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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예진의 토닥토닥] (23) 너무 살고 싶어 자해를 해요 (상)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자해하는 대학생 자녀를 둔 부모님 사례를 다루겠습니다. 먼저 자녀의 행동부터 이해해 보도록 할까요?
“우리 애는 피어싱이 유행이라고 하고 다녀요. 귀랑 입술에도 여섯 개나 했어요. 근데 또 문신을 한대요. 그럼 나가라고, 용돈도 끊어버릴 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안 하더라고요. 저희 부부는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과 교류가 있어요. 그러니 저희 애를 보면서 다를 분들이 뭐라고 하겠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자해도 하고 자살도 시도해서 이제 야단 안 치고 웬만하면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속이 많이 상합니다.”
청소년들의 자해와 자살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청소년 자살은 10만 명당 23명으로 OECD 국가 중 1위입니다.(2020, OECD Health data) 자해는 ‘자신의 신체 조직에 상해를 입히는 행위’가 있는 의도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자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자해를 경험한 68%가 자살을 시도한다고 합니다.
자해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피부 찌르기, 고통을 가하는 문신하기, 바늘이나 핀 등으로 찌르거나 피나도록 긁기, 깨물기, 머리카락 뽑기, 날카롭거나 독성 있는 물질 삼키기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사이버 자해라고 해서 ‘나는 쓸모없는 사람이야, 나는 사랑받지 못해’, ‘나는 못생겼어’ 등의 이유로 자신을 비하하는 현상도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행동의 상당수는 비자살적 자해로, 자살까지는 가지 않지만 자신을 위험하게 방치하거나 내버려두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런 행동들을 하는 걸까요?
자해가 일종의 세상 공격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수단입니다. 자기 자신을 훼손함으로써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음을 느끼고, 고통을 느낌으로써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것이지요. 인정과 관심을 받고 싶은 것은 인간의 공통점입니다. 그런데 이런 인정과 관심을 받지 못해 심하게 낙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바로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거나 타인을 괴롭히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관심을 두니까요. 대개 걱정해주거나 보살펴줍니다. 때론 야단이나 비난이 따르기도 하겠죠. 하지만 그 모두가 당사자에게는 관심의 일종으로 여겨집니다.
자해는 스스로에게 강한 고통을 가함으로써 자신의 다른 고통을 잊고자 하는 충동적이며 중독적 행위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상처를 통해 위로를 받고 싶어 한다는 점’입니다. 그런 식으로 자신이 얼마나 힘든지 알아주길 바란다고 호소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해를 통해 어떤 마음(메시지)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인지, 그 숨은 목적을 파악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그 마음에 공감하고 반응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사례처럼 사회복지 관련 일을 하는 부모님에게는 쉽게 이해가 안 되고 긍정적 반응이 어려울 겁니다. 세간에서 말하는 반듯한 모습의 아들을 바라고, 그렇게 이끌고 싶은 마음이겠지요? 야단을 치거나 어르기만 하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합니다. 아들이 피하고 싶은 고통이나 전하고 싶은 아픔이 있을 텐데, 그걸 먼저 파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지금 아들의 행동은 ‘살고 싶어서 하는 몸부림’일 테니까요. 그렇다면 앞으로 어떻게 아들에게 반응하면 좋을까요? 그 부분은 다음 주에 이어서 살펴보겠습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24) 너무 살고 싶어 자해를 해요 (하)
“우리 애는 피어싱이 유행이라고 하고 다녀요. 귀랑 입술에도 여섯 개나 했어요. 근데 또 문신한대요. 그럼 나가라고, 용돈도 끊어버릴 거라고 했어요. 그랬더니 아들이 자해도 하고 자살도 시도해서 이제 야단 안 치고 웬만하면 받아들이려고 하는데, 속이 많이 상합니다.”
지난 시간에는 자녀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면, 이번에는 긍정훈육 차원에서 부모가 어떻게 반응하고 훈육하면 좋을지 알아보겠습니다. 자해 행동 청소년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는데요. “자해 후 부모님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끼고, 이러한 죄책감으로 인해 다시 자해한다”는 겁니다.(서미 외, 2019) 부모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러워하고 자해 사실을 알린 거나 들킨 것을 후회하기도 합니다. 부모가 대개 충격, 두려움, 분노, 슬픔 등의 부정적 감정을 내보이며 자녀의 자해를 부끄럽다고 감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녀의 자해 행위를 과소평가”하기도 하지요.(Crowell 외, 2008) 이러면 더 큰 문제를 낳습니다.
자녀의 자해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부모의 반응은 달라야 합니다. 부정적 감정에 휘말려 자녀의 행동을 통제하려고 하기보다는 자녀와의 소통 방법을 뒤돌아보세요. 자녀가 먼저 긍정적 소통을 시도했지만, 부모의 거부로 좌절했던 적은 없었는지요? 듣고 싶은 말만 듣지는 않았나요? 아예 귀를 닫고 자녀의 말을 시종일관 무시하지는 않았었나요? 자녀가 자신의 의견을 주장할 수 있도록 해주었나요? 그러지 않았다면 이제부터라도 하면 됩니다.
자녀의 존재를 부모가 알아주는 것부터 자녀와의 관계는 달라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자녀의 자해 충동도 줄일 수 있습니다. 자녀의 행동과 존재를 분리해서 생각해 보세요. 자해해서라도(행동)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아이(존재감)를 각각 바라보는 겁니다. 알프레드 아들러는 모든 행동에는 목적이 있다고 했습니다. 자해하는 자녀에게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요? 자해 행동이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녀 스스로가 느끼는 무가치의 감정, 세상으로부터 소외감을 더 큰 고통으로 해결하려는 자녀를 안아주세요. 부모의 양육 태도의 변화는 자녀들이 버팀목으로 삼아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부모라면 자녀에 대한 걱정과 간섭이 끊이지 않을 겁니다. 이 또한 부모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니까요. 아닙니다. 그건 부모 입장에서 보는 사랑이지, 자녀의 입장은 다릅니다. 자녀의 인생은 자녀가 선택하도록 자율권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가 스스로 결정한 사항에 대해서는 믿고 기다려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시행착오를 거쳐서 더 나아질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어야 합니다. 부모의 신뢰는 자녀가 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줍니다. 자녀와 특별한 시간도 가져보세요. 그동안 단절된 관계를 풀어내기 위해 여행이나 자녀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해보는 겁니다. 그러면서 인간 대 인간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눠보세요. 왜 그리 자녀에게 기대했는지, 부모의 좌절한 경험이 자녀로부터 어떤 보상을 받으려고 했는지 허심탄회하게 말입니다.
부모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고, 다만 자녀를 잘 키우고 싶어서 여러 가지를 시도하며 노력하는 불완전한 인간임을 기억하세요.
[박예진의 토닥토닥] (35)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상)
50대가 된 영훈씨는 여전히 어머니께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어머니는 외아들인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오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영훈씨의 아버지는 늘 술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러니 생계와 육아 모두 어머니의 몫이었습니다. 어머니가 시장에서 장사할 때 그 등에는 영훈씨가 업혀 있었습니다. 영훈씨가 학교에 다니기 시작하자 어머니는 학원비를 벌기 위해서 밤늦게까지 집에서 부업을 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사랑과 보살핌 덕에 영훈씨는 대학에 가고 취직도 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영훈씨가 서른이 되던 해에 세상을 달리하셨습니다. 안타깝긴 했지만, 이제 좀 숨을 쉴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가 그동안 겪었던 희생과 고생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영훈씨는 어머니가 여러모로 숙고해서 고른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어머니는 어렵게 모은 돈으로 신혼집도 차려주셨습니다. 그러나 즐거운 신혼생활도 잠시, 자꾸 영훈씨 먹을 음식을 했다며 가져가라는 어머니의 말에 자주 어머니 댁에 가야 했습니다. 이뿐만 아니라 집안의 대소사는 모두 영훈씨 어머니의 의견을 따라야 했습니다. 영훈씨에게 이는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나, 영훈씨의 아내에게는 아니었습니다.
영훈씨의 아내는 부부가 함께 해결한 일도, 친정에 관한 일도, 남편 직장에 관한 일들도 시시콜콜 시어머니에게 매일 전화를 해 보고하는 남편이 점점 힘들어졌습니다. 남편은 어떤 사안에 바로 결정하는 일이 없이, 아주 사소한 것도 시어머니와 의견을 나눈 후에야 답을 했습니다. 자신은 딴 식구처럼 여겨졌습니다. “나는 뭐지? 왜 나와 결혼했지?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영훈씨가 좋았는데….” 막상 결혼하고 보니 그 착하고 성실함은 어머니를 향한 것일 뿐 자신과 두 사람이 함께 꾸릴 가정에는 해당되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3년, 결국 견디지 못한 아내의 요청으로 영훈씨는 이혼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의 이혼으로 어머니가 힘들어하시니 영훈씨는 내가 더 잘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어머니와 살게 된 영훈씨는 홀로 계시는 어머니에겐 차라리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머니는 그런 영훈씨가 참 흡족하면서도 부인도 자식도 없는 영훈씨가 안타까워 신경이 쓰입니다.
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고부 관계는 단순히 시어머니와 며느리만의 관계로 끝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남편까지 포함한 삼자 관계로 남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지요. “기혼 여성의 결혼 만족도에 가장 영향을 주는 요인도 고부갈등 상황에서 남편의 역할”이라고 합니다.(리마리, 2002)
영훈씨 가정처럼 밀착된 모자 관계는 원만하지 않은 부부 관계나 부자 관계로 인해 발생합니다. 어머니의 입장에서는 남편과의 관계가 원만하지 못해 아들에게 대한 의존도가 높고, 아들 입장에서는 아버지는 무섭고 두려운 존재이다 보니 어머니의 사랑에 더 매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어떻게 보면 집안 공통의 고통이 모자의 상호의존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합니다. 외동아들이다 보니 어머니에겐 아들은 아들 이상의 역할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서로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을 늘 갖고 있습니다. 50대인 영훈씨의 삶은 여전히 어머니에게 종속되어 있습니다. 이건 과연 누구의 삶일까요? 행복하긴 한 걸까요? 그렇다면 이런 고착의 굴레는 어떻게 끊어내야 할까요? 다음번에 이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2년 9월 18일, 박예진(율리아, 한국아들러협회장)]
[박예진의 토닥토닥] (36) 나이가 들어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하)
이번 주도 50대 영훈씨 사례입니다. 영훈씨의 어머니는 하나뿐인 아들을 키우기 위해 온갖 일을 다 하셨고, 그 덕분에 영훈씨는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도 무난히 입학하고, 직장에 취직해서 안정된 생활도 하게 되었습니다. 늘 술에 취해서 하는 일 없이 지내던 아버지는 영훈씨가 서른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영훈씨는 어머니가 그동안 겪었던 희생과 고생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영훈씨는 결혼도 어머니가 골라준 여자와 했습니다. 신혼집도 어머니가 얻어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늘 어머니가 우선인 영훈씨가 불만이었고 결국 3년 만에 이혼하게 됐습니다. 영훈씨는 차라리 어머니와 생활하는 편이 마음이 더 편합니다. 다만 이제 오십 줄에 들어서고 나니 여러 생각이 앞섭니다. 생활과 경제적인 면에서는 아무런 불편이 없지만, 간혹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지금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나,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가족치료 심리학자 보웬에 의하면, 만성적인 부부갈등을 겪고 있는 여성의 경우 본인의 불안을 해소하고자 자녀에게 집착하며, 자녀를 과보호하고 통제한다고 합니다. 아들에게 집착하는 영훈씨의 어머니도 같은 경우입니다. 아들의 자잘한 일까지 끼어들면서 아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고, 자신의 지나친 과보호와 돌봄을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 역시도 아들과 밀착된 관계로 인해 자기 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영훈씨의 감정은 아마도 복합적일 겁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희생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들면서도 아직 어린애 대하듯 하는 어머니의 태도에 화도 나겠지요. 그러니 지금 느끼는 감정도 이해가 됩니다. 자신감도 없고, 자존감도 낮으며, 의사결정도 잘 못 하는 50대의 삶이 허무하겠지만, 이는 책임지지 않고 의존하면서 살아온 영훈씨의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삶을 다시 그려야 합니다. 돌이켜보면 영훈씨가 혼자 해낸 일도 많을 겁니다. 학업성취나 대학 입학만큼은 오로지 영훈씨 노력의 결과니까요. 좋은 직장에 취직한 것도, 직장생활을 잘해낸 것도, 현재까지 직장에 다니는 것도 모두 영훈씨의 능력입니다.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 때문에 가출이나 일탈을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와 함께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모두 영훈씨가 이뤄낸 것들입니다.
다만 아직도 영훈씨의 마음은 어린아이로 남아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두려운 세상에서 이미 혼자 서 있음에도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아직 혼자인 게 두렵다며 어머니의 품으로 도망치고 있는 형국이지요. 이러한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인정하고 격려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내면에서 울려대는 “나는 부족하고 무가치하다”와 같은 비판의 말은 멈출 겁니다.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는 과잉 일반화는 이제 그만하고, “어느 부분은 부족하지만, 어떤 것은 잘했다”라고 매일 격려의 말을 스스로 해보는 건 어떨까요?
자존감은 자신을 존중하고 인정할 때 높아집니다. 작은 일은 스스로 결정해보고, 어머니와 함께 의논할 것과 혼자 결정할 일들을 구분해 혼자 의사결정을 하는 범위와 횟수도 늘려봅시다. 어머니와의 경계를 분리하고 자신의 영역을 넓히는 것은 혼자일 때의 불안을 감소시키고, 자신을 신뢰하게 해주며 심리적으로 안정되게 합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38) 내 부족함은 하느님께로 이르게 합니다
30대 초반의 은이씨는 남의 시선이 늘 신경 쓰입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나 없는 데서 욕을 하진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이왕이면 사람들한테 ‘좋은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이런 은이씨의 사전엔 거절이란 없습니다. 이런 부탁 저런 부탁 다 들어주느라 늘 바쁩니다. 혼자 다 하느라 기운이 달려도 다 나에 대한 기대려니 생각하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걱정이 올라옵니다. ‘이러다가 내 시간은 언제 갖지? 친구들 만난 지도 가족과 같이 놀러 간 적도 너무 오래됐는데, 이러다 더 혼자가 되는 거 아니야?’
이뿐만이 아닙니다. 은이씨는 매 순간 불안의 연속입니다. ‘저번에 그 미팅, 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건 아니겠지? 나를 일 못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어떻게 해? 어머나, 동창 모임 있다고 했는데 답변을 아직 못했네. 나를 무심하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새로 등록한 학원 선생님이 이런 것도 못 하냐며 나를 한심하게 생각하면?’
때로는 “어떻게든 되겠지! 죽기야 하겠어?”라고 호기를 부려보지만, 채 5분도 못 가서 사라지고 맙니다. 결국, 지난번 모임의 대화를 떠올리며 실수한 게 없나 복기하고, ‘다음번 미팅 때는 이러저러한 걸 조심해야지’ 하면서 생기지도 않을 일을 상상하며 대비하곤 합니다. 이런 자신이 스스로도 한심하지만, 오래 그렇게 살아온 탓인지 그 굴레를 벗어나기가 너무 힘듭니다. 드라마를 보면 하나같이 자기 할 말 다하면서 멋지고 당당해 보이던데 나는 왜 이러는 걸까요? 그건 드라마라서, 주인공이라서 그런 걸까요? 은이씨는 오늘도 괴롭습니다.
어떤가요? 아, 저런 건 나도 있는 모습인데 싶은가요? 그런데 사람인 이상 우리는 모두 다 비슷합니다. 내 모습이 100% 다 마음에 든다는 사람은 아마 열에 하나둘 될까 말까입니다. 우리는 모두 보기 싫은 모습을 하나씩 가지고 있고, 그것을 떼어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미운 모습만 더 크게 보이고 나를 불안하게 하지요.
우리는 저마다의 세상에서 주인공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주인공으로 살아야겠죠? 그런데 그건 내 인생에서일 뿐 세상은 또 다릅니다. 세상에는 나 말고도 수많은 사람이 있고, 그 모든 사람이 자기가 주인공인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내 생각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나는 내 모습이 비친 거울만을 보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저마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을 꿈꾸지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의 중심이 아니어도 이 세상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하니 너무 허무하고 기운이 빠지나요? 그런데 그렇게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면, 내가 나를 중심으로 돌면 됩니다.
나 스스로를 존중하지 않는데, 남이 나를 먼저 존중해주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안 드는 부분 때문에 발달한 나만의 노하우도 있습니다. 결국, 만족한 나도, 마음에 들지 않는 나도 다 내 안에 있습니다. 나는 부족해서 더 하느님께 의탁하며,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부족한 나를 채워주시는 하느님께 나를 내어드리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축복으로 충만하다면 그게 과연 불행일까요?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부족한 나를 넘어 하느님께로 이르게 합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39) 몸은 늘 말을 합니다
우리는 늘 말을 해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고선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요.
우영씨는 말 없는 딸이 늘 답답합니다. 그래서 딸의 이야기까지 대신하고는 이렇게 묻습니다. “내 말이 맞지 않아?” 그러면 딸은 “몰라” 해버립니다. 그런 딸이 우영씨는 아쉽기도 하지만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많은 아이가 “몰라”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대답하는 아이들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대답하기 싫어서일 수도 있고, 엄마에 대한 거리두기일 수도 있고, 정말 몰라서일 수도 있겠지요. 이렇게 ‘몰라’의 의미는 다양합니다.
그런데 꼭 말로만 하는 것이 소통일까요? 말로 하지 않아도 신체적으로 표현되는 심리가 있습니다. 배가 아프다, 심장이 두근거린다, 머리가 지끈거리다 등 이런 병적인 고통 말고도 동공이 불안정하거나 목소리와 발이 떨리는 등 행동의 불안정도 나타납니다. 어깨 근육이 뭉치거나 입이 열리지 않는 것 같이 긴장 상태가 나타나기도 하지요. 이 모두가 마음의 표현입니다. 우리는 말이 아닌 몸짓, 즉 신체적 언어를 통해서도 나의 마음과 생각을 표현하곤 합니다. 상대의 신체적 반응으로도 우린 많은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아이의 말 없음이 불편하고 신경 쓰인다면 아이의 신체 언어가 어떤지 살펴보세요. 엄마와 시선을 맞추려 하지 않거나 다른 곳만 보고 있다면 이런 표현일 공산이 큽니다. “엄마는 왜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해? 간섭하고 통제하려는 것 같아 불편해. 아 또 잔소리, 답답하다.”
입장 바꿔 생각해봅시다. 우리도 어릴 때 부모로부터 비슷한 일을 당하면 그러지 않았나요?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하면서 볼멘 목소리로 쏘아붙이고 자기 방문을 쾅 닫은 적이 한두 번쯤은 있을 겁니다. 그건 일종의 자기방어 본능입니다. 불필요한 관심사와 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몰라!” 하면서 도망가고 싶은 자녀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세요. 아이들은 엄마의 반응에 반항하면서도 내면은 불안해합니다. 자신의 경계를 지키고 비밀을 유지하고 싶지만, 가끔은 속내를 털어놓고 논의도 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너무 그 경계 안으로 무작정 들어오려는 게 문제이지요. 누구도 자기 영토를 침범당하고 싶지 않으니까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걱정된단 이유로 그렇다지만, 아이에게는 그건 자기 고유의 영역이 침해당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당연히 불편을 느낄 수밖에 없겠지요.
따라서 아이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부모로서 관심인지 불안인지 먼저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진심으로 아이가 걱정된다면 아이의 표정부터 살피고 스스로가 먼저 다가올 수 있게 충분히 시간을 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불안이 먼저라면 부모로서의 불안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기에 아이가 말하도록 다그치고 윽박지르겠지요. 나의 불안으로 아이가 불안해지지 않도록 해주세요.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말해주면 고맙겠어. 당장 말하고 싶지 않으면, 좀 기다릴게.” 어릴수록 자신이 마음을 부모가 알아주길 원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럴 때 인정받고 소속감을 느끼니까요. 그러니 자녀에게 요구 대신 부모의 솔직하고 걱정스러운 마음을 전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엄마가 너의 마음을 몰라서 좀 답답해. 너도 하고 싶은 말이 있을 텐데 그러지 못해서 답답하겠다.” 이렇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아이의 감정도 알아차려 주는 것입니다. 이는 서로의 감정을 상호작용하게 하여 아이의 마음을 열어줍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43) 트라우마 사건은 없습니다 (상)
최근 이태원에서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한 트라우마(정신적 외상)와 2차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심리 지원 등 정부 차원의 대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트라우마’란 시간이 지나도 같은 영향을 주는 감정적 충격으로 작게는 친구들 간의 놀림이나 장난, 크게는 사고 및 사건 목격 등에서 비롯됩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사건을 겪었다고 해서 모두 장기적인 심리 문제를 겪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25~30% 정도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과거의 기억이 지금도 생생히 재현되는 것 같고, 고통과 공포를 느끼게 되며, 생각을 차단하기 위해 단기적으로 기억을 상실하기도 합니다. 이런 경우에는 즉시 전문적인 치료와 상담을 병행해야 합니다. 트라우마는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동반하는 일이 많으며 이러한 이미지가 사람의 기억 속에 오랜 시간 남아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굿 윌 헌팅’이란 영화를 보셨나요? 주인공인 윌은 정식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수학, 법학, 역사학, 문학 등 여러 분야에서 천재적 재능을 보이지요. 그런 그는 어린 시절 양부모에게 받은 학대로 마음의 상처가 무척이나 깊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윌은 학창 시절 자신을 놀렸던 친구를 폭행하고 체포당한 후 심리학 교수인 숀을 만나게 됩니다. 늘 반항적이고 부정적인 윌의 태도에 숀은 ‘그럴 수 있다’고 깊은 공감을 해줍니다. 윌은 숀 교수를 통해 안전한 대상과 관계를 체험하게 되지요.
숀 교수는 윌에게 말합니다. “넌 천재야. 그건 누구도 부정하지 못해. 그러나 책 따위에서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우선 네 스스로에 대해 말해야 돼. 네 자신이 누군지 말이야.” 자신에게 부정적인 윌을 인정해주는 말입니다. 또한, 숀 교수는 윌의 폭력적이고 세상과의 단절적인 태도에 대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것이었다며 “네 잘못이 아니야”라고 합니다. 이는 고통 속에서 투쟁한 윌의 행동을 정당화해주지요. 숀 교수의 진정성은 윌을 변하게 합니다.
심리학자 알프레드 아들러는 “트라우마 사건은 이제 없다”고 말했습니다.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건 객관적인 사실(사건)보다 생각과 감정과 같은 사건에 대한 주관적 경험이란 의미입니다. 즉 사건은 이미 지나갔기에, 사건에 대한 공포와 무기력이 트라우마의 요인이라는 뜻이지요. 나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어떻게 바라보는지 또한 중요합니다. 사건을 계속 부정적이거나 위협이 되는 요소로 남겨둘 것인지, 또는 나를 성장하게 하는 자원들에 초점을 맞추며 극복하려는 시도를 하는지에 따라 트라우마로 발전할 가능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리는 사건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그건 다음 주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44) 트라우마 사건은 없습니다 (중)
이번 주도 트라우마에 관한 내용입니다. 개인마다 트라우마 증상, 상태, 기간 등이 달라서 일반화해서 말하긴 어렵습니다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안전’입니다.
‘안전한 대상과 장소’로 신뢰 있는 관계를 형성하고 유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장 즐거웠던 경험을 상상해 보세요. 이미지를 그려보셔도 좋습니다. 그때 느낀 감정도 기억해보세요. 항상 두렵고 위협적인 상황이 오면, 바로 대응하지 말고 그 기억과 감정을 꺼내어 회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경험을 내 안에 깊이 넣어 둔다면 어디에다 두시겠습니까? 저라면 ‘가슴 깊이’ 두겠습니다. ‘심장’일 수도 있습니다. 평상시에도 숨을 들이켜고 천천히 내쉬면서 즐거운 경험의 기억과 감정이 온몸으로 퍼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때 음악을 좋아하시는 분은 음악을 틀어놓으셔도 좋습니다. 그리고 함께하시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를 그려보세요.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기쁨과 평화의 순간을 사진 찍은 이미지처럼 내 안의 깊은 곳에 저장해두세요. 그곳은 ‘늘 안전한 곳(방)’입니다. 그러니 위협적이고 두려운 상황이 몰려오면, 바로 반응하지 말고 잠시 멈추어보세요. 호흡을 깊게 하면서, 익숙해진 ‘안전한 장소와 편안한 감정’에 머물러서 몸을 이완한 후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나에게 늘 지지해주고, 격려를 해주는 분을 생각해보세요. 그분과의 관계에서 내가 편안한 부분은 무엇인가요? 나에 대한 인정, 수용, 격려, 지지, 문제 해결에 대한 도움, 의지 등 다양한 것들이 떠오를 것입니다. 그분이 자주 하는 말, “그럴 수 있어, 네 탓이 아니야, 넌 괜찮은 사람이야” 등을 녹음해두고 들어 보세요. 성경 말씀 중에서 내게 위로와 위안이 되는 문구가 있다면 크게 읽고 녹음해서 자주 듣는 것도 방법입니다. 우리는 청각에 예민합니다. 고함치는 소리, 비난하는 소리 등으로 청각이 발달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은 좋은 소리로 자신의 힐링을 위해 사용해보세요. 전 ‘물소리’가 정화되는 의미가 있어서 자주 듣습니다. 이렇게 내 안에 “안전한 장소, 안전한 대상 그리고 나의 삶 속에서 강화된 긍정적 자원들을 활용”하여 트라우마에 대응하는 것입니다.
부정적 자기 평가도 심하죠? 고통과 어려움을 이겨 온 나의 노하우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힘들어서 시작했지만, 매일 아침 성찰을 한 지 20년가량 됩니다. 성경 말씀을 읽고, 말씀이 주는 의미를 실생활에서도 성찰해왔습니다. 그 습관이 저의 ‘성장’과 ‘상담’이란 업에 이렇게 도움이 될지는 몰랐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며, 살아갈 수 있는 나만의 노하우를 키워주셨습니다’. 저 혼자서 하지 않았습니다. 트라우마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주까지 이어집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45) 트라우마 사건은 없습니다 (하)
3주에 걸쳐 트라우마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그 대처 방안을 살펴보고 있는데요. 이번 주는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심리적 스트레스에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지 이야기해보고자 합니다.
트라우마는 우리를 사건이 일어난 시점으로 돌려놓아 불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이미 끝난 것이고 다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그때와는 다른 현재라는 것을 인식하는 게 도움이 됩니다. 과거의 공포심이 나를 자극하면 손을 꼬집어보세요. 그렇게 현재의 나를 자각하고 지금 시점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른발 엄지발가락에 힘을 가하고 발꿈치에 힘을 주어보세요. 그다음에는 왼쪽 엄지발가락과 발꿈치에 힘을 주어보세요. 이러한 행동을 몇 번 반복해보는 겁니다. 이를 신체적 중심 잡기라고 하는데요. 신체의 움직임에 몰두하여 지금 현재에 집중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체적 중심 잡기만큼이나 심리적 중심 잡기도 중요합니다. 각자의 방식대로 아마 마음의 중심을 잡아본 경험들이 있을 겁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삶에 대한 희망’일 텐데요. 이는 상담 치료에서도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희망,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요? 행복한 가정, 잘 크는 아이, 경제적 안정, 가족의 건강 등 다양하게 있을 겁니다. 이는 다른 말로 현재에서, 또는 앞으로 이루고 싶은 소망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희망이 있어 지금을 견디고 앞날을 기대합니다. 그렇다면 그 희망을 지금 여기에 담아보는 건 어떨까요?
생각해보세요. 지금 행복한 가정을 위해서 이 칼럼도 보고 있고 기도도 하고 있는 내가 보이지 않나요? 그렇다면 지금 그렇게 노력하는 나한테 집중하면 됩니다. 나를 둘러싼 환경을 내가 모두 바꿀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 속에서도 우리는 최선을 다하며 할 수 있는 것들을 만들어갑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삶은 충만해집니다. 잘될지 말지 고민하지 마세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나머지는 하느님께 맡기세요. 결과는 하느님의 뜻이니까요.
이것은 건강한 경계선을 구축하게 합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 통제 가능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를 정해주어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일에 동동 구르며 상처받는 일을 줄여줍니다. 대개 문제는 내가 어쩔 수 없는 문제들까지 감싸 안으려 해서 벌어지는 일들입니다.
평소 이런 일이 반복될 때 자신의 몸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알아두는 것도 좋습니다. 예민도가 높아져서 멍해진다거나 손에 땀이 난다거나 등골이 오싹해지거나 하는 등의 반응입니다. 이를 알면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깨닫고 재빨리 신체적 중심 잡기 등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단단해서 트라우마를 겪으면서도 성장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강점에 대한 인식이 증가하고, 대인관계에서 변화, 특히 고통받는 사람과의 연결을 더 느낍니다. 삶 전반에 대한 더 큰 감사와 삶의 과업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증가합니다. 영성적 삶이 깊어집니다. 이것은 본인의 믿음 체계와 소명에서 중대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심리학자 니라 크피르는 “진정한 변화는 종종 깊은 절망의 구렁텅이에서부터 시작이 된다”고 말합니다.
과거 사건에 대한 기억을 없앨 수는 없지만, 트라우마 사건은 이제 없습니다. 하느님께 의탁하면서 하느님 안에 살려고 노력하는 자신만이 지금 여기 있습니다. 그로 인해 나에게 ‘마음의 중심축’인 항구하고 변함없는 ‘하느님 사랑’이 현존합니다.
[박예진의 토닥토닥] (42) 음주, 진정 나를 위한 것인가요?
호형씨는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에 다닙니다. 혼자 사는 덕에 여유롭기도 하지요. 주말이 되어도 호형씨는 집 밖을 나서지 않습니다. 혼밥에, 혼술에 혼자만의 여유를 즐깁니다. 이 맛을 누가 알까요? 문제는 이러한 빈도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점입니다.호형씨는 직업상 여러 사람을 만납니다. 그럴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곤 합니다. 상대방의 표정, 말투 하나하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에 더 긴장하게 되고 신경은 곤두섭니다. 미팅을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는 혹시나 말실수한 건 없을까 곱씹느라 의기소침해집니다. 집에 오면 녹초가 되기도 하고 우울한 기분도 털어버릴 겸 또 술 한 잔 마시고 잠이 들곤 합니다.
많은 사람이 스트레스 해소법으로 퇴근 후 집에서 한 잔의 술을 즐기곤 합니다. 이러한 음주가 습관화되면 알코올 중독으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실제로 이러한 단계를 거쳐 알코올 중독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게다가 한국은 음주에 다소 관대하기도 합니다. 밥을 먹으면서도 한 잔쯤은 괜찮다고 ‘반주’로 권하기도 하지요. 이는 개인의 건강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됩니다. 매일 술에 취해 지낸다면 일상생활이 제대로 돌아가기나 할까요? 개인의 일상생활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데 개인들로 이뤄진 사회 조직이 굴러가는 데 영향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사실 술은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스트레스 해소제이긴 합니다. 괴로운 감정을 가라앉혀주며 잠드는 데 도움이 되기도 하지요.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술을 마심으로써 순간의 기분은 가라앉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외려 숙취로 고생하면 고생하겠지요. 아울러 음주는 신경계에 작용해 실제로는 숙면에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니 지나치게 술에 의존하는 습관을 고쳐야 합니다.
호형씨의 경우 사람을 만나는 직업을 가진 만큼 쉬는 날까지 다른 사람과 함께하는 것이 괴로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혼자 할 수 없는 취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요. 영화관이나 전시회를 보러 간다든가, 드라이브나 등산을 하는 등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다른 취미도 분명 있습니다.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스스로와 대화하며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들여다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면 지금의 문제가 직업적인 데서 오는 것인지, 자신의 감정이 불안한 데서 기인하는 것인지 원인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에 따라 휴직, 이직, 전직 등의 여러 가지 방안을 고려해볼 수도 있을 겁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청하고 하느님 안에서의 생활은 금주의 적극적인 방법 중 하나입니다. 어려운 일이지만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느님께 의탁하며 기도를 하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방향이 바뀔 수 있습니다. 한 음주에 관한 연구에 의하면 ‘영적 체험’은 술을 끊거나 줄이게 하는 데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강 앤 리, 2020)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내 상황을 인식하고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입니다. 계속 같은 방법에 의지하는 한 매일 똑같은 일상이 반복될 뿐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순간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누르기 위해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음주에 의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짧은 위안은 빠르게 사라지며 공허함만 키울 뿐입니다. 건강한 신체적·심리적 건강을 위해 진정으로 나를 위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고 나를 돌보는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