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과 수필, 그리고 해학
이동민
이희승은 한국문학의 특질을 ‘멋’이라고 했다. 멋은 중국의 풍류보다 해학미가 더 하고, 서양의 유머보다는 풍류적이라고 했다. 풍류는 일상이 아닌 놀이의 뜻이 강하다. 다시 말하자면 멋에는 해학이라는 요소와 풍류라는 요소가 있다. 이 해석은 멋은 ‘현실적인 삶에서 일탈’이라는 뜻이 강하다. 멋의 효용성은 사회규범이나 약속에서 벗어난다 하더라도 허용이 가능한 범위까지만 이다.
멋의 효용성은 사회규범이나 약속에서 벗어나서 울적한 마음을 후련하게 해주는데 있다. 그러나 우리가 멋에 가장 주목해야 할 사항은 해학미 이다. 해학성은 멋이 격식에서 벗어나는 부정적 이미지를 웃음으로 덮어버리려는 고도의 전략이다. 전략이란 곧 유희성으로 포장했다는 뜻이다.
유희성이란 사회의 규격에서 살짝 벗어남으로 통속성의 의미를 강하게 풍긴다. 느슨한 삶의 태도가 해학과 연결되어서 웃음을 만드는 수가 많다. 수필에서도 이와 같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해학성은 놀이와 친연 관계가 있다. 웃음과는 표리부동한 관계가 있다. 웃음이 없다면 해학은 성립되지 않는다. 놀이는 자유로운 환상이 바탕이 되어서 심심풀이로 이루어진다. 무료함을 풀어준다는 뜻이다. 놀이는 웃음으로 반응하는 한마당이다. 일종의 사회적 몸짓이고, 미학의 한 형태이다.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과거의 농경시대 때보다 더 많은 속박에 묶여서 세상을 힘들게 살아간다. 현실을 벗어나려 해도 벗어나지 못하도록 옥죄는 것이 너무 많다. 생각해보자. 농경시대에는 하루쯤은 부담 없이 쉴 수 있지만, 출근부에 도장을 찍어야 하는 현대의 삶은 쉬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이럴 때 놀이 한마당(해학이 있으므로)에서 웃음으로 넘겨버리는 것으로 길을 찾아야 한다.
조선 초기의 유학자인 강희맹이 촌담해이라는 잡저를, 즉 오늘의 수필집에 해당하는 책을 저술하였다, 내용으로 남녀정사에 관한 것을 담았다. 군자의 도를 삶의 절대가치로 추종하면서 살고 있는 유학자의 책이라서 더 흥미롭다. 이 책을 두고 ‘ 세상 사람에게 교훈을 주는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고 잡스런 이야기나 담고 있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에 응수하기를 ‘비록 이야기는 저속한 것일지라도 지극한 이치가 포함되어 있어서 이것을 잘 이해하기만 하면 모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교훈으로 삼을 수 있으니 그 공효에 있어서 옛 성현의 말씀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였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잡저라고 하는 이런 종류의 책을 많이 남겼다. 오늘의 개념으로 분류하면 수필집에 해당한다. 한국의 고전 문학에 해학미가 깃든 것은 뿌리가 깊을뿐더러 아주 광범하다. 고려시대의 이인노의 파한집이나 이재현의 역옹패설에서 조선 말의 박지원의 글까지 긴 전통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해학미는 문학에서만이 아니고 한국미의 특질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해학이 멋에 포함되어서이든, 독자적이든 한국문학의 특질인 것은 사실이다.
사대부들이 서권기와 문자향을 주장하면서 문인화에 빠져 있을 때에 일반 여염집에서는 속화라고 부르는 민화를 집집마다 걸어놓고 즐기고 있었다.(오주장전전고) 산신이나 산군으로 대접하는 호랑이를 그린 민화는 감상자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호랑이가 토끼에게 놀림을 당하도록 희화화 했기 때문이다. 민화는 민중들이 즐긴 그림이지만 사대부들도 즐겼다. 웃음을 주는 그림을 즐긴다고 하여 감상자가 즐거운 삶을 누린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욕망하는 것은 내게 결핍된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에서 없는 웃음을 민화를 통하여 충족시키려 하였다. 잠시나마 삶의 고통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한국 예술에서 해학미가 하나의 특질임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여기에 멋의 묘미가 있다.
현실의 고달픔에 매몰되어 버리지 않고 고달픔을 초월하여 삶에 생기를 되찾는 것이야말로 멋이 아닌가. 현실의 규범에 속박되지 않고, 오히려 벗어나서 아름다움을 감수하는 지혜가 바로 멋이다. 멋의 이중성은 이렇게 형성된다. 규격을 지키면서도 규격을 벗어나는 초격 미인 것이다.
영화 서편제는 사양의 길로 접어 든 우리 음악을 다룬 슬픈 영화이다. 장터에서 판소리를 공연하며 살아가는 일가족은 새로운 예술 상품인 영화를 선전하러 서양 나팔을 불면서 장터를 누비는 사람들을 만난다. 사람들은 그들을 따라 썰물처럼 빠져나가 버린다. 유봉의 가족은 저녁 귀가 길에 마을 어귀에서 아리랑 가락에 따라 한 마당 놀이를 펼친다. 우리는 아리랑을 슬픈 가락의 상징처럼 알고 있다. 그러나 유봉 일가가 아리랑 가락에 맞춰 펼치는 풍물 마당은 흥취가 넘쳐나는 굿 마당이었다. 신명이 넘치고, 기쁨이 충만한 한 마당이었다. 한도, 슬픔도 없는 웃음과 환희의 한 마당이었다. 우리에게 ‘멋’이 넘치는 삶의 한 자락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웃음과 신명이 전부가 아니었다. 웃음 뒤에는 흥건히 벤 물기가 방울이 되어서 떨어지듯이 아리랑 가락을 타고 삶의 슬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것이 한국미의 특질이고, ‘멋’의 진수이다.
오늘의 수필쓰기는 지나치리 만큼 문학성을 교시성이라고 강조함으로 시시하고 잡스런 이야기는 발을 못 붙이게 한다. 수필다운 수필을 주장함으로 좋은 수필, 값진 수필이라는 가치 판단적인 평가 기준을 만들어서 발목을 잡는다. 수필에 담아야 하는 작가의 체험과 이야기를 작가의 인품에서 우러나온다고 함으로 진솔한 자기 이야기 담기를 두려워하게 하였다. 수필의 품격론은 오늘의 수필을 엄숙주의와 경건주의에 매몰시켜 버렸다. 해학을 기조로 하는 고전 수필의 특질을 훼손하였다.
한국미의 특질을 ‘멋’이라고 하였다. 멋은 일상의 격을 살짝 벗어나는 일탈에서 미를 구한다. 경건주의에 빠져있는 수필에서 다시 멋을 찾아야 한다. 멋은 격을 지키면서도 격을 벗어나는 초격의 미이고, 일탈의 미이다. 엄숙주의에 빠져 잃어버린 웃음을 다시 찾아야 한다. 웃음 뒤에 눈물이 맺혀 있는 수필이야말로 ‘멋’의 수필이다.
“비록 이야기는 저속할지라도~~~”라고 말한 강희맹의 언설은 되씹어 볼 만한 가치가 있다. 그리고 놀이와 해학성을 수필에 담는 전략을 세워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