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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티르총리와 구달 박사
옥형길..재경향인회 부회장
오늘날 사회적 화두(話頭)는 고령화문제다. 오랜 옛날부터 검은머리 파뿌리 되도록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그토록 염불을 했으니 이제 그 효험이 나타나 보이는 것이리다.
인간의 첫 번째 욕망은 무병장수였다. 신은 이제 그런 인간의 욕망을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건강문제는 스스로에게 맡겼다. 지난 날 대가족제도와 경종농업경제하에서 노인 한두 분을 십여 명의 가족들이 봉양하는 것은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다. 더구나 농경사회에서는 노인의 일손 또한 그런대로 농업생산이나 대가족제도의 유지에 기여하는 바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지금은 핵가족화와 산업화에 따라 가정에서 노인의 위치는 설 자리를 잃게 되는데, 노령 인구는 급속히 늘어나고 있어 노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다. 경노사회는 옛말이고 이제는 경멸과 방치, 폭행의 패륜 사회로 가고 있는 것 같다.
노령화 사회가 안정적으로 유지되려면 노인에게도 능력에 따라 일자리가 주어져야 하고 생활 안정과 건강 유지 등의 복지대책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노인문제 뿐이라면 무슨 고민이 있겠는가. 그 보다 더 시급한 것은 차세대의 주역인 유소년과 청년들에 대한 육성대책 아니겠는가.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건강하고 생산성 높은 국민이 없으면 나라가 문을 닫아야 하니 이 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겠는가.
지금의 사회는 노인과 청년이 서로 복지 다툼을 벌이고 있는 형국으로 서로가 일자리와 복지의 수혜를 빼앗기고 있다고 서로를 원망하는 양상이다. 이렇게 세대 간 이해관계의 상충이 일어나니 이는 가족 간 불화의 요인이 되고 나아가 사회불안의 요인이 되는 것이다.
유소년과 청년에게 희망이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오늘날 이만한 삶의 바탕을 누가 만들었는가. 그것은 분면 지금의 노인들이다. 그들의 공적에 대한 보상에는 왜 소홀한가에 대한 고령화 세대의 반론에도 답변이 궁색해 질 수 밖에 없다.
문제의 해결은 서로가 각성하는 것이다. 청년세대는 정책적 배려에만 무기력 하게 기댈 것이 아니라 꿈과 야망을 가지고 적성에 맞는 분야를 찾아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야 한다. 왜 꼭 사무직이어야 하는가, 왜 대기업에서만 일해야 하는가, 꼭 도시라야 하는가, 그래야만 미래가 있는 것인가. 노령세대는 왜 과거를 되새김질 하며 늙고 병들었음을 탄식해 무기력하고 무료한 날들을 보내야 하는가.
선거에 나선 위정자들은 당선만 시켜주면 노령문제와 청년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겠다고 큰소리치지만 아직 누구도 이를 실현한 사람은 없었다. 일생동안 스스로 심신의 건강을 다지고 근면으로 노후대책을 마련하여 국가의 정책에 기대지 말고 하루하루를 건강하고 보람 되게 살아가는 길을 스스로 열어가야 할 것이다.
멋지게 살다가 멋지게 가는 것이 누구나의 소원이다. 최근 우리는 가장 멋진 두 노인의 삶을 보고 있다. 말레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맛 총리와 호주의 저명한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 두 분 어른이 그들이다. 고령화시대에 이처럼 멋지게 살고 멋지게 죽는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가.
올해 아흔 셋인 마하티르가 최근 제7대 말레시아 총리가 됐다. 그는 1981년부터 22년간 말레시아를 철권통치 했던 인물이다. 22년간 규제와 통제, 그리고 시위대에 대하여는 폭력적 탄압과 권위적인 정책결정으로 철권통치를 했다. 그러나 그는 말레시아의 경제를 부흥시켰고 사회를 안정시켰다. 우리나라에서라면 그가 권좌에서 물러나기가 무섭게 독재자로 몰려 그의 흔적지우기가 벌써 끝났을 것이다.
그 연세에 다시 정권에 도전했다면 노망난 노인네로, 권력에 눈먼 노인으로 치부해 눈길 한 번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15년 만에 다시 화려하게 부활한 것이다. 말레시아는 다시 강압적인 철권통치를 감수하고라도 그의 강력한 지도력에 의한 사회 안정과 경제적 부흥이 필요했던 것이다. 말레이시아 국민들은 그가 무력한 노인이 아니라 경험이 풍부한 지혜로운 지도자로 재평가한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그는 승용차를 운전하고 승마를 즐기는 정신력과 건강을 과시하고 있으니 믿음직스럽지 않는가.
다른 한 사람은 스스로의 죽음을 찾아 104세의 노구를 이끌고 안락사가 허용되는 스위스까지 가서 스스로 치사량에 해당하는 신경안정제를 주사하고 영면에 든 호주의 생태학자 데이비드 구달 박사다. “장례식을 치르지 마라. 추모 행사도 하지 마라. 시신은 해부용으로 기증해라”가 그의 유언이라고 한다.
그가 안락사를 택한 것은 삶이 버거워서가 아니고 불치병에 시달려서도 아니었다. 다만 고령이어서 더 이상 삶을 이어가는 것이 의미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한 생을 저명한 생태학자로 살아온 생태학자다운 아름답고 멋진 생태학적 마무리가 아니겠는가. 오늘도 TV강연을 하신 철학자 김형석 교수는 98세의 나이에도 글을 쓰고 강연을 다니며 인생의 황금기는 60세에서 75세 사이라고 했다. 황금기 다음에는 황혼기가 또 있다. 힘을 쓰는 것만이 일이 아니다. 노인이라 자처하며 맥없이 포기하고 의존하려 하지 말고 열심히 살다 깨끗하게 사라지는 삶이 아름다운 것이다. 노인들이여 힘을 내자.
거제중앙신문 skok@geojenew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