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스마트폰 두뇌… 'AI칩' 인간의 뇌를 닮아가다
뉴런처럼 작동하는 'AI칩'
애플·화웨이 신제품에 탑재… 3차원 얼굴 인식 구현까지
뇌 신경망서 아이디어 얻은 신경망 처리 장치 'NPU'
처리 속도 한계 극복하고수천개 코어 동시에 작동
박건형 기자
김경필 기자
입력 2017.11.11 03:01
1946년 최초의 디지털 컴퓨터 '에니악(ENIAC)'이 등장한 이후 7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컴퓨터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에니악은 1만9000개의 진공관이 설치된 높이 5.5m, 길이는 24.5m짜리 거대한 기계였고 무게는 30t에 이르렀다. 사람이 7시간을 걸려야 풀 수 있는 탄도(彈道) 계산을 3초 만에 해내면서 '총알보다 빠른 계산기'로 불렸다. 오늘날 손바닥보다 작은 스마트폰은 에니악 수천 대를 합친 것보다 많은 일을 더 빠르게 할 수 있다. 전 세계 과학자와 기업들이 더 좋은 성능의 반도체를 더 작게 만들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펼친 덕분이다.
하지만 이런 경쟁의 '룰(규칙)'이 바뀌고 있다.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들이 기존 방식의 반도체칩 성능 개선이 한계에 다다르자 전혀 새로운 반도체칩 개발에 나섰다.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인간의 뇌, 즉 신경망(神經網)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인공지능(AI) 칩의 시대가 열리고 있다. 미국 애플·구글·엔비디아·인텔·AMD, 한국 삼성전자, 중국 화웨이 등이 모두 AI칩 개발에 뛰어들어 제품을 내놨거나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미국 뉴욕타임스는 "인텔은 개인용 컴퓨터에 탑재할 수 있는 중앙처리장치(CPU)를 만들어 3350억달러(약 375조원)에 이르는 오늘날의 반도체 시장을 열었다"면서 "하지만 인공지능 비서, 가상현실을 구현하고 하늘의 드론(무인기)을 날게 하기 위해서는 전혀 새로운 반도체 기술이 필요하다"고 보도했다.
◇하나씩 빠르게 처리하던 기존 반도체… 인간의 뇌처럼 한꺼번에 숱한 정보를 처리하는 AI칩
PC의 핵심인 CPU나 스마트폰의 두뇌 역할을 하는 AP(모바일용 중앙 처리장치) 반도체칩은 코어(core)라는 처리 장치를 이용해 한 번에 한 가지 연산(계산)을 수행하도록 설계돼 있다. 주판을 들고 있는 직원(코어)이 한 사람밖에 없는 사무실과 마찬가지이다. 직원의 능력이 향상되면 업무 처리 능력이 빨라지는 것처럼 코어의 성능을 개선할수록 컴퓨터와 스마트폰의 처리 속도가 빨라진다.
코어의 속도를 높이는 것이 한계에 이르자 반도체 기업들은 '멀티코어 프로세서'를 만들었다. 계산을 하는 직원 숫자를 늘리는 것처럼 CPU나 AP에 코어를 여러 개 넣어 계산을 나눠 하도록 한 것이다. 최근 시판되는 PC용 CPU에는 코어가 2~18개 들어간다. 인텔이 개발한 반도체칩 중에는 코어가 72개에 달하는 제품도 있다. 문제는 음성 인식이나 이미지 인식처럼 새롭게 등장한 서비스를 처리하려면 멀티코어 프로세서로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의 음성 비서 빅스비(Bixby)나 애플 시리(Siri)의 경우 사용자가 음성으로 내린 명령을 완벽하게 처리하기 위해서는 스마트폰 AP 연산량의 1000배에 이르는 처리 속도가 필요하다. 음성을 분석하고 이에 적절한 답변을 찾는 과정에서 필요한 데이터의 양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마트폰 제작사들은 현재 스마트폰에 입력된 음성을 가상 공간 서버(클라우드)로 보내 답변을 찾은 뒤 다시 스마트폰으로 전송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AI 비서가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 이 때문이다.
9월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쿠퍼티노에 있는 스티브 잡스 극장에서 팀 쿡 애플 CEO가 NPU 기술이 적용된 신제품 아이폰X를 공개하고 있다.
지난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린 유럽 최대 IT 전시회 ‘IFA 2017’에서 화웨이의 리처드 유 CEO가 NPU(신경망 처리 장치)를 탑재한 AP ‘기린 970’을 발표하고 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바로 AI칩인 NPU(Neural Processing Unit·신경망 처리 장치)이다. NPU는 사람의 뇌를 구성하는 신경망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사람은 오감(五感)을 통해 인식한 수많은 정보를 뇌에서 동시에 처리하고 반응한다. 이는 사람의 뇌가 하나의 특정한 처리 장치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뉴런(신경세포)이 동시다발적으로 작동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NPU는 사람의 뇌에 있는 뉴런처럼 수많은 코어를 갖고 있다. 적게는 수십개에서 많으면 수천개의 코어가 동시에 작동한다.
강성원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지능형반도체연구본부장은 “NPU는 음성이나 사진처럼 엄청난 양의 연산이 필요한 데이터 처리와 분석에 최적화된 연산 시스템”이라며 “현재의 CPU나 AP는 계산을 최대한 정확하게 하도록 설계돼 있는 반면, NPU는 입력된 데이터 중에서 소수점 이하 부분 같은 구체적인 부분은 과감히 생략해 근삿값을 만든 뒤 동시에 많은 계산을 진행하도록 한다”고 말했다. 데이터를 생략하면 반도체칩의 구조는 단순해지는 반면 속도는 빠르고 소비 전력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 다만 근삿값을 사용해 연산한 NPU는 완벽한 계산 결과를 내놓지는 않는다. 강 본부장은 “AI 서비스나 음성·이미지 인식의 경우 하나의 정확한 정보를 얻어내는 것보다 최대한 많은 빅데이터를 동시에 처리하는 것이 더 정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는 방법”이라며 “몇몇 사람을 대상으로 물어보는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설문조사할수록 여론조사 결과가 정확해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지난 8월 인텔의 자회사 모비디우스가 공개한 AI 칩 ‘미리어드X’. 인공지능 구현에 필요한 대량의 연산을 저전력으로 빠르게 처리할 수 있다.
인텔이 개발 중인 AI 칩 ‘로이히’의 가상 이미지. 사람의 뉴런과 시냅스 구조를 모방했다.
◇글로벌 기업 경쟁 본격화
AI칩의 필요성은 인공지능과 같은 4차 산업혁명의 움직임이 본격화된 2~3년 전부터 제기됐지만 글로벌 IT 기업들은 이미 NPU 기술을 적용한 AI칩을 출시하기 시작했다. CPU의 시대를 인텔이 지배한 것처럼 NPU를 주도하는 기업이 향후 수십년간 미래 산업을 주도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중국 화웨이는 지난 9월 유럽 최대 IT 전시회인 ‘IFA 2017’에서 세계 최초의 모바일용 NPU인 AP ‘기린970’을 공개했다. 기린970은 지난달 16일 출시된 화웨이의 최신 프리미엄 스마트폰 ‘메이트10’에 탑재됐다. 애플도 최신 스마트폰인 아이폰8과 아이폰X(텐) 시리즈에 ‘뉴럴 엔진’이 포함된 AP ‘A11 바이오닉’을 탑재했다. 사용자의 얼굴을 3만개의 구역으로 나눠 인식하는 3차원 얼굴 인식 기능인 ‘페이스ID’가 이 뉴럴 엔진으로 구현됐다. 애플이 개발 중인 AR(증강현실) 관련 기능도 뉴럴 엔진을 활용할 전망이다. 삼성전자는 내년 상반기 출시되는 갤럭시S9 시리즈에 AI칩을 탑재하기 위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위해 삼성전자는 최근 신경 칩 기술업체인 영국 그래프코어와 중국 디파이테크에 잇따라 거액을 투자했다.
기존 반도체 기술의 선도 업체인 인텔도 이 시장에 출사표를 던졌다. 인텔은 지난달 말 ‘뉴런’과 ‘시냅스(뉴런 간 연결망)’를 모방한 AI칩 ‘로이히(Loihi)’를 개발 중이라고 밝혔다. 인텔 측은 “로이히는 인간으로 치면 13만개의 뉴런과 1억3000만개의 시냅스로 구성돼 있다”면서 “현재 바닷가재 수준의 인공지능을 구현할 수 있다”고 밝혔다.
AI칩이 보편적으로 활용되면서 해결해야 할 과제도 남아 있다. 이식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실장은 “지금의 기술로는 아무리 코어를 많이 집어 넣더라도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만으로는 속도와 기능 구현에 한계가 있다”면서 “수많은 코어의 작동을 동시에 완벽하게 제어하는 기술도 개발해야 하고, 곧바로 처리할 수 있는 정보와 클라우드에 보낼 정보를 구분하는 최적화 작업도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