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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출병의 규례 (레 16장)
- 설교 : 김강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15장 유출병에 대해서 공부하겠다. 주보를 읽겠다. 유출병에 대한 규례는 만성적인 남자의 유출 설정으로 인한 유출 여인의 경도로 인한 유출 여인의 만성적인 피의 유출 구조로 그렇게 말씀하신다.
유출에 대해서 그렇게 네 가지로 말을 한다. 그런 것을 보았을 때 여기 유출을 그냥 진물이 좀 흐르고 고름이 좀 흐르고 그런 정도보다는 생식 기관으로부터 유출에 대해서 다루고 있는 것으로 이해가 된다. 생식 기관으로부터 유출은 생명의 몸으로부터 분리되는 죽음의 표이고 그래서 부정하다. 왜냐하면 설정으로 인한 유출도 생식 기관과 관계가 되어 있고 여인의 경도로 인한 유출도 그렇고 경도 기간보다 길게 만일에 그런 불결이 있으면 만성적인 남자의 유출도 일종의 생식 기관의 병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 말이다.
그래서 13-14장 문둥병 규례에서는 피부에 나타나고 가죽옷 집에 나타나고 속에 있는 죽음의 활동력이 겉에 흰털이 되든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부정이었다. 그런데 15장에서는 아예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하는 것인데 그 생식 기관에 병을 말하고 있다.
성소에서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정결케하시어 생명의 하나님을 봉사하게 하신다. 이제 실은 생육하고 번성하도록 주신 생식 기관에까지 그런 죽음의 병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죽음의 부정으로부터 자기 백성을 정결케하시고 하나님을 봉사하게 하신 규례로 이 유출병 규례에서는 말씀하신다.
정결케 하신 규례는 해가 지면 되고 또 물로 씻고 칠일이 지나던지 그러면 속죄제와 번제를 드리면 되고 이런 것이 정결케하는 규례다. 물로 씻는 것은 죽음에 부정함에 오염되지 않는 생명의 물로 씻음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죽음의 부정에도 전염되지 않는 것은 온전한 생명을 나타낸 것인데 물로 씻는 것은 그 생명을 씻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해가 지는 것은 생명을 새롭게 하는 날에 임함을 말하는 것이다. 해가 지도록 까지 부정하고 해가 지면 정결케 된다. 왜냐하면 한날이 지남으로 이전에 부정케 된 생명은 끝나 버리고 이제 새로운 생명의 날이 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 제 칠일이 되면 완전한 생명이 나타나고 완전한 하나님의 기쁨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래서 칠일이 지나는 것은 안식이 임함을 그리고 제 팔 일에 속죄제와 번제로 여호와 앞에 속죄하는 것은 여호와께 나아가 새롭게 헌신함을 주시는 것이다.
이 속죄제 같은 것이 죄 때문에 드려진다 할지라도 그 목표는 하나님 앞에 드려진데가 목표점이 있다.
그냥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시 하니까 그것을 해결하는 해결사로서 법적인 문제보다는 새롭게 제물을 드리는데 제물에 안수하고 그렇게 제물에 피가 흘려지면 그 피가 흘려진데서 제물을 태울 수 있고 그렇게 새로운 헌신이 드려진 것이다. 혈루증 든 여인은 만지면 나으리라는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졌고 예수님의 능력이 그 사람에게 임하여 만진 그 시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의 능력이 그녀의 부정한 생명을 근원으로부터 깨끗케 하셨다. 예수님은 그녀의 생명을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셨다.
그것이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이적이다. 혈루증 여인이 뒤로 가서 만지면서 내가 만지기만 해도 깨끗함을 받으리라 했는데 곧 그 시로 나았다. 마태복음은 그렇게만 이야기하고 마가나 누가에서는 능력이 예수님에게서 나가서 나았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다. 마태복음에서는 능력이 그에게서 나갔다 그렇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해서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약속하신 그 약속이 이루어졌다고 유대인을 대상한 듯한 말을 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를 만져서 나았다 하면 그분은 곧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약의 성소에 있는 거룩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성소에 제사장은 만지면 다른 사람을 거룩하게 한다. 그런데 에수님은 만졌다. 마가나 누가는 선교적인 상황에 더 관심이 있다. 그러니까 능력이 그에게서 나가서 나았다 해줘야 더 이해하기 좋다. 그래서 그런데서 능력이 나갔다 그렇게 기록하고 있고 마태복음은 능력이 나갔다 그런 말이 없고 만진 즉시로 나았다. 그렇게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능력은 혈루증 걸린 여인이 만지자 나와 버렸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그녀의 생명을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온전한 정결 곧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온전한 생명의 교제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교회에 주심으로 이 생명의 언약 역사를 완성하셨다.
이제 조목조목 풀어 보면 더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이 첫 문단이 전체에 대한 설명이었다.
몸에 유출병이 있는 자 12절까지인데 남자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것이 흐르던지 엉켰던지 그 유출병 때문에 그는 부정하다. 그가 누운 침상과 그가 앉은자리가 다 부정하다. 그런데 그 사람이 입었던 옷 그런 말은 잘하지 않고 누운 침상 앉았던 자리 거기다 강조를 두고 있다. 왜냐하면 아까 말했지만 이것은 생식 기관의 부정이거든요. 그러니까 그가 누웠던 지 앉았던지 그가 탄 안장이든지 주로 그런데가 강조를 두고 있다. 유출 병환 자의 침상이나 그가 앉은자리나 또는 몸이든지 그가 침을 밷아버리든지 그가 탔던 안장이나 그의 몸 아래 닿았던 것에 접촉된 자는 누구나 부정하다. 부정한 것을 옮기는 자도 다 부정하다.
하여튼 유출병이 있는 자는 다 부정하지만 그래도 더 부정하다고 강조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주로 그가 누었던 침대 앉은자리 그가 탔던 안장 몸 아래 닿았던 곳 그리고 그 몸자체가 부정하고 그가 침을 뱉으면 그 침 뱉음을 당한 자도 부정하다. 그리고 그 부정한 것을 옮기는 자도 부정하다. 그런 식으로 부정은 옮겨간다.
거룩한 고기를 보자기로 쌌으면 그 보자기가 거룩하지 안해진다. 그런데 부정한 것을 어떤 보자기로 쌌으면 그 보자기가 부정해진다. 그것이 구약에서 부정에 대한 규례이다.
그래서 하여튼 유출병자가 누웠던 자리 그의 허리 밑에 있는 것을 만지 모든 자는 부정하고 거기다 더해서 침밷은 자는 그 몸까지 부정하다. 유출병 환자가 물로 손을 씻지 않고 아무나 만지면 그도 부정하다. 물로 씻고 만지면 부정이 옮겨지지 않는다.
유출병 있는 자가 만지 질그릇도 부정하니까 깨뜨려야 되고 나무 그릇도 부정하니까 물로 씻으면 깨끗하게 된다.
13-15절까지는 만성 유출병의 정결케 되는 규례가 있는데 유출병이 깨끗케 지면 그의 몸을 정결케되기 위하여 칠일을 기다리고 그리고 칠일후에 옷을 빨고 흐르는 물에 옷을 빨면 정하다. 그러니까 나은 뒤로도 그냥 정결케되는 것이 아니라 칠일이 지나냐 정결케되는 의식을 행할 수가 있다. 그 부정한자와 접촉한자는 해가 지면 씻으면 되지만 그 부정한 사람은 칠일이 지난후 옷을 빨면 정하다.
그는 제 팔 일에 비둘기 두 마리를 취하여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것으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서 그것으로 유출병 환자를 위해서 여호와앞에 속죄해야 한다. 그러면 이것은 생식 기관에 대한 죽음을 말해서 큰 죽음인데도 속죄제를 드릴때는 비둘기로 드리니까 굉장히 작다. 아마 이런 것은 성경 자체가 설명해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생식 기관에 대한 정기적인 유출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작은 것으로 된 것 같다. 만일에 이런 일에 소 한 마리 염소 한 마리 했다가는 상당히 힘들다. 마치 가난한자 누구가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난한자의 예물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누구나 속함을 받을수 있도록 비둘기로 한 것으로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누구나다 이 부정에 옮겨져 있다. 왜냐하면 누구나 생식 기관에 유출병이 있고 설정이 있다. 그래서 누구나다 할 수있는 비둘기 한 것 같다.
그 다음에 설정으로 인한 부정이다. 설정한 자는 부정하다. 온 몸을 물로 씻을 것이요 그러면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결케 되겠는데 여기서는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후에는 정하리라 그런 말을 하지 않고 거꾸로 저녁까지 부정하다 이렇게 반복해 났다.
정수가 묻은 옷이나 가죽은 물에 빨아야 한다. 그러면 저녁까지는 부정하다. 그러면 해가 지면 정결하다 그 말이다. 부정하다는데 강조를 둬 났다.
남녀가 동침하여 설정하였으면 둘다 씻어야 한다. 그러면 저녁까지는 부정하다. 이스라엘 백성이 시내 산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도 삼일 동안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아라 그렇게 했다. 왜냐하면 언약 체결 당사자는 남자들이거든요? 그래서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그렇게 말했다. 다른 말은 없고 씻어라 그렇게 되어 있고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아라 이 말만 있고 다윗이 지성물을 먹었을 때도 만일에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안했으면 먹으리라. 내가 집을 떠나온지가 며칠인데 그런 일이 없다 하고 먹었다. 그러면 거기 특별히 여자와 동침한 것에 대해서 금지령을 두고 있다. 이것이 그러면 무엇인지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것이 그렇게 중요한지 말하자면 생각을 해봐야 한다.
그런데 레위기의 부정법에서는 부정하다는 제일 뒤에 부정에다가 이 유출병 부정을 두고 있다. 우리 같으면 문둥병이 제일 부정하게 느껴지겠는데 유출병 부정을 제일 뒤에다 두고 있다. 왜냐하면 문둥병은 전반적인 부정을 말하는데는 굉장히 강조되어 있고 진 밖으로 쫓겨난 것 그런 일에는 굉장히 강조되어 있는데도 그래도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약속이 진행되는 그 생식 기관의 생명의 기관 그런 것은 유출병에 더 드러나 있다.
그래서 제일 뒤에다가 배열했다고 이해가 된다. 어떻든 다른 부정은 없을지라도 부부 관계를 갖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기 때문에 아마 특별히 그 부정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것 같다. 왜냐하면 다른 부정은 다 밖으로 드러나는데 이 부정은 안 드러난다.
유출병 있는 여자가 많은 군중 틈에 끼여 예수님께도 와도 이 부정한 여인은 저리로 가라 알아 맞출 사람이 없다. 문둥병은 안다. 그런데 이것은 그렇게 알아맞출 방법이 없다. 그래서 특별히 언약 체결 당시에서는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도록 그렇게 요구했다고 이해가 된다.
그런데 하여튼 남녀간에 동침했으면 둘다 물로 씻어야 한다. 저녁까지 부정하다. 어떻든 몸으로부터 유출 몸으로부터 무엇인가 나오면 그것은 다 부정하다. 그것이 특별히 생식 기관으로부터 피나 정액이 나와 버렸으면 이것은 다 부정하다.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 다음 여인의 피의 유출이다. 유출이 피이면 칠일 동안 부정하다. 이것은 경도의 부정이다. 그녀를 만지는 자는 저녁까지 부정하다. 불결한 동안에 그녀가 누웠던 침상이나 자리가 다 부정하다. 그런 것을 만지는 자는 다 부정한데 저녁까지 부정하다. 여기서는 깨끗한 규례를 말하면서 부정하다 하다는 것이 강조되어 있다.
침상과 좌석에 있는 물건을 만지는 자도 저녁까지 부정하다. 하여튼 접촉된 모든 것은 부정하게 된다. 이 여인과 동침하는 자는 그 불결에 전염되고 그 남자는 불결한 여인처럼 칠일 동안 불결하다. 그런데 레위기20 18절과 비교를 해보면 만일에 경도한 여인과 동침하면 남녀간 죽이라고 그랫다. 그러니까 경도한줄 알고 그런 관계를 맺는 것과는 다른 경우인 것 같다. 그러나 그 경도 기간에 만일에 남녀가 동침하면 죽이라고 그렇게 되어 있다.
경도 하는 여인과 동침하는 자는 남자는 여인의 근원을 드러내고 여인은 자기의 피의 근원을 드러냈음으로 둘다 백성 중에서 끊쳐지리라. 누가 모르니까 재판해서 죽일 수는 없을 것이고 하나님이 죽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런식 동침은 아닌 모양이다. 그 남자가 누은 상은 모두 부정하다. 그러니까 마치 이 불결기에 있는 여인과 동침하면 그냥 만지는 자는 하루만 부정하지만 동침하면 그 여자처럼 칠일 동안 부정하고 그 여자처럼 부정을 옮긴다.
그 다음 25-30절을 보면 여인의 만성적인 피의 유출이다. 여인이 불결기 외에 유출이 있거나 불결기를 지나는 유출이 있으면 그러니까 경도 기관이 아닌데도 유출이 있거나 그 기관을 넘어서서 계속 유출이 있으면 부정한 유출하는 날 동안에는 여기서는 피의 유출이 있는 기관에는 그렇게 하지를 않고 그 부정을 유출하는 날 동안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불결기 처럼 부정하다.
그러니까 성경 본문을 읽는 것이 최상이다. 제가 조절해 놓은 것은 그것을 읽을 수 있도록 틀만 더 잡는 것이고 이 틀에서 본문을 읽는 것이 뉘앙스를 더 잘 드러낸다. 침상이나 앉은자리나 그 불결기에 부정하고 같다. 이런 것은 만지는 자는 모두 부정하고 물로 못을 빨고 몸을 씻으면 저녁까지 부정하다가 정하다. 그런데 부정하다하다가 강조된 결론들이다.
유출이 그치면 칠일이 지난 후에야 정하다. 칠일이 지난 후에 정하다고 했는데 정결케하는 방법은 물로 씻고 옷을 빨면 된다. 그리고 제 팔 일에 비둘기 두 마리로 제사장에게로 가져오고 제사장은 그 여인을 위하여 속죄제와 번제를 여호와앞에 드려서 속한다.
유출병 규례를 주신 이유는 모세와 아론은 이스라엘 자손으로 그 부정에서 떠나게 하여 그들로 그들 가운데 있는 여호와의 장막을 더럽히고 그들의 부정한 중에 죽음을 면해야 한다. 죽음의 부정한 것은 생명의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게 때문이다. 특별히 이것은 개인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가르쳐서 죽음을 면하도록 강조하고 있다.
문둥병처럼 드러나서 다른 사람이 아는 것이 아니라 제사장의 진찰로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아는 문제이기 때문에 특별히 이 부정으로 죽지 않도록 가르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처럼 유출이 부정한 것은 생명의 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고 특별히 생명의 기관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죽음의 완전한 표상이어서 부정하다고 말하고 있다. 팔일이 지나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물을 통해서 그는 하나님앞에 새로운 헌신의 생활을 시작할수 있다. 그는 다시 속죄제와 번제를 드려서 그런다. 속죄제는 특별히 하나님앞에 죄를 해결하는 문제다.그리고 번제는 전체를 헌신해서 향내나는데 강조점이다. 그래서 그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제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단에 드리는 새로운 삶을 살수 있는것이고 새로운 삶을 시작함으로 속죄가 된 것이다.
이 은혜의 일을 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시키셧다. 이전에 모든 출생은 부정해서 여인의 출산이 부정했었다. 음식물만 죽음아래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출산도 부정하고 그럴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유업들이 다 부정하고 심지어는 생육의 기관까지 다 부정하고 이렇게 전체가 죄로 말미암은 부정의 그들의 삶의 근거를 이루고 있다. 더구나 여인은 항상 경도가 따르면 그것은 항상 생명의 불결을 끼고 사는 것이다. 만일에 그는 남자와 잘못 접촉하면 그는 죽어야 한다. 또 부부끼리 동침하는 것은 상식인데 설정하는 것은 전부 부정하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분명히 복인데도 그 출생의 생명의 토대까지 그렇게 전부 부정하게 되어 있다. 그것이 이스라엘 살고 있는 삶의 질서다. 그들은 만약에 이 부정을 해결하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죽는다.그런데 하나님게서 그들의 부정한데도 이 부정을 해결하는 규례를 주셔서 성소에서 함께 하는 헌신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복을 주셧다 하는 것이 이 레위기의 말씀이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완성하셔서 우리의 출생은 혈통으로 출생하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하늘에 속한 새로운 출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제 그리스도의 교회에서는 그런 의미로 부정은 없다. 이것은 단순히 부부관게를 잘해야 한다. 난잡한 성관게를 갖지 않아서 병이 안들게 해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명의 기원까지 부정하다 그 말이다. 그것이 생명을 이룰때까지라도 태어난 아이까지 부정햇는데 그 모든 관계를 부정하다고 말하고 있다. 왜 몸으로부터 분리를 나타내고 있다기 때문이다.
그 죽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인데 이런 관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없다. 우리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안에 있고 이제는 죽음이 만질수 없는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영원한 기업을 상속했기 때문에 거기는 죽음의 그림자가 없다. 이제 예수님 믿는 신자가 부부관게를 갖는 것은 이스라엘처럼 부정을 맛보는 부부관게가 아니다. 그들은 그런 생명의 관계를 가지고도 부정하다고 하루동안 부정하고 물로 씻어야 되는데 우리에게는 그런 것은 없다. 오히려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로다. 하는 그 약속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를 하나를 누리지 이스라엘처럼 부정하다는 관계에서 부부 관계를 누리거나 부정하다는 관계에서 생며의 근원을 보거나 그런 식으로 살지를 않는다. 교회에서는 그런 부정은 없다. 그것은 완전한 생명이 와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것을 잘못 해석하면 새벽기도 하지 말자. 그런데가 있다. 부부 관계를 해 놓고 새벽에 아버지 하면 되겠냐? 하루 동안 부정하고 물로 씻으라 했는데 그러니까 그런 그는 성전 곧 예배당에 들어오면 안된다. 이런 식으로 하는 교회들이 꽤 많이 있다. 그러니까 성경의 윤리는 하나님과 관계 생명을 나타내고 있는데 그것은 동양적인 윤리 사상으로 해석을 해가지고 아 부정하다. 이렇게 해석을 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구약때는 그런 생명의 연합까지라도 설정하면 부정한것인데 거기는 죽음의 흔적이 그렇게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그런 죽음의 흔적은 영원히 제거되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썩어짐의 그림자가 일체 없다. 우리는 그런 썩어짐이 없는 가운데서 완전한 생명의 부요함을 누리고 전체적인 헌신을 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에 주신 생명의 양속이다.
구약 때는 부부끼리 사랑해도 하루 동안 부정하다. 만일에 잘못 들어가면 죽어야 되고 그것이 그들의 생명의 토대고 기원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흔적이 없다.
이 레위기는 우리의 위생법하고는 상관이 없다. 그들에게는 구체적인 삶의 질서가 이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그리스도안에 있는 생명의 관계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지 우리의 위생법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래도 구약에서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무엇인가 이상이 있으니까 먹지 말라고 그랬지 또 이런 부부 관계도 건강에 나쁘니까 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 아니냐? 그쪽으로 읽어 들어가지 말라 그 말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시 해석할 문제다.
건강법은 다시 건강법대로 연구를 해야 되고 이런 부부 관계도 다시 해석하는 것이지 구약으로 해석해서 그것을 해석해서는 안된다 그 말이다. 구약은 하나님과 생명의 약속 생명의 교제 그것이 강조다. 위생법이 강조가 아니다. 우리는 순수한 위생법이지 구약으로부터 해석해 들어오면 안되는 것이다.
구약 때는 이런 생명의 근원을 드러냈다 하는 이런 문제들 그런 문제까지라도 부정하다는 것이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이 없다. 그러면 지금은 마음대로 그냥 관계를 가져야 된다는 그런 말은 아니다. 그 질서에 있어서 그런 것을 느껴서는 안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