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21일 토요일
1시 반 경에 엔바이를 떠난 슬리핑 버스는 5시 반 쯤에 하노이 미딩 터미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택시 기사인지 삐끼인지가 밀착 마크를 한다. 호엠끼엠 간다고 하니 15만동을 달라고 한다. 잘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바가지같아서 꿋꿋이 거절하고 큰 길로 걸어 나와서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 탔다.
미터기를 켜고 열심히 달리던 택시 기사는 주말이라 호안끼엠까지는 못 간다며 성요셉 성당 근처 골목에서 차를 세웠다. 그렇지 주말 차 없는 거리! 그건 나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미터 요금이 13만 3천 동이 나왔다. 삐끼 거절하고 열심히 걸어나가 미터 택시 탄 보람이 없잖아. 겨우 800원 절약했네 ㅠㅠ
배낭을 지고 걷기에는 조금 먼 길이었지만, 이런 저런 구경을 하면서 호수 동쪽 길을 따라 여유롭게 걷다 보니 어느덧 까멜리아호텔6다. (사파 갈 때부터, 하노이에 돌아오면 당연히 거기서 묵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웬 일? 빈 방이 없단다. 헉? 예약을 했어야 하는 거였구나. 너무 방심했네. 이 골목 저 골목 뒤지며 몇 군데 들러봤는데 큰맘먹고 들어가 본 100만동급 호텔들을 포함하여 전부 다 방이 없단다. 하나같이 내일은 방이 있는데 오늘은 없다고 한다. 오늘이 무슨 특별한 날인가? 오늘이 토요일인 줄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토요일마다 이렇게 방이 동나는 걸까?
그러다가 조그맣게 홈스테이 간판이 붙은 아주 좁은 골목(복도?)이 보여 들어가 봤는데, 거기도 역시 빈 방이 없다고 한다. 큰일났군 하면서 돌아서는데 매니저로 보이는 아가씨가 잠깐 기다려 보라고 멈춰 세운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어 방을 알아보던 아가씨, 힘없이 "없네요" 하더니 갑자기 뭔가 생각났는지 우릴 남겨두고 뛰쳐 나갔다. 몇 분 후에 돌아오더니 가까운 곳에 39달러 짜리 큰 방이 하나 있다면서 옆지기 배낭을 둘러메고 앞장을 선다.
따라가 보니 길 건너편에 있는 그린다이아몬드 호텔인데 아마도 풀북인 와중에 특실같은 게 비어 있었던 모양이다. 특실이라고 엄청 좋은 방은 아니고 그 호텔 기준에서 조금 넓다는 정도인데, 방 상태는 괜찮아 보인다. 아침밥도 준다고 하니, 방을 못 구하고 헤매던 우리로서는 이만하면 대박이다. 고마워요.
짐을 풀고, 고마운 아가씨네 홈스테이 입구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저녁을 먹었다.(혹시 같은 업체라면 보은을 하는 셈이고, 아니라도 구글 평점이 4.8이나 되는 맛집이니까...) 이름은 롤키친, 평점대로 맛있는 음식이 나오긴 했는데 양이 적어서 살짝 실망했다. 폭립과 팍붕파이댕에 밥 두 공기까지 해서 20만동 나왔으니 비싼 건 아니지만, 이렇게 조금씩 나오는 줄 몰랐다고!
#12월 22일 일요일
방콕 가는 비행기가 내일이므로 하노이에서 하루를 더 묵어야 한다. 어제 그 홈스테이를 찾아갔더니 방이 나왔다며 반가워한다. 2층으로 따라 올라가 보니 상당히 크고 멀끔한 방이 있다. 구글지도에는 입구 간판에 써 있는 dollars homestay가 검색되지 않고 근처에 140만동짜리 숙소만 보이길래 내심 걱정하며 물어보니 하루 70만동이란다. 조식과 드라이어와 냉장고가 없는 게 흠이긴 하지만, 방 자체가 아주 만족스럽고 은인과 다름없는 친절한 매니저가 있으니 70민동이라면 당연히 오케이다.
여러모로 만족했던 이 숙소에서 발견한 또 하나의 기쁨(세렌데피티)은 방 양면 벽에 그려진 매직아트 그림이었다. 하노이 거리 풍경이 그려져 있는데 보면 볼수록 입체적이고 실감이 나는 훌륭한 그림이다, 방 안에 이런 그림이 있다니, 정말 대단한 경험이다. 침대에 누워서 하노이 거리를 바라보는 기분이다. 침대나 집기들이 없다면, 누가 벽화인 줄 알겠어?
맘에 드는 방에서 푹 쉬다가 늦은 점심을 먹으로 찾아간 곳은 8년 전에 분짜를 맛있게 먹었던 분짜닥낌. 예전만 못하다는 소문도 있었으나 여전히 손님이 바글바글하고 맛도 여전하다. 이번에도 시그니처 메뉴인 분자넴 세트 2인분을 먹었다. 1966년에 개업해서 수십년을 맛집으로 군림(?)하면서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음식을 꾸준히 팔고 있다는데 가격은 가끔씩 올리나 보다. 같은 메뉴 2인분이 8년 전에는 17만동이었는데, 이번에는 20만동.
#12월 23일
태국 가는 날이다. 비행기 출발 시간이 3시 40분이니 시간이 넉넉하다. 오랜만에(?) 퍼승에 가서 아침 국수를 먹고 돌아와 숙소에서 빈둥거리고 있자니 매니저 아가씨가 방으로 찾아왔다.
몇시 비행기에요?
-3시 40분요.
공항까지 가는 택시 불러드릴까요?
- 아뇨, 86번 타고 갈 거에요.
86번 좋지요. 그럼 버스 정류장까지 갈 택시 불러드릴까요?
- 아뇨, 걸어갈 거에요.
네, 걸어가도 돼요. 항쩨 말고 항머이에 있는 정류장으로 가세요. (큰 차이는 아니지만 항머이 3번지 정류장이 호수 쪽에 있는 항쩨 정류장보다 살짝 가깝다.)
끝까지 친절하다.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려는 마음이 아름답다.
(항머이 정류장에서 86번 버스를 기다리는 중)
무난히 공항에 도착해서 방콕행 비행기를 타고
6시 경에 방콕 도착. 입국 심사 중에 리턴 티켓 보여달란 소리를 처음으로 들어봤는네, 설마 티켓 없다고 돌려보내는 건 아니겠지? 순순히 티켓을 보여주고 통과했으니 돌려보내는지 여부는 확인하지 못했다.
공항철도를 타고 막까산 역에 내려서 예약해 둔 FX 메트로링크 막까산 호텔로 갔더니 생각했던 것보다 크고 깔끔한 방을 준다. 그 사이에 리노베이션을 했나? 아님 방을 업그레이드해 준 걸까? 뭔진 모르겠지만 2년 전에 비해서 확실히 방이 좋아졌다는 느낌이다. 다음에도 방콕 하루 들를 일이 있으면 또 이용해야지.
저녁 먹으러 나가서 지하철역을 돌아다니다가 역 밖에 있는 골드커리라는 일본식 카레 식당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티비 화면을 캡처한 사진들이 가득하다. 대부분 세숫대야만한 그릇을 다 비운 사진인 걸 보면 아마도 많이 먹기 이벤트같은 걸 했나 보다.
이 식당은 특이하게도 모든 음식에 싸이즈가 있다. SS S M L 그리고 뭐 2kg? 사이즈에 대한 감이 잘 안 오길래 (그리고 배가 출출했던 참이라) 돈까스 카레 L 사이즈와 돈까스 오므라이스 M 사이즈를 시켰는데. 음식 나온 걸 보니 완전 실패다. 생각보다 그릇이 너무 크다. 옆자리 태국 아가씨가 먹는 걸 보니 SS 사이즈로도 충분했겠어. (수원 성균관 대학에서 1년간 공부하고 왔다는 이 아가씨는 한국말을 아주 잘했다.)
내일은 원숭이 사원과 해바라기 밭으로 유명한 롭부리로 떠난다. 원숭이는 15년 전에 많이 봤으니 이번에는 해바라기에 집중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