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초등학교 선생을 했었다고? 음.............. 놀라운 일이야!”
하 종식 교수와 연세대 생리학과 주임 교수인 강 두희 교수를 찾아 가자 나의
이력서를 보며 저으기 놀란다.
다시 대구로 내려온 나는 경북 대학교 주 영은 교수를 찾아가,
“교수님 연세대학에서 교수 공채를 해서 서류를 냈습니다.”
“황 선생이 연세대학교에?”
“네! ”가지마!“
“아직 가게 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오라해도 가지마!”
“.....................”
“황 선생 고생할거야! 텃새가 얼마나 심할 텐데.... 연구 강사에서 머물게 될
걸?” “기회가 주어지면 서울로 가고 싶습니다.”
“꿈도 꾸지마!” 순간 나는 섭섭한 생각이 들었지만 곧 이해 할 수 있었다.
‘나를 동생이나 아들처럼 사랑하시고 의지하셨는데 내가 떠나면 얼마나
서운하실까?’
사람들의 예상을 엎고 나는 서울로, 연세대학교로 발령 받았다.
서울로 떠나는 열차 안에서 온갖 생각에 빠졌다.
‘안강 농고 시절 하 월봉 선생님을 따라 집 위에 집이 있는 서울에 처음
왔었는데...,
대구 해안 초등학교 여자 핸드볼 팀 아이들은 다들 컷겠지?
내가 없으면 주 영은 교수님 사모님께서 걱정을 많이 하실 텐데.... 술을
좋아하시는 주 영은 교수님이 취하시면 누가 뒷바라지를 해줄까?......
멋쟁이 교수들 사이에서 나 같은 촌놈이 과연 배겨날까?‘ 등, 등의 추억과
걱정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동안 어느새 기차가 서울 역에 도착했다.
연세대학 의과대학은 교수 1명 당 조교를 한명씩 붙여주었다.
생리학과 전체에 조교가 한 명이나 두 명 뿐이었던 경북대학에 비할 때 사립대학이
다르기는 하였다.
“경기 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스탠포드 ... 서울 고등학교, 서울 대학교,
하버드대....” 교수들의 학력이 나의 눈을 튀어 나오게 한다. 거기에 비해 나는
어떤가?
“안강 농고에 대구 교대를 거쳐 대구 대학, 경북대학원이라니.... 외국 유학은커녕
서울에 있는 대학도 못나왔단 말아닌가? 주 영은 교수님 말씀대로 살아남기
힘들겠구나.....”
또한 일류 대학을 나와도 타 대학 졸업자는 버티기 힘들다 하지 않던가?
기분 나빠서, 따라가기 힘들어서, 학교 측에서 다른 학교로 보내기 때문 등의
이유로 2-3년이 지나면 학교를 나간다는데 나는 과연 몇 년이나 견딜 수 있을까?
그 순간 열차 안에서 만났던 하 종식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황 선생을 하나님이 그냥 두시지 않을 것이오!’
그렇다! 내 이력과 경력으로는 연세대학에 서류 낼 자격도 없다.
‘주어진 환경에 감사하며 최선을 다하자.’ 결심하자 마음이 편해진다.
나를 채용해준 강 두희 교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리려 전화를 드렸다.
“교수님 저 황 수관입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싶습니다.”
“마음은 고맙지만 남 보기에도 안 좋으니 우리 집은 오지 말게! 학교에서 인사하면
되지....”
결국 추석날이 되어서야 초라하게 꿀 한통을 들고 찾아 뵐 수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아파트다 빌라다 하며 이사 다니고 사모님들은 복부인이 되어 재산을
증식 시키는 동안 학교 근처의 작은 집에서 평생을 살아오신 것 하나만으로도 강
두희 선생님의 청렴 결백한 성품을 읽을 수가 있다.
차도 안 사시고 걸어 다니시니 다른 젊은 교수들이 자가용을 타고 교문을 들어 올
수없어 다들 걸어 다닌 덕분에 우리 의과대학 교수들은 더 건강을 지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회갑 때도 어디론가 가버리셔서 잔치도 못 해드렸는데 퇴임 때도 교수들이 정성으로
모은 돈을 과에 놓고 가버리시는 그 곧은 기개를 어디서 또 만날까?
나는 내가 존경하고 좋아하는 교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 기도를
해드리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강 두희 교수님이 학장에 출마하셨다.
집에 돌아와 자려다가 벌떡 일어나 옷을 입고 나가면 아내가 놀라,
“당신 이 밤에 어디 가시는 거예요?”
“강 두희 교수님을 위해 기도하러 교회에 가는 길이야!”
“정말 당신이란 사람은 특이한 사람인지 이상한 사람인지 나도 모르겠어요.”
아내도 따라 일어나 옷을 입는다.
최초의 민선 학장으로 경선을 하게 되었는데 의과대 교수 500명 중 아무나 써내는
예비선거 개표를 해보니 3등 이었다. 나는 기도를 안 들어 주신 하나님이 서운하게
느껴졌다.
과반수를 얻지 못해 재투표에 들어가려는데 누군가가 일어나,
“우리 출마자에게 정견 발표를 하게 합시다.”
모두 동의하여 한 사람 씩 나오는데, 강 두희 선생님의 차례가 되었다.
“여러분 나는 나이가 60이 될 때 까지 보직 한번 못 해 보았으니 경험이 있는 다른
분들처럼 잘 하지는 못하겠지만 여러분이 시키는 대로 무조건 밀고 나가겠습니다.”
때는커녕 티 하나 없이 순수하신 그 말씀에 모두가 감동하였는지 내 기도가 효력이
있었는지 강 교수님은 학장이 됐다.
다음번 학장도 역시 생리학과 교수였던 백 광세 교수께서 당선되어 경사가
줄이었다.
백 광세 교수님은 강 교수님과는 분위기가 다른 멋쟁이 신사였다.
후배들에게 먼저 인사하고 양보하는 겸손과 예의가 몸에 배인 교수였으니 학장을
연임할 수밖에....
나는 훌륭한 윗사람 덕분에 타 대학 졸업자로서는 최 장수 교수가 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외로웠던 차에 경북대학에서 하던 연구를 마무리 하느라 대구에 내려가면
마치 친정에 온 것처럼 연세대학에서 있었던 일들을 일렀다.
서러웠던 이야기, 속상했던 이야기, 교직원들 세미나 때 발표했던 이야기..... 들을
열심히 떠들었다.
연세 대학교로 온지 3년이나 지났을까? 경북대학의 주 영은 교수님이 찾아오셨다.
“황 박사! 힘들지?”
“괜찮습니다, 견딜만합니다.”
“대구로 돌아가자!”
“네?” “우리 집을 맡아줘!”
“..........................”
내 어찌 주 영은 교수님의 심정을 모르랴! 교수님 부부는 연로해가시고 바로 지난해
군의관으로 있던 외아들이 불의 교통사고로 비명횡사하지 않았나? 딸도 있고
동생들도 있었지만 주 영은 교수님은 재산과 사업을 내게 맡기고 싶으셨나보다.
어떤 사람은 횡재하는 일이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나대로의 꿈이 있었으니......
교수님의 아들이 되어드리고도 싶었지만 내가 갈 길이 아니었다.
“교수님! 정말 감사합니다. 교수님 곁에서 살고도 싶지만 이왕 나선 길 계속
가보겠습니다.”
“알겠네! 할 수 없지!” 쓸쓸히 돌아가시던 교수님의 모습이 내 눈에 선해 한 동안
가슴이 아팠다.
아무래도 내가 밀릴 것 같았는지 강 두희 교수님이 지혜를 짜 내셨다.
“황 선생! 병원에 오는 환자들을 위해 운동 프로그램을 짜봐!”
“운동처방을 말씀하시는 것인가요?”
“그래! 그걸 잘 연구해서 길을 뚫어봐!”
나는 곧 연구에 들어갔고 1년이 지난 후, 생리학과 교수들을 모아놓고 발표했다.
병의 종류와 정도에 따라 운동의 종류와 강도, 시간, 빈도를 나누어 시간표를
짰는데 다행히 연세대학 전산학과에 재학 중인 둘째딸 진아와 컴퓨터 프로그램에
재능이 탁월한 고등학교 다니던 아들 녀석 훈이의 도움으로 멋지고 화려한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공부방이 없어 땡볕에 앉아 이루어낸 아버지와 남매의 작품 앞에 어찌 교수들이
탄복하지 않으리!
“저 친구 아무래도 천잰가봐!”
“글쎄..... 지방대 출신인데.... 어쨌든 대단해!”
나를 보는 교수들의 눈빛이 달라진다.
이어 병원장, 학장 등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개별적으로 찾아다니며 설득하기
시작했다.
바로 개척이라는 이름 그대로 생땅을 파는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운동처방에 잘 따르면 약을 복용함으로 오는 합병증을 막을 뿐 아니라 전신운동을
하기 때문에 다른 병 까지도 치료 내지는 예방을 할 수 있다니 꿩 먹고 알 먹고,
개인이 복되고 나라가 잘 되는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원장님! 너무 심하지 않은 환자들을 제 방으로 보내 주시면 약물 처방보다 운동
처방으로 환자들이 건강을 찾도록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좁은 내 방에 찾아오는 환자들을 위해 운동 기계들을 들여놓아야 되는데.... 제대로
갖추려면 1억은 있어야 하지 않나? 1억은 고사하고 100만원도 없으니 이를
어쩌나.....
고민하다 옛날에 쓰던 못쓰는 기자재를 닦고 갈아서 방에 진열을 해 놓자 우선
체면은 세웠는데 외국에서 살던 손님이 찾아오면 실망하는 눈치다.
할 수없이 기도 하였다.
“하나님! 기계가 시원치 않으니 내 입에 할 말을 주셔서 오는 환자마다 만족하게
해 주세요!” 말로, 설명으로 때우는 작전이 오히려 환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는지
환자들의 건강은 차도가 있었고 내 방에는 손님들이 줄을 잇는다.
자전거나 런닝 머신에서 내려 변화된 기록을 컴퓨터에 넣으면 프로그램에서
진단되어 나오니 신기해하는 사람, 고마워하는 사람, 칭찬하는 사람..... 환자들의
얼굴에 만족이 넘친다.
“황 박사는 돈이 어디서 나서 기계를 들여놨지?”
“황 박사가 우리 생리학과에 돈을 벌어들이는 공신이야!”
환자들이 돈을 내는 것만으로도 6개월 만에 1억을 들여놓았으니 놀라지 않을 수
있으랴!
“우리 이 돈 중에 2천만 원만 떼어서 기계를 사들이면 어떨까요?”
강 두희 선생님이 나를 대신해 물어보시자 다른 교수들이 당연히 따라준다.
“아 그 돈이야 황 박사가 벌은 돈인데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
내 방을 찾는 사람들은 더욱 늘어 보통 30-40명은 대기하고 있었고 나중에는 소문을
듣고 내방을 먼저 찾아와 손님들을 병원으로 보내드리게 디니 병원 측에서도
만족스러워 한다.
수많은 사람들이 효과를 보고 변화되어 나는 운동 처방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로
부상했다.
결국 서울역 앞에 새브란스 건강 종합 진단 썬타가 설립되어 나는 부소장이 되었고
그 안의 스포츠 크리닉 원장이 되었다.
조교 만기인 6년 동안 경북대학 조교를 하다 연세대학 교수로 왔고 다시 6년 동안
조교 한명을 두고 근무했는데 원장이 되어 조교가 5명이나 되다니.....
5명의 연구 조교들이 검사와 연구를 거듭하고 프로그램을 계속 엎 그래이드
시키는데 그 누가 불평을 할까?
10배나 큰 사무실에는 독일에서 최신식 기자재를 들여 놓아 미국에서 온 환자들도
감탄을 한다.
“어머! 우리나라도 대단하네요.”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만났고 각양각색의 건강 문제를 다루며 느끼고 배운 것을
나누고자 나는 다시 ‘신바람 건강법’이라는 책을 펴냈다.
우리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면 우리의 영혼과 육체가 강건하여지게 된다는 뜻과
하나님의 신이 바람을 일으켜 고통과 아픔에 있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기쁨과 평화가
넘쳐 나기를 바래 이름을 ‘신바람 건강법’이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