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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마음 교회
요나 3장 10절 - 4장 4절, 사도 10장 9절- 16절
한 문 덕 목사
[전도를 하려면!]
부흥사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이 목사님께서 부흥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시골의 한 교회를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있는 마을에 도착한 이 목사님은 교회를 찾으려고 마을을 한참 헤매다가 할아버지 한분을 만났습니다. “할아버지! 말씀 좀 여쭙겠는데요? 마을교회가 어디에 있나요?”그랬더니 할아버지가 이 목사님을 아래위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을 어디에 두고 다니시오? 바로 뒤에 있지 않소?”할아버지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보니 정말 코앞에 교회가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감사하다고 말씀 드리고 할아버지에게 전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할아버지! 교회 다니시나요?”“아니요!”“할아버지! 예수님 믿고 구원 받으셔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어요. 오늘 저녁 7시에 이 교회로 꼭 오세요. 제가 여기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합니다. 할아버지께 도움이 되실 거예요. 꼭 오세요. 오시면 제가 할아버지께 하늘나라 가는 길을 알려 드릴께요!”그러자 할아버지가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코앞에 있는 교회도 못 찾으면서 어떻게 하늘나라 가는 길을 알려 주겠다는 거요?”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알려 주고, 진리의 길을 보여 주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고 따를 만한 무언가가 있어야 합니다. 당장 눈에 보이는 것만을 좇는 세상에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전하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남을 속여서라도 잘 살아보겠다는 세상에서 참된 진리의 말씀 따라 사는 것도 굳센 믿음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옳게 살아가지 않으면 사람들은 우리가 아무리 천국을 얘기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진정한 전도란 말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웃과 동료들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 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의 소식을 제대로 전하려면 우리 자신이 먼저 복음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복음대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고 말하고 있고, 예수님을 열심히 믿었던 이들이 지금 교회를 떠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예언자 요나?]
오늘 우리가 읽은 구약의 본문은 너무나도 유명한 예언자 요나의 이야기입니다. “요나”하면 고래 뱃속에 들어간 것이 떠오르지만, 요나서가 전하고 있는 메시지는 우리들에게 강력한 경고가 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요나서는 구약성서가 말해 왔던 전통적인 믿음을 깨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서 전통에 따르면 예언자는 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고,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사람들인데, 요나서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전형적인 예언자의 사명을 받습니다.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라는 것이지요.(1:1-2). 그러나 요나는 “주님의 낯을 피하여”(1:3) 배를 타고 하나님이 명령하신 반대 방향으로 가고, 그래서 이내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요나를 바다에 던지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오히려 이방인 뱃사람들이 유대인 예언자보다 더욱 하나님을 공경하고 섬깁니다(1:16). 하나님의 뜻에 따라 큰 물고기가 요나를 니느웨 땅에 뱉어 내고(2:10), 요나는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선포를 합니다. 설교의 역사에서 가장 짧은 설교, 가장 짧은 선포입니다. 니느웨는 사흘길이나 되는 큰 성읍이었지만 요나는 하룻길을 다니면서 단 한 번 외칩니다. “사십 일만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진다!”(3:4)
그런데 이 한 마디의 선포에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니느웨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으로부터 가장 낮은 사람에 이르기까지 모두 굵은 베 옷을 입었다. 이 소문이 니느웨의 왕에게 전해지니, 그도 임금의 의자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임금의 옷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잿더미에 앉았다. 왕은 니느웨 백성에게 다음과 같이 선포하여 알렸다. ‘왕이 대신들과 더불어 내린 칙명을 따라서, 사람이든 짐승이든 소 떼든 양 떼든, 입에 아무것도 대서는 안 된다. 사람이든 짐승이든 모두 굵은 베 옷만을 걸치고, 하나님께 힘껏 부르짖어라.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쳐라. 하나님께서 마음을 돌리고 노여움을 푸실지 누가 아느냐? 그러면 우리가 멸망하지 않을 수도 있다.’”(3:5-9) 이처럼 즉각적이며 전체적이며 대규모적인 회개가 일어난 결과, “하나님께서 그들이 뉘우치는 것, 곧 그들이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는 것을 보시고,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않으셨다”(3:10)
원래 예언자는 하나님을 위해 말하는 사람으로서,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일까지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예언자라는 말은 둥근 사각형이라는 말처럼 말이 되지 않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서의 예언자는 보통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에 매우 열성적입니다. 이사야는 “누구를 보내면 좋을까?”라는 하나님의 음성에 “제가 여기 있습니다. 저를 보내 주소서”(이사 6:8)라고 즉각 응답했습니다. 그런데 요나서에서 예언자 요나는 이런 전통을 뒤집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말씀 선포도 하지 않다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는 죽을 경험을 하고 나서야 마지못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 요나가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어기면서까지 니느웨에 가지 않으려 한 것일까요? 니느웨는 티그리스강 동쪽(오늘날 이라크의 모술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기원전 705년부터 681년까지 앗시리아 제국을 통치했던 세나게립 왕의 멋진 수도였습니다. 그의 아버지 사르곤 2세는 722년부터 705년까지 통치하면서 721년에 북이스라엘을 약탈하여 완전히 황폐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습니다. 세나게립 또한 701년 이스라엘의 남쪽 절반인 유다도 침공했던 왕이었습니다.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북 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는 파괴되었으며, 그 주민들은 유배형에 처해지게 됩니다. 따라서 앗시리아는 원수의 나라이고 성서에서는 앗시리아를 가장 악한 곳으로 묘사합니다. 그런데 오늘 요나서에서 니느웨는 악의 화신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요나서에서 니느웨는 하나님께 순종적입니다. 정말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요나 입장에서 니느웨는 망해야 할 곳이었고, 망하면 좋은 곳이었습니다. 원수이니까요. 그래서 “사십일 뒤에 너희는 망한다”는 예언을 하기 싫었던 것입니다. 말해 주었다가 정말로 이 사람들이 회개해서 하나님이 벌을 내리시지 않으면 원수를 갚을 좋은 기회를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정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 치밀어 올랐고,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하자, 하나님이 요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요나의 이야기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요나는 예언자이지만 자신의 생각과 경험과 복수심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습니다. 우리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과 사람의 길은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일을 행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가 고집 부리며 막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이야기는 잘 보여 줍니다.
[베드로의 고정관념]
사도행전에서 만나는 베드로도 요나와 비슷한 고정관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자신에게 중요한 믿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베드로는 성서가 금지했던 음식은 절대로 먹지 않았습니다. 레위기 11장에 보면 깨끗한 동물과 더러운 동물을 나누고, 부정한 동물은 음식으로 먹지 말라고 되어 있고, 베드로는 이 규정을 철저하게 지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사도행전의 본문에 보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성서에 규정되어 있는 율법조차도 잘못 쓰이면 때로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베드로는 율법에 충실한 나머지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새로운 시대적 사명을 깨달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인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들어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미리 차단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직접 베드로에게 개입하시고,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고정관념을 깨트려 주시려고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율법조문에 매여 하나님의 직접적인 음성에도 “주님,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을 때마다 몸에 소름이 돋습니다. 인간의 고집과 아집이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자신이 옳다고 여겼던 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직접 말씀하셔서도 듣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분명히 “주님!”이라고 불러놓고도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사람이 누구나 자기가 옳다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힐 때 하나님마저도 거부하는 일이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고정관념 깨기]
그런데 고정관념의 문제는 단순히 신앙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고정관념을 깨면 얼마든지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을 우리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과농사를 많이 짓는 일본의 아오모리 현에 태풍이 불었을 때의 일입니다. 1991년 엄청난 태풍에 의해 농가 90%의 사과들이 떨어져 버려서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지요. 땅에 떨어진 사과는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한 농부는 자신의 사과나무에 떨어지지 않는 사과들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떨어지지 않은 사과들을 곱게 포장해서 ‘합격 사과’라는 이름을 붙여 백화점에 내놓았습니다. ‘태풍에도 떨어지지 않은 사과, 여러분의 합격을 보장합니다!’이렇게 탄생한 합격사과는 보통 사과보다 10배의 비싼 가격에도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고, 보통 때보다도 3배의 이익을 남길 수 있었습니다.
떨어진 사과를 보는가? 아니면 남아 있는 사과를 보는가? 하는 관점의 변화, 그리고 그것으로 새롭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고민한 한 농부의 아이디어가 일구어 낸 성공이지요.
또 다른 예를 하나 볼까요? <빨간 클립 한 개>라는 책이 있습니다. 클립 한 개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보통 책갈피에 표시를 하거나 서류뭉치를 꽂는 용도 정도로 쓸 것입니다. 그러나 캐나다의 카일 맥도날드라는 백수 청년은 빨간 클립 한 개로 전혀 다른 시도를 하게 됩니다. 나에게 필요 없는 이 빨간 클립 한 개가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것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물물교환을 하는 한 싸이트에 이 빨간 클립 한 개를 올려 놓습니다. 그래서 이 빨간 클립은 벤쿠버에 살고 있는 코린나와 르와니의 물고기 펜과 바꾸게 되지요. 그 다음에는 특이하게 생긴 문손잡이 하나와, 그 다음은 캠핑 스토브 한 개, 다음은 빨간 발전기 한 개, 발전기에서 즉석 파티 세트로 갔다가 스노모빌로 바꾸고, 다시 야크여행권으로, 그것이 다시 큐브 밴 한 대로 바뀌게 됩니다. 카일의 이러한 시도가 방송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기업가인 브로노라는 사람이 기업의 홍보효과를 위해 이런 제안을 했던 것입니다.
이 밴이 음반 취입 계약서와 맞교환 되고, 다시 이 계약서는 피닉스 어느 집에서 1년간 살 수 있는 무료 임대권으로 넘어갑니다. 1년 무료 임대권은 왕년의 록 스타 가수인 앨리스 쿠퍼와 오후를 보낼 수 있는 권리로 바뀌고, 또 키스 스노브 글로브와 바꿉니다. 그런데 이 키스 스노브 글로브는 카일에게 손해가 되는 교환이었음에도 카일은 꼭 필요한 사람에게 물건을 주겠다는 원칙을 바꾸지 않습니다. 이런 원칙 때문인지, 이 물건은 다시 영화배우 코빈 번슨의 영화 출연권과 교환하게 되지요. 코빈 번슨이 스노브 글로브 수집가였기 때문이지요. 마지막으로 키플링이라는 마을은 이 영화 출연권을 그 마을의 집 한 채와 바꾸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마을은 영화에 나오게 되었고, 카일 맥도날드는 클립 한 개로 집 한 채를 1년 만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담은 책 <빨간 클립 한 개>는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카일의 성공 이야기는 곧 영화화 될 예정입니다. 클립을 작은 클립으로만 보지 않고 꼭 필요한 사람에게 쓰이는 그래서 교환할 수 있는 가치로 보았던 새로운 생각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사례를 더 들어 드릴까 합니다. 이 사례는 단순히 새로운 아이디어만이 아니라 훨씬 훌륭한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어느 가게에 가서 물건을 사는데 하나를 사고 두 개의 값을 내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떤 기분이 들까요? 여러분은 살까요, 사지 않을까요? 지금 제가 소개시켜 드릴 이 사람은 운동화 한 켤레를 팔면서 두 켤레 값을 받은 사람인데, 그것으로 보기 좋게 사업에 성공했습니다.
블레이크 마이코스키라는 미국 청년은 어느 날 아르헨티나 휴가여행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서 많은 어린이들이 맨발로 다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신발을 신지 못하니 다치고 병에 걸리는 아이들을 보고 이 아이들을 돕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기부는 돈이 떨어지면 끝나기 때문에, 사업을 통해 이 아이들을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요. 평생 신발 한 켤레를 만들어 본 적이 없던 블레이크였지만 이 열정 하나 가지고 자신의 작은 아파트에서 신발 사업을 시작합니다. 이것이 오늘날 유명해진 탐스 슈즈, “내일의 신발”(tomorrow's shoes)을 만들어 냈고, 탐스는 세계적인 기업이 되었지요.
블레이크가 탐스 슈즈를 시작했을 때, 신발업계의 사람들은 대다수가 반대했고, 영리 목적의 사업도, 사회적 소명도 모두 방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블레이크는 자신을 지지해 주는 많은 친구들과 함께 이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이 사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물건을 팔은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을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매행위가 이 세상을 바꾸는 데 사용된다는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기 때문입니다.
블레이크는 이런 말을 우리에게 합니다. 자신이 무엇을 열망하는지 잘 모르겠다면, 다음의 세 가지 질문을 해 생각해 보라. 만약 당신이 평생 돈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면, 무엇을 하면서 살겠는가? 어떤 종류의 일을 하고 싶은가? 어떤 대의를 위해 살고 싶은가? 블레이크는 가난한 아르헨티나 어린이들의 아픔을 치유해 주려는 대의를 품었고 그것이 오늘의 탐스를 만든 것이지요.
[하늘의 마음을 품는 사람들]
오늘 우리가 읽은 성서는 모두 우리의 마음이 훨씬 더 넓어야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나는 적국 앗시리아의 수도 니느웨는 망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좌우를 가릴 줄 모르는 십이만 명의 사람들과 수많은 짐승들의 생명을 생각하시며 그들을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소식은 유대인들에게 전해져야지 이방인들에게는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은 적국의 장교 고넬료에게도 복음의 소식이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오늘 성서는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모든 종교행위들, 신앙행위가 속 좁은 편견일 수도 있다고 경고합니다. 하나님을 복수하는 분으로, 하나님을 유대교에 가두었던 요나나 베드로처럼 우리도 어쩌면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어 두는 것은 아닌지, 우리의 고정관념을 믿음으로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성찰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훨씬 더 넓고 높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요나가 말한 대로,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좀처럼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이 없어서 내리시려던 재앙도 거두는 마음입니다. 사람들이 속되다, 더럽다고 말하는 것도 그렇지 않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고, 모든 것은 아름다우며, 모든 것은 다 의미가 있다고 품어 안으시는 마음입니다. 바로 하늘처럼 높고 넓은 마음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마음을 우리의 마음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 마음은 우리 안에 열린 하늘입니다. 마음은 하늘을 닮아야 합니다. 좁고 닫혀 있는 방이 되어선 안 됩니다. 넓고 넓은 하늘이 되어야 합니다. 끝없이 펼쳐지는 바다가 되어야 합니다. 바다가 그렇게 넓은 것은 자신에게 흘러 들어오는 어떤 강줄기도 버리지 않고 품어 안기 때문입니다. 하늘이 그렇게 넓은 것은 자신의 넓은 품으로 온 땅을 덮어주려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명사랑교회가 우리 자신만 생각하는 좁은 마음, 고정관념을 버리고 저 넓은 하늘 마음을 품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통해 큰 일을 하실 것입니다.
요나가 자신의 뜻을 굽히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니느웨는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저마다 자기가 가던 나쁜 길에서 돌이키고, 힘이 있다고 휘두르던 폭력을 그치게 된 것입니다. 요나는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서 니느웨가 망하기를 바랐지만, 하나님은 사랑으로 그들의 폭력을 그치게 하였습니다.
우리는 교회는 생명을 사랑하는 생명사랑교회입니다. 생명을 살리는 교회가 되려면 우리 모두가 하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옹졸한 마음, 편견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요나는 결국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고,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이제 자신의 고집은 버리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합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따르는 자에게 놀라운 기적으로 갚으실 것입니다.
다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 설교 후 기도
우리를 이 세상의 예언자로 부르시는 하나님!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서 세상을 알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경험을 넘어 새로운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경험 때문에 그 새로운 길로 가기를 주저합니다. 더 높고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고집을 부리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굳센 믿음을 허락하셔서, 우리가 지닌 고정관념을 넘어서게 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큰 일을 이루소서. 우리 생명사랑가족들에게 하늘의 그 넓은 마음을 허락하시어, 온 세계를 품는 교회가 되게 하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축도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사귐이 더 깊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려는 생명사랑가족들 위에 지금으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