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적으로 공부하신 스님의 글을 통해 붓다의 가르침의 진실을 조금 알게되었다.
그러나, 나는 붓다의 가르침을 넘어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의 고집멸도의 고집, 즉 인간의 고통과 그 원인은 인간의 진화와 생존을 위한 경로상에 존재한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이나 자크 라캉의 욕망에 관한 이론 등이 인간의 고통의 원인인 무명과 갈애의 원인을 가장 잘 설명하는 이론이다. 무조건 나쁘다고 야단치는 경전, 그리고 극복을 의해 정상적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가르침 보다 고통의 원인을 찾아 바르게 인도하는 것이 중생구제의 길일 수도 있다.
위의 의견에 대한,
무념스님의 말씀, 구경회 바로 그겁니다. 철학자도 아는 문제입니다. 철학자는 문제의 원인을 지금 처한 현실에서 시작합니다. 진화와 존재와 생존이 문제라는 것을...무명과 갈애가 원인이라는 것을....이것이 사성제의 고집에 해당합니다. 자 그게 무고집멸도와 같은 것인가요? 아니면 원래 공한 것이라는 이야기인가요?
무념스님의 말씀에 대한 구경회의 의견,
고집의 원인을 알면, 고통에 대처할 수 있게됩니다. 고통을 줄일 수 있습니다. 이 것은 무고집멸도 내지 공이라는 주장의 진실성을 알기위함이 아닌, 인간 실존의 문제입니다. 고집멸도의 진리를 깨달은 붓다께서도 장에 탈이 나서 열반했습니다. 인간이 존재의 근원에 대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해도 인간의 실존-현상은 자연의 법칙-진화의 법칙에서 탈출하지 못합니다.
고집스럽게 고집멸도만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이 인간의 정신적 발전에 기여하지 못해온 것입니다. 고집이 없는 멍게와 같은 하등동물로 돌아가는 것이 깨달음의 목표는 아닐 것입니다.
반야심경3
반야 중관철학은 초기불교를 부정하면서 생겨난 철학이다.
그러므로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 뼈대, 골격을 이루는 사성제를 부정한다.
반야심경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무고집멸도이다.
앞에서 오온, 12처, 18계, 12연기를 언급한 것은 결국 사성제를 부정하기 위해서다.
"무고집멸도(사성제가 없다)?"
이게 왜 엉터리인지, 왜 붓다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배치되는지 설명하겠다.
붓다의 가르침은 원인과 결과의 법칙을 서술의 기본으로 한다.
'당신이 지금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게 어떤 결과에 이른다.'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일어나는 데는 원인이 있다네"
이 말 한마디에 사리뿟따는 수다원과를 성취했다.
당신이 지금 존재하는 데는 원인이 있다.
당신에게 지금 생각이 일어나는 데는 원인이 있다.
당신이 지금 번뇌스러운 데는 원인이 있다.
그 원인을 제거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존재, 번뇌, 생각이 소멸하고 열반에 이른다.
그럼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팔정도를 닦아야 한다.
이것이 사성제에 대한 대충의 설명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무고집멸도라고 사성제를 부정한다.
내가 이것은 붓다에 대한 반역, 쿠테타라고 하니까, 어떤이는 오히려 붓다의 가르침을 발전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반야심경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을 위해 설한 것이다. 강을 건넜으니 이제 뗏목이 필요없어졌지 않는가.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고집멸도가 없어졌다. 또는 목적지에 도달했으니 이제 버려야 한다. 목적지에 도착했는데 계속 가지고 있으면 그게 또 다른 집착이다."
라고 해명을 한다.
목적지에 도달한 사람에게 왜 목적지를 설명할까?
서울에 도착한 사람에게 서울을 왜 설명할까?
눈으로 직접 보고 있는 사람에게 굳이 설명하려는 이유는 뭘까?
이것도 참 의문이다.
자, 여기에 이 해명이 왜 잘못되었는지 쉽게 설명하겠다.
먼저 이해가 쉽게 하기 위해서 사성제가 뭔지 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아주 쉬운 언어로 설명하겠다.
苦(괴로움)
번뇌가 괴로움이다.
번뇌가 괴로움이라고 하니까 '나는 번뇌가 없는데?'라고 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번뇌는 붓다와 아라한을 제외하고 다 있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은 그 번뇌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아나함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있어서 정거천에서 마지막 삶을 사는 것이다.
번뇌를 쉽게 설명하면 '생각의 흐름'이다.
생각이 흐른다.
쉬지 않고 흐르면 어찌되는가?
마음이 이 생각 저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면 평화가 없다.
생각이 흐르면 존재가 계속된다.
이게 괴로움의 진리이다.
集(원인)
생각이 흐르는 데는 원인이 있다.
감각적 욕망, 존재, 무명(지혜없음)으로 번뇌가 일어난다고 경전에서 말씀하고 있지만, 심리학적으로 따지만 수많은 원인으로 세분할 수 있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시기, 질투, 자만, 우월감, 열등감, 해태, 혼침, 들뜸, 흥분, 우울, 응어리, 한, 트라우마, 갈애, 집착, 생존욕구....등등
더 깊은 심층에서는 '이것이 나다. 이것이 나의 것이다. 이것이 나의 자아(개체성, 특별함, character)이다.'라는 관념이 도사리고 있다.
이것이 원인의 진리이다.
道(방법)
그래서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한 해탈의 길을 간다.
팔정도를 실천한다.
팔정도를 쉽게 설명하면 '알아차리고 깨어있기'이다.
그냥 알아차리고 깨어있으면 진전이 없으므로 '이것은 탐욕이다. 이것은 분노다. 이것은 시기, 질투, 인색이다'와 같은 원인을 분석하면서 알아차린다.
통찰이 일어나면 '이것은 내가 아니다. 이것은 나의 것이 아니다. 이것은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는 바른 견해에서 알아차린다.
화두를 드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념처경에서는 호흡관부터 느낌 관찰, 마음 관찰, 법 관찰을 들지만, 그건 당신이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새로운 방법을 개발할 수 있다.
그러면 생각의 흐름이라는 시스템이 붕괴되기 시작한다.
생각이 멈춘다.
욕망이 무너지면 마음에 평화가 일어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원인과 결과의 법칙(인과법)은 자연의 법칙이다.
滅(열반)
그래서 그 결과 열반에 도달한다.
열반은 번뇌의 불이 꺼진 상태다.
탐욕, 분노, 어리석음, 시기, 질투, 인색, 자만, 들뜸, 후회와 같은 번뇌의 불이 소멸한다.
마음에 고요와 평온, 평화가 일어난다.
열반은 수다원부터 경험한다.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은 그 열반의 깊이에 차이가 있다.
완전무결한 사람, 그 끝을 본 사람이 아라한이다.
이게 붓다의 가르침의 뼈대를 이루는 사성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런데 반야심경에서 무고집멸도라고 한다.
그러면서
"목적지에 도달했으므로 이제 사성제가 없어진 것 아니냐, 계속 사성제를 붙들고 있으면 그건 또 다른 집착이다. 그래서 반야심경에서 무고집멸도라고 한 것이다."
라는 말이 왜 엉터리인지 설명하겠다.
목적지에 도달했으므로 고집멸도에서 고집도는 이제 없어졌다.
하지만 멸도 없다는 말은 성립이 안 된다.
이것은 서울이라는 목적지에 도착했더니 서울이 없어졌다는 말과 같다.
"열반에 도달했는데 열반이 없어졌다? 번뇌에서 해탈했는데 해탈이 없어졌다?"
"열반은 마음이 무한한 고요와 평온, 평화로운 상태인데 그 상태가 없어졌다?"
이 말이 어떻게 성립이 된단 말인가?
그리고
"열반에 도달했지만 열반에도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라는 말은 수행을 해보지 않고 머리로 이해하려고 하니까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하는 것이다.
열반에 도달했다는 말은 유신견(나라는 생각)이 무너진 상태다.
유신견은 설명하기 어려운 것이긴 한데, '이것이 나다.'라는 행위자가 없는 상태다.
행위는 있지만 '이것을 내가 한다.'라는 생각 자체가 없다.
그러니까 집착을 하는 주체가 없다는 뜻이다.
주체가 없는데 누가 집착을 한다는 것인가?
열반에 도달해도 생각은 있다.
다만 생각이 흐르지 않는다.
생각이 없으면 목석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앉아있어야 한다.
의도가 있기 때문에 행위가 있는 것이다.
열반에 도달했음을 극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데....
좌선에 들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생각이 없는 고요와 평온, 평화로운 상태가 지속된다.
물론 움직일 때나 생각을 할 때도 고요와 평온, 평화가 바탕에 흐르고 있다.
이건 열반에 도달했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결과가 없어지면 수행을 왜 하겠는가?
그리고 무고집멸도가 진리라면 왜 붓다께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
4부 니까야를 빠알리어로 읽으신 스님에게 문의한 결과 무고집멸도라는 단어가 초기경전에 등장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게 진리라면, 그런 중요한 것을, 가장 중요한 핵심을 왜 붓다께서 언급하지 않으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