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교리로 알고 있던 바울을,
바울이 처형당하게 했던 그 당시 언어로 바울이 말하도록 ... 이라는 말씀으로 강의가 시작되었다.
예수의 협력적 종말론의 선상에서 바울은 여기저기 공동체를 세우는데 힘썼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 운동을, 바울은 에클레시아 운동을 했는데
부르는 소리만 다를 뿐 같은 운동이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은 공짜치유와 열린 밥상 공동체를 구현해 낸 급진적이고 근본적인 평등성을 전혀 그렇지 않은 시대와 상황 속에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였고, 이를 계승해서 초대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의례"가 아닌 진짜 식사를 나누는 사랑의 식탁, 주님의 만찬으로 이어나갔다.
바울의 에클레시아 운동은 이미 그 당시 있던 시민들의 모임인 '에클레시아'에서 배제된 노예, 여자, 이방인도 포함시키는 대안가족과 같은 공동체였다. 예수의 하나님 운동과 다를 바 없이 같은 맥락으로 사랑과 포용을 보여준 것이다. 로마가 지배하던 여러 대도시에 모여든 빈민층들은 가난과 질병 등으로 해체된 가족이 많았는데, 에클레시아에서 하나님 아래 평등하게 형제자매가 되어 함께 밥상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제물에 바친 고기를 사먹는 것이나 고린도전서 11장에 나오는 주님의 만찬에서 먼저 식사가 이뤄지는 부분, 재정적인 이유로 세상법정에 호소하는 것 등 많은 부분은 부유한 크리스찬들, 가진 자들의 문제였다는 것이 새로웠다. 요즘 매주 고린도전서를 묵상하는데, 이 부분은 생각지 못했다. 고기를 살 수도 없는 이들, 밥벌이로 일을 하다가 겨우 예배 시간에 맞춰 와서 주님의 만찬에 참여할 수 있는 이들이 먼저 먹고 남아 있는 음식을 먹으며 받았을 모멸감과 여전한 불평등, 한몸되지 못한 서러움이 컸겠다. 바울의 에클레시아 운동이 가장 중요히 생각하는 하늘 아래 평등하고 한몸 아래 각 지체로 각자의 사명을 받아 살아가지만, 가장 일상적이면서도 지향하는 가치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밥상이라는 곳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바울로 하여금 비통한 마음으로 편지를 쓰게 했을 것이다.
여러 바울 서신 가운데 서로 다른 목소리같이 들리는 구절들이 있다.
이는 바울서신이 세 부류로 나뉘며 급진적인 진짜 바울서신, 가짜 바울로 볼 수 있는 보수적 바울(저자가 불확실한), 반동적인 바울(바울이 쓰지 않은)로 정리할 수 있다. 몇 년 전 처음 가짜 바울이라는 단어를 들었을 때는 그 말 자체에 대한 놀라움이 있기도 했는데 그것은 말과 문화가 세대를 거듭할 수록 희석되고 변화될 수 있으니 그럴 만하겠다. 강력한 제국, 세상권세 잡은 자, 시대우상의 강력한 흐름 속에서, 처음의 감사와 은혜를 잃어갈수록 급진적인 모습을 잃을 수 있겠다. 안정과 익숙함에 젖어 좋은 게 좋은 거지 타협하며 살아가지 않도록 날마다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야겠다.
에클레시아 한몸에 입회할 때에 베풀었던 세례 의식이 새로웠다. 분명 그런 조형물을 본 것 같고, 들은 것도 같은데 이렇게 재미있고 새로울 수가 있을까. 청년 때에 에베소와 갑바도기아에 가서 새롭게 경험했던 것이 20여년이 지나 완전 잊혀져있다가 되살아났다. 바울의 서신에서 형이상학적으로만 들리고 어떤 이미지를 그려보면서 애써서 이해하려 했던 구절들이 눈에 선명한 건축물로 드러나니 속이 시원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세례탕을 만들어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묻히고 예수와 함께 올리워져 예수와 함께 사는 것을 몸에 각인할 수 있었다. 물 몇 방울로 대신하는 축소된 세례가 너무나 섭섭하다는 강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런데 이렇게 몸에 새겨도 또 망각하는 게 인간이니, 매년 그것을 다시 확인하며 예수가 로마(세상)에 대해 죽고 이제 하나님을 위해 다시 산 것처럼, 세상 풍조에 휘말리기를 거절하고 새로 태어나는 의식을 가지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그런 외부적인 장치가 없다고 하더라도, 매일 그렇게 자신을 세상에 대해 죽고 하나님에게는 산 자로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겠다. 한몸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다양한 자리와 만남 가운데서 그런 장치가 되어주기도 하니 감사하다. 작고 사소한 것부터 깨어 알아차려서 부활하신 예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오늘 하루 내게 주어진 삶을 허투루 살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