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덩이 속에서 만난 하나님(창37:23-28)
2019.10.12 김상수목사(안흥교회)
이솝 우화 중에 “우물에 빠진 당나귀”라는 이야기가 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한 당나귀가 마른 우물에 빠져 울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당나귀 주인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 어차피 이 당나귀는 늙어서 얼마 살지 못 할 것이고, 우물도 쓸모없으니까 차라리 같이 매워버리자”

주인은 이웃사람들을 불러서 우물에 흙을 던져 넣기 시작했다. 당나귀는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흙을 계속 부었다. 그런데 얼마 후 부터 당나귀의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주인이 우물 안을 살펴보다가 깜짝 놀랄 장면을 발견했다. 당나귀가 떨어지는 흙덩이들을 발로 밟아 다져서 평평하게 만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경악할 수밖에 없는 일이 일어났다. 당나귀가 다져 놓은 흙바닥을 디딤돌 삼아 우물 밖으로 나와서 주인 곁에 다소고시 앉는 것이었다.
당나귀는 어떻게 흙을 평평하게 할 생각을 했을까? 자신의 생각을 바꿨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던져 넣는 흙을 자신을 죽이기 위한 흙으로 알고 발버둥 쳤지만, 나중에는 그것을 자신을 구하기(또는 자신에게 일을 시키기) 위한 흙으로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부터 당나귀는 삶에 대한 의욕과 희망이 생겼다. 우리들이 심각한 삶의 구덩이에 빠졌을 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성품과 뜻을 생각하고, 그것에 초점을 맞추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다. 바늘 하나를 드는 것도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고통이지만, 태산 같은 일이라도 그것을 믿음을 해석하고 간구하면 내 인생 큰 유익이 된다.
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바로 그런 경우다. 요셉은 110년을 사는 동안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서 하루아침에 노예로 전락하고 그리고 후에는 애굽의 총리로 생을 마감했다. 요셉의 일생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할 수 있다.
- 채색옷을 입었던 부잣집 아들였던 시기 : 1-17세(어린이, 청소년 시절)
- 애굽에 팔려가서 종살이 하던 시기 : 17-30세(청년시절)
- 애굽의 총리가 된 후 : 30세-110세(중장년, 노년시절)
오늘 본문말씀은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구덩이에 던져졌다가,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장면이다. 요셉이 가까이 올 때, 이미 그의 형들은 요셉을 죽일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요셉을 죽일 목적으로 그의 채색옷을 벗기고 구덩이 속에 던져 버렸다. 우리들도 빛나는 채색옷이 하루아침에 벗겨지는 때를 만날 수 있다.
“23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매 그의 형들이 요셉의 옷 곧 그가 입은 채색옷을 벗기고 24 그를 잡아 구덩이에 던지니 그 구덩이는 빈 것이라 그 속에 물이 없었더라”(창 37:23-24)
이 사건은 요셉의 인생에서 가장 잊기 어려운 고통스러운 기억이다. 만약 우리들이 요셉이 입장이 되어서 구덩이 속에 던져졌다면, 그 충격과 공포감과 치가 떨리는 배신감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요셉도 이 일이 얼마나 큰 충격이었는지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형들을 용서할 때 이런 말을 했다.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창50:20-21)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라는 말은 옷이 벗겨지고 구덩이 속에 던져졌을 때를 말한다. 그런데 요셉의 이 말 속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는 부분이다. 언제부터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셨다는 말인가? 구덩이 속에서 부터다. 요셉이 구덩이 속에서 빠져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신앙적으로 완전히 딴사람이 되어 나왔다. 구덩이에 떨어졌을 때는 충격과 배신감의 파도가 그를 덮었지만, 구덩이에서 빠져 나올 때는 형들은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신다는 굳건한 믿음의 확신을 갖는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비록 몸은 종으로 팔려가지만, 그의 마음은 이미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믿음으로 가득 찼다. 그가 보디발의 집에서 신실한 믿음의 사람으로 굳게 설 수 있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대체 구덩이 속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요셉은 구덩이 속에 무엇을 했을까? 창세기 42장 21절을 보면, 요셉의 형들이 총리가 된 요셉 앞에서 자기들끼리 대화하면서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라고 말했던 것으로 보아, 요셉은 구덩이 속에서 형들에게 간절히 애걸하며 살려달라고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요셉은 애걸과 공포감으로만 끝내지 않고, 그 좌절의 구덩이 속에서 하나님을 기억해 냈다. 어린 시절 채색옷을 입고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배웠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그는 생각해 냈다. 마치 그 옛날 그의 아버지 야곱이 빈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났듯이, 요셉도 아무도 없는 구덩이 속, 절망과 좌절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눈물로 간구하면서, 주님을 만나는 은혜 체험을 했을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셨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요셉의 부르짖음을 들어 주셨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런데 본문 말씀을 보면 그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말이 있다. 바로 이스마엘 상인들이다. 요셉의 형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그 음식 중에는 요셉이 들고 온 것도 있을 것), 갑자기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그것을 본 유다가 요셉을 상인들에게 팔자는 제안을 한다.
“25 그들이 앉아 음식을 먹다가 눈을 들어 본즉 한 무리의 이스마엘 사람들이 길르앗에서 오는데 그 낙타들에 향품과 유향과 몰약을 싣고 애굽으로 내려가는지라 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덮어둔들 무엇이 유익할까”(창 37:25-26)
그렇다면 그 상인들이 그 시간에, 그 장소에 왜 갑자기 나타났을까? 유다에게 왜 갑자기 팔자는 생각이 났을까? 어떤 사람은 우연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연이 아니다. 잠언 16장 9절의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요셉을 위해 그 사람들을 그 시간에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16:9)
하나님께서 요셉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에게 피할 길을 보내주신 것이다. 이것은 요셉 생애에 있어서 하나님을 깊이 인격적으로 만나고, 그 누구의 개입도 없이 본인 직접 기도응답을 체험한 첫 번째 사건이다. 그래서 자신 있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라는 말을 할 수 있었다.

북미지역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로키산맥이 있다(로키산맥 4,500㎞, 히말라야산맥 2,576㎞, 안데스산맥 7,000㎞). 이 산맥의 해발 3,000m 지역에는 나무가 살 수 없는 수목 한계선이 있다. 이 지대의 나무들은 강력한 칼바람 때문에 위로 자라지 못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마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처럼 옆으로 누워있다. 그래서 이 나무들을 일명 “무릎 꿇은 나무”라고 부른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고산지대의 칼바람을 견딘 이 나무들이 세계에서 가장 공명이 잘되는 명품 바이올린의 재목으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지역 주민 여러분들이여, 하나님은 우리를 더 진한 신앙의 향기를 풍기는 명품 크리스천으로 만들기 위해서 때로 로키산맥의 칼바람 같은 극한 시련의 바람을 불게 하시고 때로는 각종 형태의 좌절의 구덩이에 빠지는 것을 허용하실 때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내 인생의 채색옷이 벗겨지고 심지어 구덩이 속에 떨어지고, 인생의 칼바람 때문에 비굴하고 비참한 상황에 처한다 해도,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고난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깊이 만나면 그곳은 더 큰 은혜를 체험하는 디딤돌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서 있는 상황을 믿음으로 해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요셉처럼 간절히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라. 그러면 요셉에게 그랬던 것처럼 우리들에게 피할 길을 주실 뿐만 아니라, 오히려 명품 크리스천으로 더 귀하게 사용하신다. 요셉의 삶이 그것을 증명한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