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감사하며
오전 과업을 마치고, 나무 그늘에서 도시락을 펼쳤다. 잡곡밥에 멸치, 양파이다. 물말아 먹으니 진수성찬이었다.
어디로 갈까? 나는 오늘도 버스에서 내려 발걸음 주춤거리며 어디로 가야할지를 고민했다.
아침 신문에서 이 혹서기를 살아가는 다세대 주민들의 생활상을 읽었다. 네댓식구, 이시절에도 에어컨 없이 선풍기로 버텨가는 그들, 어린 아이는 열대야에 잠을 못이루겠다며 버려진 택배 아이팩을 구해다 몸에다 걸치고 더위와 씨름을하고, 평상시와 달리 에어컨 있는 친구집에서 자고 오겠다는 딸을 차마 말릴 수가 없단다.(이럴땐 국가란...무용지물이고, 정치인들은 쓰레기다)
그들은 왜 가난할까?
누군가는 '태어날때 가난함은 용서가 되지만, 죽을때 가난함은 죄짓는 일'이라고 말하더라.
그럴듯 하지만 요즘 세상엔 틀린말이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이 통할때나 옳은 것이다.
사림들은 흔히 '하늘도 무심하다'며 겁없이 태클을 걸었다. '신은 존재하나 관리하지 않는다'말과 일맥 상통한다.
신은 사람이 태어날때 조건을 불공평하게 만들었다. 힘든 삶을 이겨내고, 죽음에도 그러한 논리를 적용한다면 정말 불공정함에 틀림이 없다.
나는 왜 이럴까?
내가 땀흘리며 걷는 것은 100세 인생 오래 살려는 것이 이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미안함과 스스로의 자책감이다. 왜 더열심히, 사회를 위해 일하지 않았을까? 그걸 감히 불교용어로는 수행이라 했던가? 그러나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단어인 것 같다.
행복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종교의 창시자(붓다, 예수, 마호메트...)들도 불행했다는 생각이 든다. 중생을 구도하려던 고뇌, 자신의 말씀을 따르는 사람들의 행복여부를 확인하지 못하고 떠나갔다는 생각때문이다.(윤회와 부활, 전지전능은 별개로하고...ㅎㅎ)
최후의 행복은 무엇일까?
오래전부터 멀리 떨어져 살며 나 죽어야 얼굴 볼듯(?)한 잊혀져가는 조카로부터 전화가 왔다. 뭔일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냥 부모님 형제 모시고 식사를 하고 싶단다.
(조카의 부모는 세상에 없으니 살아생전 그런 생각했더라면...)
참 이제서야 세상살이 눈을 떴구나! 하는 마음에 기분이 좋았다. 고맙다는 말에 덧붙여 나의인생 개똥철학을 애기했다.
'항상 현실이 제일 중요하지만 살아가며 궁금한 것, 미련 없애가며 살다보면 눈감을때 그게 제일 행복할 것 같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