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24, 고수(高手) 흉내
‘거어룩타아 십자아성에 문이여얼려 부우름이여...'
(거룩다 십자성에 문이열려 부름이여......)
세칭 동방교에서 부르는 성가(‘새노래’라고도 한다) 제1장 1절의 첫 음절이다. 아마 4절까지 있었다고 기억되지만 그 다음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끔 흥얼거리다 보면 어느날 갑자기 기억이 나곤 한다.
이 곡이 영국 스코틀랜드의 시인 로버트 번스의 가곡에 세칭 동방교에서 가사를 붙인 곡인라는 것을 나는 동방교를 떠난 다음에도 한참 세월이 흐른 오랜 훗날 알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석별'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1900년을 전후하여서는 애국가를 이 곡조에 따라서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이 노래는 세칭 동방교에서 주로 예배를 시작할 때 잘 부르곤 했다. ‘거어룩타아’라는 시작음에 맞춰 양손을 가볍게 주욱 벌리면서 몸체로 십자가의 형태를 만들고 그 다음 ‘십자아성에’라는 가사에 맞춰서는 펴든 양손을 가볍게 흔들면서 ‘문이 여얼려’라는 가사에 맞춰 다시 두손을 이용하여 문을 여는 행동을 연출하고 ‘부우름이여’하는 장면에서는 오른팔을 앞으로 내밀어 손으로 부르는 시늉을 하는 고전무용 비스므리한 동작을 정재덕 요나단 목사는 정말 멋들어지게 잘 해내곤 했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사주(四柱)중의 한사람이었으며 그야말로 그런 춤 동작은 그의 전매특허였다. 동방교에서는 소위 성가뿐만 아니라 일반 기성교회의 찬송가도 그대로 사용했는데 성가나 찬송가 어느곡을 부르더라도 그 가사에 아주 적절하게 맞게끔 손놀림과 눈빛과 얼굴표정으로 성무(세칭 동방교에서는 곡에 맞춰서 춤추는 것을 그렇게 불렀다)를 능수능란하게 아주 잘 추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나는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교주 노광공도 이런 성무에 능수능란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정재덕 요나단목사, 양복 윗도리의 주머니에 엄지를 밖으로 드러내고 양손을 찔러 넣고 서 있는 모습은 교주 노광공이 즐겨하는 스타일이다)
정재덕, 세칭 동방교에서의 그의 명명(命名)은 요나단이다. 끝날(端)때 요긴(要)하게 쓰이는 인물이라는 뜻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이름의 뜻처럼 요긴하게 쓰이지는 못하고 ‘악령’이라는 오명을 쓰고 세칭 동방교 집단에서 허무하게 사라져버린것 같다.
사주(四柱)라고 부르는 명칭은 세칭 동방교에서의 최고위직을 일컫는 말이다. 요나단(정재덕), 베드로(양학식), 헤레나(오인숙), 사르멘(김숙자)과 더불어 사주(四柱)라고 부르는데 네 기둥이라는 뜻이다.
당시 세칭 동방교에서의 사주(四柱)는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죄(罪)란 무엇인가?’ 를 논(論)할 때 四(四柱)를 非(부인)하는것, 즉 인정하지 않는 것을 대단히 큰 죄(罪)로 가르칠 정도였다. 표의문자(表意文字) 한문을 해석하는 이 얼마나 대단한 기량인가!
둘은 남자(요나단, 베드로), 둘은 여자(헤레나, 사르멘)다. 남자 둘은 사주목사, 여자 둘은 사주장로라고도 부른다. 그 중에 교주의 최고 수제자인 요나단 목사는 인물도 잘 생기고 신사다운 인품을 풍기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 친근감 있는 인물이다.
이분이 척추결핵인지 무슨 병이 있어 허리를 다쳐 요양원에 있을때 노광공 교주를 만나 신유의 체험을 한후 세칭 동방교에 입교, 노광공 교주를 그림자처럼 따라 사주(四注)에 까지 오른 사람으로 노광공보다 10여세 아래의 나이다. 평소에도 허리가 좋지않아 늘 동작에 불편을 느끼곤 하던 모습이 기억난다.
이분이 성가(세칭 동방교에서 부르는 노래)나 찬송가(일반 기독교의 찬송가도 불렀음)를 부를때 그 가사에 딱 부러지게 맞춰 기차게 손놀림과 표정을 지으면서 춤을 추는 행위(성무라고도 부름)가 같이 부르는 신도들로 하여금 감흥을 주는 희한한 재능이 있었는데 세칭 동방교 내에서는 어느 누구도 감히 따라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가히 독보적인 존재였다. 같은 사주(四柱)목사인 양학식 베드로 목사는 성질만 부랑스러웠지 이런것에는 정재덕 요나단 목사의 발뒤꿈치에도 따라 갈 수 없었다.
어느날 내 친구인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누가’라고 불리우는 전도사가 어이없게도 이것을 흉내 내기 시작했다. 우습고 어슬프기 짝이 없었고 보는 이로 하여금 그 서툰 행동이 측은함을 자아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래도 내 친구 누가전도사는 전혀 개의치 않고 제단에 서서 예배를 인도하는 기회가 되어 성가나 찬송가를 부를때 마다 앞에 서서 열심히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성무동작, 그것을 흉내내고 있었다. 남이야 흉을 보건 말건, 우스워하건 말건, 전혀 신경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만큼 부끄러움을 타지않는 천성을 가졌을까, 남의 이목에 흔들리지 않는 배짱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도 저도 아닌것 같은데 어쨌던 그는 열심이었다. 아니면 감히 어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하는 정재덕 요나단목사의 재능을 기어코 터득해 보고자 하는 열성이었을까.
하여튼 그의 요나단목사 흉내내기는 한동안 계속되었고 어느 누구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비평을 하자니 그의 필사적인 노력이 너무나 가상했고 그대로 보고있자니 어설프기 짝이 없었지만 세칭 동방교 역사 이래로 아무도 시도해 본 일이 없었던 사태앞에 잘잘못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았던가 보다.
그는 세칭 동방교의 다른 지교회 전도사로 있었지만 가끔 ‘초량12교회’의 제단에서 찬송을 인도하는 일이 있었는데 '초량12교회' 책임자인 김인경 입다목사도 ‘누가’전도사의 그런 행동에 대해 가타부타 일절 말이 없었다. 아니 김인경 입다목사는 시력이 좋지않은 분이라 어쩌면 제단에서 그런 동작을 연출하는것을 쉽게 알아채지 못했는지도 모르겠다.
모두들 성가나 찬송가를 부르면서 멍청하게 그냥 그대로 보아주고 있었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보태어 졌더라면 아마 정재덕 요나단목사까지는 못되더라도 그 비슷한 수준에까지는 이르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완성을 보지못한채 그는 입영통보를 받고 군입대를 하고 말았으니 참으로 유별나고 아련한 추억의 한 토막으로 지금도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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