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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위협 앞에서 생명을 심는 사람
본문: 사도행전 23:12-22
머리말. 바울은 실제적인 죽음의 위협을 당했다
우리는 보통 바울이 환난 가운데 복음 전했다는 말을 들으면 막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생활의 테두리 안에서 바울이 당한 고난의 정도에 대해 상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바울이 당한 고난이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바울을 죽이기 위해 40명이 넘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암살단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40명의 사람들이 바울 단 한 사람의 목숨을 노리고 구체적인 음모를 세웁니다. 이 많은 사람들이 치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조직적으로 접근해 온다면 바울이 목숨을 유지할 가능성은 매우 낮을 것입니다. 바울은 실로 피부에 와 닿는 실제적인 죽음의 위협 가운데 사역을 감당해 나갔습니다.
바울이 당한 실제적인 죽음의 위협이 그의 사역에 미친 영향은 무엇일까요? 이 구체적인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바울은 어떻게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감당했을까요? 오늘은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서 여러 서신들을 통해 말씀을 듣겠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어떻게 사역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서는 암살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많은 분들이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실제적으로 죽음에 맞닿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40-50 남성들은 많은 경제적 사회적 부담 가운데 살아갑니다. 만성적인 피로에 시달리고, 높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여러 성도님들도 각자 몸 안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한두 개씩 가지고서 약으로 버티며 살아갑니다. 그러면서도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묵묵히 자신의 일을 감당해 나가고 계십니다.
또 어떤 분들은 직장이나 사회에서 부당한 압력을 당하기도 합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집단 내에서 행해지는 부조리한 일들에 협조할 것을 요구받기도 합니다. 만일 이를 거절하고 문제를 제기하면 실제적인 불이익을 당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손가락질을 받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밖에도 우리 주변에서 죽음의 위협 가운데 노출되는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의 위협을 느끼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고 현실에 타협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생명을 심는 일을 멈추지 맙시다. 계속해서 생명을 심는 사랑의 수고를 해 나갑시다. 오늘 말씀을 통해 죽음의 위협 앞에 노출된 채 사명을 감당하는 여러분에게 주님의 크신 위로가 있기를 바랍니다.
1. 생명을 가진 사람이 생명을 심을 때 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먼저 첫 번째 말씀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이 생명을 심을 때 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죽음의 위협을 당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수고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데, 오히려 죽음의 위협으로 돌아올 수 있습니다.
바울의 복음 전파는 잃어버린 영혼을 하나님께 인도함으로 생명을 살리는 길입니다. 그동안 구원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차별받아 왔던 이방인들에게 이 복음은 참으로 복된 소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다는 복음은 유대인들에게도 참된 자유와 구원을 가져다 줍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이 복음을 미워하고 저주했습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자신들의 신념 체계를 거스르고 무너뜨렸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자기 혈통이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차별 없이 구원의 문이 열렸음을 선포했습니다. 유대인은 할례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받는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민족적 자부심을 무너뜨리는 바울의 주장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을 죽여 없앰으로써 복음 전파를 막으려 했습니다. 이 일에 40명이 넘는 광신도들이 모였습니다. 암살을 위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세웁니다. 이들의 행동은 살인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율법에도 정면으로 위배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신념으로 가득 찼을 것입니다. 잘못된 종교적 신념이 민족주의와 결합될 때 얼마나 큰 악을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줍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18절을 보면 교회 내부에서도 폭력적인 민족주의 세력이 있었습니다.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이방인 성도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이 그곳으로 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성도들은 할례자였습니다. 이방인이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지 않고 할례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과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 테러를 가할 것이 우려되었습니다. 그래서 자리를 피한 것입니다.
교회 안의 신자라 할지라도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잘못된 생각을 고치는 것이 매우 힘듭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인 방식으로 반응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위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을 심는 자에게 돌아오는 죽음의 위협 이면에 거대한 영적 세력의 작용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도 믿지 못하고 잘못된 생각에 사로잡힌 사람들에게 사탄의 세력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4:4는 증거합니다.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한다.”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유대교 암살단들의 마음 가운데 사탄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못하도록 그 마음을 가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악한 영이 작용하여 살인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불러 일으킵니다.
에베소서 6:12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우리가 교회를 이루는 것, 가정을 세우는 것, 직장과 사회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이 모든 것이 영적 전쟁의 일환입니다.
사탄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의 사역을 방해합니다. 때로는 건강을 해칩니다. 때로는 관계를 파괴합니다. 죄의 유혹에 빠지게도 만들고, 여러 사건 사고를 일으키기도 합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이 지배하는 이 사회의 구조적인 한계 가운데 어려움을 겪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이 지금 당하고 있는 죽음의 위협을 단지 개인적인 문제로 바라보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벌어지는 영적 전쟁의 차원에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생명을 심는 과정에서 당연하게 초래되는 사탄의 공격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아주 잘 하고 있고 사탄이 가장 싫어하는 매우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2.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죽음에서 살았기 때문에 다시 죽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말씀입니다. 생명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죽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죽음에 있다가 생명으로 옮겨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비참함을 잘 알고, 생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잘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결코 다시 죽음으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습니다. 계속해서 생명 가운데 머무르며 생명을 심는 사역을 감당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부분에 사도행전 22장을 보면 바울의 간증이 나옵니다. 과거에는 바울 자신이 열혈 바리새파였고 앞장서서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고 죽이러 다니는 일을 했습니다. 어쩌면 바울이 회심하지 않았다면 사도를 죽이는 암살단원으로 자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게 된 뒤로는 바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명백한 증거 앞에 그동안 믿어왔던 바리새파 신앙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저질렀으며,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올렸던 종교적 열심이 얼마나 무익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자기를 용서해 주시고 복음 전하는 사도로 세워 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바울은 결코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움츠러들거나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인이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복음의 내용을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믿고 깨달은 바를 계속해서 정직하게 전하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죽음의 방식으로 맞대응하지도 않았습니다. 기독교 사병을 일으켜서 유대교도들과 물리적으로 충돌하면서 스스로를 지키려 들지 않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참으로 무기력해 보이는 방식으로 싸움을 계속해 나갔습니다.
에베소서 2장을 보면 감옥에 갇힌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우리가 지금 수행하고 있는 영적 전쟁의 본질을 가르칩니다. 우리 성도들도 다 과거에는 공중 권세 잡은 자에 사로잡혀 살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 가운데서 구하여서 생명을 주시고 하늘로 올리셨습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세상 가운데 증거하도록 하십니다.
이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바울 사도의 구체적인 방법은 편지로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에베소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감옥 안에 갇혀서 편지 쓰고 기도하는 것은 아무 힘도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당장 감옥 문을 열고 나와서 많은 돈과 사람을 모으고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 훨씬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죽음의 방식이고, 이 또한 죽음의 위협에 굴복하는 것입니다.
싸우면서 닮게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원수와 대결하는 과정에서 자기도 모르게 원수의 방법을 닮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죽음의 세력은 두려움에 기반해서 상대방을 굴복시키고자 합니다. 죽음이 가져오는 두려움 앞에서 말씀의 원칙을 타협하고 돈과 권력을 이용해서 상황을 통제하고 조종하면서 쉽게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이 들 수 있습니다.
죽음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계속해서 믿음의 길을 지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떻게 얻은 자유인데, 다시 죽음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는 없습니다. 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생명을 가진 사람은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생명의 열매를 맺습니다
다음으로 세 번째 말씀을 듣겠습니다. 죽음의 위협 앞에서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명을 심는 수고를 감당할 때,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먼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를 죽이려고 했던 암살단원들의 시도는 결국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산헤드린 회의와도 모의해서 빠져나갈 수 없는 치밀한 암살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우연히 바울의 조카에게 비밀이 유출되었습니다.
또한 소식을 전해들은 로마 군인 천부장이 특별한 호의를 베풀어서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 천부장의 호의가 당연한 것만은 아닙니다. 천부장의 입장에서는 지금 큰 분쟁의 한가운데 있는 바울이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게 더 좋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모른 척하고 방관하기만 하면 암살단원들의 계획은 성공했을 것입니다. 나중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책임을 유대인들에게 떠넘기면 그만입니다.
암살단원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바울의 생명은 안전하게 보호받았습니다. 또한 바울이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상황 가운데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건강에 이상이 온다든지, 상황이 힘들어진다든지 해서 큰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있습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잠시 쉴 수도 있고, 적절한 방식으로 업무를 조정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서 좌절하는 일은 없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살아계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보호하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아니면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건강도 주관하시고, 상황도 지켜 주십니다. 주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면서 계속해서 사명을 감당합시다.
극도로 위축된 상황 가운데서도 바울이 사역을 멈추지 않을 때 그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고 은혜를 누립니다. 고린도후서 4장은 바울이 자신의 사도권을 부인하는 성도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입니다. 고린도 교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바울을 사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배척했습니다. 오늘날로 치면 목사가 교회에 부임했는데 아무도 목사를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바울은 이런 상황 가운데 죽음과도 같은 정신적, 영적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복음을 전하고 목양하는 사역을 감당해 나갑니다. 고린도후서 4:12에 이렇게 증언합니다.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역사하느니라.” 비록 자신은 많은 반대로 말미암아 죽음의 고통을 겪지만, 오히려 그로 말미암아 은혜가 넘치고 성도들 가운데 생명이 꽃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러 어려움과 한계 가운데서 업무에 성과가 나고, 생명이 피어나는 경우를 자주 봅니다.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 그렇습니다. 내가 먼저 희생을 감당할 때, 내 주변 사람들이 생명을 누리고 풍요를 누립니다.
나를 전혀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일만 해라는 말씀으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주님 주신 범위 안에서 일을 감당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건강을 해칠까, 경제적 손실을 입을까, 명예에 손상을 입을까,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을 두려워하면서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을 의지하여 어려움 가운데서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사역을 감당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4. 죽음의 위협 가운데 생명을 심을 때 오직 그리스도만 높아집니다
다음으로 네 번째 말씀입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 가운데 생명을 심을 때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아집니다. 왜 주님께서는 바울의 인생 가운데 이런 극도로 위험한 상황을 허락하셨을까요? 이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적용됩니다. 왜 주님께서는 우리가 인생 가운데 죽음의 위협에 노출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우리가 주님의 깊으신 뜻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 가운데서도 계속해서 주님 말씀에 순종할 때, 그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가장 영광받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풍족한 때에 성과를 낸다면, 그것은 나의 힘으로 이룬 것이요 나를 높이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연약하고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조금이라도 열매를 맺는다면, 그것은 온전히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낼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자신이 가진 육체의 가시를 두고 씨름합니다. 죽음의 세력은 바울의 육체에도 예외 없이 그 그림자를 짙게 드리우고 있었습니다. 이 육체의 가시가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 바울은 이것을 사탄의 사자라고까지 부릅니다. 사탄이 바울을 가로막기 위해서 육체에 질병을 보냈습니다.
학자들마다 이 육체의 가시가 무엇인지 많은 추측을 하였습니다. 고문을 당하는 과정에서 생긴 손이나 발의 장애라고도 합니다. 시력이 거의 상실된 것이라고도 하고, 뇌전증일 것이라고 짐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하게 알 수는 없지만, 육체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아주 심각한 기능 저하를 초래하는 큰 장애라고 보는 점에서는 이견이 없습니다.
바울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아주 간절하게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낫게 해 주십시오. 저를 통해 수많은 기적을 행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병만 낫게 해 주신다면 제가 힘있게 사역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바울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진다.” 사람의 약함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이 사실을 알고 바울은 크게 기뻐했습니다. 죽음의 위협은 그의 육체 가운데 여전히 그대로 있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크게 기뻐하며 오히려 스스로의 약함을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죽음의 위협을 당할 때, 그 두려움 가운데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하게 드러납니다. 나의 약함 가운데 내 가족들의 생명이 번성할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교회가 일어나고 직장이 새롭게 될 것입니다. 내 앞에 놓인 죽음의 위협과, 그로 인한 나의 연약함까지도 자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를 통해 내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맺음말. 죽음의 위협 앞에서도 계속해서 생명을 심읍시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오늘은 네 가지 말씀을 들었습니다. 첫째로, 생명을 가진 사람이 생명을 심을 때 죽음의 위협을 당합니다. 둘째로, 생명을 가진 사람은 결코 죽음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과거에 죽음에 있다가 생명으로 옮겨진 자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죽음의 위협 앞에서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생명을 심는 수고를 감당할 때, 그 노력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풍성한 생명의 열매를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죽음의 위협 가운데 생명을 심을 때 오직 그리스도만이 높아집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우리 성도님들 한 분 한 분의 사정을 떠올리며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우리 중에는 건강의 문제, 정서적인 문제, 관계의 문제, 직장에서의 여러 문제들로 인해 큰 고통을 겪으시는 성도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 성도님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로하시고 힘 주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을 의지하여 죽음의 위협 가운데 계속해서 생명을 심으시길 바랍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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