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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Edith Wharton 1895~1937
「1862년 미국 뉴욕의 명망가인 존스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생활했다. 학교에 다니는 대신 가정교사로부터 교육을 받으며 아버지의 서재에서 문학, 철학, 종교 서적을 탐독했고, 1878년 처음으로 시집을 출간했다. 1885년 에드워드 로빈슨 워튼과 결혼했으나 , 애정 없이 시작한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 (남편)1894년부터 심각한 신경 쇠약을 앓았다. 1차 세계 대전 때에는 프랑스에서 전쟁 구호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이 공로로 플아스정부로부터 레지움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전쟁이 끝난뒤 발표한 <순수의 시대>로 1921년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쌍둥이 소설로 불리는 <이선 프롬>과 <여름>을 통해 미국 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로 자리매김했으며, 이 외에도 <환락의 집>, <암초> 등의 대표작을 남겼다. 1913년 남편과 이혼한 뒤 세상을 떠날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프롤로그]
나는 이 이야기를 여러 사람한테서 조금씩 얻어들었고, 이런 경우에 으레 그렇듯이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조금씩 달랐습니다. 매사추세츠주에 있는 스탁필드라는 마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우체국을 알 겁니다. 이 우체국을 알고 있다면 아마 이선 프롬이 그곳으로 마차를 몰고 와서 등이 움푹 파인 밤색 말에 고삐를 얹어 놓고는 몸을 질질 끌며 벽돌로 포장한 길을 가로질러 흰 주랑을 향해 걸어가는 모습을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도대체 그 사람이 누구인지도 물어봤을 테지요.
폐인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때도 그는 스탁필드에서 가장 사람의 눈길을 끄는 인물이었습니다.~~~사람들의 이목을 끈 것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절룩거리는 다리가 덜컹대는 쇠사슬처럼 제지하는데도 태평스럽고 강렬한 그 얼굴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쓸쓸하면서도 가까이 접근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감돌았습니다. ~~~쉰 두 살밖에 안 되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답니다. 나는 이 말을 하먼 가우한테서 들었습니다.
저 사람은 그때 충돌 사고를 겪은 후로 늘 저 모양이야. 그게 오는 2월이면 벌써 스물네 해째가 되는군.
그는 신문을 훑어보지도 않고 축 늘어진 호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습니다. 하지만 어쩌다 우체국 직원이 ‘제노비아 프롬 부인’이라는(또는 지나 프롬 부인)이름이 적힌 편지 봉투를 내줄 때도 있었습니다.
나는 코베리정선에 있는 큰 발전소와 관련한 일로 고용주의 지시 아래 그 지역에 파견되었는데, 목수들의 파업이 길어지면서 일이 너무 지연되어 그해 겨울의 대부분을 스탁필드에-코베리정션에서 가장 가까운 주거지였지요-꼼짝없이 묶여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곳에 머물던 처음 얼마 동안은 생명력 넘치는 기후와 그 마을의 죽은 듯한 무기력 사이의 대비에 충격을 받았지요. 12월의 눈이 그친 뒤에는 눈부시게 찬란한 푸른 하늘이 하루가 다르게 햇빛과 바람을 폭포처럼 퍼부어댔습니다. 그러면 새하얀 풍경은 한층 더 강렬한 광채를 내뿜었지요. 그런 분위기는 인간의 생명뿐 아니라 감정까지 생동하게 하는 것 같았습니다.
스탁필드에 머무는 동안 나는 ‘네드 헤일 부인’으로 알려진 중년의 과부 집에서 지냈습니다. 헤일 부인과 아버지는 한 세대 전에 이 마을의 변호사였지요. 그래서 여주인과 그 어머니가 지금도 살고 있는 ‘바넘 변호사의 집’은 이 마을에서 가장 큰 저택이었습니다. 이 집은 큰 거리의 한 끝에 자리했는데 고전적인 주랑과 작은 판유리를 끼운 창문이 노르웨이 전나무들 사이로 판석이 깔린 길을 내려다보며 조합파 교회의 뾰족한 흰 첨탑을 마주하고 서 있었지요. 바넘 집안의 운세가 기운 것이 분명했지만 두 부인은 적절한 품위를 지키려고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네드 헤일 부인은 주위 사람들보다 사회적으로 우월하다고 느끼거나 짐짓 그런 척하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사람들보다 우연히 감수성이 좀 더 섬세하다는 것과 교육을 좀 더 많이 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자신과 마을 사람들 사이에 충분한 거리를 두고 그들을 사심 없이 객관적으로 판단할 뿐이었지요.
그 부인의 기억은 마치 악의 없는 일화들을 보고나 하는 저장소와 같아서 그녀가 아는 사람들에 관해 무엇이든 물어보면 자세한 정보를 듬뿍 들려주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선 프롬에 관한 화제만 나오면 좀처럼 말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나지막한 목소리로 “네, 그랬어요. 난 두 사람을 다 잘 알고 있었어요.~~~정말 끔찍한 일이었죠~~~.”하고 고통스럽게 말하는 것이 내 호기심에 대한 최대한의 배려인 듯했습니다.
스탁필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말 세놓는 일 비슷한 것을 하는 부유한 아일랜드계 잡화상 데니스 이디가 나를 날마다 코베리플래츠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습니다. 거기에서 정션행 기차를 타야 했지요. 그런데 겨울 중반 즈음 이디의 말들이 그 지방에 도는 역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하먼 가우가 이선 프롬의 밤색 말은 아직 다리가 멀쩡하니 어쩌면 주인이 기꺼이 나를 태워 줄지 모른다고 귀띰해 주었습니다.
“글세, 그이가 일이 그렇게 썩 잘 풀리지 않는단 말이야.” 하먼이 말했습니다. “하고자 하는 일들을 이십 년이 넘게 폐선처럼 죽치고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마음이 상하고 용기를 잃을 법도 하지. 프롬네 농장은 늘 홀아비 주머니처럼 텅 비어 있지 뭔가. 저 오래된 물방아 하나가 지금 몇 푼이나 나가겠나. 이선이 해 뜰 무렵부터 캄캄한 밤까지 농장과 물방앗간에서 뼈 빠지게 일할 수 있었을 때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했었어. 하지만 그때도 식구들이 거의 모든 걸 먹어 치웠지. 원,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통 모르겠네. 처음엔 그 아버지가 건초를 걷어 들이다 말에 받혀 정신이 나가서 죽기 전에 돈을 물 쓰듯 했거든. 그러더니 그 어머니가 또 살짝 돌아서 갓난아이처럼 약해져 몇 해를 끌었지. 그리고 이번엔 아내 지나 차례였어. 우리 마을에서 병간호는 늘 지나를 따를 사람이 없었는데 말이야. 말하자면 이선의 밥그릇은 첫술을 뜰 때부터 질병과 걱정거리로 가득 차 있었던 거지.”
이선 프롬은 왼손에 고삐를 느슨히 쥐고서 말없이 말을 몰았지요. 투구 모양의 챙 아래 꿰맨 자국이 있는 그의 구리 빛 옆얼굴은 눈 쌓인 언덕을 배경으로 영웅의 동상처럼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냈습니다. 그 사람은 한 번도 내게 얼굴을 돌리는 법이 없었지요. 내가 묻는 말이나 용기를 내어 던지는 가벼운 농담에도 무뚝뚝하게 한두 마디로 대꾸하는 게 다였어요. 그는 말없는 우울한 풍경의 한 부분인 것만 같았고, 그 안의 온기와 마음은 표현 아래에 꽁꽁 묶인, 말하자면 얼어붙은 슬픔의 화신과도 같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침묵에 어떤 적의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단지 쉽게 다가가기에는 그가 너무나 깊은 정신적 고립 속에 살고 있다고 느꼈을 뿐이에요. 또한 그의 외로움이 단순히 비극적이리라고 생각되는 개인적인 곤경의 결과가 아니라 그 속에 하먼 가우가 넌지시 말한 것처럼 스탁필드의 허다한 겨울 추위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프롬이 나를 플래츠까지 태워다 준 지 일주일이 지난 어느 날 아침 창밖을 내다보니 눈이 내려 수북하게 쌓여 있었습니다. ~~플래츠 아래쪽에 쌓인 눈 더미에 화물 열차가 갇히는 바람에 철로가 막혀 버렸소. 그가 눈부신 하양 속으로 마차를 몰면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봐요~~~그럼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겁니까? 지름길을 통해 고당 정션으로 가야죠. 그는 채찍으로 스쿨하우스힐 쪽을 가리키면서 대답했습니다. 정션으로요~~~이런 눈보라에 말입니까? 아니, 16킬로미터는 족히 될 텐데요.
저게 우리집이오. 프롬이 잘 움직이지 않는 팔꿈치를 옆으로 들어 올리며 말했습니다. ~~~어느덧 눈은 그치고 흐르는 물 같은 햇살이 섬광처럼 우리 위쪽 비탈 길에 있는 그 애처롭고 누추한 집을 드러냈습니다. 검은 유령 같은 낙엽성 넝쿨 식물이 현관에서 펄럭거렸고, 페인트칠이 떨어져 나간 얇은 나무 벽은 눈이 그치면서 불기 시작한 바람 속에서 떨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1]
밤은 쥐죽은 듯 고요했으며, 대기는 아주 건조하고 청명해서 추위를 거의 느낄 수 없었다.
사오 년 전에 프롬은 우스터에 있는 공과 대학에서 일 년간 공부하면서 어떤 친절한 물리학 교수와 함께 실험실에서 일한 적이 있다. ~~~아버지의 죽음과 그에 뒤따른 여러 불행 때문에 이선은 학업을 중도에 포기해야 했다.
프롬은 아내의 조카 매티 실버가 어쩌다 밤에 마을로 놀러 갈 때면 그녀를 데리러 스탁필드까지 걸어가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있었다. 매티가 프롬 부부와 함께 살러 왔을 때 그녀에게 이런 기회를 주자고 처음 제안한 사람은 아내였다. 매티 실버는 스탬퍼드에서 왔다. 지나를 돕기 위해 프롬네 집에 오면서 아무 보수도 받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그 이전의 삶과 쓸쓸한 스탁필드 농장 사이에 너무 큰 차이를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프롬은 플래츠까지 마차를 몰고 마중 나간 첫날부터 이 아기씨를 좋아했다.
스탁필드 마을 사람들이 부르듯이 지나는 언제나 병을 달고 사는 사람이었다.
도대체 왜 매티가 떠나야 하는데? 글쎄, 시집가게 되면 말이지. 아내의 느릿느릿한 말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아, 당신이 필요로 하는 한 여길 떠나지 않을 거야. 그가 면도칼로 턱을 세게 문지르며 대꾸했다.
[2]
처음으로 이선은 슬쩍 매티의 허리를 안았다. 매티는 싫어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들은 마치 여름 개천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처럼 계속해서 걸었다. p51
그때 문이 열리고 아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키가 크고 여윈 아내가 캄캄한 부엌을 등진 채 한 손으로는 누비이불을 끌어당겨 납작한 젖가슴을 가리고 다른 손으로는 램프를 들고 서 있었다. ~~지나가 말없이 옆으로 비켜섰고, 매티와 이선은 부엌으로 들어갔다. 부엌은 한밤의 강마른 추위 R트이라 돌무덤처럼 몹시 차가웠다. ~~~오늘 밤은 지나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매티에게 보이는 것이 유난히 싫었다.
[3]
조림지의 아래쪽 끝자락에서 재목을 끌어 내릴 일이 있어 이선은 이튿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겨울 아침은 수정처럼 맑았다. 아침 해가 깨끗한 하늘에 빨갛게 타올랐고, 조림지 가장자리의 그늘은 검푸른 색깔을 띠었다. 눈부시게 새하얀 들판 건너편에는 멀리 삼림이 군데군데 연기처럼 드리워 있었다.
지난밤 이선과 지나는 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뒤 서로 단 한마디 말도 나누지 않았다. 지나는 침대 옆 의자 위에 놓인 약병에서 약 몇 방울을 따라 마시고는 노란 플란넬 헝겊을 머리에 뒤집어쓰고 얼굴을 돌린 채로 누웠다. 이선은 서둘러 옷을 벗고 그 곁에 자리를 잡을 때 아내를 보지 않기 위해 불을 꺼버렸다. 그가 누울 때 매티가 자기 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방에 켜 놓은 촟불이 층계참을 가로질러 조그마한 빛을 쏘아 이선의 방문 아래에 보일락 말락한 선을 그어 놓았다. 그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눈을 떼지 않았다.
지금 맑은 아침 공기 속에 매티의 얼굴이 아직 눈앞에 선했다. 그것은 붉은 햇살의 일부였고 맑게 빛나는 흰 눈의 일부였다.
그는 매티가 어떤 의미에서는 불운 탓으로 자기 집에 매인 몸이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가엾게 여겼다. 매티 실비는 제노비아 프롬네 사촌의 딸이었다. 그 사촌은 산간 지방에서 살다가 코네티컷주에 내려와 스탬퍼드 출신 여자와 결혼하고 장사가 잘되는 장인의 약국 사업까지 물려받아 집안으로부터 부러움과 질시를 한 몸에 받았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큰 야심을 품고 있던 사나이 오린 실비는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한 채 너무 일찍 죽었다. ~~~장엄하게 장례식을 치른 뒤에 회계 장부를 열어 본 것은 그 아내와 딸을 위해서는 여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내는 이 장부 때문에 죽었고, 매티는 스무 살에 고아로 혼자 남아 피아노를 판 돈 50달러를 가지고 살아가야만 했다.
아내가 갑자기 의사의 진찰을 받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을 보면 전처럼 전적으로 자기 건강 문제에 몰두하고 있었다.
[4]
아내가 떠나자 이선은 옷걸이에서 외투와 모자를 집어 들었다. 매티는 전날 밤의 댄스곡 하나를 흥얼거리면서 접시를 닦고 있었다. ~~~~그는 잠깐 늑장을 부리면서 매티가 설거지를 끝내고 바느질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싶었다.
이선은 자기와 매티가 저녁 식사를 마친 뒤 그날 저녁 어떤 모습일까 마음속에 그려 보았다. 생전 처음 두 사람은 집안에 둘이서만 있게 될 것이다. 마치 결혼한 부부처럼 난로 양쪽에 마주 앉아 있을 것이다.
지나의 고향은 스탁필드보다 조금 더 크고 기차가 다니는 곳에서 가까운 마을이었다. 지나는 처음부터 남편에게 외딴 농장에서의 생활은 자기가 결혼할 때 기대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렸다. ~~~지나는 스탁필드를 얕잡아 봤는데 그렇다고 자기를 얕잡아보는 데서는 살 수 없었다.
앤드루 해일은 크고 희끗희끗한 콧수염을 기르고 옷깃이 닿지 않는 두 턱에 수염이 까칠까칠하게 자란 얼굴색이 붉은 사람이었다. ~~~사업을 꽤 잘하는 편이었지만 만사태평한 습성에다가 식솔이 많이 딸린 탓에 그는 스탁필드 마을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자주 빚을 지는 처지라고 알려져 있었다. 이선네 집안과 오랜 친구였고 그의 집은 지나가 가끔 찾는 몇 안 되는 집들 가운데 하나였다.
이선은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지만 마침내 50달러를 선금으로 지불해 달라고 간신히 부탁했다. ~~~모든 일에 그러듯이 건축업자는 예의를 갖춰 거절했다.
이선은 부엌 문간에 이르러 문고리를 돌렸다. 그런데 문이 열리지 않았다. 그는 문이 잠겨 있는 것을 알고 놀라서 문고리를 난폭하게 흔들어 댔다. 그러다 매티가 집에 혼자 있으며, 밤중에 스스로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매티의 발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리며 어둠 속에 서 있었다.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귀를 기울여 보아도 아무 소용이 없자 기뻐서 떨리는 목소리로 “이봐, 맷!” 하고 불렀다.
정적이 대답했다. 하지만 잠시 뒤 계단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더니 문틀 주위에 그가 전날 밤에 본 것과 같은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정말 이상하게도 전날 밤에 일어났던 일이 정확하게 그대로 되풀이된 탓에 문 여는 소리가 들릴 때 아내가 자기 앞 문지방 위에 서 있으려니 예상했다. 그러나 문이 열리자 매티가 앞에 서 있었다.
매티는 손에 램프를 들고 부엌의 검은 배경을 등진 채 지나가 서 있던 그대로 서 있었다. 똑같은 높이로 햄프를 들었고, 그 불빛도 전날 밤과 똑같이 분명하게 그녀의 가냘픈 목과 어린아이보다 굵지 않은 갈색 손목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그 불빛이 위로 올라가자 그녀의 입술에 윤기가 흘렀고, 눈 가장자리는 벨벳 생깔이 되었으며, 눈썹의 검은 곡선 윗부분이 순백의 우윳빛으로 빛났다.
그녀는 초롱불을 식탁에 두었다. 식탁에는 갓 구운 도넛과 뭉근하게 끓인 불루베리와 그가 좋아하는 피클을 화려한 붉은 유리 접시에 담아 저녁 식사를 정성스럽게 차려 놓았다. ~~~이선은 행복감에 숨이 막혔다.
또다시 이선은 가시처럼 짜릿하게 찔러 오는 갑작스러운 질투심을 느꼈다. 정말 자신이 온다고 그녀의 얼굴이 이렇게 빛날 수 있을까?
참, 매티, 누구 찾아온 사람 없었어? 그가 몸을 구부려 건성으로 난로의 걸쇠를 살피면서 불쑥 입을 열었다. 매티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웃으면서 말했다. 맞아요, 한 사람 있었어요. 그는 자신의 미간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는 것을 느꼈다.
그게 누군데? ~~~ 누구긴요, 조섬 파월이죠. 돌아오는 길에 잠시 들려서는 자기 집으로 내려가기 전에 커피나 한 잔 달라고 하던걸요.
매티는 부엌 찬장 위에 깨진 접시 조각들을 펼쳐 놓았다. 그에게는 산산조각이 난 둘만의 밤이 놓여 있는 것만 같았다. ~~~이선은 유리 조각들을 넓적한 손바닥에 모아 들고는 부엌을 나와 복도로 걸어갔다. 그곳에서 초 동강에 불을 붙이고는 도자기 찬장을 열더니 긴 팔을 들어 가장 높은 선반에 올려놓았다. 정교한 솜씨로 감쪽같이 맞춰 두어 아무리 자세히 살펴보아도 밑에서는 접시가 깨진 것을 알 수 없었다. 이튿날 아침에 아교로 붙여 두면 아마 몇 달은 지나서야 아내가 이 일을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그동안 새즈폴스나 베츠브리지에 가서 똑같은 접시를 구할 수 있다.
[5]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쳤다.
저기 맷, 그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을 꺼냈다. 조금 전 집에 돌아오는 길에 바넘네 전나무 아래에서 내가 뭘 봤을 것 같아? 네 친구 하나가 키스를 받는 걸 보았지. 이 말이 저녁 내내 혀끝에 맴돌았지만 막상 말하고 보니 이선은 말할 수 없이 천박하고 부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매티는 고개를 돌리거나 눈꺼풀을 들지 않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지나 아주머니가 저를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아니겠죠?
두 사람이 이렇게 앉아 있을 때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이선은 고개를 돌렸다. 고양이가 정두리 벽판에 있는 쥐를 쫓느라고 지나의 의자에서 껑충 뛰어내렸다. ~~~내일 이 시간쯤이면 아내가 저 의자에 앉아 흔들흔들하고 있겠지. 이선은 생각했다.
[6]
이튿날 아침 식사 때 조섬 파월이 두 사람 사이에 끼었다. ~~~이선은 자기 삶이나 매티의 삶에서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이렇게 행복한지 그 이유를 몰랐다.
마을로 옮겨야 할 마지막 목제들이 남아 있었다. 조섬 파월은 -겨울철에는 이선을 위해 정기적으로 일하지 않지만- 이 일을 도와주려고 잠시 들렸다.
자, 이봐, 맷, 접시를 붙일 아교를 사왔어! 얼른 그걸 갖고 와. 그는 한 손으로 매티를 옆으로 조금 밀어내고 다른 한 손에 든 아교 병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매티는 그의 말을 듣고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아, 이선 아저씨.... 지나 아주머니가 오셨어요. 매티가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속삭였다. ~~~걱정할 필요 없어. 밤에 내려와서 고쳐 놓을 테니까.
[7]
이선은 젖은 옷을 걸려고 복도로 나갔다. 지나의 발소리에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계단 위를 향해 이름을 불렀다. 지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다 올라가 방문을 열었다. 방의 거의 캄캄했지만 어둠 속에서도 그녀가 창문 옆에 꼿꼿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지나. 그는 문지방에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녁이 다 준비되었는데 내려오지 않겠어? 한 숟가락도 뜰 수 없을 것 같아. 그녀가 대답했다. ~~~내 병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해. ~~~나더러 여자애를 하나 고용해야 한다고 했어. 집에서 손끝에 물 한 방울을 묻혀서도 안 된다고.
당신 어머니 병시중 드느라고 건강을 잃었는데 당신이 내 건강을 되찾는데 드는 돈을 아까워한다고는 부끄러워서 차마 입을 떼지 못하겠네! ~~~불행한 칠 년을 함께 지내 오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처음으로 드러내 놓고 화를 터뜨린 상황이었다.
나를 양로원에 보내고 이 일을 끝내는 게 좋겠지.... 예전에도 당신 가족 중에 그곳에서 지낸 사람이 있을 텐데. 이 냉소가 그를 불로 달구는 듯했지만 이선은 그냥 흘려버렸다.
저, 이선 아저씨, 왜 그러세요? 맛이 없어요? 아냐, 맛은 그만이야. 다만 난...... 그는 접시를 밀어 두고 의자에서 일어나 식탁을 빙 돌아 매티 쪽으로 걸어갔다. 매티가 놀란 눈을 하고 벌떡 일어났다. 이선 아저씨, 뭔가 잘못된 거죠! 전 d라고 있단 말이에요! 겁에 질려 그에게 몸을 기댄 매티는 몸이 녹아 내려 사라지는 듯 했다. 이선은 두 팔로 매티를 붙잡고 꼭 껴안았다. 매티의 속눈썹이 그물에 걸린 나비처럼 그의 뺨에 부딪치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에요..... 무슨 일이죠? 매티는 말을 더듬었다. 그는 마침내 그녀의 입술을 찾아냈다. 그리고 나머지는 모두 잊고서 그 입술이 주는 기쁨에만 취해 있었다.
못 가, 맷! 가지 못하게 하겠어! 지나는 언제나 하고 싶은 대로 해 왔어. 하지만 이제는 나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매티는 재빠른 몸짓으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뒤에서 아내의 발소리가 들렸다.
매티는 씩씩하게 음식을 씹으며 지나에게 베츠브리지에 다녀온 일에 대해 한두 가지 물었다.
도대체 누가 이랬는지 알고 싶네. 지나는 무서운 얼굴로 시선을 이선에게서 매티한테로 옮기며 말했다. ~~~그녀는 깨진 조각을 조심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누가 이런 짓을 했는지 알고 싶어.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떻게 고양이가 내 그릇장에 올라갔는지 알고 싶은데? 지나가 물었다. 쥐를 쫓느라고 그랬나 보지. 이선이 대답했다.
매티가 갑자기 김이 나는 물에서 팔을 뺐다. 지나 아주머니. 그건 이선 아저씨의 잘못이 아니에요! 고양이가 깨뜨린 거예요. 하지만 찬장에서 내린 것은 저예요. 그러니 그걸 깨뜨린 책임은 저한테 있어요.
네가 내 피클 접시를 내렸다고..... 도대체 뭘 하려고? 매티의 두 뺨에 홍조가 떠올랐다. 저녁상을 예쁘게 차리고 싶었어요. 그녀가 대답했다.
매티 실버. 넌 나쁜 계집애야. 난 늘 그걸 알고 있었어. 네 아버지가 일찍이 하던 버릇이야. 너를 이 집에 데려올 때 경고도 들었어. 그래서 물건들을 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두려고 했지.....
[8]
집이 조용해지고 침대에서 지나의 고른 숨소리가 들려와 이제 부엌에서 벌어졌던 장면이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자 이선은 곧 은신처로 내려왔다. 지나가 자리를 뜬 뒤 매티와 그는 말없이 서 있었을 뿐 어느 쪽도 서로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았다. ~~~식탁에 담배쌈지와 파이프가 놓여 있었는데, 그 밑에는 씨앗 카탈로그에서 찟은 종잇조각에 “이선 아저씨, 걱정하지 머세요.” 라고 쓰여 있었다.
서재로 들어가 이선은 탁자 위에 초롱불을 올려놓고서 몸을 구부리고 불빛에 비춰가며 그 쪽지를 몇 번이나 읽고 또 읽었다. 매티가 그에게 편지를 쓴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불평만 늘어놓는 무정한 여자 곁에서 모든 생애를 낭비해야 하는가? 그에게는 여러 가지 다른 가능성들이 있었지만 지나의 편협함과 무지 때문에 하나씩 희생시켜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지나는 결혼했을 때보다 백배 더 억울해하고 더 불만스러워했다. 유일한 기쁨이라면 남편에게 고통을 주는 것뿐이었다.
이선은 낡은 너구리 가죽 외투를 껴입고 상자로 만든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뺨 아래에 이상한 돌기들이 있는 딱딱한 물건이 느껴졌다. 약혼햇을 때 지나가 만들어 준 쿠션이었다. 아내가 바느질 하는 모습을 본 유일한 작품이었다. 그것을 마룻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벽에 머리를 기댔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호롱불을 다시 켜고 탁자 옆에 앉았다. 책상 서랍을 뒤져 종이 한 장을 찾아내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지나 나는 당신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어. 그런데 그것이 모두 무슨 소용인지 잘 모르겠군. 나는 당신을 탓하지도 나 자신을 탁하지도 않아. 어쩌면 서로 헤어지는 게 우리 둘 모두에게 더 좋겠지. 나는 서부로 가서 새로운 운명을 개척해 보려고 해. 당신은 농장과 목제소를 팔아 그 돈으로~~~”
이선은 돈이라는 단어에서 잠시 펜을 멈췄다. ~~~지나에게 농장과 목재소를 넘겨준다면 자신은 무엇을 가지고 새 삶을 시작한단 말인가?
이선은 그만 잠이 들었고, 깼을 때는 겨울 새벽의 냉기가 방안에 가득 차 있었다. ~~~그가 창가에 서 있을 때 뒤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매티가 들어왔다.
지나는 매티를 향했다. “네 트렁크는 썰매에 싣기엔 너무 무거워서 대니얼 번이 와서 플래츠까지 갖다 줄 거다.” “정말 고마워요. 지나 아주머니.” 매티가 말했다.
“먼저 너하고 따져 볼 게 있는데.” 지나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면 타월 한 장이 없어졌더구나. 그리고 거실의 박제 부엉이 뒤에 놓여 있던 성냥 통을 네가 어떻게 했는지 모두지 알 길이 없네.”
이선은 ~~~격한 반발심이 또다시 마음속에 복받쳤다. 맑은 정신에는 도저히 믿기 어려워 보이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그는 매티가 추방당하는 장면을 무력하게 지켜봐야 하는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9]
이선이 부엌으로 들어가니 아내가 난로 옆에 앉아 있었다. 머리에 숄을 두르고 <신장병과 치료약>이라는 책을 읽고 있었다.
지나는 그가 들어섰을 때 고개를 들어 쳐다보지도 움직이지도 않았다. 조금 뒤 이선은 “매티는 어디 있지?”하고 물었다. 그녀는 책장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트렁크를 끌어 내리고 있겠죠.”하고 대답했다.
나들이옷을 입은 매티가 문을 등지고 얼굴을 두 손에 파묻은 채 트렁크 위에 앉아 있었다. 흐느껴 우느라 이선이 부르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이선은 소나무들이 좀 더 넓게 자리 잡은 숲에 이를 때까지 조용히 말을 몰았다. 그리고 나서 말을 세우고 매티가 썰매에서 내리는 것을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향기로운 나무 그루터기 사이를 지나갔고, 발밑에서는 눈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갑자기 매티가 일어서서 말했다. 여기에 더 있으면 안 되겠어요. 이선은 꿈에서 아직 깨지 않는 듯 매티를 멍하니 계속 쳐다보았다. 시간은 넉넉해 그가 대답했다. ~~~그래서 돌아서서 잠자코 매티를 따라 썰매로 왔다. 다시 썰매를 몰고 떠났을 때는 태양이 언덕 너머로 기울었고, 소나무 줄기들이 어느덧 붉은색에서 회색으로 바뀌었다. 들판 사이로 난 꾸불꾸불한 작은 길을 따라 두 사람은 스탁필드의 큰길로 되돌아왔다.
아버지 쪽 친척 중에 너를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부탁하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길이 이선의 목재소 옆 골짜기로 내려가는 지점에 이르렀다. 그 길을 따라 내려갈 때 어둠이 육중한 솔송ㄴ나무 가지에서 검은 면사포처럼 떨어지며 그들과 함께 내려앉았다.
그들은 코베리 도로의 꼭대기에 이르렀다. 교회의 희뿌연 불빛과 바넘네 전나무의 검은 커튼 사이로 비탈길이 썰매 하나 없이 그들 앞에 쭉 뻗어 있었다. ~~~이선이 말했다. 지금 내가 너를 썰매에 태워 내려가면 어때?
이선이 먼저 뛰어내렸고, 그녀는 그의 도움을 받아 썰매에서 내렸다. 그러면서 조금 망설이는 기색으로 하지만 어디에도 썰매가 보이지 않는데도. 하고 말했다. 아니, 있어~ 바로 저 전나무 밑에 말이야. ~~~그러고 나서 매티의 손을 잡고 썰매가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맷 준비됐지? 이선은 그들 사이에 넓은 도로가 가로 놓인 것처럼 크게 소리 질렀다. ~~~썰매는 껑충 튀어 오르며 출발했다.
두 사람은 썰매에서 뛰어내려 언덕을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선은 한 손으로 썰매를 끌고 다른 손으로 매티의 팔을 잡았다.
여기가 네드와 루스가 서로 입을 맞춘 덴가요? 매티가 숨을 죽이며 속삭이고는 두 팔을 벌려 그를 껴안았다. 매티의 입술이 그의 입술을 찾아 그의 얼굴을 훑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행동에 넋을 잃고 그녀를 꼭 껴안았다.
매티는 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녀가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아, 저도 못 떠나겠어요! 그녀가 울부짖었다. 맥,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떡하면 좋지?
맷, 그럼 어떻게 할까? 어떡하면 좋지? 두 사람은 어린애들처럼 서로 손을 꼭 쥐고 떨어지지 않았다. 절망적인 흐느낌으로 매티의 몸이 떨렸다. 정적을 뚫고 교회의 시계가 5시를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 이선 아저씨, 이제 시간이 됐어요. 매티가 소리쳤다. 그는 다시 매티를 끌어안았다. 무슨 시간이 됐단 말이야? 설마 지금 내가 너를 혼자 보낼 고라고 생각하진 낞겠지?
기차를 놓치면 전 어디로 가요?
기차를 타면 어디로 갈 건데?
매티는 말없이 서 있었다. 그의 손을 잡은 매티의 손은 차갑고 맥이 풀려 있었다. 지금 우리가 서로 헤어진다면 어디에 간들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가 말했다.
이선 아저씨 썰매를 한 번 더 태워주세요. 어디로 내려간단 말이야? 저 비탈길이요. 어서요. 매티가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우리가 다시는 올라오지 못하게 말이에요.
갑자기 길 건너편에서 늙은 밤색 말이 조그맣게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생각했다. 말이 왜 저녁을 주지 않나 궁금해하는구나.
썰매가 앞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는 다리를 쭉 뻗고 발뒤꿈치를 길바닥에 댄 다음 두 손으로 매티의 머리를 뒤로 젖혔다. 그러더니 갑자기 다시 일어섰다.
일어나 봐 그가 명령했다. 늘 주의를 기울이던 말투였지만 매티는 자리에서 몸을 웅크리고는 아니, 아니, 아니에요! 하고 날카롭게 되풀이해 말했다. 일어나라니까! 왜요? 내가 앞에 앉겠어. 안 돼요. 안 돼! 앞에서 어떻게 조종해요? 그럴 필요 없어. 길을 따라갈 거니까.
왜냐하면.... 왜냐하면 네가 나를 안고 있는 걸 느끼고 싶으니까. 그는 말을 더듬거리며 매티를 끌어 일으켰다.
두 사람이 나무를 향해 질주하는 순간 매티는 두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썰매를 옆으로 틀었다. 썰매가 빗나갔지만 다시 한번 방향을 바로잡고는 튀어나온 그 검은 덩어리를 향해 돌진했다. 마지막 순간 대기가 수백만 겹의 불타는 전선처럼 그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서 느릅나무....
하늘에 여전히 구름이 짙게 깔려 있었지만 위를 쳐다보니 별 하나가 보였다. 그는 그 별이 천랑성일까, 아니면……. 아니면……. 하며 어렴풋하게나마 별을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다 너무 피곤해서 무거운 눈꺼풀을 닫고 잠을 청해 보려고 했다……. 그 고요함이 정말 깊어 근처 눈 덮인 곳 어디에선가 조그마한 동물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들쥐처럼 나지막한 겁먹은 울음소리를 냈다. 나른한 가운데서도 그 동물이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되었다. 다음 순간 그는 그것이 고통을 겪고 있음에 틀림없다고 느꼈다. 그 고통이 극심해 신비스럽게도 그것이 그의 몸을 관통하는 느낌이었다. 소리 나는 쪽으로 몸을 움직여 눈 위로 왼팔을 뻗었지만 헛수고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기보다 손에 만져지는 느낌이었다. 부드럽고 탄력 있는 그 물체는 그의 손바닥 밑에 잇는 것 같았다. 그 동물이 고통을 겪는다는 생각에 그는 견딜 수가 없었다. 몸을 일으키려고 애썼지만 바위나 어떤 거대한 덩어리가 몸을 짓누르고 있는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혹시 그 조그마한 동물을 잡아 도와줄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계속 왼손으로 조심스럽게 더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손에 닿은 부드러운 물체가 매티의 머리카락이고 자기 손이 그녀의 얼굴에 놓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선은 간신히 무릎으로 몸을 일으켰고, 그가 움직일 때마다 엄청난 무게가 함께 움직였다. 그는 계속해서 매티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작게 지저귀는 소리가 그녀의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는 얼굴을 그녀의 얼굴에 가까이 숙이고 입에 귀를 갖다 댔다. 어둠 속에서 그녀가 눈을 뜨는 것이 보였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 맷. 난 우리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어. 그가 신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밤색 말이 울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말에게 여물을 줘야 할 텐데.
[에필로그]
내가 프롬네 부엌으로 들어가니 투덜거리는 단조로운 목소리가 그쳤습니다. 거기에 앉아 있는 두 여자 중에 누가 불평을 늘어놓은 사람인지 알 수 없었지요.
두 여자 중 하나가 키가 크고 뼈가 앙상한 몸을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사라사 실내복이 칠칠치 못하게 어깨에서 흘러내렸고, 얼마 안 되는 희끗희끗한 머리카락은 넓은 앞이마부터 뒤로 넘겨 부러진 핀으로 고정해 놓았더군요. 이 여자는 아무 표정이 없고 아무것도 비치지 않는 흐릿하고 불투명한 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얇은 입술은 얼굴과 마찬가지로 혈색이 없었습니다.
다른 여자는 몸집이 훨씬 작고 가냘팠습니다. 난로 옆 안락의자에 몸을 움츠리고 앉아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가자 재빨리 내 쪽으로 머리를 돌렸지만 몸은 조금도 머리를 따라 움직이지 않았지요.
시골이라고 하지만 부엌은 초라해 보였습니다. ~~~~어이 추워라! 불이 거의 꺼진 모양이네. 프롬은 나를 따라 들어오면서 변명하듯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습니다.
찬장 쪽으로 간 키 큰 여자는 우리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다른 여자는 쿠션을 댄 벽감에서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불평을 늘어놓는 듯 대답했지요. “난로는 지금 막 피운걸요. 지나 아주머니는 잠이 들었고, 얼마나 오래 자는지 아주머니를 깨워 난로를 살펴보게 하기 전에 전 그만 얼어 죽는 줄 알았다니까요.”
그제야 나는 그 여자가 바로 내가 들어설 때 불평을 늘어놓던 사람이라는 걸 알았다.
이 여자와 같이 사는 다른 여자가 찌그러진 낡은 파이 접시에 담긴 먹다 남은 식어 빠진 고기파이를 들고 식탁에 돌아와서는 자기를 향한 비난도 아랑곳없이 식욕이 나지 않는 음식을 내려놓았습니다. 프롬은 여자가 다가오자 머뭇거리며 그 앞에 섰습니다. 그러고는 나를 쳐다보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이 내 아내 지나예요.” 조금 간격을 두었다가 그는 안락의자에 앉은 여자를 향하며 “그리고 이쪽은 매티 실버 양입니다....” 하고 덧붙였습니다.
친절한 헤일 부인은 내가 플래츠에서 길을 잃고 눈더미에 파묻혀 버린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침에 내가 무사히 돌아온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던지 내 위험 덕분에 더욱 부인의 총애를 받게 된 느낌마저 들었습니다.
처음부터 그야말로 끔찍했지요. 그들을 이리로 옮겨왓을 때 난 이 집에 있었어요..... 사람들은 매티 실버를 당신이 지금 머무는 방에 눕혔어요. 매티와 난 아주 친했고, 그녀가 이듬해 봄에 내 결혼 들러리를 서 주기로 했었지요...
소문이 퍼진 건 그 이튿날이었지요. 부인이 계속 말했습니다. 지나 부인이 새로 고용한 아가씨가 오기로 되어 있어 매티를 서둘러서 매보냈다고요. 여기 사람들은 매티와 이선 씨가 기차를 타러 플래츠로 가고 있어야 할 시간에 도대체 왜 그날 밤 썰매를 타고 있었는지 잘 알지 못했지요....지나 부인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나도 전혀 몰랐어요.... 지금까지도 알 수가 없는 노릇이지요.
어쨌든 사고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와서는 이선 씨를 데려다 놓은 목사님 집에서 같이 머물렀어요. 그리고 의사들이 매티를 옮겨도 괜찮다고 하자마자 사람을 보내 농장으로 다시 데려갔지요.
그때부터 쭉 그 여자가 그 집에 있었습니까? 해일 부인은 그곳밖에 아무 데도 갈 곳이 없었으니까요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그래요 거기서 쭉 살았어요.
지나 부인이 할 수 잇는 한 정성껏 매티를 보살피고 이선 씨를 돌보았어요. 지나 부인이 얼마나 아팠는지를 생각하면 그건 기적이었지요.
[작품 해설]-옮긴이 김욱동 교수-
미국 여성 작가들 중에서 순수 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작가를 꼽는다면 아마도 이디스 워튼이 첫손가락에 꼽힐 것이다.
이디스 워튼의 작품 가운데 ‘현대의 고전’의 반열에 오른 <이선 프롬>은 워튼의 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이다. 미국 중고등학교 독서 목록에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말할 것 없고 인문학이나 일반교양을 위한 교과 목록에서도 늘 빠지지 않는다.
<이선 프롬>은 작가가 사망하기 일 년 전, 그러니까 작품이 출간 된지 이십 오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일반 독자들로부터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플롯에서 볼 수 있듯이 가능성과 잠재력을 가진 한 젊은이가 주어진 환경의 힘에 무참히 파괴되는 모습을 다룬다. 이선은 그가 원하던 엔지니어나 화학자가 될 충분한 자질과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꿈과 이상을 실현하기에는 그를 둘러싼 환경이 너무 가혹했다. 그는 결국 외부적 힘이라는 덫에 걸린 채 낡은 폐선처럼 살게 된다.
이선 프롬은 한 때 매티 실버와 함께 서부로 도망가 그곳에서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려고 생각한다. 그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이웃 마을에는 실제로 그렇게 하여 성공한 사람도 있다.
<이선프롬>에서는 작가의 체취가 물씬 풍긴다. 어찌 보면 이 작품은 작가 자신의 내적 삶을 그대로 옮겨 놓았다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다. 이 점에서 워튼의 문학뿐 아니라 미국 문학에서도 가장 자전적인 성격이 짙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디스 워튼의 결혼 생활은 처음부터 행복하지 못했다. 남편 에드워드 워튼은 신경질환을 앓는데다 때로는 거의 정신병에 가까운 증세를 보였다. 아내가 문학가로서 명성을 얻으면 얻을수록 질투심도 그만큼 커졌다. 심지어 이디스는 차라리 남편이 죽기를 바랄 정도였다고 하니 두 사람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다.
더구나 남편이 외도를 하자 이디스가 받은 충격은 무척 컸다. ~~~<이선 프롬>을 읽노라면 작가 자신의 삶이 눈앞에 자주 어른 거린다. 가령 이디스와 에드워드가 거의 평생에 걸쳐 신경 쇠약증을 비롯한 질병에 시달린 것처럼 작중 인물들도 온갖 질병에 시달린다. 더구나 주인공 이선 프롬의 불행한 결혼과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이 작가의 삶과 비슷하다. 주인공 이선 프롬은 작가 자신이고, 아내 지나 프롬은 작가의 남편 에드워드이며, 매티 실버는 모던 플러턴인 셈이다. 이디스 워튼은 남녀의 역할만 살짝 바꿔 놓았을 뿐 불행한 결혼 생활을 둘러싼 경험을 이 작품에 거의 그대로 옮겨 놓는다.
워튼은 시인이 무색할 만큼 시적 이미지와 상징 등을 효과적으로 구사한다. ~~~워튼이 시집을 발간한 시인이. ~~~소설은 아주 서정적이어서 어떤 대목에서는 한폭의 수채화를 보는 듯하다. -
[Review]
짧은 글이든 소설이든 처음부터 완전 허구를 꾸며낼 수는 없다. 글은 삶의 이야기다. “줄리언 반스”는 <플로베르의 앵무새>라는 책에서 “플로베르”의 글 <순박한 마음>에 나오는 “펠레시티”와 앵무새의 이야기는 플로베르가 1845년 이탈리아에 가던 중 일기에 적을 정도로 인상 깊게 본 앵무새와 연관이 있다고 말했다.
펠레시티는 불쌍하고 교육받지 못한 하녀다. 그는 50년간 같은 여주인에게 봉사하며, 아무런 원망도 없이 자기 삶을 희생한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흉포한 약혼자, 주인의 아이들, 조카, 그리고 팔이 암에 걸린 노인을 차례로 섬겼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거나 떠나버렸고, 그녀의 삶에 의미를 남기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펠레시티는 오직 신앙이 삶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녀에게는 또한 오랜 시간 함께 지내온 앵무새 ‘룰루’가 있었고, 룰루가 죽자 새를 박제로 만들었다. 결국엔 그녀도 죽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지만, 플로베르는 그녀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심장박동이 조금씩 느려졌고, 샘물이 마르듯 메아리가 사라지듯 매번 더 희미해지고 더 가늘어졌다. 마지막 숨을 내뱉으며 그녀는 열린 하늘에서 거대한 앵무새 한 마리가 자기 머리 위로 나는 모습을 얼핏 본 듯했다.“ -플로베르의 "순박한 마음"-
플로베르는 세상으로부터 위로를 얻지 못한 불쌍한 펠레시티가 마지막 임종의 순간 성령 하나님을 만나는 것으로 위안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성령의 상징은 비둘기지만 플로베르는 말하는 앵무새로 대체함으로 독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어떤 한 사람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은 아니다. 그것이 성공적인 삶이든 또 그렇지 못한 삶이든 이야기는 결국 개인의 몫이다. 돼지 같은 왕이 있는가 하면 왕 같은 돼지들도 있다. 글은 다양한 삶의 모습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새로운 삶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이다.
이 책 <이선 프롬>은 공과대학에 다니던 한 청년 “이선 프롬”이 갑작스러운 부친의 사망으로 가세가 기우는 바람에 삶의 환경에 메여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이야기다. 아내인 '지나 프롬'은 어려운 살림살이에 남겨진 모친을 돌보느라 지쳐버렸고, 병까지 얻어 매력 없는 여인으로 변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의 먼 친척 벌 되는 조카 “매티 실버‘가 살림을 도와주러 오게 되었다. 스무 살의 그녀는 생기발랄했고, 이선 프롬은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두 사람은 자연스레 사랑의 감정이 생겨났고 아내 몰래 서로의 마음을 나누게 된다.
“그가 누울 때 매티가 자기 방에서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방에 켜 놓은 촟불이 층계참을 가로질러 조그마한 빛을 쏘아 이선의 방문 아래에 보일락 말락한 선을 그어 놓았다. 그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그는 눈을 떼지 않았다.”(본문)
그러던 어느 날 아내는 도시에 있는 큰 병원을 다녀온 후, 몸 상태가 심각하다며 시중을 드는 여자아이를 데려오겠다고 말한다. 가뜩이나 어려운 집안 살림에 아내의 말을 두 사람을 함께 둘 수 없으니 매티 실버를 내보내겠다는 뜻이었다. 이선 프롬은 결국 아내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었고, 그녀를 기차 정거장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이별의 아쉬움으로 두 사람은 지난날 약속했으나 이루지 못한 눈썰매를 타보기로 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언덕을 내려갈 때, 교회의 종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은 살고 있는 곳을 떠나 먼 나라로 가서 새로운 삶을 개척할 생각도 했다. 그때마다 자신의 생계에 도움을 주는 회색 말이 여물을 찾는 소리가 글 속에 여러 번 등장한다. 결국 두 사람은 언덕길에서 큰 사고를 당했고. 이선 프롬은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 두 사람은 떠나지 못하고 되돌아온다.
이야기는 불구의 몸으로 절망에 빠진 한 인간 “이선 프롬” 의 과거를 제삼자를 통해 들려주는 것으로 시작한다. 작가는 주인공 “이선 프롬”이 고통스러운 삶의 환경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생계를 책임진 회색 말은 여물을 찾고, 차리라 죽기를 작정했을 때는 교회 종이 울리는 것으로 묘사했다.
“하고자 하는 일들을 이십 년이 넘게 폐선처럼 죽치고 앉아서 바라만 보고 있으니 마음이 상하고 용기를 잃을 법도 하지. 프롬네 농장은 늘 홀아비 주머니처럼 텅 비어 있지 뭔가. 저 오래된 물방아 하나가 지금 몇 푼이나 나가겠나. 이선이 해 뜰 무렵부터 캄캄한 밤까지 농장과 물방앗간에서 뼈 빠지게 일할 수 있었을 때는 그럭저럭 입에 풀칠을 했었어. 하지만 그때도 식구들이 거의 모든 걸 먹어 치웠지. 원, 지금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통 모르겠네.” (본문)
미국의 명문가에서 풍족하게 살았던 작가. 이디스 워튼의 결혼 생활은 불행했다고 한다. 남편의 외도로 결국 이혼하게 되었고, 그녀 역시 다른 ‘모던 플러턴’이라는 남자를 사귀기도 했다. 작가는 이 소설 속에서 삶의 환경에 매인 ‘이선 프롬’을 자신과 동일시했으며, 남편을 소설 속의 '지나 프롬'으로, '매티 실버'는 '모던 플러턴'으로 역할을 살짝 바꾸었다고 평론가들은 말하고 있다.
시인이기도 한 저자의 글은 수사(修辭)가 시처럼 아름답다. 스토리가 분명하고 일목요연하여 편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이다. 1895년 출생으로 미국 여성 작가 중에서 순수 문학의 길을 걸은 최초의 작가를 꼽히며 여성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이 책은 작가의 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작품으로 미국 중고등학교 독서 목록에 약방의 감초처럼 꼭 끼고, 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말할 것 없고 인문학이나 일반교양을 위한 교과 목록에서도 늘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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