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군기지가 쿠바영토에?
쿠바에 있는 미군기지.
쿠바와 미국과의 관계를 보면 언뜻 이해가 가지 않는다.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미군의 해외기지 가운데 가장 오래된 기지로 쿠바 섬 남동해안에 위치해 미 해병대가 관할하고 있다. 1백60 평방킬로미터 면적에 미군과 군속, 가족 3천여명이 살고있는 쿠바속의 미국이다.
미국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 중 이 땅을 차지했으며 1903년 매년 금화 2천개(당시 가치 약 4천달러)를 지급하는 조건으로 이곳을 쿠바로부터 빌렸다. 지금도 미국은 매년 임차료(rent) 명목으로 약 4천달러를 쿠바정부에 지급하고 있는데 쿠바정부의 기본입장인 '기지철수'는 확고하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이 기지를 유지하겠다고 밝혀 카스트로의 반발을 샀고 1962년 쿠바미사일위기 때에는 병력이 증파되기도 했다. 현재는 철조망, 선인장으로 둘러싸인 27km 접경선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1990년대 중반부터 아이티와 쿠바 난민 수천명이 수용된 적이 있는 이 기지의 존폐여부는 미국의 대쿠바 경제제재조치와 함께 미국과 쿠바 사이 관계개선 조짐이 있을 때마다 대화의 전제조건으로 떠오르곤 했다.
한편 카스트로 정부는 미국의 포로수용소 건설과 이용에 대해 현재까지 묵인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우리에게도 관타나모는 아주 낯선 지명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학생 때 누구나 한 번은 배우고 불러보게 되는 노래 <관타나메라>가 바로 '관타나모의 여인'이란 뜻을 지닌 노래였기 때문이다. 이 노래는 쿠바의 독립 영웅 호세 마르티가 전래 민요에 시를 붙인 것이다. 관타나모가 서양인들에게 최초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494년 4월 30일 콜럼버스가 관타나모만에 상륙하면서였다. 그는 이곳을 중국의 일부로 여기고 황금을 얻고자 했지만 포기하고 이곳을 떠났지만, 관타나모는 카리브해의 악명높은 허리케인을 피할 수 있는 천혜의 항구로서 신대륙을 찾는 이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관타나모가 군사적인 요충지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1741년 멕시코의 산티아고 장군과의 전쟁을 위해 영국의 웬트워스 장군이 이끄는 3,000여명의 영국군인들이 이곳에 상륙하면서부터였다. 그리고 이곳이 다시 스페인에서 미국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 것은 1895년 무렵 쿠바에서 스페인 통치에 반대하는 독립 혁명의 열기가 분출되기 시작하자 그 전부터 쿠바의 가치에 눈독을 들여온 미국이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결과였다.
미국의 언론은 쿠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 열기를 지지하는 논조의 기사와 더불어 스페인의 압제를 보도했으며 1840년대 자신들이 주장했던 '명백한 운명'에 대해서도 다시금 언급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쿠바에 있는 미국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함 메인호를 쿠바 아바나항에 정박시켰다. 그런데 이 메인호가 의문의 사건으로 격침되고 만다. 훗날 이 사건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도발하기 위해 미국이 스스로 벌인 일임이 밝혀진다.
1898년 4월 11일 미국의 윌리엄 맥킨리 대통령은 하바나항에서 일어난 원인 미상의 미 군함 폭발사건을 빌미로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하고 같은 해 6월 10일 미 해군 1개 대대가 관타나모에 상륙해 기지를 건설한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계사 시간에 배운 '미·서 전쟁'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미국은 쿠바와 필리핀을 사실상 식민지화 할 수 있었고, 일본과는 카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어 일본은 조선을, 미국은 필리핀을 식민지화하는 것을 승인해주었다.
1903년 2월 23일 테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관타나모 기지 임대에 관한 계약을 쿠바와 체결했고, 이 기지는 현존하는 미군의 해외 기지 중 가장 오래된 것이다. 이때부터 20세기 전반기 동안 관타나모는 미국이 중남미 전략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가 되었다. 이 기지의 중요성은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이 이 기지를 방문하고 장병들을 격려했다는 사실로도 알 수 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6월 18일 관타나모 기지는 '미합중국 해군기지(United States Naval Base, Guantanamo Bay, Cuba)'라는 명칭이 붙여지게 되었다.
20세기 전반기 동안 쿠바와 미국의 관계는 매우 순조로왔다. 그러나 1959년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가 이끄는 게릴라들의 혁명이 성공하면서 미국과 쿠바의 관계엔 결정적인 금이 가고 만다. 혁명이 성공한 뒤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쿠바군 사이에는 긴장이 흘렀고, 기지 주변엔 28마일 철책이 둘러쳐졌다. 이전까지는 자유롭게 출입하던 쿠바인들의 미군 기지 출입이 통제되었고 서로 경계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미국과 쿠바 사이의 국교 단절된 이후에도 관타나모 기지는 계속 유지되었다. 관타나모 기지에 최고의 긴장감이 흘렀던 것은 1962년 10월에 발생한 쿠바 미사일 위기 때였다. 미국은 즉시 관타나모 기지에 해병 2개 사단을 증파했고, 1964년엔 쿠바측이 기지에 물공급을 중간하기도 했다.
미국은 매년 금화 2,000개(약 4,085달러)의 기지 사용료를 지불하는 대신에 미국이 원할 때까지 기지를 이용한다는 계약을 맺어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달도 아닌 일년 사용료가 불과 4,000달러라니 어지간히 불평등 계약이다. 영화 <어퓨굿맨>에서 미군과 쿠바군 사이의 긴장은 이런 배경을 두고 있다. 이후 냉전이 종식되면서 관타나모 기지의 중요성도 많이 떨어져 한때 500명 정도의 군인이 주둔하는 사격훈련장으로 이용되기도 했으나 2001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사로잡은 탈레반과 알카에다 포로들이 이곳에 억류되면서 세인의 시선이 집중됐다. 이들을 경비하기 위해 다시 1,000여명의 미군이 증파되었고, 특히 1월 중순 이들 150여명이 수용된 ‘캠프 엑스레이(X-Ray)’에서 전쟁포로로서의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은 물론 비인도적 대우를 받고 있다고 해서 국제앰네스티를 비롯한 인권단체들과 유럽 각국의 인권 비판이 제기되면서 논란을 빚고 있다. 미군이 포로로 잡은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 가혹행위를 가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