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씨부인 제 5-2 화
“부인의 침소에 여러 날 들어 왔으나 한결같이 정색을 하고 마음을 풀지 아니하시니 이는 다 나의 잘못이라, 명대로 살 수 없으리라. 부인에게 삼사 년 동안 공방에서 혼자 고초를 겪게 한 죄는 지금에 이르러 무어라 변명할 여지가 없사오니, 부디 부인께서는 마음을 돌이켜 사람을 구해 주소서. 죽기는 서러운 것이 아니나 양친께 불효하여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면 이 도한 불초라, 자하에 간들 무슨 낯으로 선령을 뵈올 수 있으리오? 이것 저것 생각하오면 심히 곤경하오니 아무쪼록 부인께서는 다시 한 번 생각하소서.”하고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거늘,
박씨가 이 말을 듣고 보니 불쌍하고 가엾은 마음이 없지 아니하여 화얼 같은 얼굴로 더욱 씩씩하게 하고 책망하여 이르기를,
“조선은 에의지국(禮儀之國)이라 하였사온데 사람이 오륜을 아리 못하면 어찌 예의를 알 수 있으리오? 당신은 아내가 못생겼다 하여 삼사 년을 박대하였으니 부부유별(夫婦有別)은 어디 있으며, 선인(先人)이 말씀하시기를 ‘조강지처(糟糠之妻)는 불하당(不下堂)이라’하였사온데 당신은 오로지 용모의 아름다움만 생각하고 부부 사이에 오륜을 생각지 아니하면서 어찌 덕을 알며, 처자의 존재를 모르고 입신양명하여 어찌 나라를 보살피며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릴 재주가 어디 있을 것이라요? 아는 것이 저토록 없을지니 효와 충심을 어찌 알며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법도를 어찌 알으시리오? 앞으로는 효도를 다하고 수신제가하심을 명심하소서. 첩(妾)은 비록 아녀자이오나 당신같은 남자는 부러워하지 아니하옵나이다.” 하니,
제 6 회
그 후부터 시어머니며 노복 등이 지난 날 박씨를 구박함을 뉘우치고 자책하여 박씨의 신명함을 경탄해 하고 상공의 가슴에 품은 큰 뜻을 못내 칭송하며 온 집안이 뜻을 모아 화평하였다.
박씨의 모습이 바뀌었다는 소문이 장안에 퍼져서 더러는 개별적으로 들어와서 보기도 하고 재상가의 부인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여 더러는 청하여 보기도 하였는데, 하루는 한 재상의 집에서 처하여 본 후에 주과로 대접할 즈음,
여러 부인들이 서로 다투어 권하여 거나하게 짐에 많은 부인들이 박씨의 재주를 보기를 부탁하는지라, 박씨는 재주를 부리고자 하여 술잔을 받아 거짓으로 내리쳐서 술을 치마에 적신 후 치마를 벗어 계화에게 주며 말하기를,
“치마를 불꽃 가운데 넣어 태워라.”하니
계화가 명을 받들어 치마를 불 한가운데로 던지니 치마는 타지않고 그 광채가 더욱 빛나는 지라 계화가 다시 치마를 가져다가 부인께 드리니 많은 부인들이 그 이유를 물었다. 박씨가 대답하여 가로되,
“ 이 비단은 이름을 화염단이라 하옵는데 더러 빨려고 할 때는 물에다가 빨지를 못하고 불에 태워 빠나이다.”
“그러시다면 그 비단은 어디서 났사오이까?”
박씨가 대답하되,
“인간 세계에는 없사옵고 월궁에서 만드나이다.”
여러 부인이 다시 묻기를,
“입고 계신 저고리는 또 무슨 비단이오이까?”
박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 비단의 이름은 폐월단이라 하옵고, 첩의 부친께옵서 동해 용궁에 가신 때에 얻어 오신 것이라, 이 비단 역시 용궁에서 만든 것이옵니다.”
그 비단은 물에 담가도 젖지 아니하고 불에 넣어도 타지 아니하는 비단이라 하므로, 자리에 모임 여러 부인들이 듣기는 신기하게 여겨 칭찬이 자자했다.
모든 부인이 술을 따루어 박씨에게 권하니 박씨는 술이 과하여 사양하자 여러 부인들이 한사코 권하였다. 박씨는 마짐 못해 술을 받아 가지고 금봉채를 빼어 잔 한가운데를 반으로 가로막으니 완전하게 한 쪽 술은 없어지고 또 한쪽은 칼로 벤 듯하게 반만 남았던지라 여러부인들이 그 술잔을 보고는 신통함을 이기지 못하여 가로되,
“부인께옵서는 선녀의 기틀이 있다고 들었사온데 그 말이 정녕 옳도다.”하며
“이와 같은 신통함은 그금에 아직 없는 일인데 어찌하여 인간 세상에 내려 왔을까? 옛날 진시황과 한무제도 얻지 못하였던 선인을 우리들은 우연하게 만났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아니하리오?”
서로가 봄기운을 일러 화담을 하는데, 이때 계화가 고하여 이르되,
“이와같이 좋은 봄 경치에 흥을 돕고 백화가 만발하여 봄빛을 자랑하오니 소비도 이처럼 좋은 때는 맞이하여 반주 없이 한 곡조 노래를 불러 모여 계신 부인들께 위로를 드릴까 하옵니다.”하므로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더욱 기특하게 여겨 노래하기를 하기를, 독촉하는지라 계화는 붉은 입술을 반쯤 열어 밝은 목소리로 한 곡조 노래 부르니 그 소리 맑고 아름다워 산호채를 들어 부친 듯 하였다.
그 곡조에 소리하되
“하늘과 땅은 만물의 객사요, 빛과 그늘은 오랜 동안의 길손이라, 하루살이 같은 이 세상에 떠 있는 삶이 곧 약몽(若夢)이라, 봄바람 실버들 좋은 대에 아니 놀면 어이하리, 지난날을 헤아리고 지금을 살펴보니 일백 대에 걸친 흥망은 봄바람에 어지러운 그림자요, 한 순간의 변화는 장생호접(莊生蝴蝶)이라, 청산에 두견화는 촉중(蜀中)의 원혼이며, 들꽃의 봄을 비추는 경계는 왕소군(王昭君)의 눈물일래, 세상의 일을 생갓하니 인생이 덧없구나, 푸른바다로 술을 빚어 만세동락(萬歲同樂)하리로다.” 하니
여러 부인이 듣기를 다하자 정신이 쇄락하여 계화를 거듭보며 칭찬이 자자하였다.
즐거움의 극치가 끝없이 다하는 가운데 해가 서산으로 기울고 동쪽 산 마루에 달이 솟아오르니 모든 부인이 각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 대에 이공이 나이가 많아 벼슬을 하직하므로 상감이 이를 허락하시고 시백을 승지에 명하시니 시백이 감사하여 숙배(肅拜)하고 나라를 충성으로 받들며 나랏일에 부지런하니 그 명망이 온 나라에 떨치었다. 충성이 과인(過人)한 까닭에 상감이 더욱 사랑하시고 아끼시사 특별히 평안감사를 내리시니 시백이 사은숙배한 후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이를 고하니, 양친께서 크게 기뻐하시고 일가친척과 집안사람들 모두가 그 즐거움을 헤아리지 못하였다.
시백이 탑전에 하지 인사를 올리고 집에 돌아와 치행(治行) 준비로 쌍가마를 지으려 할 때, 박씨가 물어 가로되,
“쌍가마는 만들어 무엇 하려 하시나이까?”
감사(監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 같은 사람을 평안감사에 명하시니 그 맡긴 임무를 감당하기 어려우므로 부인과 함께 가고자 함이오.”
박씨가 대답하되,
“남자가 출세한 후에 입신양명하게 되면 나라 받들 날은 많고 부모받들날은 적다고 하였사오니 나랏일에 골몰하시오면 처자를 돌아보지 못하시옵니나니 첨도 함게 가면 늙으신 양 부모님은 누가 있어 봉양하리까? 낭군게옵서는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애극(愛極)히 도우심이 옳은 일인 줄로 아옵니다.”
감사가 듣고는 그 언변이 올바름을 탄복하여 도리어 무색해져 대답하기를,
“나처럼 불충불효하여 천지간에 용납하지 못할 사람이 또 어디 있으리오?
늙으신 부모님을 생각지 아니하고 망녕된 생각을 가졌사오니 지나치게 나무라지 마옵시고 두 분 노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여 나의마음을 지켜주어 남이웃음거리가 되지 않게 하여 주소서.“하고
사당에 들어가 하직 인사를 올리고 부모께 또한 하직한 다음, 박씨와 작별하는데 두 분 노부모님을 잘 뫼시기를 거듭 당부하고 곧장 길에 오르므로 수일 만에 도임하였다.
각 고을 사또들 중에 백성의 재물을 몹시 착취하는 수령이 민간에 나타나 그 작폐가 무쌍하니, 백성이 도탄에 빠져 인심이 흉흉한지라 각 고을 사또의 잘 잘못을 가리어, 백성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또는 우선 직위를 파직하고 잘 다스리는 사도는 백성에게 알리고 또한 임금에게 글로써 올림으로 중앙 관직으로 승직하여 올라가게 하고, 백성을 어진 법도로 다스려 민심을 진정케 하니 일 년 안에 모든 고을이 아무 탈없이 되어 백성이 즐겨 노래하고 격양가(擊壤歌)를 주고 받으며 서로 일러 말하되,
“이제는 살겠구나. 요순 시절처럼 국태민안 하는구나. 역산(役山)에 밭을 갈아 농사 지어 우리부모 공양하고, 형제지간에 우애있게 살아보세, 구관사또 어찌하여 백성을 침해하고 학대할 때에, 무식한 백성들이 어진 법도를 어찌 알며 효제충절(孝悌忠節)을 어찌 알까? 효자가 불효되고 양민이 도적 되었었네. 신관 사또 새로 오신 후에 충효가 함께 하셔 어진 법도로 다스리사 덕화(德化)가 넓으시니 우리 백성 편하구나. 산에 도적이 없고 밤에도 대문을 열고 자니, 길에 떨어진 남의 물건 주워 갖지 아니할 때에 선정비(善政碑)를 세워보세,” 하며 격양기가 울려 퍼졌다.
이와 같이 선정을 베푸는 자라 이감사(李監査)의 소문이 원근(遠近)에 울려 퍼지고 급기야 조정에까지 미쳤다. 상감이 이 소식을 들으시고 아름답게 여기시사 다시 병조판서(兵曹判書)로 부르시니, 감사가 교지를 받은 후 임금이 계시는 곳을 향하여 네 번 절하고 곧장 행장을 차려 서울로 올라갈 때, 모든 고을 수령과 만백성이 송덕(頌德)하는 소리 천하를 울리었다. 수일만에 서을에 도달하여 대궐에 들어가 숙배 하올 때에 상감이 보시고 반기며 격찬이 끝없었다. 이판서가 조정을 물러나와 집에 돌아와 부모님께 문안 인사를 올린 후에 친척과 옛 친구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어 여러 날을 즐기었다.
이 때 갑자년 팔월에 남경이 요란 하거늘 나라에서는 병조판서 이시백으로 정사를 삼으시니, 정사가 어명을 받들어 명나라로 떠날 때, 이 때 임경업이라 하는 신하가 있었으니 총명하고 영리하여 영웅변화의 지략이 뛰어났기로 마침 철마산성(鐵馬山城) 중군(中軍)으로 있었는데, 정사가 임금께 아뢰어 임경업으로 부사(副使)를 삼아 명나라로 들어가니 명나라 황제가 조선의 사신이 들어옴을 알고는 영접하여 들이었다. 이 때, 명나라가 가달(可達)의 난을 만나 크게 패하였으므로 위급함이 불꽃같은지라 명나라 승상(丞相) 황자명(皇子明)이 잔치 중에 황제께 아뢰기를,
“조선에서오신 사신 이시백과 임경업을 보아하니 비록 작은 나라의 인물이라 만고흥망(萬古興亡)과 천지조화(天地造化)를 은은하게 감추고 있사오니 어찌 기특하지 아니하오리까? 신은 원하옵건데 이 분 등으로 구원군의 사령관으로 정함이 마땅한 줄로 아뢰오.”
황제가 들으신 후 이시백과 임경업으로 구원군 사령관을 봉하여 구해 달라 하시니, 두 사람이 사은하고 군사를 이끌어 가달국에 들어가 싸움할 제 백전백승하여 수일 동안에 이기고 승전고를 울리며 들어가니, 황제가 보시고 극구 칭찬하시며 상을 후하게 하사하여 그 공을 나타내 조선으로 보내었으니, 시백과 경업이 황제께 하직인사 올리고 밤낮으로 조선에 도달하여 궐내로 입조하였는데 상감이 보시고 반갑게 맞이하시며 기특하게 여기시어 이르시되,
“중국을 구하여 가달을 꺾고 그 이름이 천하에 떨치며, 또한 위엄이 조선 천지에 빛나니 그대들과 같은 영웅지재(英雄之材)는 이 세상에 처음이로구나.”
하시고는 두 사람을 승직하시는데 시백에게는 우승상(右丞相)을, 임경업에게는 부원수(副元帥)를 제수(除授)하시니, 이 때 북호국(北胡國)이 점차 강성하여 다시 조선을 노략질하므로 상감이 크게 걱정하시어 임경업으로 하여금 의주부윤(義州府尹)을 시키시어 자주 노략질하는 북호(北胡)를 물리치게 하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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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 드립니다
별말씀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