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5-18
인생의 재건축
15.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 함을 들으니라 하나님이 저희의 꾀를 폐하셨으므로 우리가 다 성에 돌아와서 각각 역사하였는데
16. 그 때로부터 내 종자의 절반은 역사하고 절반은 갑옷을 입고 창과 방패와 활을 가졌고 민장은 유다 온 족속의 뒤에 있었으며
17. 성을 건축하는 자와 담부하는 자는 다 각각 한 손으로 일을 하며 한 손에는 병기를 잡았는데
18. 건축하는 자는 각각 칼을 차고 건축하며 나팔 부는 자는 내 곁에 섰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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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장에서 달리던 자녀가 넘어져서 울 때, 안타까운 심정으로 다시 일어서 달려가기를 가장 원하는 사람이 아마 부모님일 것이다. 만약 달리다 넘어진 내 자식을 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이 욕한다면, 어떤 부모라도 피가 거꾸로 솟지 않을 부모가 없을 것이다.
망나니로 소문난 아들을 둔 어느 할머니가 있었다. 그 아들은 집을 나가서 들어오지도 않았다. 집나간 아들을 그 할머니는 하염없이 기다리고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주변 사람들이 말했다.
“할머니 그까짓 녀석... 자식하나 없는 샘치고 잊어 버리세요”
그때 할머니가 말했다.
“나도 그 애가 당신의 자식이었다면 벌써 잊었을거요”
다른 사람들은 포기하라고 종용해도, 포기할 수 없는 마음 바로 이것이 어머니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처럼 끝까지 잘되길 원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바로 우리의 아버지되신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비록 우리들이 넘어졌다 할지라도 심지어는 탕자처럼 집을 나갔다 할지라도 정말 간절한 마음으로 우리들이 일어서 돌아와서 남은 인생의 경주를 완주하기를 바란다.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는 것, 하나님을 떠났다할지라도 다시 돌아오는 것... 바로 그것이 회복(回復)이요 회개(悔改)다. 만약 우리의 인생을 건축물에 비유한다면 재건(再建)이라는 단어가 회복과 개념상 가장 유사하지 않을까 싶다.
오래된 아파트나 집이라도 재건축이나 리모델링을 하게 되면, 처음보다 더 가치 있게 되어서 건물이 훨씬 더 가치 있게 된다는 것은 극히 상식적인 말이다. 우리교회도 예배당을 새로 리모델링을 하니까 훨씬 처음보다 아름답고 가치 있게 되었다. 마찬가지로 오래된 건물같은 우리의 육신과 삶이라할 지라도 주님께서 새롭게 리모델링해 주시면 그 이전보다 훨씬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 또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 되신 우리 주님의 마음이다.
오늘 본문의 상황은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지도 아래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여 완성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는 것은 단순히 느헤미야나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바램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뜻이었다. 하나님은 느헤미야의 마음에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고자 하는 열정과 비전을 주셨고,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왕의 허락을 받아서 성벽재건을 추진하였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이 계셨다.
이처럼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한다면, 우리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뜻도 동일하지 않겠는가? 우리 인생의 신축이든 재건이든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분명한 것은 우리를 회복시키시고, 멋진 인생의 성벽을 완성하여 봉헌하고, 이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기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생명을 이 땅에 내셨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어떤 면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우리들 자신보다도 더 간절하게 우리의 회복을 원하시고, 원하실 뿐만 아니라, 일으켜 주신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이 성벽을 재건하는데 있어서 방해자들이 있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에 보면, “우리의 대적이 자기의 뜻을 우리가 알았다함을 들으니라”라고 했다.
여기서 대적(對敵)은 직접으로는 그 당시에 성벽재건을 방해했던 호른사람 산발랏, 암몬사람 도비야, 아라비아 사람 게셈 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당시에 예루살렘 주변의 사마리아 등을 다스리던 사람들이다. 이들은 그 이전부터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 사이를 넘다들면서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노략질하면서 고통을 주던 자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입장에서 보면, 성벽이 건축되면 노략질하고 도둑질을 못하게 되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성벽건축을 방해하고자 했다.
이러한 원수 대적들이 느헤미야와 유다백성들을 공격해 올 때, 온갖 비방하는 나쁜 말과 나쁜 계략으로 공격하고자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꼬드겨서 예루살렘을 쳐서 요란케 하고자 했다.
여러분 우리들의 인생재건에도 이런 대적들과 같은 대적이 있을 수 있다. 끊임없이 우리를 무너뜨리고 공격하고, 나는 싸우고 싶지 않아도 일부러 두고두고 싸움을 걸어오는 못된먹은 인간들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못된 자들의 그 배후에는 그들을 혼미케하고 이용하는 마귀 사단이 있다.
베드로전서 5장 8절 말씀을 보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벧전5:8)
이 말씀에 보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할 때, 그것을 어떻게 해서든지 방해하고 무너뜨리려는 대적이 있는데, 그 대적의 정체가 뭔지를 말해주고 있다. 바로 마귀 사단이다. 그러니까 느헤미야와 백성들이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할 때에도 그들을 대적하고 방해한 사람들의 배후에는 사실은 마귀 사단이 있는 것이다.
이 마귀 사단이 하나님의 사람들을 무너뜨리려고 공격할 때 가장 많이 사용하는 무기 중의 하나가 말(言)이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언제 어디서나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하면서도 가장 강력한 무기다. 마귀 사단은 ‘나쁜 말과 비웃음’으로 우리의 마음에 분노의 파도를 일으켜서 올바른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고, 좌절감과 열등감을 줘서 넘어지게 하려고 한다. 마귀는 대체로 나에게 중요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가까운 사람들 심지어는 교인들이나 가족들, 배우자를 꼬드겨서 공격하기도 한다.
오늘 본문에 보면 도비야 같은 대적은 심지어 “저들이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질” 것이라고 하면서 사람의 감정을 슬슬 긁는 것을 볼 수 있다. 느헤미야 4장 1-3절을 보자.
“1산발랏이 우리가 성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크게 분노하여 유다 사람을 비웃으며 2자기 형제들과 사마리아 군대 앞에서 말하여 가로되 이 미약한 유다 사람들의 하는 일이 무엇인가 스스로 견고케 하려는가, 제사를 드리려는가, 하루에 필역하려는가, 소화된 돌을 흙 무더기에서 다시 일으키려는가 하고 3암몬 사람 도비야는 곁에 섰다가 가로되 저들의 건축하는 성벽은 여우가 올라가도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느 4:1-3)
그런가하면 어떤 때는 직접적인 공격을 할 것처럼 위협(협박)해서 두려움을 주고 그로인해 스스로 포기하게 만드려고 시도한다. 비난을 통한 감정적인 자극과 분열작전 그리고 협박을 통한 두려움을 주기는 사단이 성도들을 공격할 때, 매우 즐겨 사용하는 단골 메뉴다.
그러나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지 않는다. 그 대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을 주신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마귀 사단의 공격과 대적자들의 방해를 극복하고 인생의 재건축, 인생의 회복을 성공적으로 이룰 것인가?(승리의 방법) 오늘 본문은 그 중요한 승리의 원리 중의 한 가지를 말해준다. 오늘 본문에 보면 느헤미야는 대적자들의 책략에 대해서 이미 눈치를 챘다. 그래서 한 손에는 일하는 도구를 또 한 손에는 병기(창, 방패, 활)를 잡고 일을 하게 했다. 심지어 느헤미야 4장 23절에 보면 “내나 내 형제들이나 종자들이나 나를 좇아 파수하는 사람들이나 다 그 옷을 벗지 아니하였으며 물을 길으러 갈 때에도 기계를 잡았었느니라”라고 했다.
쉽게 말하면 그들은 일하면서 싸우고 싸우면서 일했다. 이것이 인생의 성벽을 재건함에 있어서 깨어 있어야할 영적싸움의 중요한 원리다. 사실 우리들도 평상시에도 마귀의 공격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대적자들의 공격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대비했던 것처럼 우리도 대비해야 한다. 방어운전이라는 것이 있는데, 언제든지 돌발상황이 발행해도 대처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에게 들게했던 기계(병기)는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창칼이었겠지만, 지금 우리들의 영적싸움에서 본다면 그것은 말씀과 기도의 병기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느헤미야는 모든 대적들의 공격 앞에서, 그 이전에 아닥사스다 왕 앞에서도 순간순간 끊임없이 기도함으로 깨어있던 사람이다. 이러한 기도들이 그로 하여금 영적으로 민감하게 했고, 원수의 술책들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얻게 했다. 이처럼 느헤미야가 이 모든 과정에서 기도했던 모습들을 느헤미야서의 도처에서 발견된다(느4:4, 4:9, 5:19, 6:9, 6:14)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서 마침내 성벽재건이 완성되었다. 15-16절을 보자.
“15성 역사가 오십이 일 만에 엘룰월 이십오일에 끝나매 16우리 모든 대적과 사면 이방 사람들이 이를 듣고 다 두려워하여 스스로 낙담하였으니 이는 이 역사를 우리 하나님이 이루신 것을 앎이니라”(느6:1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의 성벽이 재건되는 것, 회복되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다시 일어나야 한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어 놓은 승리를 말씀과 기도 가운데 믿음으로 누려야 한다. 그래서 모든 대적자의 궤계를 성령의 전신갑주로 대적하고, 예전의 모습보다 더 가치있는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