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의 독서일지(2024.07.04~07.25)*
<7월 17일 수요일>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
나는 내 조국을 내 영혼보다 더 사랑한다.
-마키아벨리
1
매미가 돌아왔다
다시, 매미가 돌아왔다
환난 같던 지난밤의 세찬 비바람
물기를 머금어 푸른 생기로 가득 찬 아침나무들
그 풍경 한 켠에서 박수치며 웃는 애기 엄마들
더 이상 궂은 날은 없을 것 같은 예감들과 같이
아니, 아닌 것이
열어놓은 거실 창으로 흘러들어온 시원한 바람과
매미 우는 소리의 아스라함과
울창한 숲의 꿈처럼
매미가 돌아왔다
매미는 해마다 다시 돌아오는
지난날의 새로운 기억이다
2
이성을 밝혀줄
다섯 가지 철학사 이야기
-인도에서는 고(苦)로부터 해방되어 해탈에 이르려 하는 과정에서 ‘내면 지향’의 철학이 발달했고, 중국에서는 난세를 치세로 바꾸려는 노력 속에서 ‘사회 지향’의 철학이 발달했다. 반면에 그리스에서는 세계를 합리적으로 이해함으로써 존재의 흔들리지 않는 근거를 찾아내려는 과정에서 ‘자연 지향’의 철학이 태어난 것이다. 이때 사유의 결정적인 힘이 된 것이 바로 로고스, 곧 “개념화하고 논증하고 논쟁하는 능력으로서의 이성”이었다. 로고스라는 사유 능력으로 피시스라는 사유 대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곧 철학이었던 것이다. 철학은 오늘날의 과학에 더 가까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다시 쓰는 세계철학사 : 「세계철학사 1」 - 이정우>중에서)
-프로타고라스는 “모든 사물의 척도는 인간이다”라는 명제를 제출한 사람으로 철학사에 길이 남았다. 이때 척도라는 것은 ‘판단 기준“을 뜻한다. 인간이 만물을 판단하는 기준이다. 그런데 판단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이렇게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면 결국 진리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라는 뜻이 될 터다. 그리하여 프로타고라스는 ’주관적 상대주의‘의 대명사가 되었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민주주의자 소피스트의 재발견 : 「소피스트 단편 선집 1·2」 - 강철웅 엮어옮김>중에서)
-플라톤은 인간 영혼이 이성과 기개와 욕망으로 구성돼 있다고 본다. 이 세 부분이 제구실을 하되 욕망이 멋대로 날뛰지 않도록 제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이 ‘자기의 주인’이 되는 길이다. 반대로 욕망이 이성의 통제를 벗어나 쾌락으로 질주할 때 인간은 ‘자기의 노예’가 되고 만다. 이 영혼의 무질서를 바로잡는 것이 바로 정의다. 영혼의 정의는 국가의 정의로 이어진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그리스 고전이 들려주는 정의 : 「아테네 팬데믹」 - 안재원>중에서)
-철학이란 우리를 자유로 이끄는 이 이성을 돌보는 일이다. 우리가 좌우할 수 없는 외적인 것을 바꾸려고 발버둥 치지 않고 올바른 이성의 지도를 따라 마음을 다스려 나갈 때 열리는 경지가 ‘아파테이아’(apatheia,부동심)고 ‘아타락시아’(ataraxia,평정심)다. 이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에픽테토스 철학은 의지에서 출발해 이성을 통과하여 자유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는 윤리학이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왕보다 더 자유로운 삶 : 「에픽테토스 강의 1·2」 - 에픽테토스>중에서)
-《군주론》은 군주가 될 야심을 품은 자에게 악덕을 속삭이는 책처럼 보이고, 《로마사 논고》는 공화국 시민이 자유와 독립을 지켜내는 데 필요한 미덕을 돋을새김한다. 이렇게 상반된 책이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것이 수많은 논쟁을 낳은 ‘마키아벨리의 문제’ 혹은 ‘마키아벨리 수수께끼’다.
(고명섭, 《생각의 요새》, <마키아벨리의 진심 : 「마키아벨리의 꿈」 - 곽차섭>중에서)
3
《도쿄를 바꾼 빌딩들 : 디벨로퍼와 함께 하는 도쿄여행》
-박희윤
도심회귀(都心回歸) 현상을 불러온
디벨로퍼의 최고의 작품
: 도쿄 미드타운
도심에서 일하고 즐긴다는 직주근접형 라이프 스타일을 통해 도심의 매력을 회복시켰다는, 이른바 도심회귀 현상이 일어난 지역이 있다. 그곳은 바로 도쿄의 롯폰기 지역으로 ‘모리빌딩’의 <롯폰기 힐즈>와 ‘미쓰이 부동산’이 재개발에 성공한 <도쿄 미드타운> 프로젝트 덕분이다.
일본의 고도경제성장기에 교외 신도시가 개발되면서 심각한 공동화 현상이 벌어졌다. 도쿄도 그런 도시의 공동화 현상이 심하게 벌어진 곳이었다. 집이 사라지면서 학교와 병원, 시장 등 생활 인프라가 줄어들고, 그러면 사람들이 더 떠나가는 악순환에 빠지는 것이다.
일본인들은 여전히 교외의 단독주택에 사는 것을 더 높이 평가했지만, 롯폰기 힐즈와 도쿄 미드타운은 ‘도심에 산다’는 의미를 인식시키는 한편, ‘복합개발에 산다’는 것을 좀 더 종합적이고 진화된 형태로 보여주었다고 한다.
요즘 전 세계적으로 화두로 떠오른 단어가 있는데 그건 ‘도시경쟁력’이라는 말이라고 한다. 서울도 그 도시경쟁력을 키우려면 전략적 장소에 롯폰기 힐즈, 도쿄 미드타운 같은 민간주도의 복합개발을 유도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본경제의 ‘잃어버린 20년’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권에서 도시경쟁력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20여 년 전 일본의 상황과 지금의 서울을 비교하면 유사한 부분이 많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일본 도쿄의 롯폰기 힐즈와 도쿄 미드타운과 같은 프로젝트 성공이 가져다 준 새로운 국가전략의 동력이 된 점과 이들을 주도했던 디벨로퍼들의 사회적 역할,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심의 매력을 회복해 ‘도심회귀’현상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