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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벽전 전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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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촌에서 남원쪽으로 가다 사선문을 통과, 우측으로 들어가면 섬진강이 보이는 산자락에 새색시모양처럼 살짝 몸매를 감추고 있는 영벽정이 있다. 이곳은 사선대 호수가 있는 지역으로 멀리는 공수봉과 성미산성이 보이며, 넓은 호수가 있는 산위에는 운서정이 사선대를 굽어보고 있다.
영벽정은 1905년 한일합방 후 이 지역의 우국지사들이 암울한 세상을 한탄하여, 뜻을 같이한 6명의 유지들이 1935년(단기 4268년 을해) 정자를 건립했다. 건립한 명단은 영벽정 동쪽바위에 새겨져 있는데, 연정 이상만, 학인 이종근, 중암 이영만, 초은 이공근, 청람 유문기, 석정 김용태 등이다.
영벽정이 새워진 이곳은 조선시대 관찰사를 지낸 이도라는 관리가 사선대의 풍광에 반해 기생을 동반해 풍류를 즐겼다는 전설이 있어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이곳에서 매년 사선대축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영벽정은 단청이 선명하게 잘 되어 있으며 기둥과 호박 주춧돌이 특징이다. 정자 주변은 암벽과 숲으로 둘러처져 있어 여름에 이곳에 오르면 서늘함을 느낀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은 꼭 한번 2층 누각에 올라 좋은 친구와 망중한을 즐긴다면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을 터이다. 사선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먹은 데로 실천하고 물이 흐르는 데로 구름이 가는 데로 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영벽정 편액은 전주의 유명한 서화가인 효산 이광렬(曉山 李光烈) 글씨이다. 그의 편액 글씨는 강직하고 중후한 필획으로 마치 주자의 행서글씨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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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벽정 기적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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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은 전주 교동에서 출생하였으며 벽하 조주승에게 사사하여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는 등 전북의 문화예술 분야에 활발한 활동을 한 서예가이다. 특히 글씨와 그림에 두루 능하여 추사의 서법과 선현들의 제법을 충실히 익혀 ‘한묵회’를 결성, 수많 은 서예가를 배출하기도 한 사람이다. 이 편액의 글씨는 효산의 후기 글씨로 그의 대표적 역작으로 평가할 수 있다.
영벽정 우측에는 이곳 지역의 농사를 짓기 위해 보를 막는데 헌신한 두 형제 참판 최순. 최전을 기리기 위한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공적비는 4개의 돌기둥을 세우고 갓석을 올린 사이에 비석을 세워 비가 맞지 않도록 하였다.
이 비는 지금처럼 수리시설이 잘 갖추어진 상태에서는 보가 중요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유일하게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물을 대는 시설이기에 아주 중요했다. 그러기에 여러 사람들이 뜻을 모아 이 비석을 세운 것이다.
영벽정 옆에는 사선문이 있는데 북쪽 사선대현판은 임실 서예가 송기상이 썼고, 남쪽 사선대사선문은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손주황의원이 유려한 글씨체로 내려썼다. 송기상선생과 손주황의원은 임실출신으로 서예와 사군자에 두루 능한 분이다.
영벽정에서 호수를 따라 산길을 올라 운서정에 오르면 산하에 관촌과 슬치재가 보이며, 주변에서 누정을 세운 김해김씨에 관한 공적비가 입구에 있다.
이곳에서 조금 더 올라 성미산성에 오르면 백제산성과 우물터를 만날 수 있으며 가는 도중에 산개나리 군락 및 참박달나무군락지는 천연기념물로 유명하다. 소풍가는 마음으로 느릿느릿 걸어서 배가 출출할 때 사선대 맛집에서 찰밥한그릇 뚝딱한다면 유익한 답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영벽정은 관촌 사선대 입구에 있지만 실제적으로 산자락에 가려 잘 안보여 정자가 있는가도 잘 모른다. 때문에 사선대를 갈 때는 초입에서 반드시 내려 정자를 한번 둘러보고, 바로 옆에 있는 최순. 최전공적비를 둘러본다면 유익한 방문이 된다./김진돈 전라금석전라금석문연구회장. 전북문화재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