많습니다. 부모 노릇하기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부모로서의 역할에 있어서 부족하고 모자라다고 하는 죄책감에 젖어서 살아갑니다. 좋은 엄마가 되고 좋은 아빠가 되는 법을 공부도 하고 강의도 듣지만, 그러나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부모로서의 욕심이 아니라, 진정 자녀들의 행복을 위해서 아이들을 경쟁 속에 밀어 넣고 또한,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다그칩니다. 가장 소중한 다른 것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을 우선 순위에서 뒤로 미루어 둡니다. 그래서 자녀들에게 미안합니다. 그래도 우리 크리스챤 부모라면 적어도 자녀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기대하심을 인정하고, 그것이 무엇인지 아이가 깨달아 알도록 끊임없이 기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자긍심을 가지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가르치고 격려해 주어야 합니다.
어버이 주일에 우리는 다시 한 번 부모님의 사랑과 은혜를 기억합니다. 부모를 순종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신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또한 부모로서의 우리들의 사명을 기억하는 날이 바로 오늘 어버이 주일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회복됨으로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의 관계도 회복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충만한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