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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전쟁이다! (6.25전쟁 사진집) 03
해가 내려갈수록 화염이 점점 높이 올라가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보였다. 부서진 조종석 창문으로부터 연기가 올라오기 시작했고, 우리는 그 내부에서 점점 더 밝은 빛을 내고 있는 불을 보았다. 그 조종실의 불은 좌우 창문을 통해서 그리고 천측 창 위로 타올랐고, 이어서 조종석 앞으로 솟구쳤다. 곧 비행기 앞쪽 전체가 화염에 휩싸였다. 비행기의 앞은 타버렸고, 거대한 꼬리날개가 천천히 하늘을 향해 곤두 서면서 오른쪽 날개가 폭발했다.
수원으로 돌아오면서 우리의 전진은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하고 있는 피란민들의 거대한 흐름에 의해 거의 완전히 차단되었다. 어떤 북한 전투기도 그 길을 아직 폭격하기 시작하진 않았지만, 누구도 그것이 언제 시작될지는 몰랐다. 어둠의 보호 아래서 한국인 전 인구가 걷고 있는 것 같았다.
온갖 종류의 차들이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피란 군중을 따라가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차들이 나뭇가지들로 두껍게 위장을 한 한국군과 경찰들을 가득 태우고 있었다. 거기에 어떤 공황의 증거가 보였던 것은 아니지만 리더십은 없는 것 같았다. 그들은 단지 남쪽을 향해 터벅터벅 걸어가는 대 집단과 만난 것처럼 보였다.
그날 오후 기차역에서 나는 기차를 온통 그 자신들로 덮어 장식하고 있는 듯한 피란민들을 찍었다. 그들은 애처롭게 보였고 지금은 매일 볼 수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내가 그리스나 팔레스타인, 인도, 중국 등에서 찍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오히려 더 잘 입었고 훨씬 깨끗해서 이들과는 달랐다.
이들은 불확실한 과거로부터 약간 덜 확실한 미래로 향해가는 가난에 시달리는 소작농들이 아니었다. 그래도 소작농은 맘이라도 편하고 배는 곯지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삶이 허물어지고 남쪽으로 가는 그 길의 끝에 바다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피란길을 차분히 품위 있게 이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어떤 방식으로라도 언제나 그 행렬에서 빠져나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사이에서 일하고 있음에 당황함을 느꼈다. 내가 피란민 중의 한 큰 아들이 부모의 안전을 위해 안간힘을 쓰며 손수레의 끈을 당기고 있는 동안 차분하게 수레 안에서 손잡이를 잡고 있는 늙은 부부를 우연히 만났을 때 나는 그 셋보다 덩치가 큰데도 내 작은 카메라만 무력하게 쥐는 부끄러움 말고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나의 사진들이 이러한 상황에서 실제로 어떤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사령부로 돌아왔을 때 램버트가 자신이 모든 뉴스의 출처들을 확인했노라고 내게 말했다. 아무도 아직 상황이 나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인 상황을 알지 못 했다. 명백히 북한군은 한강 바로 이북에서 재편성 중이었고, 새로 점령한 서울을 그들의 총사령부로 이용하고 있었다.
북으로부터 전차들이 한강 남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보고는 아직 없었고, 아무도 북한군들이 왜 이렇게 길게 공격을 멈추고 있는지 몰랐다. 공산군들이 남침 시 사용한 전차들은 한국의 방어자들을 표현할 수 없는 두려움으로 마비시켰고, 또 어떠한 응징보복을 생각할 수도 없는 공황상태로 만들었다.
6월 29일 여명 직후에 나는 사령부의 문안에 서 있는 약간 구부정하고 작고 여원 장교를 보았는데 그는 한국군의 미·군사고문단 단장으로 새로 부임한 존 처치 준장이었다. 그는 내가 한강을 따라 전개된 그의 병력에 대해 브리핑해줄 것인지 물었을 때 약간 아쉬운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는 바로 전날에 도쿄로부터 날아와서 아직도 그의 지휘체계를 확립하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듣자 하니 1/2 이상의 한국군 부대가 북한군의 첫 공격으로 차단되었거나 포로가 되었다고 했다. 거의 모든 야포도 손실되었으나 그것은 단순히 버려졌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와는 달리 이 야포들은 사거리가 훨씬 긴 북한군의 소련제 포들에 의해 압도 당한 무기였다. 따라서 공산군의 포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종심에서 아군의 보호를 받으며 포를 쏘는 대신에 전방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북한군은 그냥 간단히 한국군 포병 진지를 방어할 수 없도록 만드는 탄막사격만을 하면 됐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들을 폭파하여 산산조각 낸 후 그들은 그 위를 유유히 걸어와 진지를 점령했다. 한국군 포들은 미제였고 그것들은 38선을 가로질러 그들이 마주한 무기경쟁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정부가 운용할 수 있는 전부였다.
전쟁 발발 5일 차인 6월 29일 목요일 아침은 아름답고, 맑고, 기분 좋게 온화한 날씨였다. 또한, 불행히도 전차 운용에 좋은 완벽한 날씨였다. 일본보다 적어도 수주일 후에 시작되는 한국의 본격적인 장마는 약간 늦어지고 있었다. 서울과 수원을 연결하는 도로는 아주 건조하고 단단해서 전차의 돌파 기동에는 이상적인 상태였다.
길가에 있는 논까지도 몹시 건조해서 거의 말라 있었다. 이런 날씨로 인해 미군 전투기들은 거의 매일 낮에는 꽤 넓게, 그리고 낮게 완만히 경사진 전장을 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밤에는 미군기들이 그들의 기지로 복귀하게 됨으로써 북한군들이 어디에서 새로운 공격을 펼치게 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새로운 보급품과 군용차량, 그리고 부대들이 어둠을 이용하여 북으로부터 내려왔을 것이었다. 이와 같은 것들이 그 목요일 아침에 처치 장군이 당면한 주요 문제였다.
수원비행장으로 돌아와서 나는 그날 오후 바로 직전의 적 공격으로 부상당한 공군장병 2명의 후송 장면 사진촬영을 막 마쳤을 때, 경정찰기 두 대가 착륙했다. 정찰기 쪽으로 걸어가는 처치 장군을 보고 도대체 전방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더 분명히 알아볼 생각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포병 관측장교 대신에 정찰기로부터 내린 사람은 한국대통령 이승만이었다. 그리고 당시 주한 미국대사인 무쵸가 다른 한대의 정찰기에서 내렸다.
그 학자 같은 늙은 신사와 우리 미국대사는 방금 그들의 생명을 건 비행을 했었다. 수원으로부터 약 90마일 남쪽에 있는 임시수도 대전에서 출발한 그들을 적 야크기
한 대가 불시에 덮쳤었다. 두 미군 조종사들은 나무 꼭대기 정도의 고도를 유지하고, 그 작은 정찰기의 방향을 재빨리 움직여 바꾸며, 능선과 계곡을 넘나들면서 야크기
조종사가 그들에게 사격할 기회를 절대 가질 수 없도록 노련하게 비행했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이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력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방금 겪었던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과 같이 이 적나라한 순간에도 마음의 평정을 잃지 않는 그를 보고 깊은 찬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활주로 옆에 있는 밭에 우리가 서 있었을 때 우리의 발아래를 쳐다보았던 그의 태도였다. 나는 이승만 대통령의 이 모습을 항상 기억할 것이다. 그는 아래위를 쳐다보며 부드럽고 온화한 표현으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어쩌나. 우리 발들이 어린 콩 싹을 뭉개 버렸네"
적 야크기의 재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무쵸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급히 대기 중인 차량까지 안내하여 서둘러 비행장을 떠났다. 내가 처치 장군이 그의 사령부로 향하는 대통령을 수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놀라고 있을 때, 다른 C-54수기 한 대가 거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조용히 착륙해서 우리 쪽으로 곧바로 활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바탄'이라는 이름이 수송기 앞부분에 페인트로 쓰여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긴 자루가 달린 파이프를 무기처럼 손가락 사이에 움켜쥐고 수송기로부터 내렸다. 맥아더는 자신감에 차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눈은 내가 가끔 고열 환자의 얼굴에서 본 것과 같이 밝게 빛나는 그런 광채를 띠고 있었다. 내가 그를 최근에 마지막으로 본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미주리함에서 일본제국이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봤던 때였다.
그는 그 때나 지금이나 양쪽 모두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가 약간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그의 눈이 나의 오래된 야구모자 위에 있는 해병대 마크부터 나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나의 눈과 마주쳤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다가가 내 이름과 내가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했던 칼 마이던스의 장소를 찍은 사진작가라고 소개했다.
그가 내게 답했을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는 칼 마이던스가 일본으로 오고 있는 도중이라고. 이틀 전에 그로부터 전보를 받았노라고 말했다. "그가 돌아오고 있다고." 그리고 그가 내게 몇 마디 말했을 때 그의 눈 뒤에서 무언가가 편안해졌다. 나는 그것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바치는 가장 위대한 찬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칼에게 말하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혼자 다짐했다.
활주로 주변에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맥아더, 처치, 그리고 다른 몇몇이 지프에 탔고, 모두가 수원시내에 있는 사령부 건물로 향했다. 오래된 사령부 건물에서 일련의
짧은 브리핑과 회의를 가진 후에 맥아더가 차를 대기시키라고 명령했고, 그는 곧 거의 정찰을 하지 않은 길을 따라 전선으로 향했다.
맥아더는 서울을 향해 북쪽으로 가면서 직접 보았던 것들로 인해 낙담했음이 틀림 없었다. 도로는 아직도 남쪽으로 향하는 피란민들로 꽉 막혀 있었고, 무장한 군인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도 남쪽으로 가고 있었다. 도로 주변 어디에도 방어진지 하나 없었으며 도로를 따라 분산된 군인들이 싸우려는 의지를 갖고 있다는 어떤 증거도 없었다.
그렇다고 그들이 모두 꽁무니를 빼며 도망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이 혼돈의 붕괴가 어떤 다른 군대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먼지를 휘날리며 북으로 달리면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 맥아더 장군이 첫 번째 차에 타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로지 우리가 단호하게 먼지로 더러워진 채로 우리의 본업을 위해 북으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 몇 마일을 달리자 낙오된 피란민들의 수가 점점 적어지더니 더는 볼 수 없게 되었고, 한국군들을 수송하는 나뭇가지로 위장한 트럭들을 제외하고는 길 위에 우리만 남았다. 나는 모든 낙오된 한국군 장병들을 재편성하여 새로운 저항선을 재구축할 수 있는 집결장소가 명령으로 하달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또 우리의 앞을 안전하게 지켜주는 부대가 한강 바로 남쪽 강변에 있다고 들었다.
나는 서울을 향해 20여 마일을 가는 동안 어디에서도 한국군 지휘부의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전선으로 향하는 보급품도 보지 못했고, 통신선 비슷한 것도 없었으며, 전투 후에 부상을 당하면 우선적으로 치료를 받았을 응급처치 장소 등 군인들이 머물렀음을 보여주는 어떤 흔적도 볼 수 없었다.
아마 이러한 부대들이 있기는 있었을 텐데 우리가 전방으로 곧바로 올라왔기 때문에 내가 그들을 못 본 것 같았다. 나는 또한 미군과 북한군 사이에 놓여 있는 것이 바로 무엇인지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길이 여러 곳으로 갈라지고 서울의 동쪽으로 향하는 한 분기점인 영등포 교차로에서 우리는 북한군의 포탄이 1마일도 안 되는 한강 남쪽의 제방 위에 떨어지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맥아더는 교차로에 곧바로 서서 급하게 지형과 진지들에 대한 브리핑을 들었다.
교차로에서 맥아더가 보여준 완벽한 오만과 거의 분통을
터트리는 듯한 그의 호전성 등이 나를 매우 즐겁게 했다.
오히려 방향을 돌려 수원으로 복귀하는 길을 따라오면서 우리는 놀랄만한 현상을 목격했다. 피란을 위해 몇 가지 짐만을 챙겨갔던 침울한 표정의 피란민들이 떠나기
직전에 살았던 그 마을에 지금은 모든 계급의 군인들이 차렷 자세로 서 있었다.
그들의 장교들이 경례했고, 다른 군인들은 손을 흔들며 환호했다. 우리는 "맥칼트, 빅톨리"라는 소리를 두 번이나 들었다. 거기에는 또 북으로 향하는 트럭들의 여러 호송대가 있었는데 트럭마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군인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에 수천의 군인들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내겐 답이 없는 심각한 의문이 남았다.
이 군인들이 신중히 선택된 방어진지를 점령했었다가 미국의 유명한 장군이 지나가는 동안 잠시 그 진지들을 버리고 나온 군인들인가? 아니면 그들은 이동하기 편한 저녁 시간대에 다시 한 번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 한낮의 더위를 피해 집안의 그늘 속에 몸을 뻗고 누워 있었던 것이란 말인가?
한 가지가 나를 심히 화나게 했는데 그것은 아주 큰 미국 신문사 가운데 한 신문사에서 나온 긴 최신 기사였다. 그 기사는 한국군이 아시아에서 '최고의 군대'라는 것이었다. 정확한 정보 보고서들이 적임자들에 의해 타전되었을 텐데 거대 신문사의 과장광고로 부풀려져 무시되었음이 틀림없었다.
해가 서쪽 하늘로 질 무렵에서야 우리는 수원의 야전사령부로 돌아왔다. 햇볕이 아직 내리쪼였지만 시원한 미풍이 서울에서 수원, 그리고 그 남쪽을 연결하는 긴 골짜기에 꽤 많은 먼지를 일게 했다. 우리는 흐릿한 가을의 태양과 석양이 감싸고 있는 나무들 밑에 앉아 맥아더 장군이 마지막 회의를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나는 우리가 즉시 비행장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내 예감이 맞을 것이라고 램버트를 설득하여 우리는 지프에 올라 활주로를 향했다. 우리는 수원의 서쪽 철로들을 건너기 위해 설치된 구름다리를 넘었다.
바로 그때 야크기 한 대가 흐릿한 안개로부터 굉음을 내며 날아와 우리가 방금 지났던 다리를 따라 폭탄을 투하했다. 연기와 먼지가 공중으로 치솟았다. 근처에 있던 몇 사람이 쫓기는 닭처럼 이쪽 거리에서 저쪽 거리로 우왕좌왕하다가 도로를 가로 질러서 내달렸다.
우리의 공중엄호 전투기들이 침입한 적기와 싸우기 위해 기체를 기울여 굉음을 내며 급강하할 때 머리 위의 하늘은 아주 멋진 공중전으로 가득 찼다. 폭탄들이 활주로에
쿵쿵 떨어졌다. 기관총알들이 온 하늘을 난무했고, 서로가 서로를 쫓는 공중에서 모든 전투기의 방아쇠 스위치는 꾹 눌려 있었다. 새로 도착한 대공포들도 사격을 개시했다. 활주로 끝을 움푹 파이게 한 두 발의 폭탄을 제외하고는 비행장에 별다른 피해는 없었지만 그곳은 소음으로 가득 찼다.
불쌍한 고령의 이승만 대통령은 그곳에서 또 다른 하나의 힘든 시간을 겪었다. 적의 공격기들이 이륙을 위해 활주로로 가고 있는 이 대통령의 비행기를 덮쳤기 때문이다. 조종사가 비행기를 멈춘 뒤, 모두 뛰어내려 불행히도 또다시 망가진 콩밭으로 날쌔게 움직였다. 맥아더 장군의 비행기인 '바탕'이 착륙하여 막 자리를 잡았을 때, 장군이 활주로에 도착했다.
물론 나도 그 비행기를 타고 돌아가야 한다는 걸 알았고, 지금이 맥아더 장군의 사진을 찍어 이것을 뉴욕에서 제 때에 발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유일한 기회임을 알고서 장군에게 사진을 찍을 수 있는지 요정했을 때 그는 즉시 "물론입니다"라고 흔쾌히 대답했다. 그러면서 다시 한 번 나의 모자와 얼굴을 쳐다보고 나서 그의 참모에게 말하려고 웃음을 띠면서 돌아보았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었고, 작전 종료 후 연료탱크 분리 투하에 있어서 투하물이 아군과 충돌하지 않을 것임을 확인할 수 있을 때까지 연료탱크 투하를 늦추려고 노력할 것이었다. 다른 모든 것은 샘 웨이즈의 손에 달려 있었다. 폭격 관측자가 우리를 위한 몇 개의 좋은 목표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수원 남쪽으로 돌진하는 공산군을 선두에서 이끄는 탱크들이었다.
4대의 제트기가 그들의 삶의 터전인 지붕 없는 세계로부터 강하하기 시작했다. 샘 웨이즈는 선두 전투기를 따라 오른편에서 움직였다. 너무 가까이 날아서 우리가 그 비행기의 꼬리 배기관에 묶여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앞서 비행하는 그 제트기가 구름 속에 잠깐 뚫린 구멍들 사이로 기체를 기울여 선회하고, 방향을 바꾸며 아래로 내려왔다. 우리는 아주 가까이 붙어서 두 대의 제트기가 한사람에 의해 조종되고 있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꼭 들어맞춘 듯이 방향전환 회전 급강하 등을 따라했다.
갑자기 우리는 구름 아래로 빠져나왔다. 아래에는 정성 들여 줄이 쳐진 들과 비에 흠뻑 젖은 언덕들이 펼쳐져 있었다. 광대한 전경 바깥에 하나의 미세한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마을이었다. 그 마을의 끝에 한 교차로가 있었고, 길들이 만나는 바로 그곳에 나무들이 서 있었다. 탱크 한 대가 그 나무들 뒤에 있었고, 우리는 구름 회랑을 따라 똑바로 탱크를 향해 돌진했다. 첫 번째 폭격을 마치고 빠져나오면서 샘 웨이즈가 여전히 선도 제트기의 후미에 붙어 선회했다.
그리고 다음 로켓 공격을 위해 그를 뒤따랐다. 두 개의 불기둥 띠가 제트기 아래로부터 튀어 올라왔다. 그리고 샘 웨이즈가 그 나무들에 부딪히기 직전에 제트기를 잡아당겨 급상승시켰기 때문에 나는 사진을 찍고 좌석 안으로 몸을 웅크렸다. 우리는 시속 600마일 이상의 속도로 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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