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 4주일 강론(다해)
마부 양반, 몸을 좀 녹이시오
몹시 추운 날 저녁에, 랍비 울프는 축제일을 맞이해 마차를 타고 그를 초대한 집으로 갔다, 손님들과 잠시 시간을 보낸 랍비는 마부가 기다리고 있는 바깥으로 나와서 말했다.
“여보시오, 마부 양반. 집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시오.”
마부는 추워서 두 팔로 몸을 비비며 제자리 뛰기를 하면서 대답했다.
“아닙니다, 랍비님. 말들을 내버려 두고 혼자서 안에 들어갈 순 없지요.”
그러자 랍비 울프가 말했다.
“말들은 내가 돌볼 테니 당신은 안으로 들어가서 몸을 녹인 다음에 나랑 교대하면 되지 않소.”
마부는 몇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침내 랍비에게 말들을 맡기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모인 사람들 모두 신분의 차별을 두지 않았으며, 주인에게 초대받은 여부에 상관없이 다들 즐겁게 음식을 나눠 먹고 술을 마셨다.
술을 열 잔쯤 얻어 마신 마부는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는 랍비와 말들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들은 랍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지만 뭔가 급한 볼일이 있어서 떠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한참 뒤에 일단의 손님들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이 집 밖으로 나와 보니 이미 어두운 밤중이 되었는데도, 그 곳에 랍비 울프가 마차 앞에서 두 팔로 몸을 비비며 제자리 뛰기를 하고 있었다.
신분을 초월하여 서로 상대방의 처지에서 어려움을 헤아리고 배려해주는 마음, 이것이 주님의 길을 걸어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런 랍비와 마부의 아름다운 이야기를 생각하며 오늘의 복음 말씀과 해외 원조주일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산하 한국카리따스 인터내셔날 이사장이신 김 운회 루카 주교님은 오늘 연중 제 4주일 해외원조주일을 맞아 오늘날 세계의 실상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70억 명이 넘는 세계 인구 가운데에서 하루 1.25 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절대 빈곤층이 약 12억 명이며, 굶주림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은 약 8억 명입니다. 약 1억 명의 개발도상국 어린이들이 저체중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시리아를 비롯한 중동과 아프리카 지역의 분쟁 때문에 난민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으며, 자연재해와 전염병으로 어린이와 여성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교회는 현재까지 계속해서 가난한 나라를 도와왔는데 특히 자비의 특별희년을 맞아 이런 자선의 손길은 지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형제애를 실천하는 이런 자선 활동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드러내는 좋은 표지라 할 것입니다. 사랑의 나눔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이기도 합니다. 신자 여러분의 지속적인 사랑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오늘 복음의 말씀(루카 4,21-30)은 지난주의 속편으로 예수님의 이사야 성경 낭독 후에 대한 반응이 언급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여러분이 들은 이 말씀이 바로 오늘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습니다.”라고 했을 때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놀라움과 경악, 그 자체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두 번째에 나온 싸늘하고 냉담한 반응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냉소적인 반응이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구원과 해방의 복음 선포, 이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듯했지만 즉시 사람들은 예수의 출신 성분과 신분을 따지면서 예수의 말을 평가절하하고 그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배척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은총의 말씀을 거부하는 그들은 예수에게 기적을 요구하며 예수의 말씀에 트집을 잡기 시작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그들의 냉담한 반응에 얼마나 실망하셨을지 헤아려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화두를 꺼내시면서 구약 성경 열왕기 5장에 있는 두 가지 실화를 소개하십니다. 시돈지방 사렙타의 과부는 마지막 샘물마저 말라버린, 즉 모든 희망이 말라버린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시리아의 장군 나아만은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과는 적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사건에서 보듯이 기적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이방인들 안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뻐기며 불신과 교만에 빠졌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을 알지 못하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이방인들 안에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일들을 언급하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참된 회개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유대인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하였으며 적개심과 증오심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죽이고자 높은 벼랑으로 끌고 가고자 하였으나 예수께서는 유유히 그들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떠나셨던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예언자의 길이 얼마나 힘들고 고난의 길을 가야 하는 힘든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제 1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아 예언자도 예수님에 앞서서 이 길을 갔던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아는 대략 BC 626년에서 585년 사이에 활동하였습니다. 이 시기에 고대 근동지역의 정치적 주도권이 아시리아에 속했다가 바빌론으로 넘어갔습니다. 역사적 격동기에 예레미아는 예언직을 수행하면서 바빌론의 왕은 단지 야훼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한 도구임을 알렸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범죄로 인해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이 불가피함을 선포하였습니다.
오늘 1독서의 내용은 예레미야가 소명 받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BC 600년대에 활약했던 이스라엘의 대 예언자입니다. 그가 활동하던 당시에 나라는 멸망되어 가고 있었고 사회는 썩어 부정이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예언자가 걸어야 할 길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에 충실하고자 자신들의 정의 외침으로 받게 될 고난과 십자가를 예상하였지만 기꺼이 그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자신의 사명을 수행하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 사랑의 마음에서 가능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제 2독서, 코린토인들에게 보내신 사도 바울로의 사랑의 편지 중 “사랑의 찬가”(1 코린 12,31-13,13)는 이를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코린토는 당시 그리스의 아카이아 지역의 수도로서 항구 도시였는데 오늘날의 용어로 양극화가 심하던 그런 곳이었습니다. 다양한 민족과 인종이 어울려 살던 곳으로 소수의 부자들과 다수의 가난한 자들이 얽혀서 살던 곳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동체의 구원을 위해서 이 사랑의 대찬가를 들려주신 것입니다. 결국 모든 문제의 해결책은 상호 존중과 배려, 사랑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시대, 이 상황에서 여러 가지 잘못된 것들에 대하여 예언자적 사명으로 그릇된 것을 과감히 지적할 뿐만 아니라 이를 개선코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노력의 바탕에는 세상과 인간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또한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