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서 마태오의 복음서 7장 12절에 나오는 내용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 주어라..."
논어 제 15편 위령공편에 나오는 내용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 한마디로 종신토록 실행할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其恕呼! 己所不欲 勿施於人. 그것은 용서다.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면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
동양과 서양의 고전이 표현하는 뉘앙스는 다르지만(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이 말은 윤리학의 황금율로 통한다.
그런데~! 다른 의미도 있다. 현실이고, 실제이고, 우리가 직면하고 살고 있는 사실에 근거를 두고 있다. 뭐냐면,
'금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
이 금때문에 서구 유럽 사람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고, 이 금(과 은)으로 중국의 비단과 도자기, 차와 화약과 종이를 사들였다. 또한 그렇게 싸인 중국의 금(과 은)을 뒤찾기 위해 인도의 아편을 중국에 팔아 넘겼다. 중국의 정당한 반발을 군함의 함포 사격으로 눌러 버린 거고. 이후 서구 열강은 중국을 마구잡이로 뜯어 먹은거 아니겠는가.
최근에 악어에게 잡아 먹힐 뻔 한 인류학자의 글을 읽었다. 그 녀는 말로만 머리로만 이해한 통찰을 그 때 얻었다고 한다. '그래 우리 인간도 먹이가 될 수 있는 존재다. 말하는 고기가 인간일 수 있다.' 그 녀는 인간-동물-식물로 이어지는 인간중심의 위계적 생태계가 아닌, 서로 이어지는 순환적 생태계 사고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인간만이 생각할 수 있고, 이성은 인간의 전유뮬이라는 생각. 인간은 먹이가 아니라 먹는 존재라는 선입견을 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나의 절망적인 경험에서 이렇게 승화되는 사유를 할 수 있다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사고는 우리가 죽으면 화장하고 납골당에 갖다 놓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비료로 쓰이게 땅에 바로 묻어 버리자는 주장도 인정할 것 같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물고 물리는 약육강식의 현실를 인정할 수 있는 논리를 생산하기도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병사들이 전투에서 죽어가는 모습을 촬영한 영상이 숏폼으로 인터넷에 올라와 있다. 그 영상을 보고 드는 생각과 감정은 어떤 것일까? 한 미디어는 전장에서 병사들이 찢겨지는 고기처럼 죽어가고 있다고 보도했다. 우리도 나도 먹이가 될 수 있다. 누구에게? 악어가 아니라 바로 같은 사람들에게.
우리 인간의 얼굴에는, 우리 인간 공동체에는 다양성과 복합성, 중층성-한마디로 복잡하다-이 존재한다. 하나의 존재에 여러 얼굴. 표면이 울퉁불퉁한 거대한 원. 다양하게 각져 있는 표면들이 조각되어 있고, 그 표면에도 뭔가 조각되어 있고, 그 표면위에 다른 표면이 있고, 그 밑에도 뭔가의 표면이 존재하는 마치 프레탈 법칙처럼. 다양한 조명에 따라 팔색조의 색을 내는. 넓게는 진선미의 가치를 부여할 수 없으나 좁게는 혹은 각 자는 그 기준을 만들고 가치에 목숨을 거는. 하여 멀리서는 희극인데 가까이는 비극인 챨리 채플린의 명언처럼.
How to live.
어떻게 살 것인가? 20대 때 우린 이런 고민 많이 했다. 허세일 수 있다. 그러나 건전했다.
50대 후반이 되면서 생각해 본다. 허세일 수 있다. 그러나 건전할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무엇이 중한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